47. 전기(轉機) (619)
태고의 정적에 잠긴 불함산 정상은 아아(峨峨)하게 빛났다.
산 밑은 초여름인데 산속은 막 겨울잠을 깨고 있었다. 천지(天池)의 수면은 아직도 두꺼운 빙판으로 덮였고, 분화구의 사면(斜面)엔 눈이 덜 녹았으나 드문드문 꽃들이 피어 있었다.
천지의 4계절 날씨는 변화무쌍했다. 하늘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햇볕을 내려쬐다 흐리길 반복했다. 여름은 세찬 바람과 억수 같은 비를 퍼붓고 겨울은 수시로 눈보라를 휘몰아쳤다.
봄바람은 잔잔하게 시작되지만 매일 정오(正午)께가 되면 돌개바람이 일어났다. 천지의 남쪽 천황봉(天皇峰) 밑에서 시작되는데 처음엔 미약하게 풀썩거렸다. 그러다가 점점 거세어진 끝에 거대한 바람기둥으로 변해 갔다. 바람기둥은 천지의 동쪽 변의 절벽을 따라 이동했다. 맹렬한 기세로 땅바닥의 모래와 화산석(火山石)을 휩쓸어 올리며 돌진한 뒤 폭포수의 수구(水口)께로 빠져나갔다.
그 시각에 맞춰 천지 변에 나타나는 사람은 양신이었다. 광막한 산속에서 홀로 지낸 지 2년째 접어들었다. 자신을 대신해 목숨을 던진 주랑의 명복(冥福)을 빌면서 살아왔으나 적자생존(適者生存)의 고달픈 인생사로 되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혼자만의 일상은 견디기가 힘들어 계속 살기도 힘들겠다는 생각이었다. 다만 주체할 수 없는 무료한 시간을 죽이려고 책을 읽었다. 육체의 힘은 유한하지만 지식의 힘은 무해서 책을 읽었다. 그러나 진정한 강자는 문무를 겸전 해야 한다고 해서 검술 연마도 계속했다. 특히 바람처럼 돌고 번개처럼 치는 경지에 이르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오늘도 검술 훈련을 위해 천지 변으로 올라왔다. 벌써 돌개바람 일어나 기둥을 이룬 채 이동하고 있었다. 검술훈련은 땅바닥의 화산석을 허공으로 띄어 올리는 돌개바람 기둥을 상대로 했다. 허공에 떠오른 화산석들을 빠르게 베고 정확도를 다듬는 훈련을 계속해 왔다.
바람기둥이 이동하면서 천지 변의 물결이 거칠어졌다. 양신이 밀두도를 뽑아들자 햇살을 받은 칼날은 허공에서 강한 반사광을 일으켰다. 한 순간 무시무시한 바람기둥에 휩싸여 들며 기합성을 터뜨렸다.
"야, 잇."
몸은 자욱한 흙먼지 속으로 휩싸였고, 칼날과 돌들이 부딪치는 소리만 일어났다. 한 순간 허공이 하얗게 변했다. 하늘이 깨질 듯한 천둥소리가 우르릉 쿵 쾅 일어났다.
이미 바람기둥은 수구 쪽으로 빠져나갔고 양신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천지 변은 다시 정적 속에 빠져들고 움직임이 없는 양신으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밀두도가 떨어져 있었다.
해가 지고 밤이 오고 이튿날 아침을 맞았다.
양신은 모래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 입에서 신음을 흘려냈다. 양팔로 땅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가 다시 모래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한참 후 가까스로 몸을 모로 틀어 벌렁 눕는 자세가 되자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인가?"
목이 타는 듯한 심한 갈증을 느꼈다. 천지 변은 몇 발자국 떨어져 있지 않았다. 엎드린 자세로 땅바닥을 기어 간신히 물가에 이르렀다. 손으로 물을 움켜쥐고 바싹 마른 입술로 핥았다. 양손으로 물을 떠 마시고 나자 목구멍에서 트림이 터지고 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입에서 웬 김이 나올까?"
그제야 흐릿했던 정신이 맑아졌다. 천근처럼 무겁기만 했던 몸이 가뿐해진 느낌이 들었다. 몸을 일으켜 세우고 주변을 둘러보니 저만치 밀두도가 땅에 꽂힌 게 눈에 들어왔다.
양신은 밀두도가 있는 곳으로 다가들었다. 집어 들려다 흠칫 놀랐다. 칼날이 담금질을 당한 쇠처럼 시커멓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칼날이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단 말인가?"
칼의 손잡이를 잡고 찬찬히 살폈다. 칼날만이 아니고 칼자루를 감은 가죽도 검게 타서 오구라 붙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손등이 푸르게 변한 것을 보고 크게 놀라며 중얼거렸다
"내 손등의 피부색이 변했다니?"
손가락을 꼽았다 폈다 해보고 칼을 잡고 허공으로 휘둘러보았다. 손을 쓰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문득 돌개바람 속에서 사위가 하얗게 변하며 벼락을 쳤던 게 생각났다.
"내가 벼락을 맞았단 말인가?"
