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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나라 45. 진명

45. 진명

by 정완기

45. 진명(盡命) (618)


서라벌 궁궐 안은 봄 색이 짙어졌다.

진평왕과 마야부인은 꽃들이 만발한 정자에서 누굴 기다리는 듯 마주 앉아 있었다. 왕비는 꽃들을 바라보다 나직한 한숨을 흘려내었다.

"부인, 웬 한숨을 쉬시오?"

"폐하, 올해도 흐드러진 꽃들을 대하자니 마음만 울적해집니다."

"꽃들을 보면서 왜 마음이 울적하단 말이오?"

"금년에 덕만의 나이가 몇인지 아십니까?"

"서른다섯인가? 여섯인가?"

"서른여섯인데 배필이 없이 저대로 지내고 있으니 그렇지요."

왕비의 말에 국왕은 굳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부인은 내 뜻을 그렇게도 못 헤아리시오? 덕만은 열 아들 부럽지가 않은 공주요. 보위를 잇고 나서 배필을 맞아야 하오."

국왕 내외는 아들이 없고 공주만 셋 두었다. 장녀는 덕만(德曼), 차녀는 천명(天明), 막내는 선화(善花)이다. 그중 천명은 삼촌인 김용수(金龍樹)와 혼인해서 김춘추를 낳았다. 선화는 백제국 무왕과 혼인을 했지만 일찍 타계를 하고 말았다.

신라의 김씨계 왕실은 미추왕(味鄒王)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중엔 내물계(奈勿系)가 여러 대를 이어갔다. 그러다 진흥왕(眞興王) 대에 와서 미추계로 다시 바뀌게 되고 지금에 이르렀다.

진흥왕의 왕비인 사도(思道)부인은 장자인 동륜(胴輪)이 일찍 죽어서 차자인 사륜(舍輪)이 즉위하게 한니 진지왕(眞智王)이다. 그런데 중뿔난 데다 독선이 심한 사도부인은 왕이 황음(荒淫)하단 이유로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내몰고 동륜의 아들인 진평을 올렸다. 그리고 왕의 아들인 용수(龍樹)와 용춘(龍春)에게선 왕위 계승권을 박탈시켜 놓았다.

그런데 진평왕은 왕자가 없어 후사 문제를 대두시켰다. 용수와 용춘은 계승권이 없어 보위에 오를 수가 없자 내물계로 넘어가게 될 판이라 왕은 덕만 공주로 하여금 잇게 할 마음을 먹었다.

때문에 덕만은 어려서부터 사내 옷을 입게 하고 왕도(王道) 수업을 시켰다. 덕만도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 보위 승계에 대한 강한 집념을 드러냈다. 때마침 여왕(女王)이 통치하는 왜국은 비약적인 국가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진평왕은 그에 힘입듯 덕만이 보위를 잇게 할 정지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왕실의 본궁(本宮)을 위시해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양궁(梁宮), 석탈해(昔脫解)의 본피궁(本彼宮), 내물계(奈勿系) 김씨의 사량궁(沙梁宮)을 대대적으로 수리했다. 박씨와 석씨 계의 환심을 살 목적임을 아는 내물계는 여간 못 마땅하게 여기지 않았다.

국왕 내외가 있는 정자로 덕만과 김춘추가 다가들었다. 왕비는 두 사람이 나타나자 정자를 내려가서 꽃밭 속을 거닐었다.

"함께 들 왔군!"

"폐하, 들릴 말씀이 있습니다."

덕만의 대답에 국왕이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가?"

"화랑도의 주형을 바꾸려고 합니다."

"주형을 바꾸다니 김유신이 낭도들을 잘 이끌지 못해 그러는가? 정히 바꿔야 한다면 부제인 춘추가 그 자리를 이어 받으면 되겠군?"

"주형 자리를 내물계로 넘기려고 합니다."

"주형 자리를 내물계로 넘긴다? 대체 그럴 이유가 뭔가?"

"폐하, 화랑도의 단합과 조직을 강화시키기 위함입니다."

"화랑도의 단합과 조직을 강화시키는데 주형을 바꿀 필요가 있다?"

국왕이 의아해하자 덕만은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화랑도는 현재 김유신이 주형(主兄)이고 김춘추는 차석인 부제(副弟)였다. 덕만은 그동안 김유신을 앞세워 화랑도의 조직을 장악하고 운영에 적극 개입해 왔다. 장차 화랑도를 자신의 호위 세력으로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그 이유는 김유신이 내물계로부터 경원을 당하는 처지라서 어려움이 크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국왕은 설명을 듣고 나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짐도 덕만이 화랑도를 장악하는 걸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주형을 내준다고 해서 내물계의 협조를 얻는 게 쉽겠는가?"

"그 문제를 해결코자 춘추와 함께 사전 정지작업을 해 왔습니다."

"그럼 주형 자리엔 누굴 새로 앉힐 생각이냐?"

"후직 공의 아들인 보종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덕만은 대답하고 이미 보종(普宗)의 동의를 얻었음도 밝혔다.

"덕만은 보종의 어떤 면을 보고 주형 자리에 앉히려는가?"

"보종은 성격이 온순하고 소극적이며 나대길 싫어합니다."

"성격이 온순하다고 해서 조종이 쉽다는 생각은 오산이 아닐까?"

"보종은 남들과 잘 어울리질 못해 내물계 안에서도 외톨이 신세입니다. 그럼에도 남들로부터 대접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은 강합니다."

