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무상(無常)
사막과 초원의 땅인 돌궐의 겨울은 깊고도 길었다.
지난해 가을 카라발가순에 당도한 양신은 이유를 모른 채 감옥에 갇혀 겨울을 나고 새해를 맞았다. 그동안 여양에 남겨둔 가족들 걱정과 자신의 앞날에 대한 불안 속에 지내야 만했다.
양신은 동돌궐에 아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다갈촌 검술대회에 매회 참가를 했던 흑발이었다. 간수에게 알아보니 천호장(千戶將)인 흑발은 동돌궐에 예속된 설연타(薛延陀)가 반란을 일으켜 진압을 하러 출정 중이었다. 때문에 카라발가순으로 언제 돌아올지 몰랐다.
2월 초로 접어들고 흑발은 임무 수행을 마치자 카라발가순으로 돌아왔다. 그는 양신이 감옥에 갇힌 걸 알게 되자 한 걸음에 달려왔다.
"양신님이 이곳 감옥에 갇혀 있을 줄 누가 알았겠소?"
"흑발님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이젠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양신은 반가움과 기대감에 차게 되었다.
"나는 양신님이 수국으로 도망을 쳤단 소문을 들었고,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는지를 모르고 있었소. 그런데 이곳에 오게 된 사정도 듣게 되었소. 그동안 마음고생이 오죽이나 컸겠소? 그래도 한편으론 이렇게 된 것을 불행 중 다행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소."
"흑발님, 감옥에 갇힌 걸 불행 중 다행으로 생각을 하다니요?"
"양신님은 감옥에 갇히게 된 이유가 뭔지 몰라서 그렇소."
"저도 그 이유를 몰라 답답할 따름입니다."
"양신님은 이곳에 왔던 첫날에 일어났던 일들을 기억하오?"
"예, 전부 생각납니다. 저는 궁정 앞에 이른 뒤 수비병들에게 까닭을 모를 공격을 받았습니다. 너무도 다급한 상황이라 맞설 수밖에 없었는데 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양신님은 큰 결례를 저질렀기 때문에 공격을 받은 것이요. 칸이 계신 궁정 앞에선 무릎을 꿇고 세 번 절을 해야 하는데 그러질 않았소."
"저는 그걸 몰라서 못했습니다. 처음 온 타국인이 몰라서 예의를 못 갖추었을 뿐인데 그렇게 공격을 가하면 되겠습니까? 뿐더러 절 감옥에 처넣고 가둬두는 것도 너무 지나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양신님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니 그건 뭡니까?"
양신의 질문에 흑발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양신님은 궁중의 시녀들을 만났던 게 큰 화근이었소."
"제가 궁중의 시녀들을 만났다니요? 저는 목이 말라서 시냇가로 나갔고 거기에 있던 여인들에게 그릇을 빌려 물을 떠먹을 뿐입니다."
"그들은 시녀들이었소. 양신님은 그들과 얘기를 나눴소."
양신은 의아해하며 그날의 일들을 회상하게 되었다.
"얘길 나눴지만 시녀들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게 큰 죄가 됩니까?"
"양신님은 시녀들에게 그릇을 빌리려고 한어를 쓰지 않았소?"
"한어를 썼습니다. 그랬더니 그녀들도 반갑게 한어로 대답을 했고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었는데 한어를 쓴 것도 죄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시녀들과 대화를 나눈 것도 한어를 쓴 것도 죄가 아니나 양적선의 밀서를 가지고 중원 땅에서 왔다는 말을 했지 않았소?"
"그런 말을 했습니다."
"바로 그 말이 이런 사태를 빚게 만들었소."
양신은 비로소 안색이 굳어들었다. 생각해 보니 여간 큰 부주의가 아니었다. 비밀스러운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은 여러 면에서 주의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런데 그러질 못한 자책감이 일었다.
"제가 한어를 쓰고 임무를 함부로 발설한 건 큰 실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감옥에 넣어 가둬둘 수가 있겠습니까?"
"거기엔 또 다른 문제도 있소."
흑발의 말에 양신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흑발님, 또 다른 문제는 무엇입니까?"
"시녀들이 한족이기 때문이요."
"흑발님, 시녀들이 한족이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동돌궐 궁정에선 왜 한족 여인들을 시녀로 쓰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계민 칸의 황후는 수국 황실의 의성 공주였소. 칸의 황후에겐 가하돈이란 호칭이 붙소. 가하돈은 시녀들을 본국에서 데려왔기 때문이요."
양신은 그제야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인들은 처음엔 매우 반갑게 대하며 본국의 사정을 이것저것 물었다. 그러다가 양현감의 밀서를 지니고 왔다는 말을 듣자 돌연 안색들이 변해 몸을 돌려 떠나버렸다. 그때는 왜 그러는 것임을 몰라 이상하게만 여겼었다.
"시녀들은 처음에 양신님이 본국 사람이라 매우 반겼던 것이요. 그런데 반란을 일으킨 양현감의 밀서를 지니고 왔다고 하니 어찌 되겠소? 즉시 달려가 가하돈께 보고했고 그로 인해 큰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소."
"흑발님, 저는 한족 시녀들인 줄은 꿈에도 짐작을 못했습니다."
양신은 모든 결과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가하돈은 시녀들로부터 양신님에 관한 보고를 받자 즉시 시피 칸에게 양현감의 밀사로 온 자를 처형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소."
