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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나라 43. 혼마

43. 혼미

by 정완기

43. 혼미(昏迷)



양신은 수국 땅으로 들어섰다.

중원 땅은 도처에서 반란군이 횡행하고 있었다. 흰말을 타고 다니면 사람들 눈에 잘 띄게 되어 위험할 수가 있었다. 되도록 큰길을 피해 산속으로만 이동을 했고 송진에 나뭇재를 섞어 가리온의 몸에 발라서 볼품없는 돈점충이 말로 변화시켰다.

남쪽으로 향할수록 지난날 여선과 가정을 꾸렸던 추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열흘 만에 구려촌에 당도하자 마치 고향으로 돌아온 것 같았고 석부도 여간 반기지 않았다.

"양 대정,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구려."

"촌장님. 저는 약속대로 구려촌에 몸을 의탁하고자 왔습니다."

석부는 양신이 동돌궐에서 겪은 일들과 여양의 가족들이 고구려로 끌려간 사정을 알고 함께 눈물을 흘려주었다. 그러나 양신이 앞으로 처제를 찾고 옹장에게 복수하겠다는 말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양대정이 겪은 불행은 뭐라 위로할 말은 없겠소. 그러나 옹장은 황제의 호위 책임자로 있는데 복수를 하겠다는 건 매우 위험한 짓이요."

"저도 복수는 나중이고 우선 처제를 찾는 일부터 하렵니다."

양신도 양현감의 호위 무사였기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단 판단이었다. 그러므로 당분간 구려촌에서 은거한 채 돌아가는 사정을 살피며 움직일 생각이었다.

"양대정은 혹시 처제가 있을 만한 데로 짐작이 갈 곳은 없소?"

"저는 여양의 만춘장부터 알아봐야 하겠단 생각입니다."

"양대정은 당분간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오. 특히 여양 부근은 얼씬도 해선 안 되오. 일단 사람을 여양으로 보내 알아봐 주겠소."

양신은 고개만 끄덕이는데 석부가 좀 머뭇거리듯 말했다.

"나는 전에 양대정보고 이리로 와서 살 것을 권했으나 이곳의 형편이 매우 어렵소. 은신한 채 지낼 양대정도 어려움이 클 것이요."

석부의 말에 양신이 물었다.

"촌장님, 저는 각오가 되었지만 들어앉아만 있을 순 없잖습니까?"

"우리는 시절이 하도 혼란스러워 장사를 못하고 있소. 양대정이 주고 간 금덩이로 그동안 마을 전체가 먹고 살 수가 있었소. 그러나 거의 다 써버려서 얼마 남지가 않아서 걱정이 이만저만 크지가 않소. 장사 밑천을 다 들어먹어서 앞으로 장사에 나설 일마저 막막하게 되었소."

"촌장님, 밑천만 있으면 다시 장사에 나설 수가 있겠습니까?"

"횡행하는 도둑 떼가 위험하지만 이젠 먹고살기 위해 나서야 하오."

양신은 구려촌의 사정이 전이나 마찬가지로 어려운 속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어려움을 남의 일처럼 여길 수도 없는 데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도 무슨 해결책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촌장님, 저는 중원 땅에서 차제를 찾아야 합니다. 장사를 시작하게 되면 상단을 따라다니며 호위도 하고 처제를 찾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장사에 나서야 할 형편이나 밑천이 없어 걱정이요."

"촌장님, 저는 적지 않은 돈을 지니고 있습니다."

양신은 말하고 지니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내놓았다. 석부는 양신이 열어 보인 자루 속을 들여다보고 매우 놀라며 물었다.

"양대정, 이 많은 금과 패물은 어디서 생겼소?"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한 것은 아닙니다. 그만한 돈이면 행상에 나설 밑천이 되겠습니까? 저는 마을을 위해 전부 다 내놓겠습니다."

석부는 너무도 기쁘고 감격했지만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고맙소. 염치가 없으나 우선 마을을 되살리고 은혜를 갚겠소. 거기다 장삿길에 호위까지 맡아준다면 용기를 내보지 않을 수가 없겠소. 나는 내일부터라도 즉시 장삿길에 나설 준비를 하려고 하오."

"촌장님, 제가 중원 땅에서 안전하게 지낼 곳은 여기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곤경에 처한 마을을 돕는 건 자신을 위한 길도 됩니다."

양신은 교역상단을 꾸릴 포부를 갖고 있었다. 때문에 먼저 중원 땅에서 상술을 터득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구려촌을 발판으로 삼아 거래처를 뚫는 길도 함께 모색할 계획이었다.

"촌장님, 제가 상단을 우려는 데는 다른 생각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생각이란 어떤 것이요?"

"구려촌이 되살아나야 제가 할 장사 밑천을 돌려받게 됩니다."

양신이 정색을 하고 하는 말에 석부는 큰 웃음을 터뜨렸다.

"양대정, 절대로 떼어먹진 않겠소. 다만 당장은 어려울 일이요."

"촌장님, 저도 당장 바라는 게 아닙니다."

석부는 현재 처한 사정을 들려주었다.

황제는 3차 침공도 실패한 뒤 관군을 풀어 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그로 인해 피바람만 불러일으킨 가운데 도둑 떼는 전보다 더 극성을 부렸다. 때문에 위험 속에 나설 수도 없으나 해도 장사가 되질 않았다.

"촌장님, 이렇게 생각을 해보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생각을 하단 말이요?"