덕만이 그런 점을 강조하자 김춘추도 거들었다.

"폐하, 화랑도의 군사훈련을 시킬 계획입니다."

"전시 출전을 위해 화랑도의 군사훈련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국왕이 동의하는 뜻을 표하자 덕만은 또 다른 말을 꺼냈다.

"폐하, 가잠성 회복의 숙원을 풀 때가 되었다는 판단입니다."

"짐도 그 문제의 해결을 찾고자 고심 중이다."

가잠성의 철산지는 신라가 한수유역을 아우를 수가 있게 만든 힘의 원천(源泉)이었다. 뿐더러 왕실 재정의 근간(根幹)을 이룰 중요성에 조속한 회복은 국가적인 숙원사업이었다.

김춘추가 입을 열었다.

"폐하, 신은 가잠성 공략의 호기를 맞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공략의 호기를 맞았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국을 다녀온 죽세로부터 고무적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어떤 소식이기에 고무적이라고 하는가?"

"왜국의 법륭사 주지인 승륭 법사가 한 말이 전해졌습니다. 그 말은 근래 고구려와 백제 간의 동맹은 깨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합니다."

"동맹관계가 깨졌다면 그 이유가 뭔지 아는가?"

"고구려는 수국의 침공을 겨우 벗어나게 되었으나 전 국토가 파괴된 상태입니다. 재건에 힘을 기울이려면 대내외적으로 안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왜국은 한삼국 간의 충돌을 빚게 만들려고만 합니다. 때문에 왜국의 이간질은 날로 심해지는데 백제 또한 거기에 뇌화부동을 하는 태도를 보여 고구려는 불만이 여간 크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백제가 그러는 이유는 무엇으로 보는가?"

"3년 전 백제는 아국의 모산성을 쳤습니다. 그때 왜국은 백제에 병력을 지원해 침공을 부추겼는데 또다시 전역을 부추기는 걸로 아옵니다."

"한삼국 사이에서 왜국의 이간질은 오래된 병폐고 큰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 대체 이번엔 또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모르겠구나."

국왕의 걱정에 덕만이 대답했다.

"폐하, 왜국은 아국이 공급하는 철정 가격을 내려달라고 조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려면 고구려가 신라를 침공해서 불안을 조성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원치를 않으므로 백제가 그 일을 대신 맡아주길 바라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덕만은 여제동맹이 깨지게 된 원인을 어디서 찾게 되는가?"

"폐하, 고구려는 한삼국 간의 분쟁을 부추기는 왜국보다 백제를 더 못마땅하게 여길 것입니다. 백제가 한수유역을 되찾는 전역을 일으키는 것도 바라지 않는데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여제동맹이 깨진 상태라면 우리에겐 유리한 국면이 되었다. 왜냐하면 백제는 한수유역 회복을 최대의 과제로 삼고 있는데 단독으론 어렵다. 때문에 고구려의 지원을 얻고자 동맹을 맺었던 것이다."

"폐하의 말씀대로입니다. 백제는 고구려의 태도가 달라지면 상황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고구려는 대수 전 이후로 전역을 일으킬 여력이 없어져 백제는 방향을 틀어 왜국의 병력 지원을 얻으려고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고구려는 한수 유역의 안정을 원하고 있습니다."

덕만의 말에 김춘추도 자신의 의견을 더 개진했다.

"폐하, 고구려는 한수 유역의 분쟁을 원치 않을 뿐더러 백제가 다시 차지하는 것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 관계는 느슨해진 정도가 아니라 깨진 상태입니다. 이런 호기를 잡아 아국이 가잠성 회복에 나선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입니다."

덕만은 그 말을 받아 또 다른 말을 꺼냈다.

"폐하, 주형을 바꾸는 것은 가잠성 회복을 위해서 하려는 것입니다."

"주형을 바꾸는 게 가잠성 회복을 위해서라니 그건 무슨 말인가?"

국왕의 반문에 덕만은 비로소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폐하, 저는 가잠성 회복을 계획하고 추진은 물론 전역도 진두지휘를 할 생각입니다. 성공을 거두면 그보다 큰 공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덕만의 말에 국왕은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궁극적인 목표는 왕위 승계에 있었다. 그러나 공주의 몸으론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에 자신의 입지를 다질 필요성에 그러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국왕은 적성을 띠는 덕만의 태도에 대견함과 만족감을 느꼈다.

"가잠성 회복은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나 여건이 문제로구나."

"폐하, 백제의 국왕과 내신좌평 사이엔 반목이 심각한 걸로 알려졌습니다. 백제의 내부적인 상황을 적극 이용을 해야 합니다."

"짐도 동감이나 출병엔 상당한 병력 동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내물계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것이라 문제인데 그 대책부터 세워야 한다."

"폐하, 춘추와 더불어 내물계 협조를 이끌어낼 방도를 마련했습니다."

"무슨 방도를 마련했다니?"

"먼저 병부령과 의논을 해봤습니다."

"병부령에게서 어떤 말이 나온 게 있느냐?"

"병부령도 변품 장군에게서 가잠성 회복 건의를 받았답니다. 그러나 내물계의 협조가 없으면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병부령에게 주형 자리를 내주고 협조를 이끌어내자는 제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가능성이 크겠다는 반응을 보이며 호응해 왔습니다."

