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임나부(任那府)
왜국은 고구려가 수국의 침공을 받을 때 군사작전을 펴서 신라를 견제했다. 그 결과는 신라의 철정 공급이 절반으로 주는 보복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고구려는 전쟁의 승리를 과시하고자 배에 전리품(戰利品)과 수국 포로인 군관과 사병을 1명씩 태워서 왜국으로 보내 구경만 시켰다.
왜국 여왕은 고구려 사신에게 성대한 축하연을 베풀었다. 그 자리에서 철제품 공급을 늘려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전쟁 통에 야철소들이 파괴되어 당분간은 어렵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반면에 신라는 중요 철산지인 가잠성을 백제로부터 회복했다. 그러나 왜국은 고구려와 백제에 기대를 걸 수가 없어 심각한 사정을 해결하자면 불편한 신라에 다시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쇼토쿠는 여러 차례 신라에 사신을 보내 철정 공급량을 늘려 줄 것을 간청했다. 신라도 생산량이 크게 늘어난 데다 왜국과 적대 관계를 지속해선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을 했다.
신라는 왜국에 사행(使行)을 보냈다. 사신은 늘 두 명씩 보내는 게 관행이었다. 한 명은 신라 또 한 명은 임나부의 대표였다. 그런데 이번엔 죽세를 정사(正使)로 구미를 부사(副使)로 보냈다.
정사인 죽세는 쇼토쿠 섭정을 예방했고 부사인 구미는 우마코 대신을 만났다. 그런 역할 분담을 매우 이상하게 여긴 우마코는 죽세에게 자기 집을 방문해 줄 것을 요구했다.
주세는 마지못해 방문했고 우마코는 말했다.
"죽세님은 2년 전 내게 불상 1구를 전해 주셨지 않았소? 고마움을 재차 표하겠소. 나는 이번에도 큰 기대를 걸면서 뵙자는 청을 넣었소."
우마코의 말에 죽세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왜국에 큰 기쁨이 될 소식을 전하게 되었소."
"죽세님, 큰 기쁜 소식이라면 어떤 것이요?"
"신라는 왜국과 우호협력 관계를 강화시키기로 했소."
"그건 무엇보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가 없겠소."
우마코는 의아함을 품는데 죽세는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신라도 근래에 와선 철제품 수요가 급속히 늘어나는 형편이요. 때문에 타국에 철정을 공급할 여력이 없소. 다만 쇼토쿠 섭정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공급량을 배로 늘리는 특별한 배려를 하게 되었소."
우마코는 내심 여간 놀라지 않았다.
"죽세님, 나로선 무엇보다 반가울 소식이 아닐 수가 없겠소."
"신라는 겸하여 쇼토쿠 섭정께 새로운 방침도 통고했소."
"새로운 방침은 어떤 것을 말함이요?"
"신라는 왜국과 해온 기존의 철제품 거래 관행을 바꾸기로 했소."
죽세의 대답에 우마코는 매우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죽세님, 기존의 거래 관행을 바꾸다니 어떻게 바꾼단 말이요?"
"신라는 앞으로 사교역을 없애고 관교역만 하기로 했소."
우마코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의 귀를 의심치 않을 수가 없었다.
신라와 왜국의 철제품 교역은 두 가지 형태로 오랜 세월을 병행해 왔다. 하나는 국가 간의 공적인 관교역(官交易)이고 또 하나는 지물촌의 임나부와 망명 가락국의 왕족들 사이의 사교역(私交易)이었다. 지금은 사교역의 상대만 우마코로 바뀌었을 뿐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우마코는 분노와 함께 심한 반발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죽세님, 무슨 말도 안 될 소리를 하시오?"
"대신, 말도 안 될 소리라니? 무슨 말씀이 그리도 심하시오?"
"양국 간의 사교역은 오래된 관행이고 관교역보다 더 오래되었소. 신라가 그걸 하루아침에 없애버린다면 나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소."
"대신, 나는 섭정과 이미 합의를 끝냈소."
"섭정과 합의를 봤다니 누구 마음대로 그런단 말이요?"
우마코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죽세는 이윽히 바라보기만 했다.
죽세도 철제품 사교역이 오래된 관행이고 시작된 원인도 잘 알고 있었다. 폐지는 쉽지가 않을 일이나 왜국은 신라의 철정을 전적으로 더욱 의존해야만 하는 어려운 사정에 처해 있었다.
우마코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애써 냉정을 유지하려로 했다.
"사교역 폐지는 신라가 일방적으로 내릴 수가 없는 결정이요."
죽세는 그 말을 듣고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
"쇼토쿠 섭정과 타협을 본 일이므로 대신도 따라주시오."
"쇼토쿠가 합의를 봤다면 그 자는 제정신이 아닌 자요!"
"아무튼 간에 나는 대신께 알리는 임무를 마쳤소."
죽세가 자리를 뜰 태세를 보이자 우마코는 다급하게 말했다.
"사교역은 본래 신라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소. 오랜 세월을 두고 잘 지켜져 온 관행이요. 누구도 마음대로 깰 수가 없음을 경고하겠소."
"대신, 지금은 가락국이 없고 철정 거래는 신라와 하고 있소."
죽세의 대답에 우마코는 사뭇 협박조가 되었다.
"나는 군사작전을 펼쳐서라도 막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겠소."