"위험과 불안이 큰 속에선 어느 상단도 위축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쟁자가 적어 장사가 잘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생각을 해보니 양대정의 말도 맞겠소."

"저도 촌장님께 바라는 일도 있습니다."

"어떤 일이요?"

"저는 촌장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글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전엔 을지문덕님 밑에서 틈틈이 학문과 역사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스승으로 모실 분이 없습니다. 촌장이 스승이 되어주시면 특히 중원 땅의 산물과 재화에 관한 공부도 할 수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건 나도 기꺼이 응할 수가 있겠소."

석부는 대답하고 양신에게 묘한 점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구려촌 상단은 원래 낙구창을 중심으로 황하를 넘나들며 행상을 했었다. 그 지역은 인총이 많아서 장사가 썩 잘 되는 편이었다. 그러나 도적 떼가 들끓어 부호나 상인들이 약탈에 시달려 위축되었다. 그러나 양신이 상단의 호위를 맡아주면 한번 나서볼 만하다는 판단이었다.

석부는 여양으로 사람을 보내 만춘장에 대해 알아보았다. 지금은 주인이 살지 않고 주랑의 행방도 아는 사람도 없었다. 양신은 실망과 실의로 마음만 더 무거워질 뿐이었다.

황제는 3차 침공마저 실패한 뒤론 국도인 대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울분에 찬 나날 속에 불안감만 커졌다. 도처에서 반란군이 세력을 키우고 있어도 신하들은 반군이 줄어들고 평온을 되찾고 있다는 거짓 보고만 했다. 그런 위기 속임에도 황제는 고구려 정복의 미련을 못 버리지 못했다. 그 이유는 고구려만 멸망시키면 국내외적인 모든 어려움을 한꺼번에 날려버릴 수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새 해를 맞자 황제는 4차 출병을 거론했다. 신하들은 어리석은 집념을 비웃는 중에 임종(任宗)이란 자는 참다못해 목숨을 거는 상소문을 올렸다. 무리한 침공을 그치지 않는다면 사직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불충한 상소문이라며 여러 신하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임종을 때려죽였고 말리는 최민상(崔民象)의 입술을 베어놓았다.

황제는 태원 자사 이연에게 병력 1만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이연은 이세민에게 병력을 내주고 끌고 가게 했다. 황제는 기뻐하며 병력을 근위군에 편입시키려고 하자 이세민이 말했다.

"폐하, 신은 소청이 있습니다."

"무슨 소청이냐?"

"신이 끌고 온 병력을 지휘하게 해 주십시오."

"기특하도다. 마땅히 해야 하고말고!"

"끌고 온 병력을 근위군에 편입을 시킨 뒤 신이 전체를 맡겠습니다."

이세민의 건방진 대꾸에 황제는 부아가 치솟고 말았다.

"철이 없기로 그런 방자한 소릴 하다니 죽고 싶으냐?"

"폐하, 신은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되었다!"

"그 대신 신을 돌아가겠습니다."

이세민은 그렇게 대답하고 멋대로 병력을 끌고 돌아가 버렸다.

황제의 명령이 그처럼 통하지 않게 된 가운데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반군들 사이엔 이합집산을 통한 질서까지 잡혀 갔다. 그것은 황실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결과를 빚었다.

반란군 중엔 두각을 드러내는 유력자들이 나왔다. 이밀을 위시해 두건덕, 손안조(孫安祖), 유패도(劉覇道), 송자현(宋子賢), 향해명(向海明), 유원진(劉元進) 등이었다. 모두는 근거지를 잡고 세력을 키워서 소왕국처럼 백성들을 통치하게 되었다.

황제는 자신의 위신이 여지없이 무너지자 신하들을 더욱 증오하며 들볶았다. 그리고 선제(先帝) 때 신하였던 늙은 왕세충(王世充)을 재 등용시켜 신하들을 다잡는 역할을 맡겼다.

신하와 장수들은 불신만 당하자 황제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 왕세충은 그런 황제와 신하들 사이에 낀 채 사태의 심각성을 절감했다. 때문에 고구려 침공의 불가함을 건의했다.

황제는 왕세충마저 그러자 완전 고립감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동돌궐의 가하돈으로부터 뜻밖의 제보가 들어왔다. 탈취를 당해 상심이 컸던 명마들이 동돌궐로 되돌 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세충은 황제로부터 그 말을 듣고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구려 정복보다 종마를 돌려받는 일을 것을 건의했다. 돌려받게 되면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설득했다.

분기가 탱천한 황제는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근위군을 끌고 만리장성을 순시하겠다며 동돌궐을 위협하면 종마를 돌려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친위군을 지휘하는 조재(趙才)가 혼미한 속에 국도를 비우는 건 위험하다고 반대를 했다.

황제는 조재를 즉각 파면하고 왕세충의 말을 따랐다. 그러나 황제의 명령은 이제 국도와 낙양성에만 미칠 정도로 미약했고, 극도의 재정 궁핍으로 근위군 병력은 1만도 되지가 않았다.

겨우 꾸린 순시 병단은 북방 순행에 나섰다. 백관들과 장졸들은 내키지 않는 수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초라한 순행은 느리기 그지없어 1개월 만에 만리장성과 가까운 대군(代郡)에 이르렀다.

한편 동돌궐의 시피 칸은 급보를 받고 당황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거기다 양광이 자신을 국경으로 불러내는 국서를 보내와 대책을 세우고자 동생인 힐리를 불러들였다.