"병부령이 호응을 했다?"

"폐하, 그 때문에 주청을 드릴 게 있사옵니다."

"어떤 주청인가?"

"병부령 자리도 내물계에 내주었으면 합니다."

국왕은 덕만의 말에 놀라움이 더욱 커졌다. 덕만이 사내 못지않게 궁리(窮理)가 큼은 인정을 하나 너무 나간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덕만의 곁엔 지혜 주머니와 같은 김춘추가 있다. 두 사람 사이에 깊은 의논이 이뤄진 끝에 꺼낸 계획이란 짐작이 갔다.

"짐도 국사를 보면서 내물계의 비협조로 지장을 받고 애로가 컸었다. 그런데 화랑도 주형은 모르나 병부령 교체는 함부로 할 게 아니겠다."

국왕의 부정적인 태도에 덕만은 물러서려고 하질 않았다.

"폐하, 지금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할 때입니다."

"짐도 그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죽파를 물러나게 하면 반발이 클 것이고, 그 여파는 만만치가 않다. 그 부작용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저는 이미 병부령을 이해시켜 양해까지 구해놨습니다."

"죽파가 물러나는데 동의를 했단 말인가?"

"병부령도 대국적인 차원에서 용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죽파는 대신 무슨 대가를 바라고 있을 게 아닌가?"

"폐하, 죽파 장군을 상대등으로 올려주셨으면 합니다."

"죽파를 상대등으로?"

신라 조정의 문무관 중 상대등(上大等)은 최고 관직이었다. 국왕은 그 자리를 오랜동안 비워두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 자리를 차지할 자들이 내물계에 가장 많기 때문에 정략 상 비워두고 있었다.

"덕만은 새 병부령에 마땅한 자로 누굴 의중에 두었는가?"

"알천공입니다."

"알천을?!"

알천(閼川)은 내물계의 최고 거두로 전부터 물망에 오른 자라였다. 그 때문에 국왕은 안색이 흐려졌다. 상대는 왕위를 넘볼 위치인 데다 화백회의의 구성원으로 영향력이 커서 극히 꺼릴 대상이었다.

국왕은 자신이 보위에 오를 때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때 내물계의 도움을 얻고자 밀약을 맺은 게 있었다. 그것은 진평왕의 재위 동안은 내물계만 상대등에 앉히기로 한 것이었다. 그에 따라 첫 상대등은 노리부(弩里夫)가 앉게 되었다. 그러나 국왕은 장차 노리부는 보위(寶位)를 노릴 경쟁자로 보고 그와 알력이 생길 것을 우려해 몇 년 안 가서 밀어내 버렸다. 그런 뒤로 내물계에 휘둘리지 않고자 지금까지 상대등 자리를 공석으로 놔둔 채 꿋꿋이 독주를 해왔다.

국왕은 이번엔 김춘추를 돌아다보았다.

"부제인 춘추는 주형 자리를 승계 받을 차례인데 양보를 하겠는가?"

"폐하, 신은 앞으로 기회가 많을 것이므로 기꺼이 양보하겠습니다."

김춘추의 대답에 국왕은 대견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덕만이 보위를 승계하면 그 다음은 김춘추가 잇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을 공동체나 다름이 없는 몸으로 보고 있었다.

"모든 요직을 내물계에게 독차지를 시키면 병력을 내놓을까?"

"폐하, 어떻게 해서든 병력을 내놓게 만들어 놓겠습니다."

국왕은 덕만의 남자 못지않게 큰 과단성을 대견하게 여겼다.

"다만 참신한 인재 등용에 역행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있구나."

"폐하, 파격은 이반 한번으로 그치겠습니다. 내물계의 피동성을 고쳐 놓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취할 수밖에 없는 조치입니다."

화랑도 조직의 상층부는 내물계 진골(眞骨)들의 독차지였다. 때문에 내물계의 협조가 없이는 운영이 어렵고 단결력의 약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국왕도 화랑도의 단합과 활력을 불어넣고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선 한 번쯤 파격적인 조치를 취할 필요성을 느꼈다.

덕만은 내친김에 또 입을 열었다.

"폐하, 소청이 하나 더 있사옵니다."

"또 무슨 소청이냐?"

"전에 가잠성 성주였던 찬덕을 추증해 주셨으면 합니다."

"찬덕은 가잠성을 함락 당하게 만든 당사자가 아닌가? 성을 빼앗기게 만든 장본인에게 어찌 관직을 추증할 수가 있단 말인가?"

"폐하, 가잠성이 함락된 원인은 병력 부족에 있었습니다. 찬덕은 중과부적인 병력으로 매우 불리한 상황 속에 투혼을 다해서 싸웠습니다. 그런 사실들을 증언하고 있는 자들은 많습니다."

"이제 찬덕에게 추증을 시켜 뭘 하자는 것인가?"

"찬덕의 공적을 높여 도움을 얻고자 함입니다."

"찬덕의 공적을 높여 무슨 도움을 얻는단 말인가?"

"육두품 낭도들의 호응을 얻고자 합입니다."

"육두품의 호응을? 찬덕이 죽을 때 품계는 무엇이었는가?"

"급찬이었습니다."

"급찬에 1급을 더하겠다."

"폐하, 한 급을 더 높여 일길찬을 제수해 주십시오."

"일길찬은 너무 과한 추증이 아닐까?"

