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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나라 42. 순환

42. 순환

by 정완기

42. 순환(循環) (614)


황제는 항복 문서를 받아냈다고 떠들어댔지만 고구려는 화의(和議)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본국에선 반란군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러 돌아갈 데가 없는 탕아(蕩兒)와 같은 신세였다.

철수하는 수국 군은 요서(遼西) 땅으로 들어섰다. 장졸들의 회군 길은 기쁨에 들뜬 분위기였다. 출병 도중에 도주했던 병사들은 하나둘씩 부대로 원상복귀를 했다. 모두는 끼니를 잇기가 힘들어 군량미에 입을 대려고 돌아온 것인데 거기엔 많은 백성들도 끼어들었다.

장수들은 부족한 병력을 채우고자 어중이떠중이가 다 모여드는 걸 모른 체했다. 병사들의 절반은 군복을 상의나 하의 중 한쪽만 입고 있어 그 꼴은 가관이 아닐 수가 없었다.

황제는 그런 꼴을 보기가 낯 뜨거웠지만 세를 과시할 필요성에 모른 체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장수들이 황제를 비웃고 병사들은 명령을 따르지 않을뿐더러 제멋대로 굴었다.

행군도 해가 지기 훨씬 전에 멈추고 야영으로 들어갔고 보초도 세우지 않았다. 장수들은 끼리끼리 모여 술판을 벌였고 병사들도 군량미를 훔쳐내어 민가들로 가져가 술과 바꿔 먹었다. 3차 침공의 후유증은 그처럼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황제는 회원진(懷遠鎭)이 가까워지자 장수들의 마음을 잡고자 전역의 공과(功過)를 따져 상벌(賞罰)을 행할 뜻을 표했다. 장수들은 전공을 세운 게 없음에도 논공행상(論功行賞)엔 기대를 걸었다.

신하들은 누구나 영달을 추구하고 이해타산에 밝아서 은상(恩賞)을 바라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처지에 따라 기대와 불안감이 섞갈려 드는 분위기였다. 장수들은 미운털이 박히지 않으려고 황제의 눈치를 보기에만 급급해했다.

우문술의 장막에선 장수들이 모여서 설왕설래로 분분했다. 상좌에 앉은 우문술은 낮이면 황제에게 불려 가서 이런저런 일로 부대껴야 만했다. 신경질만 느는 황제로부터 온갖 질책과 욕설을 들어야만 했다.

"어쩌다 유명 대국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우문술의 말을 받아 우중문이 입을 열었다.

"대감, 목숨을 부지하기도 급급한 판에 그만하길 다행으로 여기오."

장수들도 그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한 마디씩 했다.

"논공행상도 다 부질없고 이젠 폐하를 대하기가 두렵기만 하오."

"인명을 가볍게 여기는 폐하에겐 그저 조심을 해야 할 뿐이요."

"폐하를 저렇게 만들어 놓은 자가 대체 누군지 아시오들?"

"세상이 다 아는 일로 양현감의 애비인 양소가 아니오?"

우문술은 한탄을 하듯 입을 열었다.

"양소는 황제가 내린 독이 든 약을 받아 들고 했다는 말이 있소. 내가 무서운 황제를 만든 결과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죽는 걸 다행으로 여기며 나 하나만으로 집안 전체가 도륙을 면하면 된다고 했다오."

신하들은 황제가 고구려 정벌에 자주 나서는 걸 내심 다행스럽게 여겼었다. 그렇지 않으면 궁궐 안에서 들볶이다 죽음을 당했을 자가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들을 했기 때문이다.

"폐하는 밖으로 나가든 안에서든 사람을 밥 먹듯 죽이시오. 이번에도 돌아가면 우리들 중에선 누가 또 목숨을 잃게 될지 모를 일이요."

"황제가 죽인 사람들을 전부 합치면 한 고을 백성과 맞먹을 만큼 많겠소. 거기다 타국인을 죽인 건 또 얼마나 많은지 잘들 알지 않소?"

"거란을 정복했을 땐 포로들까지 합쳐 수십만 명을 죽였지."

"그때는 폐하가 잘한 일도 없지는 않다오."

"대체 뭘 잘한 게 있단 소리요?"

"황제는 정복 전쟁 때마다 수만 명의 사내와 계집들을 끌고 와서 신하들에게 노비로 나눠 줬지 않았소? 그땐 입들이 찢어졌던 사람들이 참."

"나는 수많은 전쟁터를 누볐지만 이번처럼 희한한 전쟁은 처음 겪소. 전에 강한 거란을 칠 때 병력보다 열 배나 많은 병력을 끌고 가서 싸운 결과는 고구려의 총병력과 맞먹을 만큼의 전사자를 냈소."

"그러니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를 맞게 되었지!"

"누구든 기회와 능력만 갖추면 일으키려 하지 않소? 그만큼 왕조를 열겠다는 욕망을 품은 자가 많기 때문인데 우리도 다를 건 없지 않소?"

그 때문에 모두는 반란에 대해 비난을 하는 자가 없었다. 그 이유는 신하들이 모두 전조(前朝)에서 관직을 가졌던 전력이 있고 보고 들은 게 많아 딴마음을 품을 자들이 많은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에 난립했던 많은 나라들의 양상이 그걸 증명했다. 북제(北齊)는 30년, 북주(北周)는 25년이 가장 긴 축에 들었다. 나머지는 10여 년에 안팎으로 끝이 났는데 금년으로 23년째로 접어든 수(隋)는 마(魔)의 20년 벽을 넘긴 나라였다.