뒤늦게 전율처럼 두려움이 전신에 확 끼쳐 들었다. 벼락을 맞고도 살아남았다는 것은 천우신조가 아닐 수 없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해가 곰 바위 봉우리 위로 솟아 있었다.
"해가 지금 저기서 뜨면 지금은 이른 아침이 아닌가?"
돌개바람을 상대로 하는 검술 훈련은 매일 정오께 했다. 지금 해가 떠오르고 있다면 그건 어제 일어난 일이었다. 자신은 벼락을 맞고 쓰러져 정신을 잃은 채 밤을 새운 것이었다.
"내가 지난밤을 여기서 새우고 아침을 맞았다니!"
천지 변의 물결이 수런거리듯 일면서 포말을 날렸다. 어느새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뒤덮여가고 있었다.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일고 장대 같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금세 몸이 흠뻑 젖게 된 양신은 하늘이 두려운 듯 빗발 속으로 뛰기 시작했다. 오두막으로 돌아가려고 수구 쪽의 언덕을 치달아 올랐다. 그런데 이상했다. 몸이 새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별로 힘이 들지 않게 언덕을 넘었고 비탈길을 내려가 오두막 안으로 뛰어들었다.
추워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궁이에 장작을 집어넣고 입으로 후후 불었다. 남은 불씨가 살아나고 불길이 서서히 타올랐다. 젖은 옷을 벗는데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일었다.
배가 몹시 고팠다. 벽에 걸린 가죽 자루를 떼어 들었다. 속에서 육포를 꺼내 입에 넣고 씹었다. 허기를 대충 끄고 나니 한결 살 것만 같았다. 몸과 마음이 푸근해지고 안정감을 되찾게 되었다.
양신은 아궁이 속의 불길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벼락을 맞은 그만 산을 나가라는 산신령(山神靈)의 경고를 받을 받은 것 같았다. 겁이 나서 당장 산 생활을 접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들었다. 당장 몸을 일으켰다. 책들과 산삼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모든 걸 태워버리고자 오두막에 불을 질렀다. 뒷정리를 마치자 그대로 산을 내려갔다. 고구려에선 살 수가 없고 길 곳도 없어 일단 오골사로 갈 마음을 먹었다.
양신은 그동안에 오골사는 가끔씩 드나들어야 했다. 산에서 채취한 산삼(山蔘)을 오골사로 가져가면 절에선 부근의 마을에 팔고 대신 식량으로 바꿔줘 그것으로 먹고살았다. 그러면서 바깥세상이 돌아가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짧은 기간이나마 세상은 크게 바뀌었다. 고구려는 영양왕이 승하하고 건무가 왕위에 올랐다. 중원 땅에선 수양제(隋煬帝)가 신하인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시해를 당했다. 대신 이연이 당(唐)을 건국했다. 고구려에선 연개소문이 자신 때문에 계속 어려움이 처해 있고, 도해선은 아직도 자신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었다.
안암로는 유학(儒學)과 역사에 해박한 학승(學僧)으로 경서(經書), 사서(史書), 경제실용(經濟實用)에 이르기까지 해박했다. 양신은 스승으로 모시고 두루 배울 수가 있었다.
양신은 부와 명예와 권세만 추구하는 세상에 다시 끼어들고 싶지가 않다고 했지만 안함로는 그래도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권했다. 그런 스승을 만나 앞 일을 의논하고 싶었다.
안함로는 젊은 나이로 많은 원한(怨恨)에 얽히고 시련에 시달려 산속에서 은거하는 양신을 여간 딱하게 여기지 않았다. 때문에 만날 때마다 산 생활을 그만 접을 것을 종용했다.
양신은 가다가 문득 여선과 천동이 있는 장안성으로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숨이라도 한번 같이 쉬고 싶었다. 그러나 위험해서 고향엘 가보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밤하늘의 별들을 의지해 다갈촌으로 방향을 잡고 걸었다. 이틀 후에 다갈촌에 당도해보니 집들이 더 늘어나고 둘 뿐인 야철소의 굴뚝도 셋으로 늘어났다.
마을로 들어갈 수가 없어 뒷산에 몸을 숨기고 마을 내려다보았다. 날이 저물고 잠을 잘 곳이 없어 진달래 건조장으로 갔다. 건조장으로 들어서자 여선과 하룻밤을 지낸 일이 떠올랐다.
"오라버니, 오늘 밤 날 데리고 어디로 떠나 줘요!"
그 말을 못 들어준 것은 평생의 후회로 남았다.
"여선!"
허공을 향해 가만히 부르자 여선과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쯤 천동은 많이 컸겠지?"
매우 보고 싶었다. 기구한 운명을 탓하며 슬픔과 괴로움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새벽녘에 깜박 잠이 들었고 새들의 지저귐 소리에 눈을 떴다. 판자문 틈으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었다. 남들의 눈에 띄기 전에 떠나기로 했다. 이런 기회에 밀두도를 두고 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자신을 드러낼 일이라 그냥 나섰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돌려놓는 게 좋겠다."
건조장을 나서 얼마쯤 걷는데 전방에서 마주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얼른 숲 속으로 들어가 지나치길 기다렸다. 그런데 두 사람은 야장방의 마조장(磨造匠)인 순태(旬兌)와 그의 처였다. 자기도 모르게 길로 뛰어나가 외치게 되었다.