우마코는 죽세가 돌아가자 이를 으드득 갈면서 외쳤다.
"해볼 테면 해봐라. 남은 건 전쟁뿐이다!"
이튿날 구미가 찾아오자 우마코는 불같이 화를 냈다.
"구미님은 사교역 폐지에 관한 말을 왜 내게 하지를 않았소?"
"사교역의 폐지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구미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 안색이 변했다. 철제품 사교역은 임나부에도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만약에 폐지되면 지물촌 야장들은 물론 우마코 자신도 큰 타격을 받게 될 일이었다.
"구미님은 대체 그것도 모르고 사신으로 따라왔단 말이요?"
"나는 정말 몰랐습니다."
두 사람은 그때부터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구미는 우마코에게 신라의 내부 사정부터 들려주었다. 가잠성 회복으로 철정 공급의 여유가 생겼고 왜국과 적대 관계의 지속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때문에 왜국에 철정 공급량을 늘리는 대신 그걸 이용해서 사교역을 폐지할 속셈을 드러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구미님의 말씀대로이나 나는 별 걱정은 하지 않겠소."
"쇼토쿠 섭정은 사교역 폐지에 반대를 않는다는데 걱정이 없다니요?"
구미의 말에 우마코는 고개를 외로 꼬게 되었다. 사교역 폐지는 누구보다 자신이 받을 타격이 가장 컸다. 그러나 신라와 쇼토쿠 간의 이해득실이 맞아떨어진 이유부터 알아야만 대책을 세울 수가 있었다.
"나는 구미님에게 조언을 구해야 하겠소."
우마코의 말에 구미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신라 왕실과 내물계는 전쟁으로 돌입한 지경이나 다름이 없소."
"구미님, 그게 사실이라면 어찌타 그 지경이 되었단 말이요?"
"왕실을 공주에게 보위를 잇게 하려는데 내물계는 반대하고 있소."
"여인이 보위에 오르는 건 어디나 문제이구려. 그런 갈등은 어쩔 수가 없지만 내물계가 사교역 폐지에 응하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요."
"내물계는 결코 응하지 않을 것이라 일방적으로 시행할 수가 그랬다간 그 뒷감당을 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나 다른 사정이 생겼소."
"다른 사정이란 무엇이요?"
"가잠성을 탈환하고 나서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었소."
"왕실과 내물계 사이가 나쁜 건 알지만 더 악화된 이유는 무엇이요?"
"전역에서 화랑도 간부들 중 내물계가 수십 명이나 희생자를 내었소. 그런데 그에 대한 뒷말이 무성해서 내물계의 적대감을 더욱 키웠소."
"전쟁은 희생자가 나오기 마련인데 왜 그렇단 말이요?"
"변품이 화랑도를 무리하게 사지로 몰았기 때문이요. 특히 화랑도 간부들에게 더 심했는데 거기엔 어떤 음모가 깔린 것으로 알려졌소."
"어떤 음모를 깔고 무리하게 사지로 몰았다?"
"거기엔 변품과 김춘추 사이에 사전에 모종의 밀약이 있었다오."
"모종의 밀약이 뭔지 아시오?"
우마코가 큰 흥미를 보이자 구미는 놀라운 사실을 밝혔다.
"왕실은 전역을 일으키기 전 알천을 병부령에 새로 앉혔소. 그런가 하면 후직에겐 상대등 직을 제안했소. 전역에 투입할 많은 병력을 내물계가 내놓게 만들기 위함이었소. 그렇게 지원을 이끌어냈으나 전역을 끝내자 상황이 달라졌소. 가잠성 탈환에 공로가 컸다는 이유로 변품을 새로 병부령에 앉히고 알천을 밀어냈소. 그런가 하면 후직에게 제시했던 상대등 직을 죽파에게 돌렸소. 그게 극도로 관계를 악화시킨 원인이요."
우마코는 매우 흥미진진한 표정이 되었다.
"신라의 내부 사정이 그렇다면 우리에겐 하등 불리할 게 없겠소."
"신라의 내부 사정이 우리에게 유리할지 불리할지는 모르겠소."
"구미님, 유리하면 유리했지 불리할 게 무엇이요?"
"나도 신라의 내부적 분란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고 있소."
"구미님, 그러면 우린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울 일이요."
"신라는 끝내 화백회의를 열어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소."
"신라는 새로 왕을 추대할 땐 화백회의를 여는 걸로 알고 있소. 진평왕은 왕자가 없어 공주를 보위에 오르게 만들려는 걸로 알고 있소."
"대신, 그건 어림도 없을 소리요."
"그렇다면 더욱 큰 분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소?"
"그렇소. 그런데 왕위를 노리는 건 내물계만이 아니고 박씨와 석씨계도 노리고 있소. 그 점은 사정이 복잡한 형국을 만들어 놓고 있소."
"박씨와 석씨도 노린다? 그러면 그들은 누구가 되겠소?"
"박씨는 죽파이고 석시씨는 변품이요. 왕실이 그들에게 상대등과 병부령 자리를 내준 것도 화백회의 때 도움을 얻을 목적이요. 그러나 그게 큰 착각임을 모르고 큰 우를 범하는 결과를 빚게 될 것이요."
"아무튼 간에 우린 그런 각축전을 이용할 방법을 찾아야 하겠소."