"천자가 짐을 국경으로 불러내려고 출병까지 했다. 네가 공연히 종마를 탈취하는 사단을 벌인 까닭에 이런 사태를 맞았으니 수습을 해라."

"폐하, 걱정하시지 마옵소서."

"걱정을 말라니? 그런 무책임한 소리가 어떻게 나오는가?"

"폐하, 천자가 국경을 침범해 오면 우리도 맞서 싸우면 됩니다."

"뭐라고?! 맞서 싸우자고? 우리 형편에 가능한 일로 생각하는가?"

"폐하, 우린 고구려보다 강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수국의 침공을 세 번씩이나 물리쳤습니다. 우리라고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시피 가한은 힐리의 말이 불쾌하면서도 속으론 부끄러움을 느꼈다.

"폐하, 천자는 잦은 전역을 치르느라 재고가 텅 비어버린 상태가 되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을 병력을 끌고 겨우 순시라고 나선 것입니다. 신에게 명령을 내리시면 2만 병력을 꾸려 쫓아버리고 오겠습니다."

시피 가한은 내심 부끄러움과 수긍이 가서 고개만 끄덕였다.

힐리는 종마를 부족장들에게 돌려준 뒤로 그 위상이 전과 다르게 크게 향상되었다. 부족장들에게 통보를 하자 순식간에 2만 병력을 꾸려냈고 남쪽으로 출동을 하기 전에 수국 쪽에 10만 병력을 끌고 마중을 나간다는 통고를 했다.

황제는 그런 통고를 받고 그만 겁을 집어먹고 말았다. 급히 진군을 중단한 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안문성(鴈門城)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밀려든 동돌궐 군에 포위를 당했다.

안문성 안에선 황제와 장졸들이 불안감에 휩싸다. 황제는 해마다 고구려의 요동성을 포위를 했다가 도리어 당하게 되자 공포감이 휩싸여 후회막급이었다.

황제는 순행에 데리고 나온 막내아들인 조왕(趙王)을 붙잡고 울기만 했다. 병력을 총지휘하는 번자개는 황제는 물론 상하들이 모두 비관에 싸인 모습을 딱하게 보며 위로의 말을 했다.

"폐하, 아무리 큰 위기에 처했다고 해도 천자는 눈물을 보이시면 안 되옵니다. 사방에서 곧 원군들이 몰려올 것이니 조금만 참으소서."

"짐인들 왜 그걸 모르겠는가? 곤궁한 처지로 몰린 짐을 위해 원병을 보내 줄 자가 있을지 모르겠고 암담하기가 그지없다."

"폐하, 설령 원병이 오지 않아도 신이 죽기로 싸워서 막겠습니다."

"짐은 오직 번자개 대장군밖에 믿을 데가 없다."

황제는 비굴할 정도로 기가 죽은 태도를 보였다. 번자개는 그런 황제를 보며 내심 걱정이 더욱 커졌다. 사태가 위태롭게 되면 장졸들이 도망을 치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태를 막자면 무슨 궁여지책이라도 쓰지 않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폐하, 신은 진언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번자개, 무슨 진언을 하겠다는 것인가?"

"폐하, 장졸들은 오랜 전역으로 너무도 지쳐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겠지."

"위급한 지경을 벗어나려면 장졸들의 사기를 올려야 하겠습니다."

"그야 당연한 일이지. 어떻게 하면 사기를 북돋을 수가 있겠는가?"

"폐하, 장졸들이 분발해서 싸우려면 용심을 키워줘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폐하께선 큰 보상을 약속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병사들이 도망을 치지 않고 힘을 내서 싸울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짐이 어떤 보상을 하면 장졸들의 용심을 북돋을 수가 있겠나?"

"폐하, 상급만 한 게 없습니다. 전에 없이 크게 내려주십시오."

황제는 위기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만 했다.

"좋다. 짐은 매우 파격적으로 상급을 내리기로 하겠다."

번자개는 그때부터 황제와 더불어 무슨 얘기를 더 나눴다. 밖으로 나와 장수들에게 황제가 파격적인 상급을 내리겠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직접 성벽을 돌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장졸들은 분발해 싸워라."

불안감에 싸인 장졸들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시큰둥한 태도만 보이는데 번자개는 더욱 목청을 높였다.

"장졸들은 죽기로 싸워 성을 방어해 내라. 폐하께선 모두가 팔자를 고치고도 남을 만큼 막대한 보상을 내리시기로 약속을 하셨다."

장졸들은 팔자를 고칠만한 보상은 어떤 것인지 물었다.

번자개는 그에 대한 답변으로 황제가 약속한 바를 전했다.

"장수들에겐 현재의 관품에서 3품씩 올려주고 비단을 2백 필씩 지급한다. 병사들은 모두 팔품관(八品官)의 품계를 받게 된다. 거기에 더해 비단 1백 필씩을 받게 될 것이다."

장졸들은 그런 보상을 내린다는 것에 입들이 딱 벌어졌다. 그러나 잠시일 뿐 이내 코웃음을 쳤다. 다급해진 황제가 말로만 선심을 쓰려는 속셈임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런 판인데 태원에서 이세민이 또 1만 병력을 끌고 왔다. 뜻밖의 원군이 도착하자 위기감에 빠진 안문성 안은 크게 환호성을 올리게 되었다. 반면에 급변해진 상황 앞에 동돌궐 군이 당황했다.

힐리는 전쟁을 목적으로 출병을 한 게 아니었다. 지친 수국 군을 겁만 줘서 쫓아버릴 속셈이었다. 그런데 원병이 와서 사정이 달라지자 성 공격도 어렵고 패하게 되면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다.