"순태 아저씨."
순태 부부는 걸음을 멈추고 놀란 듯 입을 열었다.
"양신 야좌가 아니요?"
순태 처도 반가움에 어쩔 줄 모르며 달려들더니 양신을 덥석 안았다.
"도련님이 이렇게 살아 계셨다니?!"
양신은 두 사람을 함께 얼싸안고 꿈을 꾸는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아저씨는 그새 머리가 하얗게 희어지셨네요?"
"내 나이가 벌써 환갑을 넘지 않았는가?"
순태의 대꾸에 그의 처는 목이 멘 음성으로 걱정부터 했다.
"양신 야좌님, 여긴 왜 왔어요? 남들 눈에라도 띄면 큰일 나요."
양신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저도 마을을 살펴보고 싶어 몰래 왔다가 떠나는 길입니다. 아저씨 내외분은 꼭 만나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니 하늘이 도왔군요?"
"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린 다른 사이지, 너무도 반가워!"
"아저씨 내외분을 가장 그립고 보고 싶어 했습니다."
"도련님,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게 되었어요."
순태 처는 말을 하면서 양신의 등을 연신 쓰다듬었다.
"여기선 야좌를 두고 별별 소문이 다 났네. 중원 땅에서 살고 있다는 사람도 있고, 서역으로 떠났다는 사람도 있네. 심지어 죽었다는 말들까지 나돌 지경인데 그동안에 어디에 뭘 하면서 지냈나?"
순태가 하는 말에 양신이 반문했다.
"아저씨는 제가 대수 전 때 중원 땅으로 건너간 건 아셨겠지요?"
"그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나 그 뒤론 알 수가 없었네."
"저는 전쟁이 끝날 무렵에 돌아와 불함산으로 들어갔습니다."
"불함산으로 들어갔다니 무슨 일로 들어갔단 말인가?"
"처음엔 세상이 싫어서 죽고만 싶었습니다."
"왜 안 그렇겠나? 아무튼 이렇게 살아 있으니 고맙네."
순태 처는 남편의 말을 거들었다.
"산속 생활이 매우 어려웠을 것인데 목숨을 부지했으니 다행 예요."
"앞으론 어떻게 할 것인가?"
"그만 세상으로 나가 살아가는 수밖에 없어 산을 나왔습니다."
"잘했네. 그러나 여긴 위험하니 다시 어디로 떠나야 하겠네."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손은 왜 그런가? 시퍼렇게 멍이 들었군?"
"멍이 든 게 아니고 벼락을 맞았습니다."
"벼락을 맞았다니?!"
순태는 놀라움으로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벼락을 맞고 살았다니?"
"벼락을 맞고도 죽지를 않았으니 오래 살 것 같습니다."
양신의 대답에 순태는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한 듯 입을 열었다.
"벼락을 맞고도 살아남은 건 조상님의 가호가 있었기 때문일세."
양신은 조상 얘기가 나오자 물었다.
"아저씨, 저는 조상에 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순태는 긴 한숨을 쉬고 양신의 손을 잡고 끌었다.
"길에선 남들의 눈에 띄기 쉬우니 외진 자리로 옮겨가세."
양신은 순태를 따라 다시 숲 속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은 깊숙한 곳의 덤불에 몸을 숨기듯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이번 기회에 야좌에게 꼭 들려줘야 할 말이 있네."
순태의 말에 양신은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아저씨께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저는 중원 땅에서 사부님의 원수를 갚았습니다. 사부님의 시신도 찾아내어 오골사 근처에 무덤을 써 드렸습니다. 저로 인해 변을 당하신 사부님의 묘소라도 써 드리고 나니 그나마 큰 위안이 됩니다."
"그랬는가?"
"저는 사부님에 관한 말씀을 전해드릴 방법이 없어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릅니다. 아저씨를 만나서 알리게 되어 여간 다행히 아닙니다."
양신의 말에 순태는 이상하게 한숨과 함께 혀를 끌끌 찼다.
"양신 야좌, 자네가 알지 못하는 일들이 많은 걸 몰라서 그러네."
"제가 알지 못하는 일이 뭔데 그러십니까?"
"양신 야좌는 철장이 길러주고 검술도 지도해준 은인으로만 아는데 그 밖에 일은 아무것도 아는 게 없기 때문일세."
순태의 대답에 양신은 안색이 굳어들었다.
"아저씬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양신이 정색을 하자 순태는 좀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
"그보다 먼저 해둬야 할 말이 있네."
순태는 무거운 한숨만 또 흘려내었다. 양신은 다른 말을 꺼냈다.
"아저씨, 밀두도를 받아주십시오."
양신은 등에서 밀두도를 벗어 들고 내밀자 순태가 반문했다.
"밀두도를 왜 내게 주려는가?"
"철장에게 대대로 전하는 밀두도를 제가 지녀선 안 되지 않습니까?"
"밀두도의 임자는 바로 양신 야좌일세."
순태의 대답에 양신은 무슨 소리냐 듯 반문했다.