우마코는 말하고 흐뭇한 표정을 짓는데 구미가 물었다.
"대신은 그걸 이용할 무슨 묘책이 있으시오?"
"묘책을 말하기 전에 나는 구미님이 걱정되오."
"나는 철제품의 사교역 폐지로 타격을 받을 것인데 그 점은 대신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그런데 왜 나만의 걱정처럼 말을 하시오?"
"신라가 사교역 폐지를 들고 나온 이면엔 또 다른 계획이 있소."
"또 다른 계획이라니 그건 뭐란 말이요?"
"나는 궁극적인 목적이 임나부를 폐쇄하는 데 있다고 보오."
"임나부를 폐쇄한다?"
구미는 안색이 굳어들면서 수긍하는 표정이 되었다.
"현재 내물계는 임나부는 관장하고 있지 않소?"
우마코의 말에 구미는 고개만 끄덕였다.
"내물계는 임나부 예하의 철산지와 사교역을 장악하고 있소. 거기서 얻는 든든한 재정적 수익은 강력한 사병을 유지할 수가 있소. 그 때문에 신라 왕실은 임나부의 존속을 원치 않을 수밖에 없지 않소?"
구미는 심각한 표정으로 분연히 중얼거렸다.
"나는 그냥 당하지만은 않겠소!"
봄꽃 향기가 짙은 이가루가(斑鳩) 왕궁에선 신라 사신을 위한 연회를 베풀었다. 우마코는 참석하고 싶지가 않지만 신라 사신에게 직접 해둘 말이 있기 때문에 궁으로 들어갔다.
연회장의 취흥이 한창 도도한 가운데 우마코가 입을 열었다.
"대군이 사는 광대한 궁전이 천년만년 이어지길 바라노라. 나는 외경심을 갖고 이 궁전을 지키고 받들어 나갈 자임을 천명 하노라."
신하들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갸우뚱하게 되었다.
우마코는 조정의 최고 권력자임은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여왕을 대군으로 지칭했을뿐더러 자신이 궁전을 떠받치고 지켜준다고 했다. 듣기에 따라선 충성의 표현이 아니고 궁전이 자신의 것이란 뜻을 풍기는 여운을 강하게 남겼기 때문이다.
여왕도 우마코의 말을 속으로 곰곰이 따져보고 있었다. 뿐더러 쇼토쿠는 여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때문에 의심이 짙은 눈길을 던지고 있는데 여왕이 입을 열었다.
"소가씨 가문은 우수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소. 그처럼 훌륭한 소가씨는 조정을 받들고 지키려 들어 더욱 높이 쓰지 않으면 안 되오."
여왕은 평소에도 소가씨를 많이 추켜세우는 편이었다. 우마(牛馬)에 비유해서 유명한 일향(日向)의 큰 말이라고 했고, 큰 칼에 비유해 오국(吳國)의 진도(眞刀)와 같다는 말도 했다. 그렇지만 신하들은 오늘의 말을 이심을 품은 우마코를 애써 다독이려는데 있다고 생각했다.
신하들은 군신 간의 돈독한 유대감보다 대립의 골이 너무 깊게 보고 있었다. 우마코는 왕실이 자신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생각인 반면에 이젠 위상을 만만치 않게 다진 여왕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 봤자 우마코는 일개 신하에 지나지 않는다!"
신하들은 앞으로의 전망을 나름대로 하고 있었다. 여왕은 처음에 우마코한테 찍소리도 못했던 존재였으나 앞으론 달라질 걸로 보았다. 쇼토쿠가 버팀목 역할을 잘 한 덕분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우마코에게 왕위를 잃은 시센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쇼토쿠를 여왕에게 천거한 사람은 우마코였다. 사위인 쇼토쿠를 앞세워 여왕을 조종해 양위를 받아낼 속셈이었다. 그 결과는 크게 빗나가 여왕과 쇼토쿠는 합심과 밀착으로 왕실을 날로 강화시키고 있었다.
우마코는 술에 취해가며 점점 말이 많아졌다.
"바다 건너 옛 가락국 땅은 내 조상의 고향이다. 조상들은 거기서 철산지를 개발하고 철제품을 생산했다. 그 사실은 세상이 다 알고 있건만 그 땅을 신라에 빼앗겼으니 원통하기가 짝이 없다!"
죽세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대신은 어찌 당치도 않을 말씀만 하시오?"
"당치가 않다니? 신라 사신은 그 사실을 정말 몰라서 그러오? 가락국 왕족들은 나라가 망한 뒤 왜국으로 망명했소. 그때 가락국 땅엔 임나부가 설치되었고, 그게 생겨난 이유를 안다면 그런 말을 못 할 것이요."
우마코가 던진 말에 죽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가락국 왕족들을 우대해 특별히 철정을 공급한 걸 왜 모르겠소?"
"그러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말을 해보시오."
죽세는 알고 있었지만 대답하고 싶지가 않았다.
"가락국들은 신라에 망하고 야장들은 왕족을 따라 전부 왜국으로 오려고 했었소. 신라는 그걸 막지 않으면 여간 큰일이 아니었소.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잡아 둬야만 했소, 그러나 너무도 절박한 상황을 타개할 방책을 찾을 수가 없소. 그러다 끝내 파격적인 제안을 해야만 했었는데 그게 바로 철제품의 사교역이 아니겠소?"