황제는 왕조의 장수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신하들을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황인 양견(楊堅)도 북주의 신하였다가 제위를 찬탈했다. 자신도 당하지 않으란 법은 없었다.

근래에 와서 황제의 신임을 받는 형원항이 입을 열었다.

"회군 길에 병력이 불어나자 폐하께선 전력이 늘어나는 걸로 보고 흐뭇해하시나 큰 오산이오. 병사들은 군량미로 배를 채우려는 속셈으로 다시 돌아왔을 뿐이고 여차 직하면 또 도망을 칠 것이요."

신하들은 황제의 거듭되는 정벌의 실패에 거침없는 비방을 쏟아냈다. 뿐더러 황제와 신하들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분위기였다. 황제는 신하들의 무능 탓으로 신하들은 황제의 허세 탓으로 돌렸다. 그것은 반목과 균열 상태를 심화시키고 신하들은 패악한 황제 밑에 더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더 있어 봤자 목숨만 잃게 될 뿐이란 생각이었다.

황제도 그걸 모르지 않아 고민이었다. 때문에 옹장에게 신하들의 동태를 염탐시켰다. 신하들도 옹장의 임무를 잘 알아 경계를 했다. 모두는 황제의 눈치를 보며 겉도는 태도만 보여서 처량한 심경의 황제는 매일처럼 술을 마셨다. 그리고 대작할 신하가 없어 일개 호위 책임자인 옹장을 술상 곁에 앉혔다. 그런데 두 사람은 술이 들어가면 묘한 조화를 부리듯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뤄졌다. 그게 거듭되면서 옹장은 점차 황제에게 예의를 망각한 채 말도 가리지 않고 스스럼없이 하게 되었다.

황제는 괴로움에 하소연이 늘어나고 옹장은 평소엔 꿈도 못 꿀 격려와 위안의 말을 서슴지 않고 했다.

"옹장, 짐이 중원의 천자인 게 맞기는 한가?"

"폐하는 이 나라의 주인이신데 약한 말씀을 다 하십니까?"

"천자가 맞는다면 안심을 해도 된다는 말인가?"

황제의 넋두리에 옹장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받아넘겼다.

"폐하, 걱정일랑 그만 놓으시오. 옹장이 있지 않습니까?"

옹장의 대답을 듣고 황제는 안심이 된다는 듯 껄껄 웃었다. 그리고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시녀에게 지필묵을 가져오게 했다. 시녀가 가져온 종이를 바닥에 펴놓고 붓을 들었다.

"짐이 정복한 나라들을 적어보겠다."

황제는 국명(國名)들을 차례로 써 내려갔다. 먼저 쓴 나라들은 정복을 한 진(陳)과 토욕혼(吐谷渾)이었다. 다음은 복속을 시킨 나라들로 동돌궐, 서돌궐, 거란, 고창(高昌), 파리(婆利), 유구(流求), 이오(伊吾), 교주(交州), 임읍(林邑) 등을 썼다. 다 쓰고 나자 갑자기 밀려드는 슬픔을 주체할 수가 없는 듯 흑흑 흐느꼈다.

"폐하, 왜 우시옵니까?"

"짐은 대국의 천자로 너무도 부끄럽고 한스럽다. 이토록 많은 나라들의 무릎을 꿇렸건만 한 주먹 거리도 안될 꺼우리 만은 안 되다니!"

옹장은 손을 홰홰 내저었다.

"폐하, 항복을 받으셨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는 종이때기 한 장을 받은 걸 항복이라고 생각하는가?"

"폐하, 왜 종이 때기라고 하십니까? 엄연한 항복 문서입니다."

"짐은 묻겠다. 지난날 중원의 유명국인 북제와 북주는 돌궐의 타발 칸에게 조공을 받쳤다. 그때 타발이 뭐라고 지껄였는지 아는가?"

"신도 타발이 지껄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알면 말을 해 봐라."

"중원의 두 나라 천자는 나의 효자들이라고 말했답니다."

"그런데 짐은 타발의 아들인 계민 칸을 굴복시키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카라발가순을 순행하셨을 때 계민은 장막 밖에서 호위를 했고 자기 손으로 장막 주변의 풀들을 깨끗이 뽑았지요."

"그랬던 짐이 꺼우리들에게 관풍행전을 불태우는 수모를 당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단 말인가?"

옹장은 그러는 황제가 측은해서 입을 열었다.

"폐하, 내년에 설욕을 하시면 되십니다."

"내년엔 가능할까? 또 안 되면 짐은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신하란 놈들이 하는 짓거리는 어떤가? 네가 들려준 말이 아니더라도 모여 앉으면 짐을 비방하고 조롱하는 걸 자 알고 있다. 짐은 놈들에게 어떻게 해야 분풀이가 될지 모르겠다."

옹장은 섬찍 했으나 입을 열었다.

"폐하, 모든 일은 꺼우리가 화근입니다. 지금이라도 회군을 중지하고 다시 요동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꺼우리만 멸망을 시키면 모든 문제가 깨끗이 해결됩니다."

"짐인들 왜 그러고 싶지가 않겠나? 되지가 않아서 그렇다."

"꺼우리는 을지문덕이 죽은 데다 국력도 완전히 소진되었습니다. 폐하께서 회군을 하시니까 꺼우리는 방심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시지 마시고 얼른 행군을 되돌려 들이치면 성공할 수가 있습니다."