"제가 밀두도의 임자라니요? 밀두도를 건조장에 두고 갈 생각을 했다가 그러면 제가 다녀간 사실이 드러날 것이라 그만뒀습니다. 하긴 아저씨께 내드려도 마찬가지라서 당분간은 더 지녀야 하겠습니다."
양신의 말에 순태는 갑자기 엄숙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나는 오늘에야 양신 야좌의 집안일들을 알려주려고 하네."
"아저씨, 제 집안의 일들을 뭘 들려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순태 처가 입을 열었다.
"야좌님, 영감님이 하실 말씀을 잘 들어두셔야 해요. 저도 밀두도를 지닐 수 있는 분은 오직 야좌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양신은 순태 처마저 그런 말을 하자 심각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아저씨만 아니고 아주머니까지 그런 말씀을 하시니 저로선 의문이 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제 다갈촌의 야좌도 아니고 더더욱 철장도 아닌데 밀두도를 지닐 수가 있다니 당치도 않을 말씀입니다."
순태는 갑자기 엄숙한 표정으로 존대 말을 썼다.
"양신 야좌님, 나는 살날이 얼마 남지가 않았소. 죽기 전에 모든 사실을 밝혀야 놔야 할 일인데 오늘에야 그런 날이 오게 되었소."
양신은 순태가 엄숙한 표정에 존대 말까지 쓰자 입을 다물었다.
"양신 야좌는 옛 갈사국 왕실 후손임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요."
순태의 입에서 나온 말에 양신은 더욱 어리둥절하게 되었다.
"제가 갈사국 왕실 후손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양신이 묻자 순태는 자세를 바로 하면서까지 반문했다.
"양신 야좌는 갈사국이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으시오?"
순태는 계속 존대 말을 써서 양신은 듣기가 불편했다.
"아저씨는 왜 제게 자꾸 존대 말을 쓰십니까?"
"나는 옛 갈사국의 신하로 대대로 봉공해 왔던 집 안이요."
"저는 갈사국이란 나라 이름을 처음 듣습니다. 제가 그런 나라의 왕실 후손이라면 그에 관한 얘기를 아시는 대로 들려주십시오."
"나는 이 얘길 영영 밝히지 못하고 죽게 될 걸로 걱정을 해왔소. 그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모르는데 오늘에야 그걸 벗게 되었소."
"갈사국은 어떤 나라이며 어느 때 있었던 나라입니까?"
"갈사국은 오래전 북부여국의 한 왕자가 세웠다고 하오."
순태는 그렇게 시작해서 설명을 이어 갔다.
갈사국은 불함산 동쪽에 있었던 소국인데 큰 야철소를 두고 있어 철국(鐵國)으로도 불려졌다. 그러나 고구려에 멸망을 당했다. 고구려 건국은 갈사국에서 공급받는 철제 무기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갈사국의 국도는 바로 다갈촌이었다. 고구려는 갈사국을 멸망시킨 뒤 왕족만 남겨두고 야장들은 각처의 야장방으로 흩어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갈사국의 우수한 제철기술이 넓게 퍼진 결과 고구려는 날로 발전해서 끝내 강국으로 발돋움을 하게 되었다.
순태는 비록 글을 배우지 못했음에도 나뭇가지를 들고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듯이 갈사(曷思)란 두 글자를 겨우 써 놓았다.
"갈사국의 국명은 이렇게 쓰오."
양신은 순태가 땅바닥에 써놓은 글자를 뚫어지게 보기만 했다. 그러자 머릿속은 충격과 어떤 회의감이 일었다. 지금까지 조국인 고구려에 몸과 마음을 전부 바쳐왔는데 허탈감에 빠지게 만드는 일이었다.
"아저씨, 갈사국을 알고 있는 사람이 다갈촌에 또 있습니까?"
"나와 여준만 알고 있을 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구려는 갈사국 야장들을 각처로 흩어지게 만들어 놨소. 이젠 세월이 너무 흘러서 아는 사람이 없어졌소. 거기다 여준 철장은 그걸 아는 내게 함구를 시켜서 나는 누구에게도 말을 꺼낸 적이 없었소."
순태는 그런 말을 하고 이번에 땅바닥에 또 다른 글자들을 써놓았다. 하나는 대두명(大兜命)이었고 또 하나는 개로(盖鹵)였다. 양신은 개로라는 글자를 읽고 나서 순태에게 물었다.
"아저씨, 이번에 쓰신 글자들은 왜 써놓으셨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개로라는 분은 옛날에 일월검과 밀두도를 만들었다는 철장님으로 유명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우린 철장으로 알고 있으나 실은 갈사국의 마지막 임금님이셨소."
순태의 대답에 양신은 놀람과 더욱 큰 혼란을 느끼게 되었다.
"개로라는 분은 일월검과 밀두도를 만드신 철장인 걸로 알려졌는데 그분이 갈사국의 임금이셨다니 그 말씀 정말입니까?"
"고구려는 갈사국을 멸망시킨 뒤에 야장들을 전국의 야장방으로 전부 흩어지게 했소. 그리고 개로 임금님을 다갈촌 야철방의 철장으로 앉혔다고 하오."
"그럼 대두명은 무슨 뜻입니까?"