9급인 급찬(級湌)에게 2급을 올려 일길찬(一吉湌)으로 추증하는 것은 너무 과했다. 그러나 덕만은 그렇게 하면 화랑도의 주축인 낭도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는데 도움이 됨을 강조했다.

"폐하, 화랑도는 진골들만 판을 치고 6두품 이하 낭도들은 주눅이 들어 지내는 형편입니다. 6두품 이하의 사기를 북돋아 줄 필요성이 매우 큽니다. 찬덕의 아들인 해론의 직급을 올려 사기를 높이려고 합니다."

"해론에겐 어떤 직급을 제수하란 말이냐?"

"대나마입니다."

"찬덕의 아들인 해론은 화랑도의 검술교관이 아닌가?"

"폐하, 이번에 해론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길 계획입니다."

덕만은 그런 대답을 하고 해론이 처한 입장도 설명했다.

해론은 가잠성을 잃은 뒤로 의기소침한 처지로 지내는 형편이었다. 가잠성 방어를 못한 부친은 자책감에 자결을 했는데 자신은 큰 부상을 입고 적장의 딸로부터 치료를 받은 소문도 났기 때문에 화랑도 내부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는 몸이 되었다.

며칠 뒤 국왕은 인사(人事)를 단행했다. 알천은 병부령, 보종(普宗)은 화랑도의 주형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내물계는 크게 고무된 분위기 속에 좌장(座長) 격인 후직(后稷)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하나 같이 알천을 향해 축하의 말들을 했다.

"알천 공께서 병부령에 오르심을 축하드립니다."

"내물계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경사를 맞게 되었습니다."

"아무렴! 내물계의 쾌거가 아닐 수가 없소."

모두가 기뻐하는 가운데 비담(毗曇)이 한 마디를 툭 던졌다.

"폐하가 모처럼 쓴 선심에 마냥 들 기뻐할 일만은 아닐 듯싶습니다."

"마냥들 기뻐할 일만도 아니라니?"

"폐하가 선심을 쓴 데는 다른 의도가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번 인사를 놓고 면밀한 검토와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 말에 좌중은 조용해졌고 후직이 비담에게 물었다.

"알천공은 자격이 충분하신데 무슨 검토와 대책이 필요하단 말인가?"

"폐하는 병부령 자리를 내주고 싶어서 한 인사가 아닙니다."

비담의 대답에 몇 사람은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폐하가 보위에 오를 때 일을 우린 돌이켜 봐야 합니다. 보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내물계의 지원을 받은 때문입니다. 그 대가는 제위를 하는 동안은 상대등 직을 내물계가 독점하기로 밀약이 있었지만 지키질 않았습니다. 우린 언제까지 불만과 불평만 하면서 지낼 것입니까?"

모두는 비담의 말에 크게 호응하는 반응을 보였다. 특히 상대등에 오를 1순위 후보인 후직은 좀 다른 생각인데 알전이 입을 열었다.

"모든 게 만시지탄이요. 그러나 상대등 직은 앞으로 화백회의에서 폐하의 후사 문제를 논의하는데 있어 영향력이 커서 승산이 있겠소."

알천의 말에 후직도 크게 동의하듯 고개들을 끄덕이며 말했다.

"이번 인사는 내물계를 회유할 목적이나 나는 동의하게 되오. 다만 이번 일로 폐하는 공주에게 보위를 물릴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나 다름이 없겠소. 거기엔 말려들지 않으면 될 것이요."

그러나 비담은 강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신라는 여인이 보위에 오른 전례가 없고 국인도 원치를 않습니다."

"옳소. 마땅히 경계해야 할 일이요."

"공주가 보위에 오르는 건 기필코 막아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동조로 좌중이 분분해지자 비담은 힘을 얻었다.

"그러나 폐하께서 공주를 보위에 올릴 계획은 오래전에 세우셨습니다. 때문에 왜국 여왕이 정사를 잘 본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말도 안 될 소리요. 화백회의에서 적극 막아내야만 하오."

"내물계는 더욱 단합하고 세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소."

저마다 한 마디씩 하느라 장내는 매우 소란스러워졌다.

신라는 국초(國初)에 6촌의 촌장(村長)들이 박혁거세를 국왕으로 추대했다. 화백회의는 그것으로 시작되고, 박(朴), 석(石), 김(金)씨가 번갈아 왕위를 잇는 전통을 확립시켰다. 현재 화백회의 구성원은 국왕의 동생인 국반(國飯)을 위시해 내물계의 후직과 알천, 박씨는 죽파, 석씨는 변품, 가락계의 서현 등 총 6명이었다. 그중 김씨는 왕실과 내물계로 갈렸고, 박씨와 석씨계는 중립, 가락계는 왕실 편이었다. 만약에 중립인 죽파가 물러나고 알천이 병부령이 되면 내물계는 더욱 힘을 강화시킬 수가 있어 들뜬 분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비담은 부정적인 말을 또 꺼냈다.

"덕만 공주를 얕보다간 큰 코를 다칠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 말에 후직이 물었다.

"덕만 공주를 얕보다간 큰 코를 다치다니? 그건 무슨 뜻인가?"

"이번 인사는 공주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공주가 조정의 인사에 개입을 하다니? 언제부터 그랬단 말인가?"

"후직공께선 오래된 일임을 모르셨단 말씀입니까? 병부령과 주형을 바꾸게 된 것도 덕만 공주의 제안과 추천에 의한 일로 알고 있습니다."