"안 된다. 되돌릴 수가 없다. 3차가 안 되면 4차가 있고 4차가 안 되면 5차가 있다. 짐은 네 말대로 내년엔 꼭 설욕을 하고 말겠다."

황제는 그렇게 대답을 했지만 더 이상 허세를 부릴 계제가 못 됨을 잘 알고 있었다. 분하고 안타깝기 그지없으나 막막한 처지를 달래고자 술잔만 또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신도 폐하의 신하지만 대신들이 너무한다는 생각입니다."

"짐에게 충신이 있다면 오직 옹장 너 하나뿐이다."

"폐하, 황공한 말씀을 다 하십니다."

옹장은 그처럼 실의에 빠진 황제의 유일한 말벗이 되어 확고한 신임을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취했어도 황제는 매우 위험한 인물이라 말실수를 않고자 정신을 바짝 차렸다.

"폐하, 신은 한 가지 큰 걱정이 있사옵니다."

"어떤 걱정인가?"

"하찮은 신이 이처럼 폐하와 대작을 하는 걸 백관들이 아는 날엔 신을 처형시키라는 상소를 올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짐은 만조백관은 다 필요가 없고 너 하나만 있으면 된다."

"폐하께서 그렇게 하실수록 신은 외톨이 신세가 됩니다."

"짐도 대신이란 놈들이 널 시기하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대신들이란 하나같이 제 잇속만 차리고자 짐에게 알랑댈 뿐이다. 그런 놈들에 비하면 너만큼 짐의 심정을 진정으로 헤아려 주는 자는 없다. 한 마디로 너를 뺀 모두는 간신들에 지나지 않는다."

"폐하, 대신들을 전부 간신들로만 치부를 하시면 안 되옵니다."

"짐이 회군 결정을 내리자 놈들이 보인 태도가 어떤 것인지 너도 잘 봤지 않는가? 안타깝기는커녕 모두가 지당하다는 태도만 보였지 한 놈도 말리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옹장만은 달랐다. 잔을 받아라."

옹장은 황제가 술잔을 내밀자 황공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뭘 하느냐? 어서 잔을 받지 않고?"

황제가 손수 술병을 들자 옹장은 무릎으로 다가들었다. 엎드린 자세로 딸아 준 술잔을 받아 들고 입에 대고 마셨다.

"옹장, 짐과 너는 동병상련의 처지가 되었구나."

"폐하, 동병상련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너는 본래 칼잡이가 아닌가?"

"그렇사옵니다만."

"짐은 꺼우리에게 당했다. 너도 그쪽 칼잡이한테 당했잖은가?"

황제의 말에 옹장은 쓴웃음만 머금었다.

"폐하의 말씀대로입니다만 신도 꼭 복수를 하고 말 것입니다."

"암, 그래야지. 그런데 짐과 너는 같은 점이 또 있다."

"폐하, 어떤 점이 같다는 말씀입니까?"

"사람들을 많이 죽인 게 똑같지 않은가?"

옹장은 속으로 벌래 씹은 심경이 되고 말았다. 백성들은 황제를 두고 사람을 죽이려고 세상에 태어났다는 말들을 했다. 그런데 자신을 거기다 끌어다 붙이는 것은 불쾌하기가 짝이 없었다.

"옹장, 내일 짐은 한 놈을 죽여서 건방진 대신들의 기를 꺾어놓겠다."

"폐하, 이번에는 누구 차례가 되겠습니까?"

"곡사정이다."

황제는 도망을 쳤던 곡사정을 본보기로 삼을 속셈을 드러냈다.

"폐하, 곡사정을 죽이기보다 이용할 방법을 찾으옵소서."

"곡사정을 뭣에 이용할 수가 있단 말인가?"

"곡사정은 배반자이나 꺼우리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바로 죽이지 마시고 도움이 될 조언을 구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배반자로부터 무슨 조언을 구하란 말인가?"

"폐하, 배반자라도 목숨을 구하고 싶은 건 인지상정입니다. 곡사정에게 목숨을 붙여주겠단 미끼를 던지시면 꺼우리의 속사정을 털어놓을 것입니다. 그걸 알고 나서 처형을 해도 되옵니다."

"옹장의 말도 일리는 있겠다. 지금 끌어다 한번 말을 들어보자."

황제의 명을 받고 옹장은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곡사정은 형틀에 묶인 채 끌려왔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바짝 쳐든 채 황제를 향해 먼저 반말 짓거리로 입을 열었다.

"양가야, 지금 여기서 노닥거릴 때가 아니다."

황제는 마시던 술잔을 팽개치고 호통을 쳤다.

"이런 못된 놈! 신하로써 그런 무례한 말버릇을 쓰다니?"

"나는 이제 그대의 신하가 아니다."

"짐의 신하가 아니라고? 짐은 서역의 오랑캐인 네놈에게 높은 관직을 주었다. 그 은혜를 모르고 꺼우리와 밀통을 했고 발각될 게 두려워 도주를 했던 놈이 아닌가? 네가 사람이긴 한가?"

"나는 못된 황제의 신하 노릇이나 할 사람은 아니다."

"옹장, 저 방자한 놈이 혀를 못 놀리게 당장 베어 놔라."

옹장이 명령을 받고 칼을 빼들자 곡사정이 외쳤다.

"혀가 아니라 목을 쳐라. 시간을 끌면 더 심한 말만 나온다."

황제는 분노가 극에 달했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손을 내저었다.