죽세는 부인할 수가 없어 계속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당시 신라는 가락국 야장들이 생산하는 철제품 중 절반을 망명 왕족에게 공급을 하겠다는 제안으로 난관을 겨우 타개할 수가 있었소. 철정을 판매한 대금도 남게 될 야장들의 생계유지에 쓰기로 했소. 그러자 가락국 왕족들도 요구를 했소. 신라에 남을 야장들을 자신들이 관할하고 관장을 할 수 있게 기관을 설치하겠다는 요구였소. 신라는 용납할 수가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야장들을 잡아둘 수가 없었소. 끝내 왕족 중 한 명이 남아 야장과 철광산을 관장할 임나부를 설치하게 되었소. 그리고 신라가 임나부를 영원히 존속시키겠다는 문서도 작성을 해서 지금도 임나부에서 보관을 하고 있소."
우마코의 조리 있는 설명에 좌중은 진지한 표정들이 되었다.
"나는 더욱 중요한 말을 하나 해야만 하겠소. 지금까지 임나부 야장들은 철정을 생산하고 사교역을 하는데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고 행해 왔소. 더욱 중요한 점은 임나부가 신라 조정이 아닌 남가라 관청의 관할 하에 있게 된 것이요. 그렇게 된 이유는 가락국을 멸망시킨 신라 왕실은 내물계였기 때문이요. 그러므로 임나부는 신라 조정의 관할 밖에 있는 독립된 기관으로 봐야 한다는 말을 나는 강조를 하려는 것이요."
죽세는 말도 안 될 말이라 크게 반발했다.
"대신의 말씀은 어패가 있소. 당시 사실에 입각한 말이라고 해도 현재는 임나부의 역할과 위상은 초기와는 크게 달라졌음을 아셔야 하오."
"나도 세월이 흐르며 사정이 달라진 것을 부인하진 않겠소. 그러나 임나부는 현재도 신라 조정이 아닌 남가라 관청의 지휘와 감독을 받고 있소. 그럼에도 신라 조정이 사교역 폐지를 운운하는 건 언어도단이요."
우마코가 못을 박는 말에 죽세도 지지를 않았다.
"남가라 관청은 신라 조정에 속한 하급기관이요. 그것은 남가라 관청이 임나부를 독자적으로 관할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요. 뿐더러 임나부는 지금 남가라 관청의 지배를 받는 위치로 완전히 전락했소."
죽세의 반발을 우마코는 또 받아쳤다.
"나는 그 점에 대해서도 죽세님과 다른 생각이요."
"어떻게 다르단 말이요?"
"신라가 갑자기 사교역 폐지를 들고 나온 건 속셈이 다른데 있소."
"속셈이 다른데 있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나는 남가라 관청을 신라 왕실이 아닌 내물계에 속한 걸로 보고 있소. 때문에 신라 왕실은 사교역의 폐지를 놓고 남가라 태수와 임나부 거수에게 아무런 통고도 할 수가 없었소. 뿐더러 그 사실을 국내에선 전혀 모르게 하고 사신을 통해 아국에만 전했을 뿐이요. 그러므로 나는 철에 관해선 신라 왕실과 내물계는 따로 노는 형편으로 보고 있소. 심하게 말을 하면 신라 왕실과 내물계는 각기 다른 나라나 다름이 없다고 보오. 나는 죽세님으로부터 그에 관한 답변도 들어보고 싶소."
"대신, 말도 되지 않을 소리에 무슨 대답을 할 게 있겠소?"
"말이 되고 안 되는 것은 피차 간에 따져보면 될 일이요. 다만 사교역의 폐지 소리는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라겠소."
죽세는 우마코의 말을 궤변으로만 치부할 수가 없었다. 자신도 긴 말을 하고 싶지가 않고 그럴 의무도 없어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죽세님은 돌아가서 내 말을 신라 조정에 전하시오."
"못 전하겠다면 어떻게 하겠소?"
"나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요."
"대신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요?"
"군사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는 뜻이요."
우마코의 단호한 대답에 좌중의 분위기는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더러는 고개를 끄덕여 동조하는 자들도 있으나 쇼토쿠는 굳은 표정으로 침묵만 지켰고 여왕이 입을 열었다.
"대신, 진정하시오. 지금은 그런 말들이 나와선 안 되오."
여왕은 겨우 개선을 시킬 신라와의 관계가 수포로 돌아갈지도 몰라서 제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마코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하면서 언성을 더 높였다.
"신라는 지난해 가잠성 철산지를 되찾고 나자 그만큼 국력이 강해진 걸로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그건 큰 오산임을 알아야 하오."
우마코의 말에 죽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체 신라가 무슨 오산을 한다는 것이요?"
"왜국도 이젠 고구려와 비견될 만큼 군사적인 강국이 되었소. 옛 가락국 땅을 되찾고도 남을 만큼 강한 군사력을 지녔다는 말이요. 죽세님은 지금 내가 한 말을 신라 국왕에게 그대로 보고해 주기 바라오."
우마코는 그런 말을 던지고 자리를 박차듯 일어서 궁궐을 나갔다. 구미도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우마코의 뒤를 따랐다. 집으로 돌아온 우마코는 구미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구미님은 연회석에서 왜 벙어리처럼 한 마디도 말을 않소?"
