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피눈물
낙구창으로 통하는 길들은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낙양성 부근에선 관군들이 마구 설쳐대며 반란에 가담했다며 사람들을 죽여서 흉흉했으나 낙구창은 아직 고요했다.
만돌은 대로를 따라가면 위험하다며 산속으로만 말을 몰았다. 그러나 주랑은 양신에게 빨리 당도하고 싶어 더딘 길에 조바심을 냈다. 그리고 느리게 말을 모는 만돌의 눈치만 보다가 물었다.
"만돌님, 행정이 너무 느리지 않은가요?"
만돌은 재촉을 받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나는 주랑님이 목숨을 걸고 양신님을 구하러 나선 속내를 알지요."
"무슨 속내를 말씀하는 가요?"
"같은 여자로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딱해 보여서 그래요."
"만돌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나도 양적선의 첩 노릇을 했기에 주랑님의 처지를 이해하지요."
"그건 또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요?"
"주랑님도 양신님의 첩 노릇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요."
그 말에 기겁을 한 주랑은 소리를 꽥 질렀다.
"무슨 망측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만돌은 도리어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 반문했다.
"주랑님은 왜 그렇게 화를 내시나요?"
"말 같잖은 말을 하시니 어찌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요?"
"말 같지 않다니요? 나는 양신님이 한 말을 그대로 전한 거예요."
"제 형부가 무슨 말씀을 하셨다는 거예요?"
"양적선이 주랑님을 첩으로 삼고 싶다고 하자 양신님은 주랑님을 자기의 제2부인이라고 했대요. 고구려에선 쌍둥이 자매를 아내로 맞는 풍습이 있다고 했다는데 어찌 되었건 간에 첩인 건 틀림없잖아요?"
주랑은 기가 막혔으나 해명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형부가 양적선 장군의 청을 거부하려고 둘러댄 말예요."
"주랑님이 첩이 아니라면 이번 기회에 나도 고백을 할 게 있어요."
"만돌님은 무슨 고백을 하겠단 말씀인가요?"
"삼년 전 나는 요동성에서 연개소문의 명을 받고 양신님과 하루 밤을 지낸 인연이 있어요. 그 뒤론 양신님을 못 잊는 여자가 되었어요."
주랑은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흘려듣기엔 기분이 썩 좋지가 않고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묘해지는 감정을 누르며 화제를 돌리려고 다른 말을 꺼냈다.
"만돌님, 여양에서 낙구창까진 말을 타면 반나절밖에 안 걸린다고 들었어요. 이만큼 왔으면 거의 다 왔을 것 같은데 아직도 멀었나요?"
"우린 큰길을 버리고 돌아가다 보니 느려질 수밖에 없어요."
어느새 해는 기울어 가는데 만돌이 한 곳을 가리켰다.
"주랑님, 저기에 주막이 하나 보이는군요. 날도 저물고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네요. 주랑님도 매우 시장할 것 같네요."
만돌은 주랑의 대답도 듣지 않고 말머리를 돌려 주막으로 향했다. 주랑은 갈 길이 더 더뎌질 것 같아 내키지가 않은 채 따라갔다. 주막 안에는 식사를 하는 손님들이 여럿 있었다.
대부분 상인들 같은데 여인 두 명이 들어오자 이상한 듯 흘끔거리는 눈길을 보냈다. 시국이 하도 어수선한 때라 여인들만이 여행을 하는 건 극히 위험한 데다 예외적인 일이었다.
두 여인이 탁자에 앉자 복성스럽게 생긴 처녀가 엽차를 가져왔다.
"세상이 하도 흉흉한데 두 분께선 어디로 가시는 길이세요?"
주랑은 상냥하게 말하는 처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볼 일이 있어 여양에서 낙구창으로 가는 길예요."
처녀는 그 말을 듣고 의외란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낙구창으로 가는 분들이라면 길을 영 잘못 드셨네요?"
그러자 만돌은 처녀에게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
"이 계집애가 웬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가? 여기서 노닥거리지 말고 빨리 가서 만두나 두 접시 가져와!"
주랑은 만돌이 공연히 화를 내고 욕설을 퍼부어 이상하고 미안했다. 처녀는 머쓱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길을 잘 못 드신 걸 걱정해서 드린 말씀예요. 그런데 너무 화를 내시고 심한 욕설까지 해대시는 건 너무하지 않아요?"
"이 년이 잔소리가 많군?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썩 꺼져!"
만돌은 마구 욕설을 퍼붓고 어쩔 줄을 몰라하는 처녀의 등을 마구 떠밀었다. 주랑은 민망할 정도로 처녀에게 너무 심하게 구는 만돌을 제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돌님, 우릴 도와주려는 처녀에게 왜 그처럼 심하게 구세요?"
"주랑님, 나는 낙양성으로 가는 길이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일부러 안전하게 돌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그런데 이 계집애는 그걸 모르면서 쓸데없는 참견을 하려고 드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잖아요?"
만돌은 말끝마다 욕설이 튀어나왔고 처녀도 안색이 변했다.
"손님은 길을 돌아가고 있다고 하시나 이 길로 계속 가면 낙구창으로 갈 수가 없기 때문에 한 말이에요. 저는 조금 전에 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두 분은 남쪽에서 오시지 않았어요? 낙구창은 서쪽에 있는데 북쪽으로 계속 가면 안 되기 때문에 알려드릴 수밖에 없잖아요? 여기서 다시 남쪽으로 한참을 내려간 뒤에 대로를 만나게 되면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가야만 낙구창에 당도할 수가 있어요."