"대두명은 바로 양신 야좌님 선친의 함자요."
"대두명이 제 아버님의 함자라고요?"
양신은 처음 듣는 선친의 이름을 나직이 되뇌어 보았다. 순태 처는 흑흑 울음을 터뜨렸고 순태는 아내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여보, 오늘에야 내가 모든 것을 다 털어놓게 되었소."
"영감, 아무렴요. 얼마나 기다린 일입니까? 당연히 그러셔야죠."
순태는 용기를 북돋우려는 아내에게 말했다.
"모든 걸 다 밝히고 나면 나는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겠소."
"아저씨, 무슨 말씀인지 좀 더 자세히 들려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소. 막상 말을 꺼내려고 하니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소. 그런데 양신 야좌가 이 얘길 듣고 어떻게 감당을 해야 될지 모를 일이라 걱정이 되기도 하오."
순태는 그런 말을 하고 복받치는 감정을 가누지 못해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을 못 했다. 순태 처가 대신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양신 야좌님, 영감이 저러시니 내가 대신 말씀을 드려야 하겠어요."
양신은 두 사람이 번갈아 하는 이상한 말과 태도에 의문이 크고 마음이 답답했다. 두 사람에게 재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인데 이러십니까 들? 저는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주머니라도 얼른 말씀을 하시든가 말든가 하십시오."
"내가 직접 겪은 일이므로 자세히 전할 수가 있어요."
순태 처는 그렇게 입을 뗀 뒤 얘기를 시작했다.
영양왕이 즉위한 지 몇 해 되지 않을 무렵이었다. 왕은 젊어서부터 수렵을 좋아해서 사냥터에서 살다시피 했다. 어느 날 사냥터에서 아름다운 처녀를 발견하고 궁궐로 데려가 후궁으로 삼았다. 그 후궁의 남동생이 바로 여준의 아비인 부루(付婁)였다. 부루는 검술을 배우고자 다갈무문의 문생이 되었다. 그러나 누이가 왕의 총애를 받는 터라 여간 거들먹대지 않았다. 뿐더러 엉뚱한 욕심까지 품어서 철장 자리까지 노렸다. 결국 누이를 앞세워 국왕을 움직인 끝에 다갈촌 야장방은 전에 없던 감독관을 두게 되었다. 관독관이 된 부루는 누이를 등에 업고 월권이 더욱 심해졌다. 끝내는 철장 자리를 넘봤지만 쉽지가 않을 일이었다. 그때부터 음험한 계획을 세우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어느 해 겨울이었다. 철장 부부는 함께 심한 감기에 걸렸다. 순태 처는 간병을 맡고 있었는데 잠시 집에 볼일이 있어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 사이에 부루는 철장의 집 안으로 들어가사 좋은 약을 지어왔다며 내놓았다. 철장에게 약을 먹이자 바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부인은 크게 놀라며 부루에게 야단을 쳤다.
"이 자가 무슨 짓을 했는가?"
부루는 전혀 두려운 기색도 없이 그러는 부인에게 말했다.
"이번엔 부인 차례다. 순순히 약을 마시는 게 좋을 것이다."
부인은 그 말에 할 말을 잃는데 부루는 협박을 가했다.
"순순히 약을 마시겠소? 아니면 이 칼을 받겠소?"
부인은 몸을 떨면서 거부했지만 부루는 단검을 빼들었다.
"빨리 약을 먹지 않으면 목에 구멍을 뚫겠다!"
부루의 협박에도 철장 부인은 완강히 고개만 저었다. 부루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부인의 몸을 가로타고 앉아서 목을 졸랐다. 그렇게 해서 입이 벌어지게 되자 약을 쏟아부었다. 억지로 약을 삼키게 된 부인도 이내 의식을 잃었다. 그 모양을 지켜보고 난 부루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집을 빠져나갔다 그러다 돌아오는 순태 처와 마주쳤다.
"감독님은 여길 무슨 일로 왔다가 가나요?"
순태 처는 이상해서 묻는데 부루가 호통을 쳤다.
"범인은 바로 네 년이었구나!"
"내가 범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네 년이 잡아뗀다고 죄를 면할 줄 아는가?"
"감독이면 단 가요? 내가 무슨 죌 지었다고 욕설까지 해요?"
"시치미를 뗀다고 통할 줄 아는가? 어림도 없는 말이다."
"내가 대체 무슨 시치미를 뗀다는 거예요?"
"저 집안에 네가 저지른 짓이 벌어졌는데 그걸 잡아떼는가?"
"저 집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그래요?"
순태 처는 그런 말을 남기고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자 방안에는 철장 내외가 입에서 피를 토한 채 널브러져 있었다. 처참한 광경 속에 방바닥에 나뒹구는 약 그릇이 보였다.
"무슨 약그릇인가? 부인 정신을 차리세요!"
철장 부인은 순태 처가 외치는 말에 잠시 후 눈은 뜨고 고통스럽게 겨우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부인, 웬 약 그릇이 여기에 있습니까?"
순태 처가 묻자 부인은 신음과 함께 겨우 대꾸했다.
"부루가 철장님과 내게 독약을 먹였어."