"대신께선 그럴 수밖에 없는 내 처지를 잘 알고 있지 않소? 사행의 일원으로 온 데다 신라 조정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을 생각해 주시오."
"나도 지물촌 야장들도 함께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된 마당이요. 때문에 조심을 할 수밖에 없겠지만 신라는 일방적으로 내린 결정이 아니오? 그 결과가 어떤 것임을 알면서 가락국 후예로 그처럼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가 있겠소?"
우마코의 질타에 구미는 한숨을 지으며 대답했다.
"낸들 어찌 분개하고 반발심이 크지 않겠소? 이해해 주시오."
"내물계마저 구미님을 내치려 들진 않을 테니 걱정은 그만합시다."
"그렇지만 근래 내물계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문제요."
구미는 그런 말을 하고 신라 왕실은 끝내 지물촌의 임나부를 폐쇄하고 말 것이라 심각한 표정인데 우마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신라 왕실이 철제품 사교역을 없애려는 목적이 무엇이겠소? 거기서 얻는 수익은 야장들만 아니고 절반이 내물계 몫으로 돌아가기 때문이요. 그로 인해 내물계는 강력한 사병을 유지할 수가 있소. 왕실은 그걸 약화시키고자 자금줄을 차단하려는 것이요. 그런데 그걸 사교역 폐지에서 찾으려고 드니 우리로선 문제가 아닐 수가 없소."
구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일에 덕만 공주가 깊숙이 개입을 하고 있소."
"덕만 공주가 그 일에 깊숙이 개입을 하고 있다니?"
"덕만 공주는 그동안 왕실의 힘을 강화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 왔소. 그런 공주를 뒷받침하는 두 명의 무장이 있소. 김용춘과 김서현인데 거기에 더해 공주의 머리 역할을 하는 이 김춘추가 있소."
"특히 김춘추는 타국과 외교에 능해 쇼토쿠 섭정과 연대를 모색하고 있을 것으로 나는 추축이 되고 이번 일도 그 때문인 것 같소."
"나도 같은 생각이요. 신라는 내물계를 견제하는 데 쇼토쿠 섭정을 이용하려고 들고, 쇼토쿠 섭정은 대신을 축출하려는데 신라를 이용하려고 드니 양쪽은 자연히 손을 잡게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요."
구미가 내릴 결론에 우마코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동감이요. 나와 구미님도 한편이 되어 맞설 수밖에 없겠소."
그런데 구미가 갑자기 엉뚱한 말을 흘려냈다.
"대신은 앞으로 내 이름을 부를 때 거수 호칭을 붙여주시오."
"갑자기 거수 호칭을 붙이라니 왜 그러시오?"
"거수는 임나국 국왕의 호칭이 되기도 하오."
우마코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듯 물었다.
"거수가 임나 국왕의 호칭도 된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신라의 첫 임금인 박혁거세는 왕호가 거서간이었소. 그 뒤론 니사금이란 호칭도 여러 대를 썼고 나중엔 마립간도 있었소. 나는 임나부의 거수로 가락국을 부활시킬 왕국을 세울 야망을 품고 있소."
구미의 대답에 우마코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정색을 했다.
"구미 거수님이 그런 야망을 품고 있을 줄을 몰랐소."
"대신도 야망을 품으시오. 여왕으로부터 양위를 받을 헛꿈은 그만 접어야 하오. 앞으로 새 나라를 세우는 쪽으로 방향을 틀기를 바라오."
"내가 새로 나라를 세운다?"
"수국이 망해 가는 중원 땅엔 다시 수많은 나라들이 생겨나 각축전을 벌인다오. 그 영향은 한삼국은 물론 왜국에도 끼치게 될 것이요. 왜국에선 각처의 토호들이 세력을 키우려고 사병들을 늘리는 걸로 알고 있소."
"그러면 나는 어디서 나라를 세운단 말인가?"
"축자주는 옛 가락국 왕실의 후예와 백성들로 뒤덮여 있지 않소?"
"그건 알지만 무슨 수로 축자주에 새 나라를 세울 수가 있을까?"
"대신은 해보지도 않고 부정적인 생각부터 하진 마시오. 그곳의 많은 인총들을 백성으로 삼을 수만 있으면 왜국과 대등한 나라가 될 것이요."
우마코는 구미가 용기를 불어넣으려 듯 말하자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젠 여왕의 양위를 기대할 수가 없게 되어 스스로 나라를 세우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보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었다.
"나와 구미님은 새 나라를 세우는 일에도 협력을 하기로 합시다."
"좋소. 우리 두 사람이 목적 달성을 위해 힘을 합치고 서로가 도우면 성공할 가능성도 그만큼 커지게 될 것이니 숙의를 해나갑시다."
"구미님, 우린 먼저 철제품 사교역과 임나부 폐쇄를 막는 일부터 협력을 합시다. 그러자면 신라 왕실과 쇼토쿠의 협력을 막아야 하오. 우리의 계획도 거기에 초점을 맞춰 대책을 세울 의논부터 해야 하겠소."
"나는 귀국하면 내물계와 힘을 합쳐 맞설 방법을 찾겠소."
"구미님, 내물계만 의지하지 말고 협력자를 더 찾아야 하겠소."
"대신, 협력자를 더 찾는다면 그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소."