만돌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벌떡 일어나 처녀의 귓쌈을 후려갈겼다.
"이 버릇없는 년아! 내가 북으로 가든 남으로 가든 무슨 상관이야?"
주인은 악을 쓰고 행패를 부리는 만돌을 보다 못해 쫓아왔다.
"내 딸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손찌검을 다 하는가?"
"이 계집애가 쓸데없는 참견을 하니까 그렇지 않아요?"
"쓸데없는 참견을 한 게 아니잖은가? 낙구창으로 간다면 길을 잘 못 들어선 게 사실이 아닌가? 걱정을 해서 제대로 가르쳐 주었는데 그게 무슨 큰 잘못이라고 이리도 행패가 심한가? 아무리 손님이라고 해도 그대처럼 고약하게 구는 사람은 생전 처음 보겠다!"
"나는 안전하게 가려고 일부러 길을 돌고 있는데 남의 사정도 모르면서 건방지게 자꾸 귀찮게 끼어드니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만돌이 계속 악을 쓰듯 우겨대자 주인은 물론 손님들까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그중에서 한 손님은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요즘 시국이 뒤숭숭해 사람들은 길을 나서길 꺼리는 형편이요. 그런데 낙구창으로 갈 사람이 엉뚱하게 길을 잡아서 가다간 위험해질 수도 있소. 때문에 친절하게 알려주면 들어야지 무슨 행패가 그리도 심한가?"
또 다른 손님은 만돌에게 욕설까지 퍼부었다.
"봐하니 지두우족 계집 같은데 성질머리치곤 더럽게 사납군?"
점잖게 충고를 하는 손님도 있었다.
"여긴 낙구창과는 한참 먼 곳인 데다 남북으로만 오가게 되었소. 조금만 더 북쪽으로 오르면 백리 협곡 길로 접어들게 되오. 그곳엔 집도 절도 없는 산속이라 도둑을 만나기 십상인데 그냥 가게 놔둘 순 없소. 모두가 걱정을 해주는데 왜 말을 들으려고 하질 않는단 말인가?"
손님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하자 주인은 그만 화를 눅이며 말했다.
"두 분 손님은 초행길인 모양이요. 이 부근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내가 잘 일러주겠소. 낙구창으로 가려면 오던 길을 도로 내려가서 낙양성으로 통하는 대로를 만나야 하오 그때부턴 서쪽으로 가시오. 여기서 더 이상 북으로 가면 인적이 드문 곳이라 매우 위험해질 수가 있소. 더욱이 여인들만이 가는 건 절대로 피해야 할 일이요."
또 다른 손님은 더욱 겁을 주는 말을 했다.
"어제도 북쪽의 협곡 길에선 행상들이 도둑 떼를 만났소. 지닌 물건들을 전부 털리고 목숨마저 잃은 사람이 여려 명이나 된다오. 그런 험한 길을 여인들만이 가다가 무슨 횡액을 당하려고 그러오? 신상에 이로울 게 없어 모두가 일러 주는 걸 고맙게 여겨야지 무슨 행악이 그리도 클까? 정히 듣지를 않는다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지."
만돌은 마침내 못 참겠다는 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주랑님, 이런 재수 없는 집에서 그만 나갑시다."
만돌이 먼저 뛰쳐나가자 주랑은 주인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미안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주랑은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나 이젠 만돌이 하는 대로 따르지 않기로 했다. 주막에서 무례한 태도를 보인 것도 그렇지만 여양을 떠난 뒤로 이상하고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기 때문이었다.
만돌은 주랑의 눈치를 보며 설레발을 치듯 말했다.
"주랑님, 저 못된 주막에서 빨리 나오길 아주 잘했어요. 그렇게 하지 않았다간 우린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를 뻔했어요."
"내가 보기엔 만돌님이 심했어요. 또 이곳으로 오는 동안에 만돌님이 보인 여러 가지 태도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점이 너무도 많았어요."
주랑의 말에 만돌은 발끈했다.
"주랑님, 뭐가 이상하고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인가요?"
"여양에서 낙구창까진 말을 타면 반나절 거리로 들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계속 북쪽으로만 오다가 해가 지고 말았어요. 거기다 계속 북쪽으로만 가면 낙구창엔 이를 수가 없다고들 하지 않았어요?"
"나는 큰 길이 위험해 소로나 산길을 돌아서 온 거예요. 그래서 길이 더딘 것인데 주랑님은 왜 다른 사람들의 말만 믿으려고 하나요?"
"여양에서 낙구창은 서쪽으로 가야 하는데 달리 가지 않아요? 아무리 길을 돌아간다고 해도 북쪽으로만 계속 가면 언제 방향을 틀게 되나요?"
"주랑님은 길을 모르면 따라오기만 하면 돼요. 조금 전에 들어간 주막은 산적들의 소굴 예요. 저 안에 있는 자들은 장사꾼을 가장한 도둑들이라 내가 지닌 돈주머니에 자꾸 곁눈질을 주었어요. 곧 우리 뒤를 쫓아와 서 덮칠지도 모를 판예요. 목숨과 돈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이대로 더 북 쪽으로 급히 말을 몰아서 가는 수밖에 없어요."
주랑이 강하게 고개를 젓자 만돌은 뜻밖의 말을 했다.
"주랑님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이만 헤어질 수밖에 없겠어요."