"제가 감옥에 갇히게 된 이유는 가하돈 때문이군요?"
"그렇지만 시피 칸은 처형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소."
흑발은 가하돈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서 헐뜯는 말까지 했다.
"계민 칸은 의성공주를 맞기 전에 여러 명의 자식들을 두셨소. 형제들은 모두가 칸 자리를 노렸지만 그 자리에 오르려면 가하돈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오. 그런데 계민 칸이 승했소. 가하돈은 돌궐족 혼속을 알고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새 칸을 세우고 다시 가하돈이 되려고 했소. 그러나 자식들은 누구들 계모를 가하돈으로 맞고 싶겠소? 그러나 시피 칸이 응해서 뜻을 이루게 되었소."
양신은 자신이 감옥에 들어가게 된 사정을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양신님은 그동안 목숨을 부지한 것만도 큰 다행으로 여겨야 하오."
"그렇지만 저는 언제 처형을 당하게 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 목숨을 지켜준 분이 계셨기 때문이요."
흑발의 말에 양신은 의아하게 반문했다.
"흑발님, 제 목숨을 지켜주신 분이 계시다니요?"
"그분은 힐리 공자님이오."
양신은 그 말에 떠올린 사람이 있었다. 전쟁 전 순무 길에 을지문덕이 만났던 힐리(詰利) 공자였다. 그리고 동돌궐에 와서 첫날 궁정 앞에서 만났던 장수가 그였음도 알고 있었다.
"힐리 공자님은 시피 칸의 이복동생 이시오. 동돌궐의 군권을 쥔 실력자로 영향력이 매우 큰 분이요. 그런 위치에 있기 때문에 양신님의 목숨을 지켜 주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요."
"흑발님, 공자님은 왜 제 목숨을 지켜 주셨을까요?"
"첫째는 양신님이 고구려인이고, 두 번째는 양현감의 밀서를 전하는 임무를 맡았고, 세 번째는 수국에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요."
"흑발님의 말씀을 들으니 저는 크게 마음이 놓이게 됩니다."
양신은 안도를 표하는데 흑발이 물었다.
"양신님은 어떻게 양현감의 밀사가 되어 여길 오게 되었소?"
"저는 사부님에 관한 일을 알아보고자 수국에 침투했습니다."
양신은 그런 대답을 하고 자신은 수국의 내정을 정탐하는 임무도 겸하게 되었다는 점, 또 을지문덕이 양현감에게 보내는 서찰로 수국의 대정직을 얻게 되고 반란을 부추기는 데도 힘을 썼음을 밝혔다.
"그렇다면 양신님을 다시 보게 되었소. 힐리 공자님도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양신님이 더욱 마음에 들어 기대가 커질 걸로 생각되오."
"수국의 반란은 고구려와 동돌궐에 다 같이 이로우면 이롭지 해가 될 건 없다는 생각입니다. 때문에 저는 이곳에 왔습니다. 그 점을 유의해 주신다면 절 그만 석방해 줄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동돌궐은 고구려와 수국 사이에 낀 난처한 입장이요. 그 점 때문에 양신님의 석방은 간단히 처리할 수가 없게 되었소."
"그렇다면 저는 어디서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겠군요?"
"그렇지만 양신님은 동돌궐에 있지 않소?"
"동돌궐에 있지만 감옥에 들어 있지 않습니까?"
양신의 항의성 반문에 흑발은 쓴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하후돈은 께선 지금도 양신님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소. 심지어 옥리를 매수해서 양신님이 먹는 음식에 독을 타려고까지 했소."
흑발의 말에 양신은 적이 놀라고 말았다.
"가하돈이 독을 타려고 했단 말씀 사실입니까?"
"사실이요. 힐리 공자는 그 일마저 미리 알아내어 막으셨소."
"그런 줄은 몰랐고 공자님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언제까지 목숨을 부지하게 될지가 의문이라 절망감은 여전합니다."
"양신님의 석방은 또 다른 변수가 있어 문제요."
"또 다른 변수는 어떤 것이 되겠습니까?"
"돌궐인은 수국과 복속 관계를 그만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들이 요. 반면 고구려완 관계를 개선하고 강화시킬 필요성이 크오."
"저도 그 점은 동감입니다."
"때문에 관망세를 취하는 입장이라 양신님을 석방하는 건 여러 가지 변수들이 걸려 있어서 어려을 수밖에 없겠소."
양신도 이해가 가는데 흑발은 화제를 돌렸다.
"힐리 공자님은 양신님에 대한 기대가 매우 크신 분이요."
"공자님은 제게 어떤 기대를 거신다는 말씀입니까?"
"힐리 공자님은 양신님이 혼자서 궁정 수비병들을 여럿 상대했던 광경을 목격했소. 그 뒤로 큰 재목이 될 걸로 보고 계시오."
"큰 재목이 될 걸로 보신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건 양신님에게 좋을 일이요."
흑발은 그 정도만 얘길 나누고 돌아갔다 며칠 뒤 감옥으로 다시 왔다.
"양신님을 내 집에 한번 초대해서 위로하는 자리를 마련하겠소. 이 일도 공자님의 배려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아두오."
그날 흑발은 양신을 감옥에서 꺼내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양신은 진수성찬의 대접을 받으며 여러 가지 얘기들을 더 나누었다.