"공주가 뭣 때문에 내물계를 추천하겠는가?"

"거기엔 다른 큰일을 추진하기 위한 목적이 깔려 있습니다."

"다른 큰일을 추진하다니 그게 뭐란 말인가?"

"요즘에 서라벌은 가잠성 회복 전에 나선다는 소문이 돕니다."

"가잠성 회복 전에 나선다는 소문이?"

"출병을 하게 되면 폐하는 내물계에 상당한 병력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쪽에 병부령과 주형 자리를 내주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를 요구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알천은 비로소 알만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린 병부령과 주형 자리를 내칠 수는 없다. 일단 돌아온 자리는 받고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후직도 그 말에 호응하는 태도를 보였다.

"나도 병부령과 주형직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 자리를 잘 해내고 이용을 하기에 따라 득이 되면 되었지 손해가 될 것은 없겠다."

비담은 여전히 불만스런 태도로 말했다.

"폐하는 무리한 병력을 요구할 게 분명하실 테니 그게 문제입니다."

"병력을 내놓더라도 전군의 지휘권은 병부령이 갖지 않는가?"

후직의 대답에 비담은 또 부정적인 대꾸를 했다.

"병부령이 병력을 지휘를 해도 폐하의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비담은 그런 말을 하고 우려되는 점을 또 하나 더 들었다.

"공주가 화랑도에 대한 장악력을 키우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앞으로 주형은 공주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고 후직도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나도 공주가 그동안 화랑도에 깊이 관여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국사에까지 깊숙이 간여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알천은 비담을 나무라고 나섰다.

"비담, 추측만 함부로 말하지 말고 구체적인 증거를 대봐라!"

"추측이 아닙니다. 폐하는 지난해 말 김호림을 병부령으로 삼겠다는 뜻을 밝히신 건 모두가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알천공으로 바뀌게 된 것은 공주의 개입이 아니곤 일어날 수가 없는 일입니다."

비담의 말에 많은 사람들이 수긍을 하는 빛을 보였다. 그러나 알천은 흔들리는 좌중의 분위기를 잡으려 듯 또 반박했다.

"비담, 그대는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사람이다."

"제가 모르는 게 대체 뭡니까?"

"내물계는 조정에서 아무런 힘을 못 쓰는 처지에 놓였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선 많은 고위직을 맡을 필요성이 있다. 그대는 병부령과 주형이 매우 중요한 자리임을 몰라서 그러는가? 우리가 그 직분을 충실히 수행해 내게 되면 내물계의 힘도 따라서 커지게 된다."

후직도 내분이 일어나는 걸 막고자 입을 열었다.

"일단 모두가 냉정해지길 바라오. 나는 이 일이 왜국을 다녀온 죽세의 보고를 받고부터 비롯되었고 가잠성 탈환 전역을 거론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오. 아마도 박씨와 석씨계는 폐하의 설득에 호응을 하게 되었을 것이요. 전역이 기정사실화 되면 내물계만 반대를 할 수는 없소."

좌중은 그 말에 수긍하는 태도가 되었다. 국인들 사이에 가잠성 회복을 바라는 공감대가 너무 컸다. 그 일은 거국적인 단합에서만 가능한 일임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물계만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일 경우 큰 지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때문에 국왕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그 대신 챙길 건 모두 챙기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는 쪽을 결론을 냈다.

어느 날 김유신의 집에선 연기가 꾸역꾸역 치솟았다.

벌써부터 사람들의 입에선 김유신이 여동생 아지(阿之)를 불태워 죽인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데 드디어 일이 터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들 때문에 큰 관심과 안타까운 심경들이었다.

아지가 김춘추의 애를 뱄기 때문이라는데 사실의 진위를 아는 사람도 거기에 음모가 깔렸음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더욱이 그 배후에 덕만 공주가 있고 김유신이 지시대로 따르는 시위를 하는 것이었다.

덕만은 김춘추와 김유신 간에 동맹을 맺을 필요성에 정략결혼을 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춘추는 이미 장가를 들고 하희(夏嬉)부인과 사이에 딸을 둘 두고 있었다. 아들이 없음을 핑계로 재혼을 해야 한다는 연극을 꾸몄고 하희부인은 강제로 이혼을 당했다. 머리를 깎은 그녀는 비구니(比丘尼)가 되어 절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각본에 따라 김춘추와 아지는 부부가 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김유신은 해론을 자기 집으로 오게 불렀다.

해론은 김유신의 집으로 가면서 지난날 아지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신분이 달라 문희와 혼인을 포기했다. 그리고 김유신의 부친이 주선한 중매로 다른 여인과 혼인하여 아들을 두었다.

김유신은 술상을 차려놓고 해론을 맞아주었다.

"해론, 얼마 전 우리 집에서 일어난 일로 매우 놀랐겠지?"

해론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춘추공의 부인께선 절로 들어가셨다는 말을 들었네."

김유신은 그 말을 못 들은 척 화제를 돌렸다.

"나는 주형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네."

"유신, 갑자기 무슨 소린가? 매우 섭섭하겠네."

"섭섭할 게 없네."

"자넨 웬 술상까지 차려놓고 무슨 일로 날 보자는 것인가?"

"자네에게 해줄 중요한 말이 있기 때문에 보자고 했네."

"내게 할 중요한 말이라니 무엇인가?"