만돌은 혼자서 말을 타려는데 주랑이 안장에 걸린 돈주머닐 잡아챘다.
"아니?! 네가 왜 내 돈주머니에 손을 대는가?"
주랑은 만돌이 지녔던 두 개의 돈주머니 속을 들여다봤다. 하나는 큰 금덩이가 들어 있고 또 하나는 은전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만돌님은 이렇게 많은 돈을 받고도 날 버릴 생각인가요?"
"주랑님이 내 말을 듣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더 있겠어요?"
만돌의 대답에 주랑은 의심스러운 점을 또 지적했다.
"만돌님은 노자 돈이 없어 위험한 일을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주머니 하나는 사근님에게서 받은 거예요. 그러면 본래 지녔던 금덩어리가 든 주머니는 어디서 난 것인지 밝혀요."
"주랑님은 내게 그걸 따질 권한이 있는가요?"
"만돌님은 큰 금덩어리를 지니고도 사근님에게 노자 돈이 없다고는 거짓말을 하고 많은 은전을 받았어요. 그러나 거기엔 무슨 음모가 있는 게 분명해요. 그에 관한 답변을 들어야만 하겠어요."
"사람은 누구나 돈에 욕심을 내기 마련이라서 맡았을 뿐예요."
주랑은 그런 대답을 하는 만돌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 봤다. 생각할수록 앞뒤가 맞지 않고 석연치가 않은 구석이 있었다. 특히 금덩어리를 누구한테 받았는지가 큰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도 놀라고 경황이 없어 미처 생각을 못한 게 있어요."
"주랑님은 미처 생각을 못한 점이 뭔가요?"
"만돌님은 생사의 기로에 선 형부를 빨리 구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보인 태도는 서두르는 기색이 조금도 없는 데다 일부러 느리게 움직이며 시간만 끌려는 태도를 보여서 그래요."
"주랑님, 나는 말을 처음 타기 때문에 느려질 수밖에 없어요."
"만돌님은 지금까지 말을 모는 걸 보면 처음 타는 사람이 아녜요. 때론 매우 익숙하게 몰뿐만 아니라 거침없이 달리기까지 했잖아요?"
"아무튼 간에 노자로 쓸 내 돈주머니나 빨리 돌려줘요."
만돌은 패물 주머니를 뺏으려고 덤벼들었다. 그러나 주랑은 강하게 밀쳐내고 지금까지완 다르게 험한 표정에 반말까지 썼다.
"묻는 말에 거짓 대답만 계속하면 살려두지 않겠다."
주랑이 갑자기 으름장을 놓자 만돌은 겁을 먹은 표정이 되었다.
"만돌, 이제야 생각나는 점이 있다. 여양에선 두 달 전에 그대가 양적선의 별장에서 도망쳤다는 소문이 났다. 그런데 위험한 그곳으로 다시 들어갔고 형부를 또 만나게 되었다는 것은 거짓 말이 분명하다."
만돌은 그 말에 매우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지 못했다.
"만돌, 나는 그대가 만춘장에 와서 먼저 사근님을 만나는 걸 봤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어디로 바삐 가는 것도 봤다. 이제 생각해보니 사근님과 너는 무슨 일을 꾸민 게 분명하다. 바른대로 말을 해라."
주랑의 추궁에 만돌은 두려운 빛으로 여전히 입을 열지 못했다.
"형부가 양적선 장군의 별장에 계신 게 확실한가?"
만돌은 창백해진 얼굴로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거짓말이다. 나는 네가 꾸민 음모에 빠진 게 분명하다."
"거짓말도 아니고 음모도 없어요."
"음모를 소상히 밝히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목을 베겠다."
주랑이 장도를 빼어들자 만돌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주랑님, 말씀을 드리겠으니 제발 살려만 주세요."
"네가 지닌 두 개의 돈 주머니 중 금덩이는 누구한테 받았는가?"
만돌은 칼끝이 목으로 다가들자 몸을 부들부들 떨며 고개만 저었다. 주랑이 칼로 천천히 찔러들자 만돌은 얼른 입을 떼었다.
"고구려에서 받았습니다."
"고구려에서 누구한테 받았는가?"
"도해선이란 사람에게서 받았어요."
주랑은 너무도 놀랐고 비로소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무슨 이유로 금덩이를 받았는가?"
"도해선을 돕는 대가로 받았어요."
만돌의 대답을 듣고 주랑은 펀 듯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너는 날 이리로 꼬여내는 일을 맡은 것이다. 그 사이에 만춘장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다. 그에 대한 일을 바른대로 대라."
주랑은 만돌이 입을 열지 않자 훌쩍 말에 올라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여양으로 돌아가야 하겠다."
만돌은 사색이 된 채 주랑의 앞을 가로막고 악을 섰다.
"내 돈주머니는 돌려줘요!"
주랑은 못 들은 체 말을 몰려고 하자 만돌은 매달린 채 소리쳤다.
"여선 부인은 지금 만춘장에 없어요. 가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만돌의 말에 주랑은 다시 말에서 내렸다.
"없다면 어떻게 된 것이란 말인가?"
"부두엔 고구려에서 온 배가 대기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만춘장을 떠나면 숲 속에 숨어있던 도해선과 부하들이 안으로 들어가 여선부인을 강제로 끌고 나가 부두로 데려간 뒤 배에 태우게 되었어요."
"그럴 순 없어!"
주랑은 절규하듯 소리를 지르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끝났다는 판단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만돌이 주절거렸다.