"옹장, 그냥 놔둬라. 놈이 원하는 바를 해 주면 안 되겠다."

곡사정은 그런 황제의 부아를 더욱 질렀다.

"살인마, 양가야. 무슨 속셈으로 주저를 하는가?"

황제는 분노로 전신이 부들거렸지만 억지로 참고 입을 열었다.

"곡사정, 짐이 널 부른 건 조언을 듣고자 함이었다."

"양광, 내게 무슨 조언을 들을 게 있겠는가?"

"그대는 꺼우리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므로 짐을 위해 도움이 될 조언을 해다오. 도움이 되면 목숨을 부지하게 해 주겠다."

곡사정은 한동안 황제를 물끄러미 보다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나는 포악한 학정에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살리고 싶을 뿐이다. 사람을 죽이길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자에게 내가 무슨 조언을 하겠는가?"

"곡사정, 사람들은 짐이 단지 부황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은 행복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건 천만부당한 말이다. 짐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더라도 실력으로 천자가 될 사람이다. 막중한 자리를 지키자면 강하게 다스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줄 순 없겠나?"

"듣기 싫다. 그대는 제정신이 아닌 자다!"

"곡사정, 너는 꺼우리와 한통속이었던 게 드러날 게 두려워 도망을 쳤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끝내 버림을 받고 끌려와서도 세상은 다 그런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가? 그렇지만 네가 짐을 위해 꺼우리를 꺾을 방도를 알려 준다면 모든 죄를 용서하고 다시 높이 쓰겠다."

"양가야, 조언해 줄 게 있다면 고구려 침공을 그만 둘 일이다. 너는 그보다 본국에서 거세게 번지는 반란의 불길을 막을 게 더 급하다. 민심이 떠난 이상 군심마저 곧 떠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목숨을 보존하기조차 어렵게 되니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겠다."

황제는 그 말에 잠시 멍청해지는 표정이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민심이 떠나면 군심(軍心)도 떠날 것이었다. 곡사정의 말마따나 자신에겐 열 명의 신하보다 단 한 명의 병사가 더 필요했다. 그 점을 깨닫게 되자 몸이 으스스 떨리게 되었다. 그동안 자신은 잘한 점보다 못한 점이 더 많아 벌어진 결과라면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았다.

"곡사정, 짐이 그렇게도 잘한 게 단 한 가지도 없다는 말인가?"

곡사정은 황제의 말에 대답했다.

"내가 생각하기엔 잘한 점이 없지도 않다."

"그게 뭔가?"

"연전에 그대는 타국인에게 물건을 팔 때 돈을 많이 받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다. 그건 매우 좋은 모습으로 비쳤다. 그로 인해 타국의 왕들은 수국의 재정이 넉넉함으로 알고 두려움에 많은 복속이 이뤄졌다. 그게 바로 천자의 군림하는 자세이고 진정한 치적이라 하겠다."

"짐은 그대의 말을 경청하겠다. 그러나 천자는 권위만 가지곤 신하들을 다잡고 국정을 수행해 나갈 수가 없다. 때론 타국을 정벌해서 영토를 확장시켜 강국으로 군림을 해야만 천자의 권위를 세울 수가 있다."

황제가 하는 말에 곡사정은 반박을 했다.

"짐이 고구려 정복에 나섰던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음을 너도 잘 알지 않는가? 또 넓은 중원 땅과 많은 백성들을 다스리자면 강압책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목적은 왕조의 안정을 기하려는데 있다. 또 백성들은 당분간 그만한 고통쯤은 감내할 것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정복 길에만 나설 것인가?"

"짐은 꺼우리 정복에 실패한 것을 인정한다. 그 이유를 지적해 다오."

"그 대답은 간단하다. 정복할 대상을 잘 못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수국과 고구려 병사들의 질이 다름도 알아야 한다."

"병사들의 질이 어떻게 다르다는 말인가?"

"고구려 병사는 죽기로 싸우지만 수국 병사들은 우쭐댈 줄만 안다. 전투는 피하고 노략질에만 눈을 밝히는 병력에 무슨 기대를 걸겠는가?"

황제는 수긍이 가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하긴 아무리 많은 병력과 군비를 쏟아부은들 싸울 의지가 없는 병력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므로 뻔한 결과로 초래하게 된 것이었다.

"짐도 부족했던 점을 반성하게 된다. 그렇지만 신하들이란 자들은 어떤가? 패전의 책임을 짐에게만 돌리려고 한다. 뿐더러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책임은 망각한 채 짐만 비방하려고 드니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황제는 옹장에게 곡사정을 도로 끌고 가게 명령했다.

이튿날 진중엔 황제의 중대한 발표가 있을 것이란 말이 퍼졌다. 장졸들은 혹시 회군을 취소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그럴 경우엔 다시 도망칠 생각들만 하고 있었다.

진중엔 대를 높게 세워놓고 그 주변을 수많은 군기(軍旗)들로 둘러쌌다. 부대마다 장수들이 직접 병력을 끌고 도열했다. 장막을 나선 황제는 위엄 있게 대 위로 올라가 섰다.

우문술이 목청을 높여 선창을 했다. 그러면 도열해 선 장졸들이 따라서 복창을 했고 그 소리는 우레와 같이 퍼져나갔다.

"황제 폐하, 만만세."

"대 수국 만만세."

황제는 위엄 있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장졸들에게선 질서 정연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둘러보면 볼수록 도무지 군대로 볼 수가 없는 무리들이었다. 그리고 거기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비치는 것 같아 한심한 마음만 더해졌다.