"저는 공자님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만 수국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불안감에 잠을 못 이룹니다. 제가 하루속히 수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흑발님이 도와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나는 양신님을 돕고 싶으나 또 다른 문제가 있소."
"흑발님, 또 다른 문제는 어떤 것입니까?"
흑발은 대답을 주저하다 입을 떼었다.
"양신님의 석방은 가하돈만 아니고 건무 왕제도 원치를 않소."
양신은 그 말에 안색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제 목숨은 건무 왕제의 손에도 달렸다는 말씀이로군요?"
"그런데 양신님을 실망시킬 일은 또 있소."
"제가 실망할 일이 또 있다니 그건 무엇입니까?"
"나로선 그에 관한 얘기를 전하기가 참으로 난처하오."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답답하니 말씀을 해 주십시오."
"양신님도 종당엔 알게 될 일이므로 말을 해야 하겠소. 양신님의 가족들은 지금 수국 땅에 있지 않고 고구려로 돌아갔소."
양신은 청천벽력 같은 말에 머릿속이 하얘지고 말았다.
"흑발님, 그 말씀 정말입니까?"
"그렇소. 도해선이 수국에 침투해서 납치를 해왔다고 하오."
"도해선이?"
양신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그 사실을 놓고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에 수국 땅에 그대로 남아 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양현감의 반란에 연루되어 가족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었다. 때문에 절망감 속에서 그걸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흑발님, 차라리 잘 된 일로 치부를 해야 하겠습니다."
"양신님이 그러는 마음은 이해가 되오 그러나 그 걸로 그칠 수가 없는 문제가 또 있으니 첩첩산중이나 다름이 없겠소."
"그걸로 그치지 않을 문제는 또 무엇입니까?"
"양신님과 건무 왕제 간의 관계 때문이요."
양신은 더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양신님 또한 고구려로 송환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소."
흑발의 말에 양신은 갈수록 태산이란 생각만 들었다.
"양신님은 어려운 처지에 놓였지만 다행인 점도 없지는 않소."
"제게 다행한 점이 있다면 무얼 말씀하십니까?"
"건무 왕제의 속셈은 다른데 있기 때문이요."
"다른데 있다니요?"
"건무 왕제의 내심은 양신님이 본국에 송환되는 걸 원치 않소."
"본국 송환을 원치 않는다고요?"
"동돌궐에서 계속 억류 상태로 있기를 바라는 눈치라 그렇소. 다만 그 마음이 언제 바뀔지는 모르겠다는 점이 걱정이요."
양신도 수긍이 가고 암담한 심경은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렇지만 당장은 안심을 해도 좋을 것 같소."
흑발의 말에 양신은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건무 왕제가 제 송환을 요구하면 시피 칸께선 어떻게 하실까요?"
흑발은 그 말에 무거운 음성으로 대꾸했다.
"전에는 응하시지 않았을 것이요. 그러나 지금은 다르오. 수국과 고구려 사이에 낀 사정도 있고, 앞으로는 고구려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나로선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추측을 하게 되오. 그렇게 되는 날엔 양신님은 최악의 사태에 처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요."
"저는 어찌 되건 고구려와 동돌궐은 다시 한 편이 돼야 합니다."
"다시 한 편이 돼야 한다? 그래도 양신님은 고구려만을 생각하오?"
흑발은 반문하고 양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흑발님도 고구려와 동돌궐은 공생을 해야만 살 수가 있음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특히 동돌궐은 고구려의 철제품과 무기를 공급받아야만 끊긴 중계무역을 재개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동돌궐은 영원히 수국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동감인데 나는 도대체 양신님이란 사람을 알 수가 없소."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양신님은 도대체 무사와 안일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소. 그처럼 큰 대담성을 어떻게 지니게 되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소."
"제가 대담성을 지녔다는 건 말도 안 될 말씀입니다."
"그런 대담성을 지닌 양신님은 분명 큰 야망도 품고 있을 것이요."
양심은 어이가 없어 쓴웃음만 짓고 흑발이 다른 말을 꺼냈다.
"힐리 공자님도 큰 야망을 품은 분이요."
"공자님은 어떤 야망을 품고 계신지요?"
"칸 자리에 오를 야망이요. 때문에 세력 규합에 힘을 쓰고 계시오."
"공자님이 그러신다면 시피 칸에겐 아들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시피 칸께선 아들을 여러 분 두셨소."
"그런데 어떻게 보위를 넘보실 수가 있겠습니까?"
"칸은 본래 세습되는 자리가 아니요. 칸이 승하하면 각부의 족장들이 유능한 자를 새로 추대하게 되오. 그게 몇 차례 깨진 적은 있소만."
흑발은 대답을 하고 현재 처한 동돌궐의 사정도 들려주었다.
돌궐의 국력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는 타발(佗鉢) 가한 때였다. 그가 재위했던 동안은 중원의 한족 국가들 치고 공물(供物)을 바치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그런 그가 죽기 전에 아들에게 칸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로 인해 돌궐인은 내분이 일어나자 수국은 모략을 써 내분을 조장하고 격화시킨 끝에 돌궐인을 동서로 분열되게 만들었다. 그런데 시피 칸도 자식에게 물려줄 기미를 보여 힐리는 불만이 매우 컸다.