"우리의 목적과 계획은 철과 연관이 되는 데서 찾아야 하겠소. 그건 우리만의 추구가 아닌 상대 쪽도 마찬가지가 아니요? 우리가 눈을 돌릴 데는 백제밖에 더 있겠소?"
우마코의 말에 구미도 동조했다.
"좋은 생각인데 그 일은 대신께서 나서야 효과적이 아니겠소?"
"그런데 백제 또한 내부 사정이 너무도 복잡다단하오. 가잠성을 상실한 뒤 국왕과 8가 사이의 내홍이 더욱 격화되고 있어서 문제요."
"대신. 그 점을 우리 일과 결부시키는 방법도 있지 않겠소? 백제 쪽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대신이 마땅한 인물을 내게 천거해 주시오."
"나는 상좌평인 목돈과 잘 통하나 구미 거수님은 그렇지 못하오. 그러나 이번 일은 목돈과 대치되는 인물과 접촉을 해보면 어떨까 싶소."
"목돈과 대치되는 쪽의 인물은 누가 되겠소?"
"의자 왕자요. 나는 교분이 없지만 구미 거수님이 시도를 해보시오."
구미는 그렇게 하기로 대답하고 작별했다.
죽세는 귀국을 앞두고 인사차 쇼토쿠를 은밀히 방문했다.
"죽세님이 귀국하면 신라 조정으로부터 좋은 결과가 있길 기대하오."
쇼토쿠는 그런 말을 하면서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신라가 철제품 공급과 무기 공급도 늘려 줄 것을 요청했다. 왕궁의 수비 병력을 늘려서 방비를 강화시키려는 목적임을 밝혔다.
"섭정께서 수비병력을 늘릴 계획이면 무기도 공급하겠습니다."
죽세는 왜국 왕실이 처한 어려운 사정을 적극 도울 생각이었다.
쇼토쿠는 죽세가 귀국한 며칠 뒤 여왕과 의논을 했다.
"전하, 신은 세운 계획을 곧 실천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섭정은 신라와 관계를 개선해서 과인은 더 기쁠 수가 없겠네."
여왕은 쇼토쿠가 세운 계획도 성공하길 기원하는 마음이었다.
쇼토쿠는 섭정이 된 후로 가장 먼저 왕궁의 수비병들을 교체할 계획부터 세웠다. 그 이유는 수비병의 대부분이 우마코의 영향력 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여왕의 안위와 직결될 문제라 상대적으로 열세인 고구려 계로 채워 균형을 잡을 생각이었다.
"과인은 왕궁의 수비병보다 대신의 사병들이 더 많은 게 걱정일세."
"전하, 신도 그 문제부터 해결할 계획입니다."
"그게 쉬운 일일까?"
"토호세력을 복속시키면 우호 세력을 두텁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수비병을 늘리면 재정적인 부담이 큰 것이 문제가 되겠네."
"그 문제는 철제품 사교역 폐지와 관교역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섭정은 대신의 반발이 커질 것도 대비를 해야 하네. 나는 그에 대한 대비책을 먼저 세우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일세."
"당분간은 대신이 눈치를 못 채게 은밀히 추진을 하렵니다."
"섭정, 주의에 주의를 더 할 것을 재삼 당부하겠네."
"전하, 신은 건의를 드릴 게 있습니다."
"어떤 건의인가?"
"국사 편찬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국사를 편찬하다니?"
"국사 편찬은 국체 확립의 기본입니다. 신은 국사 편찬을 통해 신하들과 토호들이 국가의 체계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그래야만 왕실의 정통성을 확립할 수가 있고 중앙집권을 강화시켜서 왕조의 안정을 다지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왜국의 국사(國史)를 최초로 편찬하려는 쇼토쿠는 그 일을 위해 이미 식자(識者)들과 의논을 했고 도움도 받기로 되었다.
"전하, 처음엔 별 관심이 없던 신하와 토호들이 점점 호응하는 쪽으로 기울어 다행입니다. 그 이유는 가문의 격을 높이는 데 이용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열기가 높아질수록 왕실의 권위도 높아지게 됩니다."
여왕은 이튿날 바로 국사 편찬을 공표했다. 그런데 의외로 환영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저의를 의심하는 우마코는 반대만 할 수도 없어 일단 궁궐로 들어가서 여왕과 함께 있는 쇼토쿠에게 물었다.
"섭정은 갑자기 국사를 편찬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국사 편찬은 왕실의 중앙집권을 강화시키려는 데 있습니다."
"국사를 편찬한다고 중앙집권이 강화될 수가 있겠는가?"
"토호들은 가문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적극 참여할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왕실의 입지 강화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마코는 쇼토쿠의 속셈을 알만해서 이번엔 여왕에게 물었다.
"전하께선 국사 편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여왕은 자기도 모르게 쇼토쿠가 한 말을 대신했다.
"토호들을 복속시켜 수비 병력을 늘이는데 도움을 얻을 생각이요."
"수비 병력의 증원은 재정을 고려할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과인은 앞으로 병력을 동원하려는 대신에게도 도움을 주려고 하오."
"전하, 제가 병력을 동원하는데 도움을 주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대신은 신라 사신에게 군사행동을 취하겠다는 공언을 했지 않았소? 과인은 왕실도 병력을 내야 하므로 그에 대비를 하려는 것이요."
"전하, 그러면 국사 편찬은 병력 동원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까?"