"짐은 회군을 했으나 정복은 끝나지 않았다."

황제의 첫마디에 기쁨에 젖어 있던 장졸들은 숨들을 끊었다. 그러나 장수들은 손짓으로 장졸들에게 호응을 하라는 지시를 했다. 장졸들은 마지못해 와하는 소리를 조금 내다 말았다.

장졸들의 시원치 않은 호응 소리에 황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짐은 회군한 뒤 장졸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하겠다."

그 말에는 장졸들이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짐은 구려 정벌을 통해 너무도 느낀 점이 많고 반성도 크다. 무엇보다 장졸들의 소중함을 절감하고 있다. 구려는 금이 많이 나는 땅이니 내년엔 금을 캐러 가자. 장졸들이 금덩이를 하나씩 얻게 해 주겠다."

장졸들은 황제가 하는 소리가 무슨 뜻인지 몰라 다시금 표정들이 굳어들었다. 금덩어리를 얻게 해 준다는 감언이설은 또 출병을 하겠단 의중을 드러낸 것이라 썰렁해진 분위기가 되었다.

"짐은 며칠 뒤 장졸들에게 승전 축하연을 베풀겠다."

장병들이 화답하는 환호성 속에 황제는 자기 장막으로 들어가 버렸다.

장수들은 곧 잔치 준비에 착수했다. 잔치를 벌일 장소는 망도(網都)와 석가장(石家莊) 사이로 잡았다. 먼저 그쪽으로 군량미를 실은 마차들을 보내 마을마다 나눠주고 술을 담게 했다. 또 망도와 석가장의 현감들에겐 닭 1천 마리와 돼지 5백 마리를 바치는 부담을 지웠다.

황제는 닷새 뒤 잔치를 벌일 장소에 당도했다.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장막으로 백관들이 모이게 했다. 우문술은 그 이유를 옹장으로부터 알게 되어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폐하, 반역자 곡사정을 어찌하시렵니까?"

"그 자는 죽어 마땅하지 않은가?"

"폐하, 지당한 말씀입니다."

"짐은 곡사정을 징벌해서 백관들에게 본보기를 삼고자 한다. 어리석게 오랑캐를 믿고 짐을 배반하고 도망을 쳤다. 그 말로가 어떤 것임을 똑똑히 보게 만들어 모두가 가슴 새겨 두게 하려 함이다."

백관들도 황제가 곡사정에게 잔혹한 형벌을 가해 간담을 써늘케 만들 의도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밖에 큰 가마솥 하나가 걸렸고 장작을 쌓아둔 것을 보고 여간 들 의아해하지 않았다.

옹장이 들어와서 아뢰었다.

"폐하, 형벌을 가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막을 나섰다. 백관들도 따라나서자 잠시 뒤 몸이 묶인 곡사정이 끌려왔다. 병사들은 백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곡사정을 가마솥에 들여앉혔다.

병사들은 가마솥에 물을 채워 곡사정은 얼굴만 내놓게 되었다.

"가마솥에 불을 지펴라."

옹장이 내린 명령에 병사들은 불을 붙였다.

"짐은 곡사정을 삶아 백관들에게 국물 맛보게 해 주겠다."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에 백관들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마솥 밑에선 장작에 지핀 불이 서서히 타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곡사정은 담담한 표정으로 들어앉아 있었다.

곡사정은 황제와 단 둘만이 마주 했을 땐 욕설까지 퍼부었지만 지금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물이 점점 뜨거워져서 심한 고통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백관들은 차마 볼 수가 없는 광경 앞에 공포에 질리고 더러는 눈을 가리거나 몸을 돌려세우게 되었다. 도저히 사람으로 써 할 수가 없는 짓을 보는 고통 또한 큰 고문이 아닐 수가 없었다.

곡사정의 입에선 끝내 고통을 참지 못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 황제에 대한 욕설이 터지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기를 쓰다가 한순간 그의 머리가 물속으로 잠겨 들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황제가 눈물을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신에게 마구 욕설을 퍼부을 줄로만 알았던 곡사정이 의연하게 죽는 태도를 보며 자신은 완전히 졌다는 패배의식을 느꼈다.

백관들은 황제가 눈물을 흘리는 걸 보며 의아함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이 저지른 짓이 너무 지나쳐 반성을 하는 것인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황제는 갑자기 입을 열고 강한 음성으로 말했다.

"백관들은 곡사정을 끓인 국물을 한 모금씩 마셔라."

옹장은 그 명령이 떨어지자 큰 국자를 들고 가마솥 앞으로 다가들었다. 그리고 국물을 듬뿍 떠들더니 맨 먼저 우문술에게 내밀었다.

"우문술 마셔라."

황제의 명령을 받은 우문술은 움찔하며 국자에 입을 대기만 했다.

"빨리 마시지 못할까!"

우문술은 자기도 모르게 뜨거운 국물을 꿀꺽 마셨다. 그때부터 국자는 백관들에게 차례대로 돌려졌다. 모두는 고구려 정벌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끔찍하고 황당한 벌을 받는 것이었다.

호리소코루에선 서서히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양신은 병사들 중 젊고 무예가 뛰어난 2백 명 가량을 선발해 특공대를 조직했다. 적진 침투 훈련으로 들어간 특공대 대원들은 전원이 한족 군복을 입고 행동을 하게 되었다.