"아버님이 자넬 금산 당주로 천거하셨음을 알려주려고 하네."

"날 금산 당주로 천거를 하셨다고?"

"자네가 의기소침하게 지내는 걸아시고 걱정 끝에 의욕을 불러일으켜 주고자 병부령께 천거해 이뤄진 일일세. 나는 축하 술상을 차렸네."

해론은 뜻밖의 말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고맙네만, 가잠성 회복에 나선다는 소문이 도는데 사실인가?"

"사실이고 그 때문에 자네의 직급을 높여 금산 당주로 삼게 하셨네."

김유신의 대답에 해론은 얼굴이 약간 밝아지며 물었다.

"내겐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이 아니나 금산 당주가 되면 가잠성 출전에 참가를 못하게 될지도 몰라서 걱정이네."

"해론, 출전을 못하다니 무슨 소린가? 금산 당주로 많은 병력을 지휘할 수가 있게 되었네. 자넨 이삼일 안으로 신주정으로 가게 되었네."

"유신, 내가 신주정으로 가게 된다고 했는가?"

"자넨 당주로 직급이 높아져서 변품 장군이 참모로 발탁하셨네. 앞으로 가잠성 회복작전에서 선봉에 세우게 딘 걸로 알려져 있네."

해론은 흥분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자신에게 그런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 기쁨으로 목소리마저 떨려져 나왔다.

"유신, 마침내 나는 염원을 풀 기회를 잡게 되었네. 그런데 기쁨에 앞서 충분한 병력 동원이 가능할 수가 있을지에 걱정이 생기네."

"병부령과 주형 자리를 내물계로 넘긴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네."

그런 대답을 하고 설명을 덧붙였다.

"가잠성 회복 전에 투입할 병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덕만 공주께선 내물계에 병부령과 주형 자리를 넘기게 된 걸로 알려졌네."

김유신의 대답에 해론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충분한 병력 투입이 가능하면 탈환은 가능한 일로 보네."

"해론, 자네는 명예를 회복할 기회가 왔네."

"물론일세!"

해론은 말하고 자신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쟁터는 선악(善惡)을 구별하기가 힘든 곳이었다. 부친은 가잠성에서 전사했고 자신만이 살아 돌아왔다. 더욱이 자신은 적장의 딸에게 치료를 받은 소문도 나서 비겁자로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되었다.

김유신은 우울한 세월을 보낸 해론을 위로하고자 말을 돌렸다.

"어제 영지가 우리 집에 놀러 왔는데 많이 컸더군?"

영지(英智)는 해론의 아들이었다. 해론은 늘 어린 아들에게도 떳떳하지 못한 아비란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이번에 그런 자책감을 떨어낼 기회로 삼아야 하겠다는 생각에 두 주먹이 불끈 쥐었다.

"유신, 나는 기필코 가잠성을 되찾고 명예를 회복하겠네."

"해론, 전군님도 자네에 대한 기대감이 크실세. 나는 자네가 소원을 청취할 것으로 믿네. 공주님은 자네가 가잠성 회복에 큰 공을 세우게 되면 특별히 성주로 삼겠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들었네."

"나로선 너무도 황공한 말씀이라 부담과 걱정이 앞서네."

"해론, 부담감은 크겠지만 자네는 충분히 해낼 수가 있어!"

"유신, 그런데 또 다른 걱정이 없지도 않네."

"해론, 어떤 걱정을 말하는 것인가?"

"변품 장군께선 날 싫어하고 꺼리시기 때문일세."

"걱정 말게. 변품 장군은 자넬 참모로 발탁하기로 하셨지 않은가?"

"변품 장군께선 날 몹시 미워하시는 걸로 아는데 정말 그러실까?"

김유신은 그 점을 모르지 않았다. 변품은 해론이 양신을 신라로 데려왔고 그로인해 신임이 큰 아란도 참모가 목숨을 잃었다. 때문에 해론은 변품 밑으로 들어가길 꺼려하는 것은 당연했다.

"해론 가잠성 회복전은 여간 큰 대작전이 아닐세. 변품 장군은 폐하로부터 총 지휘를 부여받아서 책임감이 여기 크시지 않을 것일세. 때문에 전역에서 자네에 대한 기대감이 클 수밖에 없네. 그에 부응을 하자면 자네는 누구보다 적극성을 띠고 앞장을 서 싸워야 하겠네. 많은 사람들의 기대감이 클 것이나 나는 자네가 잘 해낼 것을 믿어 의심치 않네."

해론도 그 말에 변품이 자신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더라도 개의치 말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찌 되었건 간에 피맺힌 한을 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몸을 바칠 각오를 다지게 되었다.

"가잠성을 회복하게 되면 변품 장군은 병부령으로 승급하시네."

김유신의 말에 해론은 의아한 듯 반문했다.

"병부령이 되신 지 얼마 안 되는 알천공은 어떻게 되시나?"

해론의 질문에 김유신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대꾸를 했다.

"알천공은 단명으로 물러나시게 될 수밖에 없겠지."

김유신의 대답에 해론은 조정의 심한 암투야 말로 실로 무섭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자신은 가잠성 회복 전에 나설 일만을 생각할 대였다. 올 초에 타계하신 어머니께 불효자의 딱지를 떼고 어린 아들에게도 떳떳한 아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해론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아버님, 소자는 이제 치욕적인 삶을 끝내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해론은 아내와 아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신주정으로 떠났다.