우마코의 질문에 쇼토쿠가 대답을 했다.
"신하들과 토호들은 자기네 가문의 격을 높이고자 조정에서 요구할 병력 동원에 참여도가 클 것으로 기대를 하게 됩니다."
쇼토쿠의 대답 속엔 왕실에 대한 우마코의 압박을 견제하겠다는 의미도 깔려 있었다. 그것을 아는 우마코는 첩첩산중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군?"
우마코는 애매한 대답을 하고 고민에 잠겼다. 여왕이 신하와 호족들에게 가기(家記)를 적어 내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그걸 따르긴 따라야 하는데 자신은 내키지가 않을 일이었다.
"섭정, 내가 망설이게 되는 이유는 우려되는 점이 있기 때문일세."
"대신께선 어떤 점을 우려하시기에 그러십니까?"
"신하와 호족들이 각자 가문의 격을 높이려고 들게 뻔하네. 그러므로 없는 사실도 꾸며내고 행적을 높이려고 들 게 큰 문제일세."
"대신께서 우려하실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행적의 사실여부를 놓고 여러 학자들이 검증해서 진위를 철저하게 가리게 만들려고 합니다."
쇼토쿠의 대답에 여왕은 우마코를 한번 떠보려고 들었다.
"대신의 선조는 본래 백제인으로 알고 있소. 그러나 증조부 때 가락국으로 옮겨 철제품 교역에 종사했고, 가락국들이 망할 땐 왕족들을 따라서 망명을 해왔소. 그러므로 어느 가문보다 기록할 게 많겠소."
우마코는 고개만 끄덕인 뒤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속으로 못마땅해서 혀를 찼지만 여왕이 자신의 병력 동원에 도움을 주겠다는 말에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신라 공격에 동원할 병력을 생각을 하면 긍정적인 면도 있었고, 자신도 가문의 격을 높이기 위해 국사편찬에 참여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왕은 우마코가 궁궐을 나가자 쇼토쿠에게 물었다.
"섭정, 국사 편찬에서 다른 부작용은 없겠는가?"
"전하, 부작용보다 긍정적인 면이 큽니다."
"어떤 점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가?"
"요즘에 신하들과 토호들은 각자 세력 불리기 경쟁이 심해졌습니다. 때문에 백성들의 어려움도 커지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여러 세력 간의 합종연횡이 일어나 시국이 어수선해지고 있습니다. 신은 국사 편찬으로 그걸 어느 정도 수그러들게 만들 계획입니다."
"과인은 섭정의 말을 듣고 이해가 잘 되질 않네."
"전하, 국사 편찬을 하면 부작용이 따를 수도 있겠으나 왕실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는 결과를 낳을 수가 있음으로 득이 큽니다. 특히 한삼국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은 출신 국끼리만 뭉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앞으로 한삼국 쪽 유이민은 더욱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빨리 왜국 백성으로 동화시키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국사 편찬은 한삼국 출신들의 계통을 가리고 성향을 파악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과인은 이제야 이해가 되네."
"전하, 신은 특히 고구려 계를 포섭하는데 힘을 쓰려고 합니다."
"과인은 그보다 토호들의 대한 대책을 세우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신도 그 점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당분간은 토호들 간의 각축을 조장할 정책을 쓰려고 합니다. 특히 백제와 신라 계 백성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고구려 계 백성들은 이용하려고 합니다. 때문에 이번에 수비대장을 고구려 장수로 교체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왕은 쇼토쿠의 대답에 무겁게 고개만 끄덕였다.
"아무튼 대신의 반감에 각별히 신경을 써주기 바라겠네."
"전하, 신도 유념을 하겠습니다."
이때 집으로 돌아간 우마코는 동생인 마리세를 불렀다.
"대신, 철제품 사교 폐지에 대한 무슨 대책을 세우셨습니까?"
"나는 그 점에 대해선 별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별 문제로 생각을 않으시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마리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인데 우마코가 물었다.
"마리세, 너는 눈도 귀도 없는 자이다."
"대신, 무슨 이유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너는 쇼토쿠가 궁궐 수비병들을 교체하고 있는 걸 알고 있나?"
"저도 이름 없는 무장이 새로 수비대장이 된 것에 의아함을 느낍니다."
"새 수비대장은 안좌라는 자로 담징 스님이 천거한 자다."
"쇼토쿠가 고구려 계 수비병 숫자를 늘릴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건 우리에게 여간 큰 위기가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마리세는 놀람보다 의아한 표정만 지었다.
안좌(安佐)는 담징 스님이 왜국에 왔을 때 행자(行者) 스님으로 따라왔던 청년이었다. 안좌는 검술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 때문에 쇼토쿠는 궁궐 수비병에 넣어서 자신의 호위 임무를 맡겼다.
"저도 안좌가 섭정의 심복이라 크게 쓰일 걸로 짐작은 했습니다."
"우린 뒤늦게나마 급히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대신께선 안좌에 대한 대책을 세우겠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조무래기한테 신경을 쓰지 않는다. 신라에 대한 대책이다."
마리세도 그 대답에 걱정이 되었다. 형이 신라 사신에게 군사작전을 불사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은 것을 모를 사람이 없었다. 또 조정의 세력 판도가 복잡해져 쇼토쿠를 견제하기도 더욱 쉽지도 않게 되어 갔다.