수국 군은 망도와 석가장 사이에 이르렀고 거기서 연회를 베푼다는 정보를 이미 입수하고 있었다. 양신은 특공대의 훈련을 어느 정도 마친 터라 흑발과 더불어 그쪽으로 출동했다.

동돌궐 군 1천여 명은 석가장 근처로 접근한 뒤 산속에 은신을 했다. 수국 군의 야영지를 살펴본 결과는 병사들의 군기가 엉망인 상태였다. 뿐더러 진지 안은 음식과 술을 파는 백성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어 동돌궐 정탐병들도 그 틈에 끼어서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양신과 흑발은 어수선한 상태의 수국 군 진지를 직접 들어가 보기로 했다. 두 사람은 한 밤중에 종마가 있는 장소와 경비 상태를 알아볼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호장님은 그냥 계십시오. 저 혼자서 침투를 하겠습니다."

"양천호장 혼자서 가능하겠소? 위험하니 조심을 하시오."

"정탐 병들의 보고에 의하면 적진은 한심한 지경이랍니다."

양신의 대답에 흑발도 동조하는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수국 군 장수들은 휘하 병력의 수자조차 제대로 파악을 못하는 형편이라오. 우린 먼저 종마들이 있는 데를 확실히 알아 두는 게 급선무요."

양신은 수국 군 진지 속으로 침투를 했다. 정탐병들은 그를 군마들을 모아둔 장소로 데로 데려갔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말들 중엔 종마들이 보이질 않아 그대로 돌아오고 말았다.

"천호장님, 군마들을 모아둔 장소는 다른 데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경비병들의 수자가 의외로 많지가 않음을 알아내 안심이 됩니다."

"그렇다면 종마들이 있는 곳을 어떻게 알아낸다?"

"저는 장소를 알아도 어둠 속에서 종마를 구별해 낼 수가 없습니다."

"양천호장은 못하나 우리 병사들은 대번에 알아볼 수가 있소. 내일 밤엔 나도 들어가서 종마들이 있는 곳을 함께 알아보기로 합시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튿날 밤 양신과 흑발은 정찰병 3명만 끌고 수국 진지 속으로 침투했다. 진지 안엔 장졸들의 숙소로 쓰는 수많은 천막들이 있었다. 정탐병들이 먼저 살펴봤으나 끝내 알아내질 못했다.

양신은 어두운 진지 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많은 소형 천막 사이에 드문드문 있는 큰 장막들은 장수들 것이고 중심부에 있는 가장 크고 화려한 장막에 황제가 있었다.

"천호장님, 황제가 있는 큰 장막의 주변에서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황제의 장막 주변에서 뭘 찾는단 말이요?"

"큰 장막 후면에 크고 길이가 긴 장막들이 있습니다."

양신의 말대로 그런 천막들이 4개나 있었다. 흑발은 그것들에 주목을 하면서 말했다.

"저런 천막들은 보급품을 두는 데가 아니겠소?"

"그럴 수도 있지만 그 안에 종마를 두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양천호장은 왜 그런 생각을 하오?"

"양광은 종마들을 매우 아낄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과 가까이 두려고 할 것임으로 그런 추측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경비병들이 보이질 않을까?"

"아무튼 그쪽으로 접근해서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나도 양천호장의 말대로 해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요."

양신은 이번엔 정탐병 한 명만 데리고 4개의 장막들 쪽으로 접근해 들었다. 장막 틈으로 안을 살펴본 정탐병은 고개를 끄덕였다. 종마를 확인하자 돌아가서 흑발에게 알렸다.

이튿날 저녁 무렵부터 수국 군 지지에선 황제가 베푸는 승전 축하연이 벌어졌다. 양신은 밤이 이슥해지기만 기다렸다. 작전을 펼치기 전에 흑발을 또 설득해 볼 마음을 먹었다.

"천호장님, 저라면 이 기회에 1천여 병력을 전부 투입시켜 양광의 장막을 급습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면 양광을 생포할 수도 있고 수국도 멸망을 시켜 버릴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대체 양신님처럼 못 말릴 사람은 처음 보오."

"천호장님은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처럼 두둑한 뱃장은 부럽기가 짝이 없으나 그만 접으시오."

"왜 접으라는 말씀입니까?"

"나도 양신님처럼 그런 큰 욕심을 한번 부려봤으면 좋겠소. 그러나 그건 내 권한 밖의 일이고 이번 작전에선 병력을 지원하는 임무만 지녔소. 그러니 양신님은 종마 탈취나 확실하게 성공을 거두길 바라겠소."

양신은 아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며 대꾸했다.

"종마 탈취 작전은 차질 없이 수행해 내겠습니다."

"양신님은 미리 알아둬야 할 점이 또 있소."

"천호장님, 어떤 점을 알아두라는 말씀입니까?"

"공자님이 이번 작전을 양신님에게 맡긴 이유를 알아둬야 하오."

"이유가 뭔지 말씀해 주십시오."

"공자님은 종마 탈취의 성패에 따라 취할 태도가 달라지 게 되오."

"어떻게 달라진다는 말씀입니까?"

"성공하면 공자님의 공적이 될 것이요."

"저도 그렇게 하고자 해서 하는 일입니다."

"수국은 이번 작전을 동돌궐의 소행으로 의심하게 될 것이요."

흑발의 말에 양신은 고개만 끄덕였다.

"반면에 힐리 공자는 수국의 반란군이나 고구려 군에 돌리게 만들 것이요. 그런데 그럴 경우 실제로 행한 양신님에 관한 처분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나로선 걱정을 하게 되지 않을 수가 없겠소."