변품은 뜨악한 표정으로 해론을 맞았다. 그리고 대뜸 입을 열었다.

"해론 당주, 자네가 실제로 올 줄은 몰랐다."

해론은 그 말을 듣고 아연하다 못해 섬뜩할 지경이었다.

"대장군님, 소관은 가잠성 회복전에 참가하고자 왔습니다."

"해론, 내가 그것을 몰라서 그러겠는가? 돌아갔으면 좋겠다."

"대장군님, 소관은 꼭 참전을 해야 합니다."

"그건 자네의 생각일 뿐이다. 나는 도저히 자네와 자리를 함께 할 수가 없다. 그런 내 마음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가?"

"소건은 대장군님의 심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장군이 절 참모로 발탁을 하셨다는 말을 듣고 온 것입니다."

"그건 그대를 옹호하는 쪽에서 하도 사정을 해서 나는 내키지가 않아서 수락을 했지만 역시 마주 대하게 되니 견딜 수가 없다."

해론은 그런 을을 듣고 낙담과 난감함으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소관은 대장군님이 그런 말씀을 하셔도 물러가지 않겠습니다."

"자네 마음대로 하게나!"

변품이 물러가라는 손짓을 해서 해론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장수들도 도외시하는 태도로 쌀쌀하게 대했다. 이튿날 신주정 군 중 1만 병력을 발진했다. 밤에만 은밀히 움직인 뒤 가잠성을 불시에 포위하고 곧바로 공성기를 붙여 즉각 공격으로 들어갔다.

백제군은 크게 당황했지만 상당한 대비책은 세워져 있었다. 전에 신라군이 썼던 방비책을 그대로 썼다. 성벽 위 둘레에 쌓아둔 목제에 불을 붙여 치솟는 화염이 방벽을 이뤄 신라군은 접근조차 못했다.

신라군은 진입이 어려운데다 부상자만 많이 났다. 난관에 봉착한 변품은 곁에 있는 해론에게 꺼지라고 신경질을 부렸다. 그래도 해론은 성벽 밑을 뚫어 일부를 무너뜨리고 침투할 것을 건의했다. 변품은 성벽 밑을 뚫는 작업을 즉각 시작했다. 아무런 임무도 부여받지 못한 해론은 스스로 병사들 틈에 끼어 일을 했다.

부장인 탁번(託番)은 그러는 해론에게 말했다.

"해론 당주, 솔직히 말하면 대장군은 자네를 죽이고 싶어 하신다."

"그렇다고 해도 제가 어찌 여길 떠날 수가 있겠습니까?"

"대장군은 그대 때문에 받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모르겠는가? 자넨 대장군의 예하가 되었으니 군법에 의해 반역자로 처형할 수도 있다."

"차라리 처형을 당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게 무슨 억하심정인가? 대장군의 처남은 고구려에서 처형을 당했고 아끼던 아란도 부장은 자네가 데려온 고구려인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게 원인을 제공한 자네가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못 느낀다면 대체 어느 나라 백성인가?"

"소관도 말할 수가 없는 죄송함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가잠성 회복 전에 목숨을 던져서라도 노여움을 씻어드리고 보답을 하고자 합니다."

탁번은 그 말을 듣고 돌아갔다 이튿날 다시 해론에게 왔다.

"대장군께선 해론 당주가 목숨을 던지겠다는 말을 전해 들으시고 앞으로 올 백제 원병을 책임을 지고 퇴치시킬 임무를 부여하겠다고 하셨다."

해론은 너무도 기뻐 대답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내일 서라벌에서 화랑도 병력이 도착하게 되었다. 해론 당주는 화랑도 병력을 지휘해 적의 원병이 오면 격퇴시킬 임무를 수행해 주게."

그러나 해론은 자신이 화랑도를 지휘하는 것도 화랑도가 적의 원병 퇴치하는 것도 너무도 예외적인 일이라 반신반의로 물었다.

"제가 화랑도를 지휘하다니요? 보종 주형이 용납을 하겠습니까?"

"보종 주형은 대장군께서 설득을 해서 해결을 보실 것이다."

탁번의 대답에 해론은 더 물을 수가 없었다.

"다만, 해론 당주에게 다시 확인을 하겠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가잠성 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한 말일세."

"부장님,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었습니다."

"되었네."

탁번은 그런 대답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런데 그날 서라벌에서 화랑도 5백 명이 도착했다. 이튿날은 백제의 원병 1천 명도 도착했다.

변품은 즉시 해론을 불렀다.

"백제 원병은 수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 원병은 성을 공격하는 아군의 등을 노리게 되었다. 앞뒤로 적을 두는 상황은 좋지가 않다. 해론 당주는 화랑도 5백 명의 지휘해서 적의 원병을 퇴치시켜라."

"부여하실 작전을 충실히 수행하겠습니다.

"전투의 승패는 병력의 숫자보다 사기가 좌우하게 된다. 그대는 적의 원병을 퇴치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어주길 바란다. 해낼 수가 있겠나?"

"해낼 수가 있습니다."

"전투 경험이 적은 낭도들을 격분시켜 용맹심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 때문에 나는 해론 당주를 지휘관으로 택한 것이다."

해론은 그 말에는 어떤 강박감을 느껴서 입을 열었다.

"적의 원병은 1천인데 화랑도는 5백으론 무리일 듯싶습니다."