그런 데다 본국에서 철륵이 침공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그건 가하돈이 모국을 구하고자 거짓 소문을 전한 것이었다. 그걸 모르는 힐리는 급히 철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황제는 동돌궐 군이 썰물처럼 물러가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황망히 성을 빠져나가 곧장 회군으로 들어갔다. 돌아가면서 생각을 많이 했다. 국도엔 전조의 왕족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때문에 앞으론 통제를 하기가 더욱 힘들어진다는 판단이었다. 국도로 돌아가는 것은 이래저래 망설여져서 방향을 틀어 낙양성으로 들어갔다.

번자개는 회군이 끝나자 황제에게 약속을 지킬 것을 주청했다.

"폐하, 무사히 회군을 하셨으니 공약을 이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황제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나는 네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짐이 안문성을 벗어난 게 장졸들이 잘 싸운 결과로 생각해서 그런 공약을 쳐드는가?"

번자개는 그 말에 대답을 못하는데 황제가 버럭 소릴 질렀다.

"그렇게 부하들로부터 인망을 산 뒤 너는 무슨 짓을 하려는가?"

황제의 계속되는 질타에 번자개는 두려움을 느꼈다. 더욱이 황제가 자신에게 어떤 의심을 품고 있음을 알게 되자 몸이 떨렸다. 다행히 황제는 더 이상은 추궁을 하지 않았다.

낙구창에서 웅거한 이밀은 황제가 낙양성으로 들어가자 공격을 하겠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럼에도 신하들은 반군이 진격해 올 것이란 소문을 황제가 모르게 하려고 쉬쉬하기만 했다.

안문성에서 황제가 장졸들을 농락한 결과는 너무도 큰 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믿고 의지할 것은 근위군 뿐인데 그나마 등을 돌리게 될 것 같았다. 황제는 어려움에 고독하기까지 했다.

황제는 어느 날 한 시녀로부터 놀랄 소문을 듣게 되었다. 반군이 곧 낙양성을 공격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처럼 위험함에도 보고를 하는 신하가 하나도 없어 낙담 끝에 우문술을 불러들였다.

"그대는 알고 있었는가?"

"폐하, 무엇을 말씀이시옵니까?"

"짐은 엄청난 사실을 시녀로부터 들어서 알게 되었다."

우문술은 황제가 뜬금없는 말을 해서 자신에게서 뭘 떠보려는 게 있다는 판단에 경계심을 품은 채 반문만 할 수밖에 없었다.

"짐은 전국에 도적 떼가 기승을 부리는 걸로 알고 있었다."

"폐하, 염려하지 마옵소서. 도적 떼는 곧 소탕될 것입니다."

"도둑 떼가 아니고 반란군이 문제이다."

"폐하, 요즘은 반란군인지 도둑 떼인지 구별을 못할 지경입니다. 그 따위 하찮은 무리들은 별 걱정하실 게 못 되옵니다. 한심한 무리들의 행패는 관군에 의해 조만간 종식이 될 것입니다."

황제는 우문술의 대답에 꾸짖음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신하란 자들이 짐에게 보고를 않으니 그게 답답할 노릇이다."

우문술도 그 말엔 무슨 변명을 더 할 수가 없었다. 황제와 신하가 서로 간에 불신감이 깊은 만큼 변명을 하기도 싫었다. 말이 나오질 않는데 황제는 달래는 투가 되었다.

"신하란 자들은 반군이건 도적 떼건 간에 도대체 보고를 하지 않는다. 답답한 짐은 가장 신임을 하는 너만을 믿는데 그럴 수가 있느냐?"

"폐하, 신은 숨겨 온 게 하나도 없사옵니다."

"숨겨 온 게 하나도 없다고? 그런 말이 어떻게 나오는가? 신하건 하찮은 지방관이건 거짓보고만 올리는 게 능사로구나. 짐은 신하들이나 반군이나 전부 한 통속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니 너한테 만이라도 바른 대답을 한번 들어보고 싶다."

"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진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한 번 들어 보자."

"폐하, 지난해는 도적 떼가 주로 태산의 동쪽에서만 날뛰었습니다. 그런데 금년엔 점점 퍼져 지금은 황하 변 전체를 뒤덮게 되었습니다."

황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네 말대로라면 국도와 낙양성도 위험에 처했다는 게 아닌가?"

"폐하,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매우 위험한 지경입니다."

우문술의 대답에 황제는 더는 꾸짖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짐은 그 지경에 이르렀을 줄은 까맣게 몰랐다. 사태가 그처럼 심각함에도 신하란 자들은 뭘 했는가? 위기를 수습할 대책을 세우려는 자는 하나도 없고 도리어 방조를 하는 것 같으니 실로 믿을 자가 없구나!"

황제는 한탄을 하면서 답답한 가슴을 주먹으로 탁탁 두드렸다. 신하들이 그 모양임은 그렇다 치고 근위군마저도 반란을 일으키게 될지도 몰랐다. 우문술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신은 감히 주청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사옵니다."

"어떤 주청을 하려는가?"

"폐하,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하북 지방은 전체가 반란의 무리로 뒤덮였습니다. 국도와 낙양성도 곧 위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폐하께선 여길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피하셔야만 합니다."

"짐이 어디로 피한단 말인가?"

"폐하, 천도를 해서 사태를 수습해 나가면 어떻겠습니까?"