"천호장님은 어떤 걱정을 하시게 됩니까?"

"경우에 따라선 양신님의 이름이 밝혀질지도 모르게 되기 때문이요."

양신은 또 고개만 끄덕였고 흑발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되면 수국으로 들어가려는 양신님은 큰 영향을 받게 되오. 나는 그 점 때문에 우려하는 바가 매우 클 수밖에 없겠소."

"저도 그 점은 큰 걱정입니다. 물론 특공대원 전원은 한족 복색으로 한족 행세를 하며 작전에 참여하게 됩니다. 고구려인이 낀 게 알려지지 않기 바랄 뿐입니다. 그래야 저는 수국 땅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힐리 공자님은 다른 생각을 하고 계시오."

"힐리 공자님은 어떤 생각을 하시기에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힐리 공자님은 양신님이 동돌궐에서 자신을 돋게 만들려고 하오."

"저는 작전을 꼭 성공을 시켜야만 수국으로 갈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소. 나는 양신님 편이라 그런 걱정을 하게 되오."

"감사합니다. 다만 성공을 하면 밀두도는 꼭 돌려받고 싶습니다."

"밀두도는 성공 즉시 내주고 두둑한 사례금도 받게 될 것이요."

양신은 밀두도를 되찾고 동돌궐을 떠날 수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었다. 때문에 사례금 따윈 바라질 않지만 성공을 거두고 수국 땅으로 들어가자면 얼마간의 돈은 필요할 일이었다.

이튿날 해 질 녘부터 수국 군 진지에선 승전 축하연이 벌어졌다. 축제장이 된 진지는 불야성처럼 횃불들을 밝혀놓았다. 전 병력은 술을 마시며 여흥을 즐기는 분위기가 서서히 무르익어 갔다.

밤은 점점 깊어져만 가고 노래와 춤을 추던 장졸들은 하나 같이 몸들을 가누지 못하게 되었다. 끝내는 하나둘씩 그 자리에 쓰러져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가며 조용해져 갔다.

양신은 드디어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 진지 속으로 침투했다. 1백여 명의 특공대가 움직임을 시작했다. 종마를 지켜야 할 경병들마저 자리를 지키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특공대는 너무도 수월하게 접근해들 수가 있었다. 4대로 나눠 역할 분담을 맡고 훈련을 했기 때문에 그대로 행동을 했다. 1대는 황제의 장막 쪽을 2대는 장수들의 장막 쪽을, 3대는 경비병들의 장막 쪽을 맡은 가운데 4대는 종마를 끌어내는 행동대로 움직이게 되었다.

4대는 도둑고양이처럼 소리를 죽인 채 큰 장막들로 접근해서 종마들을 끌어내었다. 보초들이 없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전부 끌어낸 종마들을 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양신은 민첩하게 일을 성공시키자 도리어 허탈해지는 기분이었다. 한낱 도둑질을 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흑발은 종마들을 손에 넣자 잽싸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동돌궐 병력 1천 명은 별 수고를 드리지 않고 종마들을 되찾았다. 뛸 듯이 기뻐하며 곧장 서쪽으로 나가지 않았다. 일부러 길을 돌아 여양산맥(呂梁山脈)을 끼고 북상했다. 그런 뒤에 호리소코루로 향하는 길을 택해 나가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밤새도록 행군을 한 끝에 새벽녘엔 고구려 국경과 가까운 역현(易縣)에 이르렀다. 흑발로부터 고구려 국경이 가까워졌단 말을 들은 양신은 새삼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에 그리운 여선의 얼굴이 겹쳐졌다.

"여선, 그대가 너무 보고 싶다. 밝은 달 속에 그대 얼굴이 있는데 내가 보이는가? 바람에 실어 내 마음을 그대에게 전하겠소."

양신은 허공에 대고 말한 뒤 이번엔 주랑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제부턴 다시 중원 땅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마음을 굳혔다. 밤을 새워 행군한 끝에 이튿날 새벽 무렵 호리소코루에 당도했다.

병사들은 소리 높여 만세를 불렀다.

"종마를 되찾았다. 우리가 승리했다!"

그 소리에 놀란 주민들이 뛰쳐나와 환호성으로 응답을 했다.

그때 힐리는 호리소코루에 와 있었다. 그는 탈취해온 종마 42 필을 둘러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직접 말들을 점검하며 음성을 높여 종류 별로 말들의 수자를 파악했다.

"부루가 9 필, 절라는 8 필, 가라가 7 필, 고라는 10 필, 가리온이 4 필, 사류가 4 필에 덤으로 딸려온 구렁말 5 필까지 합쳐 총 47 필이로군!"

양신은 힐리에게 물었다.

"공자님, 저는 종류에 따라 말들의 이름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고구려에서도 들어 본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고구려에선 백마를 센말이라고 부르는데 전체가 흰색입니다. 그런데 이 중엔 흰 몸에 갈기와 꼬리만이 흑갈색인 말도 있군요? 저는 젤 마음에 듭니다."

"흰 몸에 갈기와 꼬리만 흑갈색인 것은 가리온이다."

"공자님, 말의 색깔에 따른 명칭이 있듯 특성도 있습니까?"

힐리는 말들에 관한 자부심이 커서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돌궐의 영역은 고구려보다 서너 배나 넓다. 때문에 말들도 많고 종류와 성질이 여러 가지로 다른 말들은 쓰임새도 다르다."