"힐리 공자님이 칸 자리에 오르시면 가장 먼저 동서 돌궐의 통합에 나설 것이요. 그런 야망 때문에 자주를 외치고 그 명분을 내세워 수국을 배척하는 태도를 보여 오셨소. 또 그 일로 돌궐인 전체로부터 지지와 중망을 한 몸에 사게 되셨소. 거기다 수국은 고구려 침공에 거듭 실패했고 내란 상태로 접어들었소, 돌궐인은 그만 복속에서 벗어날 기회를 맞게 되었다는 기대에 차 있소. 나는 누구보다 공자님이 칸에 오르시길 바라는 사람이라 힘이 닿는 한 적극 도우려고 하오."
"흑발님, 저도 공자님이 칸에 오르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야만 돌궐인은 전처럼 부흥을 기하고 강성해질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무 왕제가 힐리 공자님께 협조를 구하는 점도 있어서 문제요."
흑발의 말에 양신은 또 자신에 관계된 일로 생각되어 긴장했다.
"어떤 협조를 구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양신님의 억류를 원하며 그에 따른 조건이 있소."
"억류에 관한 조건이 있다니요?"
"나도 그 이유는 모르겠소. 그러나 양신님에겐 나쁠 없겠소."
"왜 나쁠 게 없다는 말씀입니까?"
"양신님이 동돌궐에서 계속 속박 상태로 있기를 바라고 있소."
"아무튼 간에 제 석방은 어렵겠다는 말씀이 되는군요?"
"힐리 공자님은 장차 고구려 왕위를 잇게 될 건무 왕제를 무시할 수가 없는 형편이요. 때문에 그런 요구를 거부할 수가 없는 입장이시요."
양신은 한숨만 흘려내는데 흑발이 말을 이었다.
"힐리 공자님은 양신님을 큰 인재로 보시는데 어떻게 생각하오?"
"제가 무슨 생각을 할 게 있겠습니까?"
"양신님은 하루속히 억류에서 벗어나길 바라고 있지 않소?"
"그렇습니다만."
"그 때문에 나는 제안을 하고 싶소."
"어떤 제안을 하시렵니까?"
"양신님이 감옥에서 벗어날 방법을 함께 찾자는 것이요."
"벗어날 방법이 있겠습니까?"
"양신님이 동돌궐에 귀화를 해서 관직을 얻는 방법이요. 그렇게 되면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가 있지 않겠소?"
"흑발님, 저는 귀화를 할 수가 없습니다."
"양신님은 동돌궐에서 새 출발을 하면 모든 걸 해결할 수가 있는데 왜 귀화를 않겠다는 말을 하는 거요? 그 이유를 알아봅시다."
"저는 공자님이 베푸신 은혜와 배려에 보답하자면 마땅히 흑발님의 권고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수국으로 돌아가서 또 처리를 해야 할 일들이 있으므로 그럴 수가 없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양신님은 수국으로 돌아가서 처리를 할 게 무엇이란 말이요?"
"불행을 당하신 사부님의 시신이라도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 사부님의 목숨을 앗은 옹장이란 자를 다시 만나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자만이 사부님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로선 어떻게 해서든 사부님의 무덤이라도 써 드려야 합니다. 그런 사정을 흑발님도 잘 아시는 터라 이해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흑발도 그 문제 때문에 양신이 수국으로 가겠다는 것을 말릴 수는 없었다. 자신은 도리어 도와줘야만 했다. 그러나 그걸 돕고자 힐리를 설득한다는 건 자신이 없는 일이었다.
"흑발님, 제가 감옥을 벗어나게 부디 힘을 좀 써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소. 나도 해결할 방도를 여러 면으로 찾고 있소."
양신은 그런 얘기를 나누고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야 만했다. 그런데 며칠 뒤 흑발이 밝은 표정으로 양신을 찾아왔다.
"양신님, 기쁜 소식이 있어 전하려고 왔소."
"흑발님, 무슨 기쁜 소식이 있는지요?"
"양신님이 석방되는 건 아니지만 일단은 감옥을 벗어나게 되었소."
"석방이 아니고 어떻게 감옥을 벗어난다는 말씀입니까?"
"감옥을 벗어나는 대신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소."
"제가 어떤 임무를 부여받게 됩니까?"
"힐리 공자님은 휘하에 큰 교역을 상단을 두고 계시오. 서돌궐과 거래를 하는데 양신님을 상단에 배속시켜 호위 임무를 맡기기로 했소."
양신은 너무도 기뻐 흥분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무렵 북방의 초원지대는 도적 떼가 부쩍 극성을 부려서 대상들이 습격을 자주 받고 피해가 막심했다. 그 이유는 반란을 일으켰던 설연타 무리가 진압을 당한 뒤 도적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국은 설연타 세력이 동돌궐에 계속 반하게 만들고자 지원을 했다. 때문에 여간 큰 골칫거리가 아닌데 특히 동돌궐의 대상들이 입는 피해가 가장 커서 걱정이 이만저만 크지가 않았다.
"호위 임무는 내가 건의했지만 공자님은 흔쾌히 받아들이셨소. 양신님의 검술 실력을 믿고 호위임무를 잘 수행해 낼 것으로 기대를 하기 때문이요. 다만 나는 우려되는 점이 없지도 않소."
"흑발님은 어떤 점을 우려하십니까?"
"양신님이 상단을 따라다니는 건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소. 그럴 경우 그대로 떠나버릴 수도 있다는 걱정이 은근히 되오."
흑발의 말에 양신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어떻게 흑발님을 배신할 수가 있겠습니까? 감옥에서 나가는 것만도 감사할 일인데 맡겨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겠습니다."