"천도를 한다? 어디로 가면 안전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남쪽의 장강 이남은 비교적 반란 세력이 약한 편입니다."

우문술은 황제에게 장강(長江) 유역인 강도(江都)를 추천했다.

강도는 비교적 전쟁 피해가 크지 않아 황제에 대한 반감도 적은 편이었다. 우문술은 그곳으로 천도한 뒤 내치를 다지고 민심을 수습한다면 난국을 타개할 수가 있다고 권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긴 무슨 짓이라도 해서 오직 천자 자리만은 유지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짐도 한번 생각을 해 볼 일이다!"

"폐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우문술의 건의가 아니어도 황제 역시 당분간은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날 생각이었다. 밤이면 불안감에 잠을 이룰 수가 없고, 더 큰 위기에 빠지기 전에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황제는 우문술이 물러가자 홀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은 이제 반란자들과 다투는 위치로 추락한 지경이었다. 더욱이 신경이 쓰이는 대상은 태원 자사인 이연이었다. 그의 원병 덕분에 안문성을 탈출했으나 그것으로 황제와 제후(諸侯) 간의 위치를 역전시켜 놓았다.

이연은 황제와 이종 4 촌간이었다.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가깝게 지내서 서로를 너무 잘 알았다. 1만 정도로 줄어든 근위군은 아직도 어떤 반란 세력보단 우위를 점하겠지만 이연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끝장이 나게 되었다.

황제는 각축이 심한 화북 지역을 빨리 포기하고 장강 이남으로 천도를 서두를 필요성을 느꼈다. 화북 지역은 이연에게 내주더라도 장강 이남의 제후들을 장악해 세수(稅收)를 착실히 챙길 수만 있다면 다시 북상을 시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즉각 천도 준비로 들어갔다. 더불어 사전 조치도 취할 게 있었다. 여러 아들과 손자들을 각 지역에 분산 분봉(分封)하는 일이었다. 흩어지게 만들어야 최악의 경우 직계(直系)들 중 단 한 명만이라도 살아남아 국체를 유지하길 바라고 대비를 할 목적이었다.

마침내 황제의 천도 공표가 나왔다. 그리고 내버려 뒀던 용선(龍船)을 수리하게 했다. 신하들은 일제히 천도에 반대하고 나섰지만 황제는 묵살하고 강력히 추진하게 했다.

전국이 혼미를 거듭하는 속에 구려촌 상단은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양신이 제공한 장사 밑천으로 다시 행상에 나선 덕분에 다시금 구려촌은 생기를 되찾고 번창 일로를 걸었다.

석부는 양신을 자신의 친 아들이나 다름없게 여겼다. 마을 사람들도 생명의 은인으로 떠받들었다. 양신은 나이가 어림에도 지도자의 면모를 드러내어 사람들이 따랐다. 그동안에 진 신세에 보답하려는 마음도 컸지만 양신의 인간 됨됨이에 존경심까지 품고 있었다.

석부는 양신이 내준 모든 자금에 이자(利子)까지 쳐서 따로 모으며 관리를 했다. 양신이 장차 교역에 나서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본금으로 축적을 해두려는 것이었다.

양신이 대외 교역에 나서려는 뜻을 품고 있는 것에 마을 사람들도 관심들이 컸다. 교역 상단이 꾸려지면 일원으로 참가할 마음을 먹고 각자는 검술 실력을 키우기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양신은 구려촌 상단을 쫓아다니며 어느덧 반년이나 주랑을 행방을 찾아봤으나 알 수가 없었다. 혹시 태원으로 가 가의를 만나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석부는 그쪽은 얼씬도 못하게 막으면서 구려촌에 검술을 지도할 무문(武門)을 세울 것을 권했다.

석부는 양신의 도움으로 장사가 번창 일로를 걷자 한 가지 생각을 한 게 있었다. 대원들의 검술 실력이 늘어나면 상단을 스스로 지켜낼 능력이 생기고 양신에겐 무리를 모으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나는 양신의 신상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싶네."

"촌장님, 제 신상에 관해 무슨 말씀을 하시렵니까?"

"자넨 전에 내가 했던 말이 생각나는가?"

"촌장님은 여러 가지 말씀을 해주셨는데 어떤 말씀인지요?"

"자넨 많은 수하를 거느릴 상이라고 했던 말일세."

"저도 그 말씀은 생각납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수난과 시련을 못 벗어날 신세인데 어찌 그런 데까지 관심을 둘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에겐 주어진 운명이 있네. 운명은 스스로 노력을 기울여 개척해 나갈 수가 있네. 좋은 해결을 볼 방법을 찾자는 것일세."

"좋은 뜻으로 해주시는 말씀이나 저는 특출한 사람은 못 됩니다."

"아닐세. 양신은 누구보다 큰 능력과 강한 의지를 지닌 사람일세. 그러니 한번 큰 뜻을 품어 보게.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계속 어려움도 헤쳐 나간다면 길은 열리게 되었네. 야망을 한번 품어보게."

"촌장님은 소생을 두고 늘 과찬의 말씀만 하십니다. 제가 아무리 큰 뜻을 품어본들 그걸 이뤄낼 여건이 못 되는데 어쩌겠습니까?"

"나는 과찬만 하는 사람이 아니네. 자넨 고구려 왕실로부터 아내를 되찾을 마음을 먹고 있는 사내일세. 그런 마음은 아무나 품지 못하네."

"그런 마음을 먹는 건 오로지 분심에 못 이겨 그렇게 될 뿐입니다."