"고구려에선 털빛에 따른 명칭들이 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돌궐인은 말들의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힐리는 그에 대한 설명도 해주었다.

"먼저 부루를 들겠다. 몸 전체의 털 색깔이 연한 황색은 황부루이고, 연한 붉은 색을 띠면 적부루, 연한 청색은 청부루로 불린다. 다음은 절라 계통으로 가장 많다. 몸 전체가 짙은 붉은 색이 특징이다. 그런데 갈기와 꼬리가 진한 고동색이면 부절라로 부른다. 또 몸 전체가 연한 갈색이고 갈기와 꼬리가 흰색이면 표절라로 부른다. 그 다음은 고라로 체구는 절라와 비슷하나 체구가 좀 커서 전투용으로 쓴다. 또 고라와 비슷한 가라 계통이 있다. 가라는 몸이 짙은 회색이다. 그러나 갈기와 꼬리만 흰색일 땐 표가라이고, 몸 색이 연한 고동색에 갈기와 꼬리가 짙은 갈색이면 달가라로 부른다. 돈점충은 몸이 달가라와 같은 색인데 흰 점들이 박혀 있다. 그러나 가장 많은 것은 몸 전체가 흑갈색을 띤 사류가 되겠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것은 구렁말이다."

"공자님, 저는 말들의 종류가 그처럼 많은 줄은 몰랐고 쓰임새가 다른 줄도 몰랐습니다."

"말들은 모두 중요시한다. 돌궐인이 말의 성질을 잘 알아 쓸모에 맞춰 쓰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여러 종류의 말을 길들이는 것이다. 그 일을 잘하는 자는 진정한 사내로 행세를 할 수가 있다."

양신은 고개를 끄덕인 뒤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공자님, 저는 이만 작별을 드리고 수국으로 떠나겠습니다."

힐리는 그 말에 좀 당황을 한 듯 대답을 했다.

"양신, 며칠 좀 쉬다가 떠나면 어떻겠는가?"

"공자님, 저는 하루가 여삼추와 같습니다."

"알겠다. 그렇다면 얼마간의 보상금을 내주겠다."

"공자님, 보상금은 내리시지 않아도 됩니다."

양신은 그런 대답을 했지만 얼마간의 돈을 지닐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힐리는 비로소 밀두도를 돌려주었다. 양신은 빌두도를 돌려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거듭 감사를 표했다.

"공자님, 저는 연개소문에게 보낼 서찰이 있습니다."

"그걸 보내달라는 것인가? 내용은 어떤 것인가?"

"제가 다시 수국 땅으로 들어가게 된 것과 주랑을 찾고 옹장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는 내용을 썼습니다."

"알았다. 연개소문에게 전해 주겠다."

이튿날 아침에 흑발이 큼직한 가죽 주머니 두 개를 들고 왔다.

"양신님, 받으시오."

"흑발님, 웬 가죽 주머니를 둘씩이나 제게 주십니까?"

"가죽 주머니 중 하나는 양신님이 동돌궐에 올 때 지녔던 것이고, 또 하나는 힐리 공자님이 내리신 은전이요. 속을 한번 봐 두구려."

양신은 동돌궐에서 압수를 당한 것은 놔두고 힐리가 내려준 것을 열어보고 나서 여간 놀라지 않았다.

"흑발님, 웬 금은보화가 이렇게나 많이 들어 있습니까?"

"힐리 공자님은 성공할 경우 내릴 보상금을 미리 정해 두셨소. 양신님은 장차 교역을 할 마음을 먹고 있으니 장사 밑천에 보태시오."

"그렇지만 이렇게나 많은 돈을 받아도 되겠습니까?"

"힐리 공자님은 양신님이 떠나질 않기를 바라오. 그러나 교역에 관심이 큰 걸 알고 동돌궐에서 교역을 한다면 도와주겠다고 하셨소."

"중원 땅에서 일을 끝내게 되면 다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공자님이 내리신 지시가 있소."

"어떤 지시입니까?"

"양신님은 말을 바꿔 타고 가시오."

"어떤 말로 바꿔 타라는 말씀입니까?"

"힐리 공자님은 이번 작전이 성공한 기쁨이 크시오, 종마들 중 양신님이 큰 관심을 보였던 종마를 내주라는 지시를 내리셨소."

"저는 종마는 필요가 없습니다. 타던 말을 그대로 타겠습니다."

양신이 사양을 하자 흑발이 말했다.

"양신님, 공자님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바꿔 타고 가시오."

흑발은 말하고 병사가 끌고 온 가리온을 가리켰다.

"양신님이 가리온을 타면 풍채가 더욱 좋아지겠소."

"흑발님, 많은 말 중에서 왜 가리온을 내주십니까?"

"돌궐인은 가리온을 타면 행운이 따른다고 믿소."

"그러면 가리온을 고맙게 받겠습니다."

"양신님의 행운을 빌겠소. 그리고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소."

양신은 가리온 앞으로 다가들었다. 몸 전체가 백마이나 갈기와 꼬리만은 흑갈색이었다. 튼튼한 다리에 허리가 늠름했다. 양신은 한눈에 마음에 들어 올라타 보니 세상이 더 넓게 보이는 것 같았다.

명마를 타는 건 너무 과분 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젊은 나이로 많은 수난을 겪은 터였다. 앞으론 좋은 일이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에 행운의 말을 고맙게 받기로 했다.

"흑발님, 서찰을 꼭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양신님, 행운을 빌겠소."

양신은 마침내 말 배에 박차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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