"주랑님, 절 나쁜 년으로만 보진 마세요."
"뻔뻔스러운 것! 나쁜 년으로 보지를 말라니?"
"저 때문에 여선 부인과 주랑님은 목숨을 구하게 된 거예요."
"너 때문에 목숨을 구했다고?"
"여선 부인은 그렇게라도 여양을 떠나야 아이들과 함께 목숨을 건질 수가 있어요. 저 때문에 거길 뜨게 되었으니 그렇지 않겠어요?"
만돌의 대답에 주랑도 수긍이 가는 점이 없지는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언니가 형부를 기다리고자 만춘장에 계속 남아 있다간 위험을 피할 수가 없었다. 이젠 자신도 만춘장으로 가봐야 소용이 없었다. 절망감 속에 사정을 좀 더 알아보려는데 만돌이 입을 열었다.
"주랑님, 제가 못할 짓만 한 건 아니므로 제발 죽이진 마세요."
"너 같은 인간은 죽일 가치도 없다!"
주랑은 그런 대답을 했으나 그래도 여양으로 되돌아가서 확인을 해볼 필요성을 느꼈다. 그처럼 마음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는데 만돌은 돈주머니를 되찾고자 기를 쓰며 매달렸다.
"그러시면 돈 자루만이라도 돌려주세요."
"만돌, 형부가 양적선의 별장에 계신다는 것도 거짓말이지?"
"예, 거짓말을 했어요."
만돌의 대답에 주랑은 크게 분개하고 말았다.
"나는 사람을 죽인 적은 없으나 너만은 죽여 버리겠다!"
주랑의 태도가 돌변하자 사색이 된 만돌은 두 손으로 싹싹 빌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제가 북쪽으로 가려는 건 다른 이유도 있어요."
"북쪽으로 가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저는 동돌궐로 가서 감옥에 갇힌 양신님을 구해내려고 했어요."
만돌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주랑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형부가 동돌궐 감옥에 갇혔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양신님은 동돌궐 감옥에 갇혀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만돌, 형부가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주랑의 반문에 만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가 돈을 모은 건 양신님을 감옥에서 빼내는데 쓸 목적 예요."
주랑은 그 말을 믿건 믿지 않건 간에 형부가 동돌궐로 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일어난 일들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형부에 관해 더 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돌, 내가 묻는 말에 또 거짓말을 한다면 이번엔 죽는다. 형부가 동돌궐 감옥에 갇혔다면 그걸 대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밝혀라."
"저는 양적선의 별장에서 도망친 뒤 요동으로 갔어요. 그리고 도해선을 만나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 뒤에 금덩이를 받고 도해선을 만춘장으로 인도하게 되었어요. 마침 산해관으로 떠나려던 참인 사근님도 도해선과 논의를 하게 되었고 함께 이 일을 꾸미게 된 거예요."
주랑은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리게 되었다. 형부가 동돌궐 감옥에 갇혀 돌아오지 못하는 것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그렇다면 먼저 언니가 납치를 당한 게 분명한지 확인을 하고 싶었다.
"나는 일단 언니의 일을 알아봐야 하겠어!"
주랑의 마음은 그처럼 오락가락이고 만돌은 악착같이 잡고 늘어졌다.
"주랑님, 가려면 돈 주머니 하나만은 내줘요."
"그럴 순 없다. 너도 말을 타고 여양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라."
만돌은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듣지 않았다.
"지여선 부인은 여양에 없고 그리로 가는 건 죽으러 가는 거예요. 그 그러므로런 주랑님은 저와 함께 동돌궐로 가서 양신님을 구해내요."
주랑도 언니가 그대로 여양에 있으란 보장이 없고, 형부를 함께 구해내러 가자는 말도 허수히 들어 넘길 수가 없어 생각에 잠겨 들었다.
"주랑님, 제발 제 말대로 헛수고는 마세요."
주랑은 아무런 대꾸도 않자 만돌이 팔을 잡아끌었다.
"주랑님, 일단 저 주막으로 다시 들어가요."
"주막은 왜 다시 들어가자는 것인가?"
"저는 배가 고파 못 참겠어요. 주랑님도 마찬가질 텐데 일단 뭘 좀 먹어야 움직일 수가 있겠어요. 그리고 얘기도 좀 더 나눠 봐요."
주랑도 양신에 관한 일을 좀 더 알아보고자 끄는 대로 끌려갔다.
만돌은 다시 주막으로 들어간 뒤 아까와는 전혀 다르게 주인에게 허리를 깊이 숙이고 공손하게 사과의 말부터 했다.
"주인아저씨, 제가 너무 무례하게 굴었어요. 용서해 주세요."
주인은 좀 마음이 풀린 듯 대꾸했다.
"사과를 하니 나도 없던 일로 하겠소."
"주인아저씨, 우린 조용히 얘길 나누면서 저녁을 먹으려고 해요. 빈방이 있으면 내주실 수가 없을까요?"
"그렇게 하겠소. 소분아, 손님들을 방으로 모셔라."
처녀의 이름은 소분(少芬)이었다. 그녀는 두 여인을 좀 외진 쪽에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만돌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소분에게 매우 상냥한 음성으로 요리를 풍족하게 시켰다.
잠시 후 만돌이 몸을 일으켰다.
"주랑님, 저는 소피를 보러 변소를 다녀오겠어요."