"분심도 용기가 없으면 못 품는 것일세. 자넨 영웅기질을 지녔기 때문에 능히 품을 수가 있네. 그럴 능력도 충분히 지닌 사람일세."

"촌장님은 제게서 뭘 보고 영웅 기질이 있다는 말씀을 하십니까?"

"자넨 구려촌을 위해 지닌 돈을 전부 쾌척한 사람이 아닌가?"

"지닌 돈을 전부 내놓은 게 영웅 기질이란 말씀입니까?"

"자네의 영웅 기질을 여러 면에서 드러나지만 이기심보다 이타심이 큰 점에서 잘 드러나네. 큰 적선은 영웅 기질에서만 나오는 것이니까."

"제가 그런 마음을 먹는 건 단지 편해지기 때문일 뿐입니다."

"바로 그 점일세."

"바로 그 점이라니요?"

"영웅 기질은 큰 것에서만 찾는 게 아니고 작은 데서도 드러나게 되었네. 무엇보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일일세. 자고로 영웅이란 파란만장한 시련을 겪지 않으면 성장할 수가 없네."

"저는 혼자 쓰기엔 많은 돈을 지녀서 불편 때문에 맡겼습니다."

양신의 대답에 석부는 빙그레 웃은 뒤 어렵게 입을 떼었다.

"네겐 요즘에 다른 걱정이 하나 생겼네."

"촌장님, 다른 걱정이 생기다니요?"

"자네 덕분에 구려촌 상단은 잘 굴러가고 자리가 잡혀졌네. 그런데 자네는 행방을 모를 처제를 찾고자 노심초사일세. 그러나 넓은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찾는 일은 위험과 어려움이 따를 일이라 그럴세."

"그보다 구려촌에 무슨 걱정거리가 생겼기에 그러십니까?"

석부는 또 망설이다가 말을 꺼내고 말았다.

"그동안 우리 상단은 수많은 도적 떼의 습격을 받고도 피해를 입지 않았네. 자네 덕분이라 늘 감사하게 여기는데 그 때문에 남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면서 화근이 되고 말았네."

"무슨 화근을 말씀하십니까?"

"우리 상단에서 백마를 타고 다니는 자는 검술실력이 대단하단 소문 이 났네. 그 때문에 도적 떼가 음접을 못해 동업자들부터 부러움을 샀네. 그런데 그 소문이 다른 데로 들어가서 문제가 생겼네."

"다른 데는 어디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낙구창을 근거지로 삼는 반군들일세."

"반군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기에 그러십니까?"

"반군의 우두머리가 자넬 한번 보자는 통보를 해 왔네."

"그 자가 절 반군에 끌어드리려는 게 아닐까요?"

"나도 그런 생각 때문에 걱정일세."

"우두머리는 어떤 자입니까?"

"낙구창의 반군 수령 중 하나인데 이름이 크게 난 자일세."

"그 자의 이름을 아십니까?"

"이밀이란 자로 근본이 없는 자가 아닐세."

양신은 반군 수령(首領)이 이밀이란 말에 놀랍고도 반가움이 일었다.

"촌장님, 이밀이란 수령은 저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제가 양현감 밑에 있을 때 가까이 지낸 인연이 있습니다."

"그런가? 그러면 한번 찾아가 만나볼 의향은 있는가?"

"만나는 건 어렵지 않으나 반군에 끌려들어 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석부도 양신의 마음과 같았다. 그러나 이밀의 요구를 거부하기가 어렵고 한편으론 다른 생각을 해볼 수도 있어서 말을 꺼냈다.

"중원 땅은 난세로 접어들었네. 혼란은 점점 더 심해질 수밖에 없게 되었네. 도처에 야망을 품고 세상을 구하겠다는 자들이 군림을 하는 격동의 시대를 맞았네. 그러나 그중엔 새로 나라를 세울 자도 있네."

"저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양신도 그런 틈에 끼어 경험을 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

"촌장님은 제가 왜 반란군에 드는 걸 권유하시려고 합니까?"

"자네가 중원 땅에서 사나이로 능력을 한번 시험해 보면 어떨까?"

양신은 무슨 뜻인지 알지만 대답을 않고 석부는 또 입을 열었다.

"군웅들은 저마다 자신의 앞날을 개척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이네. 양신도 그들과 사귀면서 세상을 배우는 경험을 쌓으면 좋을 것 같네."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제가 뭘 또 보탤 게 있다고 그러겠습니까? 저는 지금까지 남이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 자의로 해 본 게 없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도 제 의지와 상관없이 저지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런 틈에 다시 끼어들어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양신, 그렇게만 생각하진 말게. 자넨 앞으로 자의로 해야 할 일들이 많아질 시기가 되었네. 자넨 군웅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삶을 배우고 세상을 배울 기회를 얻을 필요가 있네. 또 그렇게 해서 많은 경험을 쌓게 되면 행동반경도 넓혀나가기가 쉬워지네. 무엇보다 강조할 점은 영웅들과 교유하고 부대끼다 보면 자신의 성장도 빨라질 수가 있네."

양신은 석부가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하는 말임을 잘 알았다.

"촌장님은 제가 구려촌을 떠나길 바라서 그러십니까?"

"무슨 소릴! 오직 양신의 앞날이 열리게 되기만 바랄 뿐일세."

"그러시면 저도 한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양신은 며칠간을 생각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촌장님 말씀대로 포산공을 한번 만나보러 가겠습니다."

