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절규(絶叫) (617)
반란의 소용돌이는 황궁(皇宮)마저 위험한 상태로 몰아갔다.
황제는 가장 의지했던 우문술의 타계로 고립감이 컸고, 신하들 중엔 해치려고 들 자도 있어 극도의 경계심이 일었다. 신하들 또한 황제에게 언제 죽음을 당할지 몰라 피차간의 불신감만 팽배해졌다.
백성들도 황제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수국의 멸망만 바랐다. 천도 소식이 전해진 강도의 백성들도 두려움에 빠졌다. 그동안 황제가 저지른 짓과 한 말들이 그곳에도 퍼졌기 때문이다.
"백성은 단 한번 죄를 짓고 뉘우쳐도 벌을 받아야 한다. 더욱이 반군과 조금만 연관이 있어도 모조리 죽이고 마을을 불태워야 한다."
태원은 비교적 평온을 유지하는 곳이었다. 황제는 천도를 위해 병력 1만을 보낼 것을 명령했으나 이연은 동돌궐의 침입을 대비해야 한다며 거부하고 자신의 거사를 위해 장정들에게 징발령을 내렸다.
양신은 서세적과 위징을 데리고 태원으로 향하다 구려촌을 들렸다. 자신의 도주로 이밀이 구려촌에 무슨 보복을 할지 몰라 사정을 알렸다.
"얘길 들어보니 자네가 이밀의 군영을 떠난 사정은 이해가 가네."
"저 때문에 구려촌이 무슨 해를 입게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내가 감당을 해 낼 수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 대신 태원으로 가되 이연 밑에는 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게. 그리고 당분간은 구려촌엔 오지 말고 서로 연락만 취하고 기로 하세."
"이밀의 추긍을 막을 방법이 있겠습니까?"
"자네가 동돌궐로 떠나버려 인연이 끊긴 걸로 하겠네."
"알겠습니다. 저는 이번 기회에 북방과 교역을 하기 위한 근거지를 태원에 마련할 계획입니다."
"그러면 돈을 내어주겠네."
"당장은 필요하지가 않습니다. 다만 밀두도는 지니고 가겠습니다. 또 생각하는 점이 있어서 가리온을 타고 태원으로 가려고 합니다."
이튿날 다시 길을 떠나 이틀 뒤 태원에 당도했다. 이세민은 양신이 찾아오자 여간 반기지 않았다. 거기다 재사로 소문난 서세적과 위징을 데려 와서 환대를 했다. 주안상까지 차려내고 대화를 나눴다.
모두는 황제의 천도를 화제로 삼았다. 그로 인해 전개될 사태를 놓고 진지하고 폭넓은 의견을 교환했다. 서세적은 특히 황제의 천도를 놓고 강도 높은 비판을 가했다.
"천도는 도주를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위징도 그 말에 동조했다.
"천도는 사직을 보전할 궁여지책이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수조는 침몰하는 배와 다름이 없는 형세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세민은 두 사람의 부정적인 태도를 보고 양신에게 물었다.
"만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저는 천도보다 반군들의 행태를 더 지적하게 됩니다."
"반군들의 어떤 행태를 말함이요?"
"이밀의 진영에서 머무는 동안에 여간 실망이 크지 않았습니다. 세간엔 이밀을 반군들 중 가장 두각을 드러낸 존재로 봅니다만, 난세 속에서 그가 무슨 기여를 할 만한 그릇이 될지는 의문이 듭니다."
서세적과 위징도 이밀에 대한 비판을 하며 은근히 이연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세민은 그런 두 사람보다 양신에 대한 관심이 더 컸다. 얘기를 나누면서 세 사람의 성향도 파악하고 있었다. 서세적은 기개가 넘칠 장수감, 위징은 학식을 지닌 참모 감으로 봤다. 그런데 양신은 무예를 지닌 데다 사세 판단이 정확함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양신은 자신에게 질문이 많은 이세민에게 부담감을 좀 느꼈다. 무엇보다 자신의 신상에 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에 큰 의문을 느꼈다.
"만춘님은 고구려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는 처지로 알고 있소."
이세민의 말에 양신은 내심 더욱 놀라며 대꾸를 했다.
"공자님, 저는 앞으로 중원에서 터를 잡고 살고자 합니다."
"만춘님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릴 계획이요?"
"중원 땅을 근거지로 삼고 북방 교역에 나설 생각입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를 탐색하는 눈길이었다. 이세민은 가의를 통해 양신의 사정과 인성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비록 고구려에서 쫓겨난 몸이나 조국을 배격할 사람도 아니고 중원 땅에 해를 끼칠 사람도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앞으로 관계를 설정하고 교류도 해나가며 다뤄볼 생각을 했다.
"만춘님은 중원 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소."
"사람이 살기 좋은 땅으로 생각합니다."
"중원 땅에선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려고 하오?"
"저는 어디서나 불의는 배격하고 평화와 공존을 위해 힘쓰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다만 관직은 맞지가 않아 장사를 하렵니다. 장사는 북방의 유목민을 상대로 하렵니다."
"북방 유목민과 교역을 하자면 애로가 많을 것이요."
"그 때문에 공자님께 도움을 청하고 싶습니다."
"어떤 도움을 청하려고 하오?"
"태원은 북방 교역의 중요한 거점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북방을 오가며 장사를 하려는데 그러자면 태원에 근거지를 마련해야 합니다. 공자님은 그 일에 많은 편의를 봐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만춘님에게 빚을 진터라 도울 수가 있는 데까진 돕겠소."
이세민은 그런 대답을 하고 이튿날 양신을 따로 만났다.
"내가 만춘님을 따로 보려는 이유는 의논할 게 있어서요."
"공자님은 저하고 무슨 의논을 하시렵니까?"
"나는 만춘님과 상부상조하는 사이가 되었으면 하오."
"공자님,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나는 만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생각하게 되오."
"그때 저는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이제라도 사과를 드립니다."
"사과할 필요는 없소. 그땐 동돌궐로 가던 길이 아니었소?"