만돌은 방을 나가면서 돈주머니 쪽에 다시금 눈길을 주었다. 주랑도 자신이 돈 주머니를 쥐고 있는 한 도망을 치진 못할 것으로 보았다.
"주랑님, 패물 주머닐 가지고 혼자서 떠나면 안 돼요."
"그런 걱정은 말고 얼른 다녀오기나 해요."
방을 나선 만돌은 주방으로 갔다.
"소분, 감주가 있으면 두 그릇만 떠 주겠어요?"
"예, 그러지요."
소분은 얼른 감주 두 그릇을 떠서 쟁반에 담아 내주었다. 만돌은 쟁반을 받아 들고 오다가 구석진 데로 가더니 허리춤에서 봉지를 하나 꺼낸 뒤 흰 가루를 감주에 타고 손가락으로 저었다.
그때 방 안에 혼자 있던 주랑은 무심코 방문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그랬더니 쟁반을 들고 오던 만돌이 갑자기 주변을 살피고 감주 그릇에 무엇인가를 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만돌은 잠시 후 태연하게 쟁반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주랑님, 목이 마르실 것 같아 감주를 두 그릇 얻어왔어요."
주랑은 시치미를 떼면서 감주를 권하는 만돌에게 말했다.
"만돌님, 할 말이 있는데 밖에 누가 있는지 한번 봐주세요."
만돌은 몸을 일으킨 뒤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 도로 닫았다. 주랑은 그 틈에 감주 그릇을 얼른 바꿔 놓았다. 만돌은 자기 자리에 앉자 감주 그릇을 집어 들고 주랑에게도 권했다.
"주랑님, 어서 드시고 하실 말씀이 무엇이지 해주세요."
주랑은 자기 앞의 그릇을 천천히 집어 들었으나 마실 수는 없었다. 그러자 만돌은 상냥한 웃음을 머금고 어서 들라는 듯 눈짓을 하고 자기 그릇에 입에 대고 한 모금을 마셨다.
만돌은 감주를 꿀꺽 삼키고 나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들었다. 놀란 눈으로 주랑을 바라보며 그릇을 방바닥에 떨어뜨렸다. 잠시 후 눈동자를 하얗게 까뒤집은 채 입에선 울컥 피를 토했다.
주랑은 그 모양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얼마나 독한 약을 탔기에 금세 쓰러져 사지를 비틀어 소름이 끼쳐 들었다. 만돌은 독을 품은 눈으로 노려보며 악에 바친 소리를 흘려냈다.
"나쁜 년! 네가 그릇을 바꿨지? 네년의 애비는 고구려 땅에서 태산팔협에게 이미 죽은 걸 알기나 해? 너도 고통을 받고 죽어라."
주랑은 다급히 물었다.
"그, 그 말이 정말인가?"
만돌은 그러는 주랑의 옷을 틀어잡았다. 그러나 그 손은 이내 힘이 풀리고 바닥에 늘어뜨렸다. 주랑은 급살을 당하는 광경 앞에 어쩔 줄을 모르는데 소분이 나타나 방문을 열었다.
소분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주랑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감주를 마시더니 죽었어요."
소분은 죽은 만돌을 들여다보고 나서 중얼거렸다.
"저는 이럴 줄 알았어요."
"처녀, 내가 죽인 게 아니고 감주를 마시고 저렇게 되었어요."
주랑이 변명을 하자 소분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걱정 마세요. 이 계집은 제 꾀에 지가 죽은 거예요."
"제 꾀에 죽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방금 전에 저는 이 계집이 하는 짓을 다 보고 있었어요."
소분의 대답에 주랑도 알고는 있었지만 모른 체 물었다.
"뭘 봤기에?"
"이 계집은 감주에 무슨 약을 탔어요. 그걸 보고 저는 손님이 걱정이 되어 가만히 뒤를 따라왔어요. 그런데 남을 죽이려고 탄 약 그릇을 어쩌다 지가 마시고 죽고 되었네요."
그때 주인도 요리를 담은 쟁반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방바닥에 쓰러진 채 입에서 피거품을 토해내고 죽은 만돌을 내려다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이 여인이 죽다니? 어쩌다 이렇게 되었소?"
주인은 주랑을 의심하듯 묻자 소분이 부친에게 만돌이 죽게 된 경위를 자세히 설명했다. 딸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난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얼른 방문을 도로 닫았다.
"이 계집은 남을 죽이려다 제풀에 당했군! 낭자는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가 없겠소. 그러나 큰 위기를 모면했다고 해도 이 사건은 관에 신고를 해야만 되는 일이요."
주인의 말에 주랑은 내심 여간 당황하지 않았다.
"관아에 신고를 하신다고요?"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그러면 저는 어떻게 될까요?"
"낭자는 죄가 없어도 일단은 취조를 받게 될 것이요."
"그럴 수는 없어요!"
주랑이 외치듯 말하자 주인도 무슨 생각에 잠겨 드는 태도가 되었다.
"하긴 그렇게 되면 낭자는 여러 가지로 골치 아픈 일을 겪게 되겠소. 자칫 공연한 죄를 뒤집어쓰고 무슨 위험이 닥칠지 모르겠소. 나는 그런 생각 때문에 걱정이 여간 크지가 않소."
주랑도 큰일이다 싶었다. 때문에 차라리 자신과 만돌 사이에 얽힌 사연들을 밝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을 마치고 그 증거로 방바닥에 놓인 돈 주머니들을 가리켰다.
주인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물었다.