"그렇게 해준다니 다른 말을 하나 더할 게 있네."

"어떤 말씀입니까?"

"나는 포산공이란 자가 마음에 들지 않네. 그런데 그 밑엔 학덕과 재기가 넘치는 신예 재사들이 많이 모여들었단 소문을 들었네. 자넨 거기서 젊은 재사들과 사귀고 어울리는 기회를 갖게. 그러나 마음에 들지가 않으면 다른 데로 옮겨 많은 인물들을 접촉하는 것도 고려해보네."

"촌장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석부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미소를 지었다.

"저도 촌장님께 부탁을 드릴 게 있습니다."

"무슨 부탁인가?"

"이제부턴 제 밀두도를 맡아서 보관해주십시오."

"밀두도를 왜 내게 맡기려고 하는가?"

"저는 밀두도를 지니고 있음으로 해서 여러 번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차라리 안전한 곳에 보관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찾아 쓰겠습니다."

석부도 밀두도가 고구려 다갈촌 철장들이 대대로 물려받는 전유물임을 들어서 알기 때문에 안전하게 보관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며칠 뒤 양신은 구려촌을 떠나 낙구창으로 향했다. 그 부근의 지리를 어느 정도 알아서 어렵지 않게 반군의 군영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양적선의 별장이었다. 별장의 주변이 병영이 되었는데 그 규모가 제법 상당했고 짜임새도 잘 갖춘 편이었다.

양신은 입구를 지키던 파수병에게 제지를 당했다.

"무슨 일로 온 자인가?"

"양만춘이 포산공을 뵈러왔다는 말씀을 전해 주시오."

파수병은 양신의 말을 듣고 즉시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기골이 장대한 청년이 파수병을 따라 나와 양신의 행색을 살피며 물었다.

"노형이 포산공을 찾아온 양만춘이오?"

"그렇소."

"내 이름은 서세적이요. 포산공으로부터 노형에 관한 얘기를 많이 들었소. 이렇게 만나 보게 되어 반갑소. 함께 안으로 들어갑시다."

서세적(徐世勣)은 양신과 비슷한 또래였다. 양신은 자신을 스스럼없게 대해주는 서세적에게 친근감을 느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랬더니 마당에서 이밀이 양팔을 쫙 펼치고 맞았다.

"만춘 대정이 날 찾아오다니? 이건 행운의 조짐일세!"

양신도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포산공께서 무사하신 모습을 뵙게 되어 젤 기쁩니다."

"이 사람아, 자네만 목숨이 질긴 줄 아는가? 나도 수없이 죽음의 고비를 넘겼네. 이제부터 천천히 밀린 얘기를 나눠 보세나."

그날 저녁에 이밀은 주안상을 차려 놓고 참모들을 배석시켰다. 양신은 생전 처음 보는 진수성찬 앞에 의외란 느낌이 들었다. 반군 군영 같지 않게 차린 상이 너무도 풍성했기 때문이었다.

이밀은 그동안에 겪은 일들을 양신에게 자랑스럽게 들려주었다.

양현감은 반란의 실패로 관군에 체포돼 목숨을 잃었고 자신은 체포를 당했다가 도주를 했다. 그 뒤 산속으로 숨어들어 몇 달간을 나무껍질을 벗겨 먹으며 연명을 했다. 그러다 남들이 모르는 타지로 가서 서당의 선생 노릇을 하며 숨어 지냈다. 그런데 그 지역에서도 적양(翟讓)이란 자가 반란을 일으켜 찾아가서 몸을 의탁했다.

적양은 이밀의 신분이 높고 학식도 많아서 부하로 삼기를 꺼렸다. 그래도 참모로 삼아 힘을 합치면 세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때부터 적양은 외부적인 일을 맡고 이밀에겐 내부 관리를 맡겼다. 그런 역할 분담에서 이밀은 적양을 보좌하며 군사 작전 계획도 맡았다. 이밀은 뛰어난 지도력으로 다방면에서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적양은 그에 따라 병력을 지휘해 주변의 성읍(城邑)들을 많이 점령해 나가는 데 박차를 가할 수가 있었다. 때문에 세력은 급속도로 불어나고 사방에서 젊은이들이 많이 몰려들게 되었다. 거기엔 이밀의 명성이 큰 작용을 해서 그의 지위와 영향력은 적양과 맞먹게 커졌다.

웅지를 품은 젊은이들은 이밀 밑으로 많이 몰려들었다. 그 중엔 서세적, 진숙보(秦叔寶), 정지절(程知節), 나사신(羅士信), 시효화(柴孝和), 위징(魏徵) 같은 이름난 재사들이 다수 있었다. 이밀의 위상은 더욱 높아져서 적양은 자신과 동급의 수령으로 대우를 하게 되었다.

이밀은 양신을 자신의 호위무사로 삼았다. 부하들에게 양신이 고구려 출신으로 조국을 등진 이유도 밝혔다. 그러자 참모들 중 서세적과 위징(魏徵)은 큰 관심을 갖고 접근해 왔다.

양신은 간부의 한 사람이라 진중에서 베푸는 연회석에 참석할 수가 있었다. 반군은 산채 나물에 박주나 마실 걸로 여겼는데 그렇지가 않음에 내심 실망했다. 기름진 요리에 청주를 마시면서 맛이 있네 없네 하는 투정들을 부리기가 일수였기 때문이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겠는 표방과 다른 처신을 할뿐더러 호화판 생활은 물론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상대로 수탈까지 저지르고 있었다.