부인은 그 말만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순태 처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부루는 순태를 잡아끌고 나타났다. 그리고 어쩔 줄을 모르는 순태 처에게 호통을 쳤다.
"네가 두 분에게 독약을 먹인 것을 남편한테 실토를 해라."
순태는 방안에 벌어진 광경을 보고 놀람과 동시에 즉각 알아채게 되는 게 있었다. 부루는 순태 처에게 윽박지르듯 말했다.
"내가 관아에 고발을 하면 너는 살인죄로 처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왜 내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해요? 부인께선 숨을 거두시기 전에 부루 감독이 강제로 독약을 먹였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이런 못된 게 있는가? 죄를 내게 뒤집어씌우려 들다니!"
"누구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감독관은 살인자예요!"
"내가 살인자라고? 그렇다면 좋다. 이제부터 관아로 가서 시시비비를 가릴 수밖에 없다. 순태 처는 당장 나를 따라나서라."
"죄가 없는 제가 관아는 무엇 때문에 간단 말이에요?"
순태 처는 그렇게 부인을 했지만 겁에 질린 몸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순태는 부루가 아내를 살인자로 몰고 설치듯 끌고 가려고 하자 앞을 가로막았다. 그렇지만 속은 난감하기만 했다.
"마조장, 비켜서지 않겠는가?"
부루가 명령을 하듯 말하자 순태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소."
"그러면 나 혼자 가서 고발을 하겠다."
부루는 말은 그렇게 했으나 막상 떠나진 않았다.
순태는 그러는 부루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관청에선 죄가 어느 쪽에 있건 누이가 후궁인 부루의 편을 들게 되었다. 더욱이 아내는 철장 부부의 병간호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무슨 흑심을 품고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모함을 하면 남들은 믿을 수도 있었다. 답답하고 난감한 심경이나 끝내 오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나는 두 사람 중 어느 쪽도 편을 들지 않겠소."
"어느 쪽도 편을 들지 않겠다면 그건 무슨 소린가?"
"두 사람은 철장 내외분이 횡액을 당하신 일에 연관이 있소. 그러나 두 사람은 다 같이 철장 내외분을 살해한 죄를 서로에게 미루고 있소."
"마조장은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감독관이 관청에 고발하면 내 처는 꼼짝없이 살인범으로 몰리오."
"죄를 지었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지 아겠는가?"
"아내는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나는 가만히 있지 않겠소. 감독관은 그 점을 생각해 주시오."
"마조장,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단 소린가?"
"아내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면 감독관을 죽일 수밖에 없소."
"날 죽인다고?"
"이판사판으로 그럴 수밖에 더 있겠소?"
"마조장, 그러기 전에 너는 내 손에 먼저 죽게 된다."
부루는 말하고 장도를 쓱 빼어 들었다. 순태는 무기를 지니지 못한 터라 뒷걸음질을 치지 않을 수가 없고 부루가 협박했다.
"마조장, 더 이상 몸을 움직이면 칼을 받는다."
순태는 그 말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대로 죽게 된다면 부루는 마음대로 죄를 뒤집어 씌우게 될 것이다. 죽은 몸으론 변명도 억울함을 밝힐 수가 없게 되었다.
"감독관이 우리 부부를 죽이면 어떻게 될지를 한번 생각해 봤소?"
순태는 말하고 걸음을 멈추자 부루는 좀 주춤하는 태도가 되었다.
"내가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관청은 감독관의 편을 들 것이나 야장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야장들은 왜 그렇게 생각을 않는다는 말인가?"
"야장들은 철장 내외 분이 돌아가시게 된 것이 내 처가 아닌 감독관의 소행으로 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요."
부루는 순태의 대답에 내심 마음이 흔들렸다. 두 사람 사이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순태는 부루의 눈치를 보면서 또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다. 그것은 어린 자식들과 철장 부부의 유일한 혈육인 두 살짜리 양신의 앞날이 걱정이었다. 순태 처는 양신의 유모(乳母)로 거의 키우다시피 해왔다. 더욱이 부루는 양신을 그냥 놔두지 않을 수도 있었다.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모두가 살아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런데 부루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마조장, 죽기보다 사는 방법을 찾는 게 좋지 않겠는가?"
순태는 어떤 기대를 걸고 공손하게 물었다.
"감독관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마조장의 처는 죽어 마땅하지만 나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다른 생각이라면?"
"철장 부부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그렇습니다만?"
"산 사람은 그대로 살아갈 방법을 찾고 싶지가 않은가?"
부루의 질문에 순태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내가 장도를 한번 휘두르면 마조장은 끝이 난다."
순태는 협박조의 말에 몸이 움츠려 들었다.
"죽음처럼 허무한 일은 없다. 마조장은 어찌 생각하는가?"
"저도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살고 싶습니다."
"그 말 진심인가?"
"진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진심이라면 나로선 달리 생각을 해 볼 수도 있겠다."
"어떤 생각을 하겠다는 말이요?"
"마조장이 살고 싶다면 내 말을 듣는 게 좋겠다."
"어떤 말씀이요?"
"나와 마조장 부부가 함께 파국을 면할 방법을 찾자는 걸세!"