"대신께선 연회장에서 신라에 군사작전을 펴겠다는 공언을 하셨는데 제로선 무리라는 생각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대신은 그보다 섭정에 대한 대비책이 더 급하게 되었으므로 그쪽에 신경을 쓰셨으면 합니다."
"내 체면은 이래저래 말이 아니게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나는 침공을 앞세워 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 그 일을 위해 먼저 대형 선박을 여러 척 건조하는 계획을 착수하려고 한다."
"대신께서 꼭 신라 원정을 하셔야만 하겠습니까?"
"나는 원거리 교역에 나설 준비를 하기 위함이다."
"갑자기 원거리 교역이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앞으론 철제품 교역만으론 큰 수익을 낼 수가 없게 되었다. 우리도 지방 토호들 중에서 철광산 개발에 나선 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중에는 소규모 생산을 시작한 자도 있다."
"대신, 아직은 거기에 기대를 할 수가 없음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나도 그걸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점점 더 늘어나게 되면 신라는 아국에 철정을 팔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대신의 그 말씀엔 저도 동감입니다."
"철제품 수입을 다변화해서 신라에 의지하는 걸 벗어나련다."
"타국과 교역에 나설 생각이십니까?"
"앞으론 각국의 특산품을 취급해 큰 수익을 내고자 한다. 때문에 원거리 교역에 투입시킬 대형 선박 건조에 착수를 할 생각이다."
우마코는 그로부터 며칠 뒤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는 안예국(安藝國)의 국주(國主)인 가벤(河邊)을 불렀다. 그에게 큰 함선 10여 척을 건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가벤은 명령을 받고 곧장 쇼토쿠를 찾아가 그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쇼토쿠와 무슨 숙의를 긴 시간을 나누었다. 그로부터 보름쯤 지나서 가벤은 우마코를 찾아갔다.
"가벤, 일은 시작이 되었는가?"
"배를 건조하자면 벌목부터 해야 됩니다."
"그건 당연한 말인데 벌목은 잘 되고 있는가?"
"아직 시작을 못했습니다."
"왜 시작을 못했다는 말인가?"
"벌목 허가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건 내가 책임을 지겠으니 당장 가서 벌목을 시작하게."
우마코는 호통을 치듯 쫓아 보냈는데 며칠 뒤 가벤이 또 왔다.
"이번엔 무슨 일로 왔는가?"
"벌목을 시작했으나 잘 되지가 않습니다."
"왜 잘 되지가 않는다는 말인가?"
"그 이유는 인부들이 산으로 들어가서 나무를 베기 시작하면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을 내리칩니다. 그로 인해 인부들은 겁을 먹고 중단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벼락을 내려쳐 중단을 할 수밖에 없다고?"
"인부들은 두려움에 차서 산에 들어가려고 하질 않습니다. 모두는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여 아예 나무를 벨 엄두를 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산에 제사를 지내고 하도록 하게."
"그렇지 않아도 폐백을 바치고 제사도 지냈습니다. 그러나 벌목을 시작하면 멀쩡한 하늘에서 어김없이 벼락을 내리칩니다."
우마코는 미심쩍은 표정인데 가벤이 말을 이었다.
"저는 할 수 없이 하늘을 향해서 크게 외쳤습니다."
"뭐라고 외쳤는가?"
"벼락의 신이여, 일을 못하면 저는 대신의 명을 어기게 됩니다."
"가벤, 거기서 왜 내 이름을 쳐든단 말인가?"
"저는 대신의 명을 받고 하는 일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벌채 허가를 낸 분은 전하이시다. 마땅히 전하의 이름을 대야 한다."
"대신께선 왜 전하를 이름을 거론하려고 하십니까?"
"가벤, 배를 건조하려는 것은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이다. 모든 것은 전하를 위해서 하는 일이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간에 저는 인부들에게 나무를 벨 것을 다그쳤습니다. 그러나 일만 시작하면 뇌성벽력을 물론 억수처럼 비까지 쏟아져 내립니다. 그럴 때마다 인부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쳐버리는 일이 되풀이됩니다. 그러니 저로서도 더는 일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벌목을 못하겠다고?"
"저는 하늘을 향해 이렇게도 빌어 받습니다. 벼락 신이여 제가 다치는 것은 괜찮지만 인부들이 다쳐선 안 되므로 부디 그쳐 주십시오. 그렇게 빈 뒤 일을 시켰더니 이번엔 벼락이 아닌 또 다른 일이 일어났습니다."
"또 다른 일이 일어나다니 그건 또 무엇인가?"
"나무를 베어놓으면 이내 썩어 문드러져 목재로 쓸 수가 없습니다."
"베어 놓은 나무들이 금세 썩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대신께서 제 말을 못 믿으시면 직접 가서 확인을 해주십시오. 만약에 썩지 않은 나무를 골라 주시면 그것을 목재로 다듬겠습니다."
"이런 미친놈을 보겠나? 그 아가리를 찢어놓기 전에 당장 꺼져!"
가벤은 호통을 듣고 꽁지가 빠지게 도망을 쳐버렸다.
우마코는 분한 생각보다 가벤에게 어떤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다가 문득 쇼토쿠를 머리에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배후에서 농간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쇼토쿠, 내 일을 계속 방해하다간 목숨을 잃게 된다!"
우마코는 중얼거리고 으드득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