"그렇습니다. 말씀을 못 드릴 형편이었으나 이젠 모든 걸 밝힐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저도 공자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을 말이오?"
"공자님은 제 신상에 관해서 잘 알고 계신데 어떻게 아셨는지요?"
"만춘님은 그 점에 대해 무슨 짐작이 가는 점이 없소?"
"저는 여양 참군이셨던 가의님이 이곳에 사시는 걸로 압니다."
"바로 가의 참군이요."
"저는 가의 참군님을 만나 뵈어야 하겠는데 어디서 사십니까?"
"가의 참군은 타계했소."
이세민의 대답에 양신은 너무 놀라며 물었다.
"가의 참군님이 언제 돌아가셨단 말씀입니까?"
"금년 초에 타계했소."
"공자님, 저는 당장 가의님의 집부터 찾아가야만 하겠습니다."
"집을 모르오. 알아봐 주겠으니 하던 얘기를 계속합시다."
"그렇게 하시지요."
"나는 만춘님이 동돌궐에 갔었던 일에 관심이 크오."
이세민의 말에 양신은 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저는 양현감의 서찰을 동돌궐 칸에게 전하는 임무로 갔었습니다."
"그 서찰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소?"
"모릅니다."
"그런 뒤 만춘님은 동돌궐에서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듣고 싶소."
"저는 거기서 뜻밖의 큰 수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양신은 그렇게 대꾸하고 동돌궐에서 겪었던 일들을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이세민은 다 듣고 나서 자못 흥미를 느끼듯 물었다.
"만춘님은 그로 인해 힐리 공자와 인연을 맺은 사이가 되었군요?"
"저는 어느 정도 신임을 얻기까지 했습니다."
"힐리 공자와 그만한 친분을 쌓았다면 나도 부탁을 할 게 있소."
"어떤 부탁을 하시렵니까?"
"만춘님은 동돌궐을 한 번 더 다녀와 줄 수는 없겠소?"
"공자님, 제게 무슨 일을 시키실 게 있으십니까?"
"힐리 공자에게 전할 서찰이 있는데 내일이라도 당장 떠났으면 하오."
"서찰만 전하고 돌아오면 됩니까?"
"서찰을 전하고 답장을 받아와야 하오.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소?"
"한번 해보겠습니다."
"고맙소. 그러면 나와 약속을 해야 할 게 있소."
"어떤 약속입니까?"
"나와 만춘님이 나눈 얘긴 누구에게도 비밀이요."
"공자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 대신 나는 중원 땅에서 북방 교역에 나설 만춘님의 계획을 적극 지원하고 안전도 보장을 하겠다는 약속을 하겠소."
"공자님, 감사합니다."
"만춘님에게 그런 약속을 한 대신 요구할 것도 있소."
"어떤 요구를 하시렵니까?"
"오늘 이후로 나는 만춘님과 더는 만날 일이 없겠소."
이세민의 말을 듣고 양신은 좀 실망하며 입을 열었다.
"공자님은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만춘님도 짐작이 될 것으로 생각되오."
"저는 도무지 짐작이 가는 점이 없습니다."
"만춘님은 내 밑으로 들어올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요."
"제가 관직엔 뜻이 없음은 공자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만춘님을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을 것이요. 다만 서로 간에 믿고 나눈 약속만은 철저히 지켜나갈 것이요."
"저는 앞으로 공자님께 무슨 도움을 청할 수가 없게 되겠군요?"
"아니오. 내가 들어 줄만 하고 필요성이 있을 땐 돕겠소. 그러나 모든 청은 서세적과 위징을 통해서만 하오. 그것도 우리만 아는 일이요."
양신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공자님의 말씀을 따르고 철저하게 지키겠습니다."
이튿날 이세민은 양신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그리고 전에 양신을 처음 만났던 곳에 이르자 서찰 한통을 내주면서 말했다.
"만춘님, 일을 꼭 성사시켜 주길 바라오. 이번에 동돌궐을 다녀오는 일 역시 누구도 알게 해선 안 되오. 서세적과 위징도 마찬가지요."
"공자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여기서 작별을 드리겠습니다."
"만춘님, 일이 잘 되기만을 바라겠소."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졌다.
양신은 한번 가봤던 길이라 닷새 후 카라발가순에 당도했다. 흑발을 찾아가서 이세민의 서찰을 힐리에게 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사흘 뒤 힐리는 양신을 만나보겠다며 불렀다.
힐리는 양신을 크게 반기며 답장을 내주었다. 양신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교역을 할 구상을 밝히고 호리소코루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싶으니 도와줄 것도 청하자 힐리는 흔쾌하게 대답했다.
"어렵지 않다. 흑발과 상의해 나가도록 하게."
그런 대답과 함께 양신에게 또다시 많은 양의 금을 내주었다. 그리고 흑발로 하여금 국경까지 배웅을 하도록 지시했다.
"흑발님, 공자님은 제게 많은 금을 또 내려주셨습니다. 저로선 사양할 수가 없어 받았습니다만 이래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양신의 말에 흑발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양신님은 보상을 받을 만해서 받는 것이요. 공자님은 교역을 하려는 양신님이 장사 밑천으로 쓰게 하려고 내리신 것 같소. 나중에 돈을 많이 벌게 되면 그때 가서 공자님께 갚으면 되지 않겠소?"
흑발은 그런 대답을 하고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도 들려주었다.
동돌궐에선 수국의 반란군이 벌창을 하는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국의 반군 지도자들 중엔 동돌궐에 신속(臣屬)하고 후원을 받으려는 자들이 많았다. 자신의 일에 도움이 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이연 또한 그런 추세에 따라 신속을 맹세했을 것이었다. 더욱이 태원은 동돌궐과 국경을 접한 지역이라 거병할 때 근거지의 안전에 신경을 써야만 했다. 때문에 위험을 막을 방도를 찾고자 동돌궐에 어떤 제의를 했을 것으로 추측을 했다.