"나도 양신님의 성품을 잘 알기에 믿음은 가오. 그러나 공자님도 속으로 그 점을 꺼리는 마음이 있으셔 나는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했소."
"흑발님,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면 저는 배신을 저지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떠날 수가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양신님이 그냥 떠날 수가 없는 사정이란 게 뭐요?"
"저는 밀두도를 압수당했습니다."
흑발님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무릎을 쳤다. 그도 그럴 것은 밀두도는 다갈촌의 철장들이 대대로 지녀온 장도였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장도를 두고 떠날 수가 없을 건 당연하게 생각했다.
"밀두도를 압수당한 것은 몰랐소."
"간수에게 물어봤더니 힐리 공자님이 보관을 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호위 임무를 수행하게 되면 지니고 다닐 수가 없을까요?"
"그 마음은 알겠으나 내 소관 밖의 일이요."
흑발은 간단히 무지르는 대답을 하고 돌아갔다.
이튿날 양신은 석방되었다. 감옥을 벗어난 몸은 마침내 끝을 모를 절망감에서 헤어나는 일었다. 앞으로 상단에서 일하며 교역에 관해 배울 기회를 얻게 되어 부풀어 오르는 마음은 하늘을 날 것만 같았다.
며칠 후 양신은 상단의 일원으로 카라발가순을 떠났다. 서쪽으로 향하는 길은 사막과 초원이 되풀이 이어졌다. 그런 행로는 도리어 심신의 안정을 되찾고 호기심도 생겨나게 되었다.
상단은 도중에 몇 차례 도적 떼의 습격을 받았다. 그럴 때마다 양신은 번번이 도맡다시피 퇴치를 시켰다. 때론 백여 명이 넘는 도적 떼가 덤벼들 때도 있었으나 양신의 검술을 당해내지 못하고 인명 손실만 입은 채 도주했다. 그런 활약상은 소문이 나고 두려움을 느낀 도적 떼는 접근을 피했다. 안전을 보장받게 된 상단의 대원들은 양신을 매우 중요한 존재로 여기며 떠받드는 태도까지 보였다.
양신은 출행을 몇 차례 하는 동안에 특히 서역(西域)으로 나가는 길과 지형을 익히기에 힘을 섰다. 무엇보다 대상들의 운영 실태와 장사의 생리를 배우면서 많은 경험을 쌓는 기회를 얻었다.
어느 날 카라발가순으로 돌아온 양신에게 흑발이 뜻밖에도 연개소문을 데리고 만나러 왔다. 너무도 반가운 나머지 양신과 연개소문은 괴성들을 지르듯 서로가 달려들어 부둥켜안았다.
"연선인!"
"형, 그동안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고구려로 간 내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모두가 잘 지내고 있으므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오."
양신은 그 말을 듣고 안도의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그러니까 우리 가족이 무슨 수난을 겪지는 않았다는 말인가?"
"형, 뭣 때문에 수난을 겪는단 말이요?"
연개소문의 대답에 양신은 말을 돌리고 말았다.
"모든 게 다 내 잘 못일세. 여인들을 끌고 적국으로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정신 나간 짓이었네! 그동안에 많은 후회와 반성을 했네."
"형, 이젠 그런 말은 그만 하는 게 좋겠소."
"그러겠네. 그런데 연선인은 이곳에 무슨 일로 오게 되었는가?"
"건무 저하의 명을 받고 왔소."
"혹시, 날 고구려로 끌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는가?"
"아니요. 나는 건무 저하가 힐리 공자께 보내는 서신을 지니고 왔소. 그 내용은 알 수가 없고 여선부인이 형에게 전하는 말을 하겠소."
"무슨 말인지 해 보게."
연개소문은 좀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저하께선 여선부인을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이셨소."
"용서하고 받아들였다고?"
양신의 반문에 연개소문은 덧붙이는 말도 했다.
건무는 여선부인이 돌아온 이상 양신에 대한 죄를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양신의 핏줄인 천동도 성장할 때까진 궁궐에서 보호했다가 되돌려주기로 했다. 건무는 그 약속을 지킬 것이고 양신은 그 조건에 따라 고구려엔 들어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양신은 착잡한 심경이나 고개를 무겁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형의 심정이 어떨지는 잘 알겠소만 어찌하겠소? 여선 부인도 앞으론 형이 모든 걸 깨끗이 잊고 새 출발을 할 것을 바라고 계시오."
"연선인! 내가 어찌 깨끗이 잊을 수가 있겠는가?"
양신이 화를 내자 연개소문은 움찔했고 흑발이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엔 양신님은 화를 낼 처지가 아닌 것 같소."
연개소문은 그 말에 힘을 입듯 위로의 말을 했다.
"형은 살아남은 것만도 큰 다행으로 여기고 포기할 건 포기하오."
양신은 고개만 끄덕이는데 연개소문이 말을 이었다.
"도해선은 기고만장하게 형에게 이런 말을 전하라고 했소."
"무슨 말인가?"
"자신이 중원 땅에서 여선 부인과 아이들을 데려오지 않았다면 모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그걸 감사하게 여기라고 했소."
양신도 수긍이 가지만 착잡하기만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뻔했다. 그러나 모든 걸 포기를 해야만 하는 자신은 인생의 무상함만 더욱 크게 느낄 뿐이었다.
연개소문은 갑자기 투정을 부리는 음성이 되었다.