"그러니까 돈 주머니를 다시 찾고자 낭자를 죽이려 했다가 이 계집은 제가 도리어 당하게 되고 말았군? 그런데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이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단 말이요?"
주랑은 그 말을 듣고 주인에게 두 개의 돈주머니들을 내주었다.
주인은 그걸 받아 들고 속을 들여다보더니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하나는 주먹만큼이나 큰 금덩이가 들어 있고 또 하나는 은전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죄를 짓지도 않았지만 관아에 끌려가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저로선 관아에 가고 싶지가 않은데 피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주랑의 부탁에 주인은 매우 난처한 듯 입을 열었다.
"나는 낭자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건 확실하다고 믿소. 그러나 이건 내가 간단히 처리할 수가 없는 일이요. 때문에 좀 더 사정을 구체적으로 들어본 뒤에 나도 무슨 결정을 내려도 내릴 일이요."
주인의 대답을 듣고 주랑은 생각에 잠겼다. 위기를 모면하고자 적당히 둘러대선 안 되겠고 모든 걸 다 털어놓기로 했다. 때문에 자신의 신분과 사정을 소상하게 밝히고 수국 땅으로 오게 된 경위도 말해 주었다.
"낭자의 얘기를 듣고 보니 타국 땅에서 너무도 딱한 사정에 처했구려. 나도 동정을 금치 못하겠는데 죽은 계집이 양적선의 첩이었기 때문에 문제요. 관아에선 낭자와 저 계집 사이를 연관을 지워 공연히 의심을 두려고 들지도 모르겠소. 그러므로 관아로 들어가는 건 안 되겠소."
"그러시면 절 어떻게 도와주실 방법이 없겠습니까?"
"천성이 사악한 저 계집이 저렇게 죽은 것은 자업자득이요. 그러나 나로선 이 일을 간단히 처리할 수가 없고 돕는다고 해도 한계가 있으므로 여간 주저가 되지 않을 수가 없겠소."
주랑은 그 말에 간곡하게 더 매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가 관아에 가지 않게 해 주시면 은혜에 대한 보답을 하겠습니다."
그런 말을 하고 금덩이가 든 주머니를 주인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주인은 크게 놀라면서 물었다.
"낭자, 이처럼 큰 금덩어리를 정말 내게 주겠다는 것이요?"
"제가 목숨을 잃게 된다면 금덩이고 돈이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금덩이를 받고 저 시체를 남몰래 처리하고 없었던 일로 처리되도록 만들어 달라는 말이 아니요?"
"그 일만이 아니고 또 다른 부탁도 드릴 게 있어요."
"또 다른 부탁을 할 게 있다니 그게 뭐요?"
"저는 이제 백제로 돌아가지 않고 중원 땅에서 계속 머물겠어요."
"중원 땅에서 계속 머물려는 이유는 무엇이요?"
"저는 형부가 돌아오길 기다려야 하기 때문예요."
"형부인 양만춘 대정은 양현감의 밀서를 지니고 동돌궐에 가서 감옥에 갇혔다니 그것도 큰 문제이나 낭자는 앞으로 어디서 머물려고 하오?"
"저는 태원 땅으로 가려고 해요."
"낭자가 태원 땅으로 간다면 무슨 이유로 그런단 말이요?"
"저는 태원 땅에 계신 가의 참군이란 분을 만나서 몸을 의탁하려고 해요. 그래야만 안전하고 앞으로 일들도 그 분과 상의를 할 수가 있어요. 서면님이 절 그곳으로 데려가 주셨으면 해요."
"내가 낭자를 태원으로 데려가서 가의 참군을 만나게 해 준다?"
"그렇습니다. 저는 소분도 함께 갔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나도 낭자에게 부탁을 하고 싶소."
"주인께선 제게 무슨 부탁을 하실 게 있다는 말씀인가요?"
"낭자가 가의 참군과 그처럼 가까운 사이라면 나도 만나고 싶소."
"서면님은 무슨 일로 가의 참군님을 만나려고 하시나요?"
"낭자가 가의 참군에게 날 소개해 주면 청을 해볼 게 있소."
주인은 그렇게 대답하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의 이름은 서면(徐勉)이고 본래 관직에 있었던 몸이었다. 황제가 운하를 팔 때 현장 공사 감독을 맡고 있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공사엔 여인들까지 강제로 동원을 시켜 노역에 투입했다. 그로 인해 혹사를 당하다 죽은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았다. 나중엔 죽은 시체가 너무 많아서 제방을 쌓는 속에 그대로 묻기까지 했다. 그런 일을 오래 겪다 보니 환멸을 느껴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생계를 영위하고자 외동딸과 함께 주막을 차렸다. 그러나 주막의 경영은 난리 통이라 잘 되지가 않았다. 살기가 힘들어서 관직에 대한 미련이 다시 생겨났다. 그런 참에 주랑이 가의 참군과 가까운 사이임을 알게 되자 생각을 바꾸었다. 그 이유는 가의 참군이 태원 자사인 이연과 먼 친척이라는 점이었다. 만약에 그가 추천을 해준다면 태원에서 군관 직을 얻을 수가 있었다. 게다가 이연도 반란을 일으킬 기미가 보인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이런 때 그 밑으로 들어가서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만약에 그게 되지 않는다고 해도 큰 금덩이만 있으면 태원으로 옮겨가서 딸과 더불어 사는 데는 별 걱정이 없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도 마침 여길 뜨려던 참이었소. 내가 가의 참군의 천거로 당국공 밑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소."