"흑발님, 수국 반란자는 동돌궐에 신속하고 뭘 요구합니까?"
"가장 많은 요구는 무기요. 이연도 잇속을 챙길 목적에 무슨 제의를 했을 것이요. 반면에 시피 칸께서도 어떤 반대급부를 요구하실 게 있으시오. 거기다 이연은 반란자들 중 가장 유력한 자이요. 복속을 전제로 어떤 후원을 바랄 게 분명하오."
양신은 흑발의 말을 듣고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은 누구나 다를 게 없지만 이연도 마찬가지란 생각이었다. 국경에 이르자 힐리가 내준 금덩이가 든 주머니를 흑발에게 내밀었다.
"흑발님, 금덩이를 잠시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양신님은 금덩이를 왜 내게 맡겨두려고 하오?"
"금은 카라발가순에 근거지를 마련할 때 쓰고자 합니다. 그곳에 교역을 위한 상관을 지르려고 합니다. 흑발님이 장소도 잡아주시고 공사를 진행시킬만한 사람도 구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흑발은 그 말을 듣고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저는 이만 헤어지겠습니다."
양신은 흑발과 작별하고 며칠 뒤 태원으로 되돌아왔다. 남이 모르게 동돌궐에서 받은 답장을 이세민에게 전했다. 그리고 숙소로 들어가자 서세적과 위징은 어디를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구려촌을 다녀왔소."
양신이 하는 말에 서세적은 의아하게 물었다.
"며칠 전 구려촌 사람이 여길 다녀갔소. 그런데 거길 갔단 말이요?"
서세적의 말에 양신은 속으로 뜨끔하면서 반문했다.
"구려촌 사람이 여길 다녀갔다고 했소?"
"구려촌 사람은 이밀이 만춘님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다는 말을 전했소. 때문에 만춘님이 구려촌에 오면 안 된다고 했는데 갔었단 말이요?"
양신은 내심 당황했지만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구려촌에 들어가진 않고 대신 산속에 숨어서 마을의 동정만 살폈소. 그랬으니 사람이 여길 다녀간 것을 모를 수밖에."
"아무튼 간에 만춘님이 돌아온 것을 공자님께 보고를 하겠소."
서세적이 숙소를 나가자 위징은 무겁게 입을 떼었다.
"만춘님도 우리와 함께 공자님을 보필했으면 좋겠는데 그리도 장사를 하고 싶소? 공자님도 섭섭한 눈치를 보이셨는데 다시 생각을 해 보오."
"내 뜻은 굽힐 수가 없소. 두 분은 공자님을 위해 내 몫까지 힘을 써주시오. 나는 두 분을 의지하려고 하니 도움을 주셨으면 하오."
양신은 그런 대답으로 얼버무렸는데 이튿날 이세민의 부름을 받았다.
"이번에 수고가 많은 만춘님에게 감사하오."
"공자님에게 도움이 되셨다면 저로선 큰 보람을 느낍니다."
"큰 도움이 되었소만 문제가 생겼소."
"어떤 문제입니까?"
"이밀이 만춘님에 대한 정탐을 하고 있소. 때문에 만춘님은 당분간 동돌궐로 가서 지내는 게 좋겠소. 내일이라도 바로 떠났으면 하오."
"공자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양신은 대답하고 물러나와 서세적과 위징에겐 당분간 동돌궐로 가서 교역 상단을 꾸리는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서세적이 물었다.
"만춘님이 황제의 명마 42 필을 탈취했다는 게 사실이요?"
"누구한테 들었소? 그 때문에 나는 명마 중 한 필을 얻게 되었소. 여기로 타고 온 가리온이란 백마가 바로 그 말이요."
서세적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라는 눈길이 되었다.
"나는 공자님께 가리온을 바칠 생각이요."
양신의 말에 서세적이 반문했다.
"그 백마를 타면 행운이 온다는데 그걸 바치겠단 말이요?"
"내 행운도 중요하나 공자님께 먼저 행운이 오길 바라는 마음이요."
서세적은 양신의 대답에 감탄하는 표정이 되었다.
"만춘님한테 여러 면에서 감복을 하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하오?"
"나는 중원 땅의 백성들이 하루속히 질곡에서 벗어나길 바라오. 그러자면 태원 자사님이 새 나라를 열어야 한다는 생각이요."
"만춘님은 당분간 동돌궐로 가서 교역에 나설 준비를 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소. 얼른 일을 마치고 우린 다시 만나길 기다리겠소."
이튿날 양신은 길을 떠났다. 가리온 대신 서세적이 마련해 준 말을 타고 갔다. 얼마쯤 가는데 뒤에서 누가 달려오며 외쳤다.
"양만춘님, 잠시 기다려 주시오."
따라온 사람은 이세민의 서사(書士)였다. 그는 주머니를 하나를 양신에게 내밀었다. 양신이 받아 들고 속을 들여다보니 큰 금덩이가 들어 있었다. 당황히 도로 내밀자 서사가 말했다.
"만춘님의 장사 밑천에 보태라는 말씀을 하셨소."
서사는 그런 말만 하고 돌아갔다.
한편 이밀은 양신이 도망친 것에 여간 분노하지 않았다. 태원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첩자를 보내 알아보게 했다. 서세적과 위징은 이연에게 붙었는데 양신은 없었다. 다만 이세민이 황제의 명마를 타고 다녔는데 그걸 양신이 바쳤다는 소문이 났다. 보복할 방법을 찾던 참이라 그 사실을 황제의 측근인 옹장에게 알려주었다.
옹장은 그 제보를 황제에게 보고했다. 황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이연에게 보낼 칙서를 썼다. 그리고 옹장이 전하게 태원으로 보냈다. 옹장은 강도를 떠날 때 마음속으로 황제와 작별을 고했다. 태원에 당도하자 이연에게 칙서를 바쳤다.
이연은 칙서를 읽어보았다.