"형은 나하고 한 약속을 깬 사람이요."
"연선인, 내가 무슨 약속을 깼다는 말인가?"
"주랑 누님은 지금 행방을 모르게 되었소."
양신은 크게 놀라며 그제야 생각이 나서 물었다.
"장안성으로 함께 가지를 않았다면 백제로 간 것인가?"
연개소문은 주먹으로 눈시울을 닦으며 대답했다.
"주랑 누님은 백제로 가지도 않았소. 그 때문에 백제국의 백기 좌장이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 주랑 누님의 소식을 묻는 일까지 벌어졌소."
양신은 어쩔 줄 모르는데 연개소문은 낙담이 큰 표정으로 말했다.
"주랑 누님은 아마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싶소."
"연선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중원 땅에 살아남았으면 오죽 좋으련만 그걸 바랄 수가 없잖소?"
연개소문은 말하고 끝내 흑흑 울음을 터뜨렸다. 양신은 난감하고 괴로움에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혹시 중원 땅에서 살아남을 수도 있겠다는 일말의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가 않았다.
"연선인, 나로선 중원 땅에서 무사하길 바랄 뿐일세. 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네. 어찌 되었건 간에 모든 게 다 내 책임일세.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속히 중원 땅으로 다시 가서 찾아볼 결심일세."
연개소문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돌렸다.
"형, 합하께서 돌아가신 건 아오?"
"나는 수국에서 병환으로 돌아가셨다는 풍문을 들었네. 여기로 오다가 서부대인께서도 타계하신 걸 알게 되었네. 연선인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하나 뭐라 위로를 할 말이 없네. 용서를 바랄 뿐일세."
"아버님은 병환으로 돌아가셨지만 합하께선 그렇지가 않았소."
"그렇지가 않으셨다면 무슨 소린가?"
"형이 수국으로 떠난 뒤 건무 저하는 계루부 병력을 끌고 요동 땅으로 가서 합류했소. 합하는 건무 저하와 함께 숙소를 쓰고 식사도 하셨소. 그때부터 이상하게 합하의 건강이 점점 나빠지게 되셨소."
"합하의 건강이 왜 나빠지게 되셨단 말인가?"
"합하께선 내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소. 저하와 함께 지내면서부터 매일처럼 독이 든 음식을 먹은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소.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져서 아무래도 오래 살진 못하겠단 말씀도 하셨소."
"그렇다면 합하께선 누구에게 독살을 당하신 게 아닐까?"
양신이 그런 말을 하자 연개소문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형도 범인이 누군지 알만 하겠소?"
"알만 하겠네."
"나는 합하가 땅에 묻히시던 날 꼭 원수를 갚기로 다짐을 했소."
연개소문의 대답에 양신은 입을 열었다.
"자네가 원수를 갚겠다고? 그건 내가 해야 할 일일세."
양신은 그런 대답을 했지만 실제로 가능할지는 의문이었다.
"연선인, 서부대인께서 돌아가신 슬픔이 오죽하겠는가? 자네는 매우 어려운 사정에 처해 있음도 알고 있네. 모든 게 다 나 때문일세. 무엇보다 왕제 저하의 미움을 사게 되어 큰 어려움을 겪는다니 나로선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자책감만 클 뿐일세."
"저하는 형이 수국으로 떠날 때 내가 도운 걸 나중에 알았소. 그 때문에 서부 대인직을 잇는 걸 방해하고 있소. 그 대신 삼촌에게 직을 이을 것을 종용하고 있지만 삼촌은 듣지를 않고 계시오."
양신은 무슨 생각을 한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연선인 섭섭하게 듣지 말게. 일단 삼촌께서 상가직을 맡으셨다가 나중에 자네에게 넘기는 방법을 쓰면 해결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일세."
"형은 모르는 말이요. 형식상 국왕의 재가를 받아야 만하오."
연개소문은 그런 대답을 하고 자조하는 심경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상가직 승계보다 목숨을 부지하는 게 더 급한 형편이요."
양신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용기를 주려고 했다.
"연선인, 위기를 넘기기에 힘을 쓰게. 어떻게든 목숨을 지켜내야 만하네. 버티면서 직위를 물려받을 방법을 찾아야만 하네."
"일리가 있는 말이라 나는 노력을 하겠소. 그러나 저하가 내게 이런 임무를 부여해서 동돌궐로 보낸 목적은 다른데 있다는 생각이 드오."
"다른데 목적이 있다니 그건 무슨 말인가?"
"저하는 내가 본국을 떠난 기회에 동돌궐에서 계속 살 것을 바라는 뜻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어서 그러는 거요."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난감하기만 하오."
"연선인은 어찌 그런 약한 소리만 한단 말인가?"
"내가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이요?"
"자넨 강한 사나일세.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일세. 사나이는 죽음을 무릅쓰고 모든 시련을 강한 의지로 돌파해서 이겨야 하네. 나는 돌아갈 자리가 없으나 자넨 그렇지가 않네.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 지켜야 하네."
"내가 돌아가서 제 자리를 되찾고 지켜내라?"
"대인 직은 잠시 삼촌께서 대신 맡으시면 되네. 그렇게 해서라도 자넨 왕제의 독시를 피하고 위험을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네. 그러므로 사나이로 용기를 갖고 모든 걸 버텨내야 하네. 자넨 그럴 의지를 충분히 지녔네. 부족한 점이 있다면 고치면서 무조건 버텨야 하네."