"나도 1천 병력을 이끌고 후방에서 지원을 하겠다. 문제는 해론 당주가 살신성인의 본보기가 되어 낭도들을 크게 분발시킬 수가 있느냐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해론 당주가 공격에서 앞장을 서고 목숨을 초개처럼 던져 산화하는 모습을 보여라. 성패는 그것에서 갈리게 될 것이다."

변품은 공격에서 선두에 설 뿐만 아니라 목숨을 버리라는 요구였다.

해론은 고개만 끄덕였다. 자신은 목숨을 던지겠다는 말을 여러 번 했었다. 젊은 화랑도가 적을 제압하는 데는 격정을 불러일으킬 자극을 주기 위해 자신이 앞장을 서 자진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해론 당주만 믿겠다. 가잠성 회복의 명암이 엇갈리게 될 이번 작전의 성패는 해론 당주가 목숨을 초개처럼 던지느냐에 달렸음을 명심하다."

변품이 목숨을 던질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해론은 서운함과 슬픔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가잠성이 함락당할 때를 떠올렸다. 부친처럼 자진을 못해 수모를 당했다.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장군님의 뜻에 부응하겠습니다. 대신 말씀을 드릴 게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가잠성엔 선친의 묘소가 있습니다. 함락시키면 서라벌로 이장하게 해주십시오. 다만 제가 전사하면 이곳 벌판에 묻히게 해주십시오."

"해론 당주는 왜 이곳에 묻히려고 하는가?"

"저는 혼백이라도 이곳에 남아 가잠성을 지키려고 합니다."

해론은 출정에 앞서 보종을 만나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보종은 변품과 의논이 되었는지 기꺼이 지휘권을 넘기겠다고 했다. 해론이 미안하단 말을 했으나 보종은 전혀 섭섭한 기색이 아니었다.

"나는 해론 당주가 화랑도를 지휘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오. 부디 용맹성을 떨치는 모습을 보여서 낭도들을 분발시켜 주시오."

해론은 보종 또한 변품과 같은 말을 하자 두 사람이 자신에 요구하는 것은 진명(盡命)임이 더욱 분명해졌다. 극단적인 요구에 유감없이 없지도 않았지만 마음을 다질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해론은 화랑도 5백여 명을 이끌고 출정했다.

백제군의 원병을 지휘하는 장수는 윤충이었다. 그는 병사들의 피로를 풀 휴식을 취한 뒤 공격에 나설 참이었다. 그런데 신라 병력이 밀려들어 전투태세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윤충은 진격해 오는 신라군의 행군 행태가 어딘지 어설퍼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화랑도 깃발을 세우고 있어 정규군이 아님을 알았다. 거기다 병력이 적음에 자신감이 생겼다.

"적은 신라의 화랑도이다. 우리는 제대로 한번 본때를 보여주자."

반면에 전투 경험이 적은 화랑도는 백제군과 거리를 좁혀들게 되자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해론은 백제군과 마주 접하자 진격을 멈춘 뒤 낭도들을 돌아다보며 크게 외쳤다.

"나는 이곳을 죽을 자리로 삼겠소. 화랑도 여러분들은 내 아들에게 아비가 어떻게 싸우다 죽었는지를 말해 줄 것을 바라겠소."

화랑도는 그 말에 화답하듯 함성을 질러댔다.

"금산 당주 해론은 백제군 장수와 겨루고 싶다."

해론이 외치에 윤충도 그 말을 맞받아쳤다.

"애송이 장수가 같잖게 흰 소리를 치는데 한번 붙어보자!"

양쪽 장수들은 각자 병력들에게 돌진 명령을 내렸다.

해론은 선두에서 말을 몰아 질풍처럼 적진에 돌진했다. 양군의 접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해론은 혼자서 적진 가운데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백제군의 집중 공격을 받고 전신은 붉은 피로 물들어 버렸다.

끝내 말에서 떨어져 내렸다. 장렬한 전사는 한낱 미풍(微風)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오랜 세월의 원한과 수모의 인생을 한꺼번에 씻을 수가 있었다. 큰 자극을 받은 낭도들도 함성을 지르며 거침없이 돌진했다.

반면 백제군은 그 기세에 눌려 제대로 싸우질 못하고 뒷걸음질만 쳤다. 윤충도 더는 안 되겠다는 판단에 후퇴 명령을 내리고 말았다. 전투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해론을 위시해 많은 낭도들이 들판에 누운 시체로 변해 있었다. 화랑도가 백제 원군을 격퇴시키자 신라군은 사기가 충천해서 기승을 부리듯 성 공격에 박차를 가해 나갔다.

성 안의 백제군은 원군이 쫓겨 간 데다 신라군의 공격이 거세져서 급속도로 사기가 떨어졌다. 도망을 치는 병사들이 속출하게 되자 성주는 성을 포기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 때부터 신라군과 모두가 목숨을 건지는 조건으로 신라군에 성을 내주기로 했다.

그것으로 신라는 가잠성 회복하고 국력을 좌우할 철산지도 다시 품게 되었다. 변품은 위상이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김춘추가 반길 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이유는 화랑도의 간부들 중 내물계의 희생자가 많이 나오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변품은 이젠 자신도 큰 야망을 품을 만하다는 생각이었다. 왕자가 없는 왕실을 대신해 석씨계로 자신은 화백회의에서 왕위에 도전할 야심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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