"짐과 공은 군신 지간이나 이종(姨從) 사촌 간이요. 우린 어려서부터 우의가 매우 돈독했었소. 공은 북방을 방비하는 중책을 수행하며 짐의 각별한 신임을 받는 나라의 기둥이요. 짐은 강도로 천도를 했으나 신하들 중엔 짐의 목숨을 노릴 자가 생길 지경으로 위기에 처했소. 짐은 공과 동맹을 맺어 종묘사직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오. 공이 1만 병력을 지원해서 근위군을 강화시키면 그 지휘를 세민에게 맡기겠소. 훈구(勳舊)의 척추인 공은 부디 청을 들어주기 바라오. 끝으로 태원엔 양현감의 반역을 돕고 짐의 명마를 탈취한 구려인 첩자가 있소. 공은 구려인을 체포하고 짐을 배반하려는 옹장과 함께 처형해 주기 바라오.
칙서라기보다 도움을 청하는 사사(私事) 로운 서신에 지나지 않았다. 이연은 황제가 병력을 또 요구하자 내심 코웃음을 쳤지만 말미에 쓰인 내용엔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랑장, 이곳에 황제의 명마가 있다니 그건 금시초문인 걸?"
"자사님, 소장은 반역자 이밀의 제보로 받고 알게 된 사실입니다."
"중랑장, 명마가 여기에 있다는 게 정말 사실인가?"
"이곳에 있는 꺼우리 첩자가 세민 공자께 바쳤다고 합니다."
이연은 배석한 이세민을 돌아다보았다.
"세민아, 중랑장이 하는 말이 사실인가?"
"소자는 돈점충이를 한 필을 얻었는데 명마인 줄은 몰랐습니다."
이세민의 대답에 옹장은 뜻밖의 말을 했다.
"소장은 공자께서 명마를 타시게 된 것을 축하해마지 않습니다."
옹장의 말에 이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중랑장은 세민이 명마를 타는 걸 축하한다니 무슨 소린가?"
"소장은 일찍부터 당국 공을 흠모해 왔습니다. 세상은 공이 큰 뜻을 펼치시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소장도 공의 견마가 되고자 합니다."
이연은 칙서의 말미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중랑장이 내 견마가 되겠다면 폐하를 배신할 뜻인가?"
"소장은 강도를 떠난 순간부터 폐하의 신하가 아닙니다."
"너는 폐하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자인데 너마저 반역인가?"
이연의 반문에 옹장은 흠칫하다가 대꾸를 했다.
"반란은 전국으로 번졌고 황제는 진압할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신하들은 전부 등을 돌렸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황제를 죽이라고 외칩니다. 그런 황제를 전들 어찌 받들 수가 있겠습니까?"
"중랑장의 입에서 그런 말이 술술 나오다니 목을 쳐줘야 하겠다."
이연은 말하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노려보았다. 옹장은 뜻밖의 반응에 겁을 먹고 떨리는 음성으로 겨우 반문했다.
"당국 공께선 왜 소장을 거두시길 꺼리십니까?"
"나는 너 같은 자를 견마로 쓰고 싶지가 않다."
"당국 공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옹장, 나는 네놈이 어떤 자임을 벌써부터 잘 알고 있었다."
"공께선 절 어떻게 보시기에 그러십니까?"
"너는 전부터 폐하께 주청한 말이 있지 않는가? 내가 반란을 일으킬 것임을 단언하면서 사전에 처치해 버릴 것을 주장했었다. 그런 자가 뻔뻔하게 내 견마를 하겠다고? 그걸 믿을 수가 있겠는가?"
"공께선 너무도 터무니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 말이 터무니없다고? 네놈은 폐하께 세민이 병력을 끌고 강도로 오게 한 뒤 볼모로 잡고 날 불러 죽이라는 건의를 하지 않았는가?"
옹장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입을 다물었다.
"칙서 말미에 무슨 말이 쓰여 있는지 너는 알고 있는가?"
"폐하께서 뭐라고 써놓으셨기에 그러십니까?"
"네 놈은 배반자라고 쓰셨다."
이연은 그렇게 대답하고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옹장은 황제가 그런 말을 써놨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다면 황제는 자신이 이연에게 붙으려고 도망칠 것을 이미 눈치를 챘던 것이었다.
"폐하는 너 같은 배반자를 곁에 두면 위험하단 판단을 하신 모양이다. 때문에 네놈을 내손을 빌려서 없애버릴 방법을 택하신 것이다."
옹장은 비로소 황제의 속셈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게 들통이 난 터라 자신은 끝장이 나게 되었다. 단단한 올가미가 씌워져서 빠져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치가 떨렸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의연하게 입을 열었다.
"공의 말씀을 들으니 소장은 기쁘기 그지없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네놈이 기쁘고 부끄러울 게 무엇이란 말인가?"
"폐하에 대한 공의 충성심을 확인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충성심을 확인했다고?"
"때문에 폐하께서 소장을 이곳에 보낸 일에 보람을 느낍니다."
"폐하가 무슨 보람을 느끼신단 말인가?"
"폐하께선 당국 공의 충성심을 확인하게 되셔 안심을 하시게 되셨습니다. 소장은 돌아가서 그 점을 보고하려니 기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이연은 비웃음을 머금고 질타했다.
"강도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다!"
"왜 안 된다는 말씀입니까?"
"너는 모든 게 들통이 나자 손바닥을 뒤집듯 잘도 태도를 바꾼다."
"공의 말씀을 듣고 소장도 크게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솔직히 저는 잠시 불충의 뜻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공의 충성심에 크게 뉘우치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폐하께 돌아가서 목을 늘이고자 합니다."
"헛소린 그만해라. 나는 널 강도로 돌려보내지 않겠다."
"공께선 소장이 돌아가는 걸 무슨 권리로 막으시렵니까?"
"내가 막으려는 게 아니고, 폐하께서 원치를 않으신다. 돌아와 봤자 너는 또 무슨 농간을 부릴지 모른다. 이번 기회에 내가 대신 네놈을 처형해서 아예 후환을 덜려는 속셈을 드러내신 걸 모르겠는가?"