"서면님이 그러실 생각이시라면 저도 적극 돕도록 하겠어요."
"낭자, 나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 과분한 사례를 받는 건 크게 마음이 걸리오. 그러나 서로가 믿고 상부상조해 살아갈 길을 찾아봅시다."
"서면님이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도 더없이 고맙겠습니다."
"나는 지금부터 남들이 모르게 빨리 시체부터 처리를 해야 하겠소."
서면은 말하고 즉시 시체를 집 뒤로 옮긴 뒤 땅을 파고 묻었다. 그러는 동안에 주랑은 또다시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갈등을 빚게 되었다.
"서면님, 저는 아무래도 여양의 사정을 확인해보지 않고는 태원으로 떠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혹시 언니와 아이들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큰일 예요. 이리로 데리고 와서 함께 태원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나도 낭자의 말을 들으니 그렇게 하는 게 좋겠소."
"돌아가는 길도 모르고 밤길에 어떻게 방향을 잡고 제대로 갈 수가 있을지 몰라 걱정입니다. 서면님이 함께 가주실 수는 없겠어요?"
"그렇다면 이 밤으로 함께 떠납시다. 마침 타고 온 말이 두 필이나 있으므로 밤길을 빨리 달린다면 새벽녘 전에 당도할 수가 있겠소."
"그렇게 해주신다면 지체하지 않고 곧 떠나셔요."
"낭자는 장도를 메고 있는데 검술을 익혔소?"
"조금이요. 때문에 제 앞가림은 할 수가 있어요."
주랑은 대답하고 이번엔 자기 돈 주머니를 소분에게 맡겼다. 그리고 두 사람은 즉시 말을 타고 함께 길을 떠났다.
이미 깊어진 밤길이나 부지런히 말을 몰았다. 아직은 새벽이 먼 시각에 여양에 당도할 수가 있었다. 주랑과 서면은 만춘장으로 다가들었다. 그러나 대문을 두드릴 용기가 나지 않아 뒷 담장 쪽으로 돌아갔다. 주랑은 서면의 부축을 받아 담장을 넘고 별채로 접근해서 나직이 불렀다.
"언니, 주랑이 돌아왔어요."
그러나 아무런 인기척이 없어 문을 열고 방안을 들여다봤다. 어둠에 눈이 익어가며 살펴봤으나 아무도 없었다. 눈물이 왈칵 터지려는데 주방에서 일하는 숙수 아주머니가 소리 없이 다가들었다.
"주랑 낭자, 돌아왔구려!"
"아주머니, 언니와 조카들은 여길 떠났습니까?"
숙수 아주머니는 목소리를 죽이라고 손짓을 했다.
"주랑 낭자는 여길 어떻게 들어왔어요?"
"뒷 담장을 넘어서 들어왔어요."
"잘했어요. 이 집은 지금 관군에게 점령을 당했어요. 낭자가 여기에 있다간 체포당해서 처형을 면치 못할 것이므로 얼른 빠져나가요."
숙수 아주머니는 주랑의 손을 잡고 끌었다. 그리고 후원의 쪽문을 열고 함께 밖으로 나가서 숲 속으로 들어갔다. 주랑은 참담한 심경으로 울음이 섞인 음성으로 겨우 물었다.
"아주머니, 언니가 여길 떠난 게 분명한가요?"
"사근님 가족을 따라 고구려로 가는 배를 함께 탄 것만 알고 있어요. 그런데 사근님은 산해관에서 배를 내릴 것이나 여선 부인은 고구려에서 데려갈 사람들이 왔기 때문에 그대로 갔을 것으로 짐작이 돼요."
주랑은 절망적인 심경인데 숙수 아주머니가 말했다.
"주랑 낭자도 말을 타고 빨리 쫓아가면서 배를 찾으면 어떻겠어요?"
"저보고 배를 쫓아가라는 말씀인가요?"
"낭자도 그 배를 탈 수가 있다면 함께 돌아갈 수가 있지 않아요? 고구려로 가는 배는 황하를 떠내려가는 데만 며칠이 걸린대요. 말을 타고 빨리 강변을 쫓아가면서 내려가는 배들을 찾아보면 어떻겠어요?"
주랑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언니를 만날 수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언니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라도 싶은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 말씀 고마워요. 빨리 쫓아가 보겠어요."
주랑이 황급히 말에 올라타자 서면은 의아히 물었다.
"낭자, 어디를 가려고 그러오?"
"저는 황하 변을 따라가면서 고구려로 가는 배를 찾아보겠어요. 돌아가는 언니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 하겠어요. 제 마음을 이해해 주세요."
"그러나 배를 발견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소?"
"배를 만나지 못하면 서면님을 다시 찾아가겠어요."
"알겠소. 나는 기다리고 있겠소. 꼭 돌아오기만 바라겠소."
주랑은 질풍처럼 말을 몰아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덧 가을도 거의 다 가고 있지만 한낮의 태양은 뜨거웠다.
누런 물결이 넘실대는 황하는 일 년 중 수량이 가장 많은 때였다. 주랑은 뙤약볕 밑에서 곡식들이 익어가는 강변을 따라가면서 강상의 상선들을 발견하면 목이 터져라 불렀다.
"여선 언니, 주랑예요. 대답해 주세요."