부루의 말에 순태는 응하는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살 방법을 찾겠습니까?"
순태의 질문에 부루는 장도로 허공을 한번 갈랐다.
"마조장이 마음을 먹기에 달린 일일세."
"내가 어떻게 마음을 먹으면 되겠습니까?"
부루는 장도로 순태의 가슴을 겨누고 노려보았다.
"마조장은 살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감독관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먼저 들어봐야 하겠습니다."
"마조장의 대답은 내 요구에 따를 용의가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
"따를 수가 있는 일이라면 따르겠습니다."
"그런 대답을 들으니 나로선 인정을 베풀 용의가 있다."
"감독관님은 내게 어떤 요구를 하려고 그러십니까?"
"서로가 철장 부부의 죽음을 떠넘기는 걸 그만 두자."
"그건 제 처가 한 짓으로 받아들이란 말씀입니까?"
"아니다. 서로 타협을 해서 해결을 보는 것이다."
순태는 내심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자기 부부는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내와 시선을 나누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철장 부부는 병으로 죽은 게 된다!"
부루의 말에 순태는 또다시 고개만 끄덕였다.
"이건 우리만의 비밀로 죽을 때까지 지킬 수가 있겠는가?"
순태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동의를 하고 말았다.
"나는 앞으로 야장방의 모든 일은 마조장과 의논을 해서 협조를 구하고 처리를 해 나갈 것이다. 그 대신 마조장도 명심을 해 둘 게 있다."
"어떤 일입니까?"
"마조장 부부의 목숨은 항시 내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아둬야 한다."
"알겠습니다."
"좋다. 이곳의 뒤처리는 내게 맡겨 두면 된다."
"우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마조장은 처를 데리고 집으로 가서 안정을 취하게 해 줘라."
순태는 그 말에 당장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식들과 어린 양신이 다치지 않게 된 것만도 최선책이었다.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없어 아내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뒤 다갈촌은 부루에 의해 철장 내외의 장례를 치렀다.
양신은 순태 처의 얘기가 끝나자 억장이 무너질 충격과 분노로 을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하늘이시여, 그만 좀 끝내 주십시오!"
양신은 그렇게 외치고 다시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순태는 그 심경이 오죽할까 싶어 힘들게 입을 열어 위로의 말을 했다.
"양신 야좌, 날 용서해 주오. 이 얘길 이제야 꺼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준 철장 때문이요. 그는 아비와는 좀 다른 사람이요. 아비가 저지른 짓을 나중에 알게 되었던 모양이요. 그때부터 괴로운 마음에 오랜 기간을 타국 땅을 유랑을 했소. 그러다가 아비가 죽자 돌아오게 되었소. 나는 그때까지 양신 야좌를 맡아 기르고 있었소. 그런데 여준은 야좌를 데려가서 잘 키우겠다고 간청을 했소. 나는 사죄하는 마음으로 그러는 걸로 받아들이고 내줄 수밖에 없었소. 그 뒤로 여준은 혼인도 하지 않고 외동딸과 함께 잘 키웠기 때문에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소."
"아저씨, 저도 사부님이 절 아껴주신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거기다 여선은 제 자식을 낳았으며 여선과 쌍둥이 여동생은 중원 땅에서 제 목숨을 구하고자 목숨을 내던졌습니다. 저는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양신은 부모들의 대한 추억은 죄스럽게 기억 속에 없었다.
"낸들 양신 야좌의 그런 심경을 왜 모르겠소?"
"저는 어려서 아주머니 젖을 먹은 일만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두 분은 절 핏줄처럼 키우고 보살펴 주셨습니다. 그러나 얼굴도 모르는 부모님들이 당하신 일은 제 가슴을 찢어지게 만드나 실감이 되지 않아 막심한 불효자일 뿐입니다. 저는 고구려에선 살 수가 없어서 어디로 떠나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부모님에 관한 일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양신은 지녔던 인삼을 순태에게 내놓고 몸을 일으켰다.
"저는 이 자리엔 도저히 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제가 어디에 자리를 잡게 되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오래 살아계셔 주십시오. 제가 두 분을 꼭 모셔다가 함께 살겠습니다."
"양신 야좌, 어디서 살든 간에 잘 살기만 바라오."
양신은 그 자리를 떠났다. 오골사로 가서 사부의 무덤 앞에 섰다.
"사부님, 세상에 이런 악연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원통합니다."
무덤은 고요하기만 했다. 양신의 머릿속엔 사부의 얼굴보다 여선과 주랑의 얼굴만 떠올랐다. 오골사로 들어가 안함로 스님을 만났다.
"스승님, 저는 산에서 그만 나왔습니다."
"양신, 참 잘했다."
"이제부터 스승님과 의논을 드릴 게 있습니다."
양신은 그렇게 입을 뗀 뒤 불함산에서 벼락을 맞은 일, 고향인 다갈촌에 갔다가 그동안에 몰랐던 집안의 내력과 부모님에 관한 일들을 알게 된 것도 알렸다. 안함로는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측은한 눈길을 보냈다.