"공은 폐하가 그런 속셈을 드러낸 걸로 왜 단언을 하십니까?"
"내 말을 못 믿겠으면 네가 직접 칙서를 읽어 보렴!"
이연은 대답하고 들고 있던 칙서를 집어던졌다. 옹장은 그걸 주워 들고 읽어보니 말미에 자신을 처형하라는 말이 분명히 쓰여 있었다. 이젠 완전히 궁지로 몰렸다. 그러나 연극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당국 공께선 부디 오해를 거둬주시기 바랍니다."
"이 놈아, 내가 거둘 오해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폐하께서 칙서 말미에 써놓으신 것은 소장에 대한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에 대한 말이란 말이냐?"
"그건 바로 공에 대한 간접 경고입니다."
"나에 대한 간접 경고라고?"
"폐하는 공에 대한 불만을 에둘러 표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공은 그걸 깨닫지 못하셔서 그럴 뿐입니다. 공은 소장의 잘잘못을 가릴 권한도 없습니다. 소장을 죽이고 살리는 건 폐하만의 고유한 권한인데 공이 만약에 소장을 죽이신다면 그건 폐하의 재량권을 가로채는 불충입니다."
이연은 그 말을 듣고 버럭 소릴 질렀다.
"세민아, 이놈을 당장 끌어내 처형을 해라."
"아버님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세민은 대답하고 문을 확 열었다. 그러자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속절없이 끌려 나가게 된 옹장은 부들부들 떨며 애원을 했다.
"살려주십시오. 공자님께 바칠 게 있습니다."
"중랑장은 내게 뭘 바치겠다는 소리요?"
이세민의 반문에 옹장은 다급하게 대꾸했다.
"저는 모은 재산을 지니고 왔는데 전부 공자님께 바치겠습니다."
"중랑장은 내게 뇌물을 바치고 목숨을 구할 생각이요?"
"공자님, 저는 목숨을 구해야 만 사원을 풀 수가 있습니다."
"중랑장은 무슨 사원을 풀게 있다는 말이요?"
"저는 꺼우리 첩자를 잡아 죽여야 합니다."
이세민도 그게 누구인지 알만한데 옹장은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허리춤에 두른 긴 자루 같은 주머니를 풀어내어 바쳤다. 이세민은 그 속을 들여다본 뒤 물었다.
"중랑장은 이 많은 재물을 전부 내놓겠단 말이요?"
"전부 바치겠으니 공자님이 꺼우리 첩자를 체포해 처형해 주십시오."
"중랑장이 말하는 자는 혹시 양만춘을 가리키는 게 아니오?"
"그 자의 본래 이름은 양신이고 중원 땅에 와서 개명을 했습니다."
"양만춘은 동돌궐로 떠나서 지금은 이곳에 없소."
"공자께서 그 자를 불러오게 해 주실 순 없겠습니까?"
"중랑장이 원한다면 사람을 한번 보낼 수는 있겠소."
이세민은 그렇게 대답하고 주머니를 챙겼지만 옹장을 감옥에 처넣었다. 그런 뒤 사람을 호리소코루로 보내 양신에게 옹장이 태원에 온 걸 알리고 대결을 할 것도 권했다.
양신은 대결이 불가피하나 한편으로 우려되는 점이 있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이세민이 옹장을 편들면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겠다는 의문 때문이다. 그러나 사부에 관한 일을 알아내려면 만나야 만했다.
어느덧 계절은 여름이 다 가고 가을로 접어들었다.
주랑은 태원에서 2년째 살고 있었다. 그러나 양신에 관한 소식은 어디서도 듣지를 못했다. 여선은 고구려로 끌려갔고 생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남은 것은 옹장에 대한 복수뿐이었다. 그러나 가의는 생전에 양신이 찾아올 때까진 경거망동을 하지 말 것을 당부했었다.
이세민은 그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주랑이 계영과 서분에게 검술을 지도하는 걸 관람한다는 구실로 자주 찾아갔다. 그러나 속셈은 다른 데 있어 먼저 계영을 잠자리를 하는 사이로 만들었다. 계영은 이세민이 주랑도 노리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주랑 역시 이세민의 흑심을 알아 서분과 붙어 지내고 잠도 함께 잤다. 그런데 양신이 나타나자 이세민은 주랑을 못 만나게 만들려고 동돌궐로 가게 한 것이었다.
서면은 태원으로 온 뒤 가의의 천거로 관리가 되었고 재혼도 했다. 서분은 계모와 뜻이 맞지 않아 집을 나와 계영의 집에서 주랑과 함께 살았다. 어느 날 서분은 자기 집에 들렀다 부친이 계모와 나누는 얘기를 엿들었다. 뜻밖에도 옹장이 태원으로 와서 감옥에 갇혔는데 곧 양만춘과 대결을 벌이게 될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분은 그 얘길 즉각 주랑에게 전했다. 양신이 살아있음을 알게 된 주랑은 기쁨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계영에게 옹장과 대결을 벌일 장소인 청량산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계영, 자사님의 별장이 있다는 청량산은 어디에 있어요?"
계영은 그 질문을 받고 내심 당황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세민으로부터 양신에 관한 일은 일체 함구할 것을 지시받은 터였다. 양심의 가책이 컸지만 모른 체할 수밖에 없었다.
주랑은 밤새 한숨도 못 잔 채 이튿날 서면을 찾아갔다. 서면은 주랑이 꺼낸 말을 듣고 내심 여간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랑과 계영을 감시하는 역할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분은 무슨 헛소리를 하고 다니느냐!"
서면은 딸을 심하게 꾸짖고 부인을 했다. 그런데 계영이 생각을 바꾸었다. 더 이상 속여선 안 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주랑에게 청량산이 있는 곳을 알려주고 서분과 함께 떠나게 했다. 그리고 이세민과 서면에겐 그 사실을 숨겼다.