"형, 내가 그렇게 할 수가 있을까?"
"연선인, 자넨 충분한 능력을 지녔네. 나는 그걸 믿어 의심치 않네. 내일이라도 즉각 고구려로 돌아가게. 용기를 내어 맞서 싸우게."
연개소문은 그 말에 힘을 입듯 이튿날 고구려로 떠났다.
황제의 3차 침공은 이미 두 차례에 걸친 전역으로 국고는 고갈되고 근위군은 5만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백성들은 전쟁에 신물을 나고 신하들도 중단을 요구하는 말들이 나왔다.
백성들은 전쟁에 넌덜머리가 나서 병력 동원에 응하질 않았다. 장졸들도 전투에 임할 분위기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때문에 황제는 완전히 권위가 땅에 떨어져 초라하기만 했다.
황제가 무리한 출병을 강행한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비록 고구려를 꺾을 수는 없어도 그나마 침공을 멈추게 되면 황실은 존립 자체가 위태해질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존재감마저 없어진 황제는 이럭저럭 요동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구려에 항복 요구부터 했다. 그건 구걸이나 다름없는 처사였다. 고구려 또한 거듭되는 침공에 기진맥진의 상태가 되었다. 양측은 타협을 본 끝에 마침내 합의에 이르렀다. 고구려는 망명한 곡사정을 되돌려주고 수국은 즉시 철군을 하기로 했다.
황제는 그것만으로도 체면이 서자 허세를 부렸다. 곧 철군 명령을 내리고 고구려 국왕이 입조를 하기로 되었다는 거짓말까지 했다. 그렇게 수국 군이 회군한다는 소문은 동돌궐에도 전해졌다.
양신은 동돌궐을 탈출할 궁리만 하고 있었다. 때문에 상단을 따라다니면서 여러 가지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그러다가 수국 황제가 초라한 출병을 덮고자 명마(名馬) 42 필을 전쟁터로 끌고 나간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점을 놓고 한 가지 착안을 했다.
명마는 동돌궐의 종마(種馬)들로 양광의 강요로 바친 것이었다. 황제의 위엄을 높이려고 종마들을 화려한 마구(馬具)로 장식을 해서 전쟁터로 끌고 나갔던 것이다.
돌궐인에게 말을 생의 동반자나 다름이 없었다. 특히 종마는 여간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걸 빼앗겨 자존심이 여간 상하지 않았다. 만약에 그걸 되찾게 된다면 돌궐인의 기쁨은 여간 크지 않을 일이었다.
양신은 그런 종마들을 빼앗아 힐리에게 바치고 그 공을 돌린다면 동돌궐을 떠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때문에 양현감의 반란을 부추겼듯 과감하게 그 일을 추진할 마음을 먹었다.
어느 날 양신은 그 일을 놓고 흑발에게 운을 떼어 봤다. 그리고 자신이 성공하면 풀어줄 것도 요구했다. 흑발도 종마를 되찾아 족장들에게 돌리면 힐리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것으로 믿었다.
흑발은 즉시 그 계획을 알리자 힐리는 기발한 생각이라며 무릎을 쳤다. 그렇지 않아도 패퇴를 거듭하는 수국에 한번 반하는 행동을 해보일 필요성이 있던 참이라 크게 반긴 것이었다.
힐리의 반응이 좋자 흑발은 양신을 다시 만났다.
"힐리 공자님도 해볼 만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소."
"제가 만약에 성사시키면 석방되어 떠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 점은 걱정하지 마오."
"그 작전을 수행하려면 병력이 필요하겠습니다."
"당연한 말이요."
"또 하나 요구가 더 있습니다."
"무슨 요구요?"
"제가 천호장 직을 받게 해 주십시오."
흑발은 고개만 끄덕이고 즉시 힐리 공자에게 가서 보고했다.
"양신은 병력은 물론 천호장 벼슬까지 내려달라고 합니다."
힐리는 양신의 말을 전해 듣고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관직엔 뜻이 없다던 자가 천호장 직을 요구한다?"
"그만한 작전을 펼치려면 최소한 1천여 병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대 병력으로 원활한 작전을 수행하자면 그만한 직위를 지녀야 한답니다."
힐리는 말없이 또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저는 양신의 요구가 꽤나 당돌해 말씀을 드리기가 주저되었습니다."
"주저할 게 뭔가? 종마를 회수할 수만 있다면 국익에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돌궐인의 자존심을 회복시킬 일이니 마땅히 실행해야 한다."
힐리는 머리 회전이 빠른 편이었다. 만약에 성공을 하면 종마를 족장들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큰 환심을 살 수가 있을뿐더러 자신의 성가를 더욱 높이게 될 일이었다.
흑발은 실패하면 자신이 책임을 질 게 걱정되었다.
"공자님, 양광의 병력이 형편없게 줄었지만 5만 여 명에 이릅니다. 전면 공격 작전을 감행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불과 1천여 병력으로 호대한 상대를 쳐서 성공할 가능성이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양신의 작전을 계획을 더 들어보고 다시 보고하게."
흑발은 또 양신을 만나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물었다. 그러자 양신은 전면 공격이 아닌 기습 탈취 작전을 펴겠다는 대답을 했다. 흑발은 그런 대답을 듣고 힐리에게 다시 보고했다.
"기습 탈취 작전이 오히려 좋겠다. 한번 맡겨보자."