하루 종일 그렇게 외치고 외치기를 거듭했다. 나중엔 목이 잠겨 목소리를 쥐어짜도 나오질 않았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나중엔 피눈물처럼 끈적거려져 시야마저 흐려졌다. 그러나 어느 배에서도 응답은 없고 어떤 배는 뱃사람이 뭐라고 고함을 질러대기도 했다.
주랑은 끝내 목소리마저 나오지가 않고 울음이 터져도 눈물마저 말라붙어 나오질 않았다. 실망감, 절망감, 허탈감, 안타까움 속에 황하의 하구에 이르자 몸은 완전히 지쳐버렸다.
황하의 하구에선 강줄기가 수십 갈래로 갈라졌다. 강물은 상류에서 실어온 흙이 쌓여서 삼각주(三角洲)를 만들었다. 끝없는 갯벌만 드러난 삼각주의 먼 끝자락에 하얀빛을 발하는 게 바다였다.
주랑은 지친 몸으로 먼 황해 쪽에 멍청한 눈길만 던졌다. 더는 나갈 수가 없는 곳에 이르렀기 때문에 멈추었다. 가슴속은 만감이 교차하고 비로소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오직 생부의 얼굴을 보려고 백제를 떠나 만리타국까지 왔다. 그런데 생부의 얼굴을 보기는커녕 이젠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따금씩 사비성의 부친 얼굴을 머릿속에 떠 올렸지만 자신은 배신자로 죄송한 생각만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원망도 컸다. 생부의 얼굴을 영 못 보게 만들어 놨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젠 생부의 얼굴은 영영 모르게 되고 분신 같은 언니마저 다시 헤어졌다. 그처럼 모든 걸 송두리째 잃은 슬픔과 공허감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자 마지막 남은 태산팔협의 옹장에 대한 복수심이 끓어올랐다. 복수를 하려면 먼저 동돌궐 감옥에 갇힌 형부를 구해내야 만했다. 둘이 힘을 합치면 복수가 가능하다는 생각에 분연히 말머리를 돌려세웠다.
"형부를 구하기 위해 빨리 다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돼!"
그런 결심을 굳히게 되자 다시금 황하를 거슬러 오르게 되었다. 하류로 갈 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상류로 오르면서부터는 여간 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중원 땅은 워낙에 드넓어서 지역마다 사정이 달랐다. 황하의 양안은 대체로 농사가 잘 되어 인심이 후했다. 마을들을 거칠 때마다 재수가 좋으면 밥을 얻어먹고 굶주림을 면했다. 그러나 상류로 오를수록 지난해 든 흉년으로 구걸을 하기가 힘들어졌다.
어떤 때는 배가 너무 곺아서 들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 씹었다. 그러자니 몸은 극도로 수척해져 말 잔등에 붙어 있기조차 힘이 들었다. 그래도 말은 풀을 뜯으며 계속 걸어주었다.
이제 남은 건 오직 형부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에 강행군을 한 끝에 겨우 여양에 가까워졌다. 거기서부턴 더욱 주의를 하며 사람들에게 여양 쪽 사정을 계속 알아봤다. 예상대로 많은 백성들이 설쳐대는 관군들에게 무고한 죽음을 당하고 있었다. 도처가 그 지경이라서 큰길은 위험하고 길을 끼고 산속으로 숨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여양의 외각을 돌은 다음부터는 밤길에 지나쳤던 기억을 더듬어 서면의 주막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산속을 더듬어 나가다 보니 시간도 걸리고 힘겹게 겨우 당도할 수가 있었다.
서면과 소분은 주랑을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듯 맞았다.
"낭자, 나는 여길 제대로 찾아 올 수가 있을지 걱정이었소.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서 여간 반갑고 다행한 일이 아니요."
주랑은 몸을 가누기조차 힘이 들고 신열이 났다. 갑자기 눈이 부옇게 흐려진 채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그때부터 소분이 지극 정성으로 간병을 한 끝에 이틀 만에 겨우 깨어나게 되었다.
서면은 안도의 한숨을 흘려내며 말했다.
"낭자, 며칠간 몸을 더 추슬러야 하겠소."
"서면님 저는 며칠간 더 쉬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소분도 주랑의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주랑 언니, 이제부턴 제가 언니를 건사하겠으니 그럼 떠나요."
"소분, 고마워. 날 좀 도와주면 내일이라도 바로 떠나겠어요."
서면은 그 말을 듣고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갑시다. 잔인한 황제는 백성들의 목숨을 파리만도 못하게 여기며 죽여 대오. 폭정에 항거하는 백성들의 봉기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소. 나도 사나이로 불평불만을 품을 게 아니고 싸우겠소. 그러기 위해 세상을 구하려는 당국공 밑으로 들어가서 동참을 하려고 하오."
소분은 주랑에게 엉뚱한 말을 했다.
"언니, 앞으로 절 동생으로 삼고 검술도 가르쳐 주세요."
"소분은 왜 갑자기 검술을 배울 마음을 먹게 되었지?"
"저도 언니처럼 근사한 여자가 되고 싶어요."
"내가 근사한 여자라고?"
"언니는 금덩어리를 아버지께 주고 은전을 모두 제게 맡겼어요."
"그래서 근사한 여자라고?"
"그런 행동은 웬만한 남자도 못할 일이예요. 저는 큰 감동을 받고 말았어요. 그러니 어찌 언니를 존경하고 따르고 싶지가 않겠어요?"
"그런가? 나도 소분 같은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어!"
주랑은 그런 말을 하는 소분의 손을 꼭 쥐어주다.
이튿날 주랑은 서면의 가족과 함께 태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