이세민은 양신이 청량산에 도착한 보고를 받자 옹장을 옥에서 꺼냈다. 옹장은 이세민의 눈치를 보며 애원하듯 매달렸다.
"공자님, 제가 강도로 돌아가게 풀어주실 순 없겠습니까?"
"중랑장은 양만춘과 대결을 원치 않았소?"
"공자님, 제가 공자님께 막대한 재물을 바친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절 풀어주시고 대신 공자님이 양신을 처형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세민은 냉랭하게 대답했다.
"나는 폐하와 부친의 명을 어기면서까지 중랑장을 도우려는 것이요. 더욱이 중랑장이 원한을 풀 수 있게 양만춘을 불러오는 선처도 베풀었소.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올 수가 있소? 중랑장은 어차피 처형을 면치 못할 몸이니 처형장인 청량산으로 가는 수밖에 없겠소."
옹장은 그래도 하소연을 하듯 또 매달렸다.
"공자님, 제가 양신을 제압하게 되면 살려주시겠습니까?"
"만약에 제압을 한다면 한번 생각을 해 보겠소."
이세민의 그런 대답을 듣고 옹장은 그런대로 고무가 되었다. 자신이 바친 뇌물의 효력을 보게 된 걸로 여겨 한 걸음 더 나가는 말을 했다.
"고맙습니다. 이왕 마음을 쓰시는 김에 고려해 주실 게 더 있습니다."
"뭘 고려하라는 것이요?"
"저는 중원 사람이고 양신은 꺼우리 첩자가 아닙니까? 공자님은 동족인 제 편이 돼주셔야 한다는 말씀을 간곡하게 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중랑장 편이 돼달라니 그건 어떻게 하라는 말이요?"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제가 꺼우리를 제압할 수 있게 공자님께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절실하게 바라는 바이니 부디 들어주십시오."
이세민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실망하며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내가 대체 중랑장을 어떻게 도울 수가 있단 말이요?"
"제가 불리할 경우 병력들로 하여금 절 거들게 해 주십시오."
이세민은 그런 대답을 듣고 욕설이 터질 뻔했다. 자신에게 재물을 바친 이유가 거기에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중원의 유명 무예가가 그 따위 소리를 하니 자존심이 여간 상하지가 않았다.
"나는 이번 대결의 승패가 어느 쪽으로 나건 상관이 없소. 다만 중랑장은 중원 제일의 무예인이요. 그런데 겁먹을 말만 하니 여간 실망스럽지가 않소. 명성에 먹칠이 되지 않게 의연히 대결에 임하시오."
옹장은 그 말에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이세민은 옹장의 처형을 청량산에서 행한다는 소문을 크게 냈다. 그러면서 속으론 자신에겐 거북한 존재로 여겨지는 양신을 옹장이 대결에서 제거해 줄 것을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드디어 병력 5백 명과 옹장을 끌고 청량산으로 향했다.
이때 주랑과 소분은 먼저 청룡산 별장에 도착해 있었다. 두 사람은 대결장이 될 연병장을 둘러본 뒤 빈 헛간 속으로 숨어들었다. 한편 그곳에 와 있던 양신은 주랑이 그곳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세민의 도착으로 별장은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날 밤에 주랑은 마당 가운데 있는 큰 나무 위로 올라갔다. 거기서 몸을 숨기고 대결을 지켜보다 양신이 위태할 경우 합세할 마음이었다.
아침이 밝고 별장 주변의 고요한 숲 속은 산새들의 지저귐으로 가득 찼다. 그런 가운데 5백 명의 병사들은 마당 둘레를 에워 쌓다. 드디어 양신과 옹장이 각기 다른 쪽에서 등장했다.
주랑은 밤새도록 나무 위에서 초조와 불안 속에 뜬 눈으로 새운 터라 심신이 매우 지쳐 있었다. 그러나 멀리서 모습을 드러낸 양신을 보고 너무도 기뻐 나무에서 뛰어내릴 뻔했다.
마당 둘레는 삽시간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양신과 옹장은 걸음을 옮겨 마당 복판으로 마주 좁혀 들었다. 양신의 걸음 거리는 민첩한데 반해 옹장의 걸음 거리는 어딘지 무거워 보였다.
두 사람은 마당의 한가운데서 10 여보쯤 간격을 두고 마주 섰다. 그곳은 주랑이 숨어있는 나무와 매우 가까운 곳이었다. 옹장은 마주 서자 먼저 입을 열었다.
"양신, 오래간만이다. 이 불구대천의 웬수야!"
양신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너는 내 동생들 목숨을 일곱이나 앗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옹장, 겨루기 전에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소."
옹장은 그 말에 기운 센 늑대처럼 어깨를 쫙 펴며 반문했다.
"뭔가?"
"나의 사부님이 묻혀 계신 장소를 알려주시오."
"양신, 그대가 사부의 무덤을 쓰려면 먼저 살아남고 볼 일이다."
"죽든 살든 간에 나는 알아둬야만 하겠소."
"알겠다. 우리가 두 번째로 조우했던 절이 생각나는가?"
"거긴 오골사가 아니요?"
"절의 산문각 근처에 있는 큰 바위 밑구멍에 시체를 넣어뒀다."
"옹장, 그 말을 믿어도 되겠소?"
"이 판국에 그걸 속여 뭘 할 것인가?"
양신은 대답을 듣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사부가 목숨을 잃게 된 게 자신 때문이란 자책감 때문이었다. 자신이 검술을 익혀 살생에 휘말리게 된 것도 후회와 환멸감만 일었다.
옹장은 고갤 떨구고 있는 양신을 보며 먼저 장도를 쓱 뽑았다. 양신도 마주 뽑아 들었다. 햇빛을 반사하는 두 자루의 칼날은 몽환적인 검기를 뿜어냈다. 양신은 사부가 묻힌 데를 알았으니 그냥 떠나고 싶었다.
그때 옹장은 몸을 돌려세우고 이세민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공자님, 다시 한번 생각해봐 주실 순 없겠습니까?"