거기다 반군 내부에 편이 갈려져 있었다. 이밀을 추종하는 무리는 소수인데 반해 적양을 따는 무리는 다수였다. 양쪽은 은근히 대립과 견제를 일삼고 있었다. 적양과 이밀은 입만 열면 단합을 외쳤지만 내심은 참모들을 교묘히 조종하고 경쟁을 시켰다. 각자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데만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신은 인재들과 사귀고 배울 마음으로 들어온 터라 매사를 관찰자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본래의 목적에 뜻을 둔 자는 극소수고 대부분은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만 혈안이었다. 때문에 양신은 그런 데서 허송세월을 하고 싶지가 않아 떠날 마음을 먹었다.

그런 중에도 관심이 가고 눈여겨볼 사람들이 있었다. 한 사람은 무골(無骨)로 성격이 대범한 서세적이고 또 한 사람은 학문과 지혜가 깊은 위징(魏徵)이었다. 두 사람 또한 양신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기 때문에 세 사람은 자주 어울리게 되고 함께 하는 시간도 늘어나게 되었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패기와 의협심이 강하고 불의를 못 참는 성격들이었다. 그러나 진중은 탐욕적인 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렇지가 않은 자는 소수라 매사 밀리고 외면을 당하는 형편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밀 또한 재물을 탐하는 적양과 다를 게 없고 무리의 수를 늘리는 데만 관심이 컸다. 위징은 그 점에 실망했고 서세적은 이따금 불만을 터뜨렸다. 거기에 양신도 이밀을 비판하는데 가세를 하게 되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양신의 속내를 알기 위해 자신들의 속내를 먼저 털어놓았다.

"포산공은 군웅 축에 낄 자격이 없는 소인으로 보고 있소."

서세적이 단정적으로 하는 말에 위징도 거들었다.

"포산공은 패업을 달성할 그릇이 못되고 능력도 부족하다고 보오."

양신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마음들이 이밀에게서 떠났음을 알았다.

"세적님은 각처의 군웅들 중 누구에게 기대를 걸게 되오?"

"내 마음을 끄는 인물은 태원 자사인 당국 공뿐이요."

서세적은 서슴없이 대답했고 위징도 그 말을 받았다.

"나도 그렇소. 당국공은 동돌궐로부터 북방 영토를 지켜내신 분이요. 선정을 펴서 고을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계시오. 황제는 전에 당국공을 시기해서 체포해 죄를 묻겠다는 소문을 퍼뜨린 적도 있었소. 그러나 누구도 당치도 않을 일로 여기며 황제를 한심하게 보았소."

서세적도 또 다른 말을 했다.

"황제가 그러는 이유는 당국공마저 반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여서 그렇소. 그렇게 될 경우 황제는 끝장이 날 타격을 받게 될 것이요."

양신은 태원과 당국공이란 말이 나오면 불현듯 주랑을 떠올리게 되었다. 뒤늦게 그녀가 가의가 있는 태원으로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입을 떼었다.

"나는 태원으로 한번 가볼까 하는 생각이요."

"양만춘님은 당국공 밑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는 구려?"

서세적의 질문에 양신은 대답을 못하는데 위징은 한 술을 더 떴다.

"나도 양만춘님을 따라 태원으로 갔으면 좋겠소."

"내가 태원으로 가려는 것은 다른 일이 있기 때문이요."

양신은 그렇게 대답하고 행방을 모르는 처제를 찾기 위함임을 밝혔다. 그리고 이세민과 작은 인연이 있음도 말했다. 그러자 세세적은 매우 반기는 빛으로 부탁을 하는 말을 했다.

"그러면 이세민은 양만춘님에게 신세를 진 처지요. 그러면 나하고 위징님을 이세민에게 소개를 해줄 수는 없겠소? 우린 당국공 밑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그러는데 양만춘님이 도와줬으면 좋겠소."

위징도 동감이란 표정으로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양신은 두 사람과 유대와 교류를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이나 다른 말을 해야만 했다.

"나는 당국공 밑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소."

양신이 그런 말을 하자 두 사람은 실망하는 표정이 되었다.

"다만 나는 앞으로 상단을 만들어 대외 교역에 종사할 계획이요. 태원은 북방과 교역을 하는 중심지로 알려졌소. 때문에 이세민님을 한번 만나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중이요. 거기다 두 분은 앞으로 관계로 진출할 뜻을 품으셨소. 두 분의 영달을 위해서 내가 도움이 될 수가 있다면 함께 찾아가 이세민님을 한번 만나볼 용의는 있소."

서세적은 그 말에 매우 반가워하며 매달리듯 말했다.

"앞으로 교역에 종사하려면 이세민님과 교유는 매우 중요하오."

양신은 두 사람과 인연을 더 이어가겠다는 생각인데 위징이 말했다.

"양만춘님, 부탁이요. 우린 앞으로 나갈 길이 다르더라도 서로 돕는 사이가 됩시다. 제발 함께 가서 이세민님에게 우릴 소개해주오."

양신은 대답했다.

"우리들의 뜻이 그렇다면 즉각 실천에 옮겨봅시다."

세 사람은 그렇게 합의를 본 뒤 곧 떠날 준비를 했다. 두 사람은 몰래 떠날 생각이지만 양신은 구려촌이 마음에 걸렸다. 때문에 이밀에게 안위가 걱정되는 처제를 찾고자 무단으로 떠남을 용서해 달라는 글을 남겨 놓고 두 사람과 함께 태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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