"자네 얘긴 전해지는 말이라 갈사국 왕실의 후손인지는 확실치가 않네. 다만 벼락을 맞고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것은 나로선 여간 큰 의미를 두지 않겠네. 한 마디로 자네는 그걸로 모든 액운이 사라지게 되었네. 기쁘기 그지없어 나는 자네의 앞날을 놓고 의논을 하고 싶네."
"스승님, 저는 모든 과거를 잊고 새롭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암, 그래야지. 자넨 세상을 위해 큰일을 할 수가 있는 사람일세."
"스승님, 세상을 위해선 무슨 일을 하면 좋겠습니까?"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는 일을 하면 좋겠네."
"그런 일은 스님들이 하실 일이지 제가 할 수가 있겠습니까?"
"중은 사람들에게 어진 마음을 깨우치게 하는 게 고작일세.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동물이라고 말할 수가 있네. 마음만 먹으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파괴할 수가 있네. 그에 대한 죄의식도 느끼지 않네. 같은 인간끼리도 해를 끼치네. 때문에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게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네. 자네는 그걸 막는 사람이 되어보게."
양신은 막연하고도 엄두가 나지 않을 말이라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중원에서 석부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한 마디를 불쑥했다.
"저는 조상의 나라를 재건해 볼까 합니다."
"조상의 나라를 재건한다?"
"나라를 재건시켜 백성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면 어떨까요?"
"그렇게만 한다면 이 세상에서 그보다 더 좋을 일이 있겠는가? 그것이야 말로 이상이고 거기가 극락세계가 아니겠는가? 세상의 왕들은 이모두가 백성들의 주인인양 굴기만 하네. 그렇지가 않은 왕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스승님, 그러고 싶지만 막상 나라를 세우는 게 쉽겠습니까?"
양신의 대답에 안함로는 고개를 저었다. 나라를 세우는 게 가능한 일이건 아니건 간에 다시 세상으로 나가려는 양신의 의욕을 북돋아 주고 싶어서 과도한 말도 아낄 수가 없었다.
"나는 양신이 어떤 운명을 타고났는지 모르겠네. 창업은 야망과 능력만으로 이룰 수가 없고 운이 가장 큰 작용을 할 것으로 생각되네. 그렇지만 자네는 사나이로 큰 꿈을 꾼다면 이뤄낼 수가 있는 사람일세."
양신은 좀 진지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나라를 세우자면 땅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함로는 그 말에 끌려들어 가듯 대답했다.
"나라를 세울 땅은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지."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다니요? 어디서 찾는다는 말씀입니까?"
"말갈 땅으로 한번 눈을 돌려보면 어떻겠는가?"
"왜 말갈 땅으로 눈을 돌리라고 하십니까?"
"그에 대한 설명을 해주겠네."
안함로는 그렇게 대답하고 말을 이었다.
송화강(松花江)의 우측 넓은 삼림지대는 말갈족이 퍼져 사는 터전이었다. 그들은 삶은 풍족하지 못하나 빈부(貧富)의 차이는 적었다. 남에게 얽매이길 싫어하는 편이라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경향이 컸다. 다만 쪼개지는 속성이 너무 커서 지금까지 통합 왕조를 세우지 못했다.
"사나이는 큰 뜻을 품게 되면 조국이든 타국이든 용기와 노력만 있으면 이룩해 낼 수가 있네. 중원의 역대 여러 왕조들의 절반은 한족이 아닌 타 종족들이 나라를 세웠네. 수와 당도 한족이 아닌 북방의 유목민 후예가 세운 왕조일세. 자네가 곧장 말갈 땅으로 가게나."
"제가 말갈족 사이로 들어가선 무슨 일부터 해야 되겠습니까?"
"나는 나라를 세워본 적이 없네. 그러니 내게 물을 말이 아닐세. 그건 자네가 마음을 먹고 결정을 하고 알아서 해나갈 일일세."
양신은 그런 대답을 듣고 문득 한 인물이 떠올랐다.
속말부의 대막불인 돌지계(突地稽)였다. 그는 학식도 있고 자의식이 매우 강하고 말갈족에 대한 자부심이 큰 인물로 알려졌다. 그 때문에 대수 전 때는 을지문덕과 각을 세웠던 사람이다.
말갈족은 스스로를 삼호족(森豪族)으로 칭했다. 삼림 속의 호대한 종족이란 뜻이었다. 그런 만큼 고구려에 복속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특히 돌지계는 대수 전 땐 수국과 내통을 했던 사실이 알려질 만큼 고구려에 반하는 성향이 큰 인물이었다. 일단 그를 찾아가기로 했다.
"스승님의 말씀대로 나라를 세우든 못 세우든 간에 말갈족 땅으로 가겠습니다. 거기서 새로 살아갈 자리를 마련해 보고자 합니다. 당장 떠나겠습니다."
"양신. 끝으로 조언을 하나 더 하겠다."
"어떤 조언을 하시렵니까?"
"말갈족은 고구려와 조상이 같아 정서가 비슷하다. 이 세상엔 수많은 왕조가 들어서고 망했다. 그러나 창업처럼 힘든 일은 없다. 자고로 창업을 한 자들은 남의 보위를 찬탈한 자들이 많다. 양신은 그런 짓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스승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두겠습니다."
양신은 큰 절을 올리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