"중랑장, 뭘 다시 생각해 보라는 말이요?"
이세민의 트릿한 반응에 옹장은 마당 둘레를 향해 외쳤다.
"병사들은 들어라. 나는 폐하를 호위하는 중랑장이다. 내 앞에 서 있는 자는 꺼우리 첩자이다. 병사들이 나서 마땅히 체포할 일이다."
병사들 사이에선 약간의 동요가 일고 이세민이 입을 열었다.
"중랑장, 그대는 처형을 당하러 끌려온 처지이다. 그러나 그대는 사원을 풀게 해달라고 간청을 해서 원하는 대결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 자가 무슨 염치로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오는가?"
"나는 염치고 뭐고 따질 형편이 못 되오."
"중랑장은 그리도 대결이 두렵소? 그 때문에 피하려고 든다면 부끄럽기가 짝이 없을 일이요. 나는 폐하의 명에 따라 병사들은 중랑장을 처형하고자 이곳에 데려 왔소. 또 대결이 펼쳐진다는 말에 병사들은 큰 관심을 갖고 있소. 그런데 중랑장이 두려움 때문에 부끄러운 소리만 자꾸 하면 그냥 처형으로 들어가야 하겠소."
병사들도 옹장이 처형을 당하러 끌려 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뜻밖에도 큰 검술 대결을 펼치게 되었다는 것에 모두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결과를 지켜보게 되었다.
"집행관은 즉각 중랑장을 처형하라."
이세민의 명령에 집행관과 병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옹장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안 되오. 내 손으로 꺼우리 첩자의 목을 베어놓겠소."
옹장의 대답에 집행관과 병사들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양신은 몇 걸음 다가들었다. 옹장은 움찔하며 뒷걸음질을 치려다 수많은 병사들의 눈길을 의식하며 기합 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양쪽의 칼날들은 뒤얽혀 들었다. 마당 둘레의 병사들은 하나 같이 숨을 죽이고 접전을 지켜보는 가운데 무시무시한 금속성을 일으키는 공방전만 숨 가쁘게 펼쳐졌다.
양신은 상대와 공방을 벌이면서도 마당 둘레를 살피게 되었다. 옹장이 마당 둘레의 병사들에게 한 말 때문이었다. 병사들 중엔 동료 의식을 느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려 들 자도 있을 것이었다.
옹장은 접전을 펼치면서 양신이 마당 둘레를 자꾸 살피는 기색을 알아챘다. 자신을 마당 가운데로 유인하려는 기미도 느꼈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은 주로 중앙의 큰 나무 부근을 맴돌게 되었다.
두 사람의 접전은 처음엔 막상막하였으나 옹장은 점점 체력의 한계로 숨을 헐떡이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양신이 마당 둘레에 자꾸 신경을 쓰고 있는 것에 노림수를 찾았다.
"병사들이여, 꺼우리 첩자에게 활을 쏴 죽여라!"
옹장은 이따금씩 숨찬 음성으로 그런 말만 되풀이했다. 그럴 때마다 양신은 마당 둘레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 병사들 중엔 반감을 품고 활을 쏠 자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양신의 그런 심리를 간파하고 기회를 노렸던 옹장은 한 순간 독을 묻힌 척퇴비침(擲腿飛針)을 날렸다. 그때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던 주랑은 급해서 몸을 날려 독침(毒針)을 대신 받았다.
양신은 너무도 놀라며 쓰러진 주랑에게 달려갔다. 그 순간 옹장은 칼날을 쑤셔 넣었지만 도리어 자신의 목이 베어져 나갔다. 모든 게 순간적으로 일어나게 된 일이었다.
양신은 절규를 터뜨리며 주랑을 끌어안았다.
"주랑, 죽으면 안 돼!"
주랑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푸른색으로 변해 갔다.
"형부, 전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러 가요!"
입술을 달싹거리듯 그런 말을 남기고 허공에 두 눈을 열어놓았다. 한창 피어날 꽃봉오리 같은 얼굴엔 순청무잡(純靑無雜)만 남겨졌다.
이세민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애처로운 죽음과 처참한 죽음을 번갈아 보았다. 양신은 주랑마저 자신 때문에 죽게 되자 비통한 오열을 터뜨렸다. 자책감에 못 이겨 밀두도로 자기 목을 찔렀다. 그러나 이세민이 재빨리 팔을 쳐 칼날은 비껴지고 목에서 선혈만 흘렀다.
이튿날 청량산 자락의 양지바른 곳에 주랑의 무덤을 쓰게 되었다. 이세민은 장례를 치르고 나자 양신에게 위로의 말을 남기고 서둘러 병사들을 끌고 태원으로 돌아갔다.
양신은 주랑의 무덤 곁에서 울기만 했다. 서분이 남아 양신을 위로하며 보살폈다. 그러면서 그동안에 주랑이 겪었던 일들을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이세민이 주랑에게 마음을 두고 만나지 못하게 막은 일, 주랑과 해론 간에 얽힌 사연, 만돌에 의해 여선이 고구려로 납치된 일, 주랑을 독살시키려고 들었던 만돌은 도리어 죽음을 당한 일들이었다.
서분은 얘기를 마치고 큰 주머니를 내놓았다.
"주랑 언니 것이니 양신님이 챙겨 가세요."
양신은 금덩어리와 은전이 가득 든 주머니를 도로 내밀다.
"왜 날보고 챙기라고 하오?"
"주랑 언니의 재물이니 당연한 챙기셔야 해요."
서분은 그렇게 말하고 자기네와 주랑이 인연을 맺게 된 사연, 함께 태원으로 와서 정착하게 된 일을 설명했다. 양신은 덧없는 인생의 허무와 회의감만 더해지며 말했다.
"나는 재물을 많아 소분의 몫으로 돌리겠소."
"지니고 가시면 요긴하게 쓰일 데가 생길 거예요."
소분의 말에 양신은 사부의 묘소를 쓸 일을 생각했다.
"나는 여길 떠나겠소."
"어디로 떠나실 건가요?"