"공자님은 1천 병력을 어떻게 동원을 하시렵니까?"
"호리소코루엔 항시 그만한 병력이 있지 않은가? 일단 결정이 났으니 종마 탈취 작전을 서둘러야 하겠다."
"양신은 을지문덕의 수제자란 말을 들을 만큼 인정을 받았던 군관입니다. 수국의 1차 침공 때 가장 큰 군공을 세운 군관으로 소문났고, 뛰어난 작전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뿐더러 내부적인 단합을 이루는 데도 큰 기여를 했음은 고구려 장수들은 대부분이 인정하는 바입니다."
"양신을 천호장에 임명하고 즉각 병력을 내주도록 하라."
"공자님, 양신에게 군사 작전권을 부여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부여했지 않은가? 더한 요구도 받아들이겠다."
"공자님, 양신은 자신의 장도를 돌려받길 원합니다."
"장도는 성공을 거둔 뒤에 가능한 일이다."
흑발은 힐리의 대답을 양신에게 가서 즉각 전했다. 양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작전을 성공시키고 말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졌다.
"모든 게 다 흑발님의 덕분입니다. 그저 감사를 드릴뿐입니다."
"양신님은 관직엔 뜻이 없는 줄로 알았는데 천호장직은 왜 원하오?"
"저는 어느 나라 관직이든 뜻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을지문덕님의 경우를 봤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고구려를 위해 그처럼 헌신을 하셨건만 결과는 독살을 당하셨습니다. 그 점은 양현감의 경우도 마찬가지랍니다. 그의 부친인 양소는 양광이 형을 제거하고 제위에 오르게 만든 1등 공신이었건만 끝내 독이든 약을 받아야만 했다고 합니다."
"그 일과 천호장 직과 무슨 상관이 있겠소?"
"저는 타국인이고 큰 작전을 수행하는 데는 우려할 점도 있습니다. 군대는 능력보다 계급이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고위직은 병력을 통솔하에도 용이하고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고위직을 바랍니다."
"무슨 뜻인지 알만 하겠소."
"흑발님, 밀두도는 언제 돌려받게 됩니까?"
"양신님이 성공을 거둘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요."
양신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질문을 했다.
"양광이 고구려의 항복 문서를 받았다는 게 사실일까요?"
흑발은 농담처럼 반문했다.
"고구려에서 내쫓긴 사람이 언제까지 조국을 걱정하려고 하오?"
"고구려는 제 조국입니다. 왕실만의 고구려가 아닙니다."
"그렇긴 하오. 우리 첩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회군하는 수국 군은 군기가 엉망이라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로 무질서가 심하다오."
양신은 그 말에 자신감이 더 커져 내친김에 한 마디를 더 했다.
"동돌궐도 이번 기회에 양광에게 한번 큰 타격을 가해보면 어떻겠습니까? 종마 42 필을 노리는 걸로 그친다면 너무 아쉬울 것 같습니다."
양신이 하는 말에 흑발은 둘러대고 말았다.
"갑자기 대병력을 병력 동원하긴 쉽지가 않을 일이고 시간도 매우 촉박하오. 양신님은 어떤 작전을 짰는지 먼저 듣고 싶소."
"아직은 계획 단계라 말씀을 드릴 게 없습니다."
"아직도 짜 놓은 작전이 없다니 그건 무슨 소리요?"
"1천 병력 중 실제로 투입할 병력은 백여 명에 불과합니다. 작전을 짜기보다 먼저 병사들을 선발해 강훈련을 시킬 일이 급합니다."
"백여 명을 투입시킨다고? 그래도 작전은 필요하지 않겠소?"
"특공대를 구성할 백여 명을 제대로 선발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병사들 개개인적인 능력을 파악해야 그에 따른 작전을 짤 수가 있습니다."
흑발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나머지 병력을 무엇에 쓰려오?"
"나머지 병력은 특공대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나는 백여 명의 특공대로 습격이 가능할지는 의문이요?"
"종마를 도적질 하는 데 많은 병력은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을지문덕님 밑에서 전술전략을 배운 양신님은 잘할 것으로 믿겠소. 그렇지만 이번 작전을 가볍게 여겨선 절대 금물임을 아시오."
"노파심에서 하시는 말씀이나 명심하겠습니다. 실은 저도 이번 작전은 여간 큰 부담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결정이 난만큼 신중하게 임하겠습니다. 내일이라도 작전에 투입할 병력을 받고 싶습니다."
양신의 말에 흑발이 대답했다.
"동원할 병력은 호리소코루에 있소. 정예의 병력이므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충분한 능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를 해도 되겠소."
"흑발님, 호리소코루는 어디에 있습니까?"
"고구려와 국경지대에 있소."
"그렇다면 여기서 동쪽 지방이 되겠군요?"
양신은 그만큼 조국과 가까운 곳이라 감회가 새로워졌다.
"저는 빨리 호리소코루로 가고 싶습니다. 특공대를 조직할 병력부터 선발해서 훈련을 시켜야 하고 적응시킬 시간도 필요합니다."
"시간이 촉박하다면 내일이라도 떠날 수가 있겠소."
"흑발님, 떠나기 전에 제 요구에 대한 확답을 다시 받고 싶습니다."
"그건 걱정은 마오. 날 믿듯 힐리 공자님을 믿으시오."
이튿날 두 사람은 호리소코루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