"고구려요. 사부님의 시신을 찾아 묘소를 써드려야 하오."
"고구려로 돌아가시는 게 괜찮을까요?"
"죽기밖에 더하겠소? 가야만 하오."
"그 일을 마치시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나는 세상이 싫어졌소."
양신의 입에서 그런 대답이 나오자 소분은 강하게 말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어요?"
"나는 너무도 가슴이 아프고 슬퍼서 죽고만 싶소."
"저도 그 마음을 잘 알아요. 그러나 죽을 마음을 먹는다면 주랑 언니가 바친 목숨을 헛되이 만들게 만드는 것임을 몰라서 그래요?"
소분은 그런 말을 하고 얼굴엔 짙은 분노를 들어냈다. 양신은 깊은 깨달음을 얻고 깊은 한숨만 흘려내며 아무 말도 하질 못했다.
"주랑 언니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지시는 게 도리입니다."
소분이 또박또박하는 말은 양신의 가슴에 준절하게 박혀 들었다.
"내게 큰 깨달음을 준 소분의 말을 마음에 새겨두겠소."
양신은 그렇게 대답하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언니의 묘소는 제가 돌봐드리겠으니 아무 걱정도 마세요."
"고맙소."
양신은 대답하고 말에 올라 떠났다. 북쪽으로 오를수록 황야뿐이라 민가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노숙과 굶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참담한 심경이었다. 마침내 조국 땅을 다시 밟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런 감흥도 일지가 않은 채 오골사에 이르고 말 잔등에서 정신을 잃었다.
한 스님이 발견해서 절 안으로 옮겨진 뒤 사흘 만에 눈을 떴다.
오골사 주지인 안함로(安含老)로 스님은 양신의 얘길 듣고 나서 산문각 근처에 있는 큰 바윗장 밑에서 여준의 시체를 찾아냈다. 살은 썩고 뼈만 남은 시체를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양신은 무덤을 쓰고 나서 서분이 준 재물을 절에 시주했다. 사부와 주랑의 위패를 절에 모시고 나자 다시 몸져눕고 말았다. 그때부터 죽음을 생각해 보게 될 만큼 앓아야만 했다.
안함로는 양신의 간병에 크게 신경을 썼다. 그동안에 값진 삶을 살았음에도 조국에서 살 수가 없는 양신의 처지를 동정했다. 어떻게든 돕고자 절 안팎에 비밀로 하고 건강을 회복하게 힘을 썼다.
양신은 거강을 회복하는 동안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새 해를 맞은 어느 날 안함로 스님께 말을 꺼냈다.
"방장님이 극진하게 보살펴 주셔서 저는 살아났습니다. 고마움 잊지 않고자 머리를 깎고 이 절에서 사부님의 고혼을 지켜드리고자 합니다."
양신이 하는 말에 안함로 스님이 물었다.
"양신, 왜 그런 생각을 하는가?"
안함로의 질문에 양신은 울먹이며 대답했다.
"제 운명이 싫어졌습니다. 저는 자진을 할 수도 없습니다. 모진 운명의 고통을 벗어나자면 중이 되는 길밖에 없겠습니다."
"나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네."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운명은 행과 불행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네. 누구도 그걸 벗어날 수도 바꿀 수도 없다고 하네. 그러나 이런 말도 있네. 운명을 받아들이는 자는 운명에 끌려가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운명을 끌고 간다고 하네. 다시 말해 운명은 자신이 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가 있다는 말일세. 그러자면 무엇이 중요할지를 생각해 볼 일일세."
"무엇을 생각하는 게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일세. 즉 자기가 하기에 따라 운명은 달라지고 개척할 수가 있다는 말일세. 즉 자신이 운명을 만들 수가 있네."
"운명이 달라지고 개척을 할 수가 있다는 게 가능할까요? 그럴 수만 있다면 누군들 하고 싶지가 않겠습니까?"
"자네가 한번 해보면 어떨까?"
"제가요?"
"자네는 운명을 개척해 나갈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네."
"방장님은 왜 그렇게 보십니까?"
"나는 자네처럼 강한 사람은 처음 보았고 때문에 확신이 서네. 암. 자넨 운명에 휘둘리기보다 짊어지고 나갈 수가 있는 사람일세. 중이 되기보다 속세에서 세상을 위한 큰일을 해야만 하겠네."
처음엔 안함로의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는 양신은 머리에 주랑의 얼굴이 떠올리게 되자 생각이 달라졌다. 며칠간을 깊은 생각을 한 끝에 결심을 하고 말았다.
"방장님, 저는 이만 절을 떠나겠습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중원 땅으로 다시 가려고 하는가?"
"사람이 없는 불함산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불함산으로 들어가서 뭘 하겠단 말인가?"
"마음의 수양도 쌓고 사부와 주랑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그러면서 공부도 겸했으면 어떨까?"
"스님께서 제게 권하실 책이 있으시면 내주십시오. 저는 책을 읽은 뒤 가끔씩 찾아와서 가르침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며칠 뒤 양신은 말을 타고 불함산(不咸山)으로 떠났다.
불함산은 사람의 접근을 허락지 않는 성스럽고 신비스러운 산으로 알려져 있었다. 봄이 왔는데도 겨우내 쌓인 눈은 여전히 두텁게 쌓였고 얼어붙은 개울 바닥에선 소리 없이 물이 흐르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기가 힘든 산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마침내 굉음을 울리는 거대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천지(天池) 폭포 밑에 이르렀다. 자욱한 물안개로 뒤덮인 속에서 말은 걸음을 멈추었다.
양신은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 밑으로 다가들었다. 물안개에 잠긴 사위는 한 치도 앞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갑자기 일장 광풍(狂風)이 일면서 모든 나무들이 강한 바람에 휘어들었다. 순식간에 폭포의 비말(飛沫)에 흠뻑 젖어든 채 허공을 향해 불러보았다.
"주랑."
어디서 화답을 하듯 호랑이 울음소리가 일어났다.
"어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