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새로운 길 (626)
속말부를 떠난 양신은 중원 땅이 아닌 호리소코루로 향했다. 그곳엔 흑발에게 금덩어리를 맡겨 지은 건물이 있었다. 허망했던 세월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개척할 생각이었다.
호리소코루에 당도하자 돌리 가한을 예방했다. 힐리 가한의 감시를 당하는 처지인 돌리는 양신이 무문의 도장을 열고 싶다는 말을 꺼내자 적극 호응을 하며 도울 뜻을 밝혔다.
사람들은 고수(高隋) 전쟁 때 양신이 수양제로부터 종마를 되찾아 줬기 때문에 매우 호의적인데 무문의 도장을 세우겠다고 하자 모두가 환영을 하며 돕겠다는 분위기였다.
시피 가한이 수양제에게 무릎을 꿇은 뒤 힐리 가한 역시 당에 복속하게 된 것을 동돌궐 백성들은 큰 수모로 여겼다. 때문에 사기가 떨어진 가운데 양신이 갈사무문 도장을 열자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돌리 가한도 부족장의 자제들에게 도장 입문을 권했다. 그런 소문을 들고 힐리 가한도 아들인 타문(陀紊)을 호리소코루로 보내 문생으로 입문시키는 뜻밖의 조치를 취했다.
흑발도 와서 양신과 오래 간만에 회포를 풀고 도울 것을 약속했다.
"고수전은 고구려 주변국들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소. 몇 배나 강한 수국을 물리친 것은 지략이 크신 을지문덕님을 비롯해 장수와 병사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용감히 싸운 결과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소. 나는 양신님이 세운 도장이 잘 되도록 물심양면으로 돕겠소."
"저는 흑발님에 대한 은혜를 뭐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양신님이 이곳에 무문을 세운 것으로 보답은 충분하오."
흑발은 바로 카라발가순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양신은 호리소코루에서 자리를 잡는데 여간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양신은 전부터 생각한 바가 있어 파루를 시켜 백산부 대막불의 아들인 백장(柏章)을 호리소코루로 데려와 검술을 지도했다. 파루는 양신이 동돌궐에 갈사무문의 도장을 연 것을 걸마루에게 알렸지만 백장을 호리소코루로 데려온 것은 숨길만큼 심복이 되었다.
파루는 양신의 삶과 행적을 꺼질 줄 모르는 불길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게 양신은 너무도 매혹적인 사나이로 비춰졌다. 숱한 어려움들을 꿋꿋이 버텨낸 건 보통 인물이 아닐 것이다. 분명 큰 야망을 품었을 것으로 믿어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양신은 호리소코루에서 1년 간의 검술 지도를 해서 도장을 본 궤도에 올려놓았다. 그런 뒤 타문을 사범으로 세워 도장을 맡겨놓고 자신의 계획에 따라 다음 목표인 실위국으로 향했다.
실위국은 흑수의 중상류에 접할 만큼 영토가 넓었다. 그러나 5부로 나뉜 채 추장들이 각자의 영역을 통치했다. 추장들이 추대해 세운 선우(單于)는 명색뿐인 국왕이라 말갈처럼 통일이 안 된 나라였다.
선우인 치얼루는 양신을 반갑게 맞아 각별히 대해주었다. 두 사람은 고수 전쟁을 회상하며 중원 땅에서 수국의 뒤를 이은 당 또한 북방 경략에 나설 태세를 보여 우려 속에 많은 얘기를 나눴다.
양신은 치얼루가 실질적인 국왕이 되려는 야망을 품고 있는 인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점 때문에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길 첫 번째 대상국으로 실위국을 택한 것이었다.
치얼루는 전에 을지문덕의 호위무사였던 양신에 관한 일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을지문덕의 죽음에 대한 강한 분개와 애도를 표해서 양신은 그에게 어떤 기대감을 품었다.
양신은 치얼루의 의중부터 떠보기로 했다.
"선우 전하, 저는 이제 고구려 백성이 아닙니다."
"나도 그 사정을 잘 알고 있네. 그렇다면 여기서 살면 어떻겠나?"
"저는 동돌궐 호리소코루에 자리를 잡고 무문을 열었습니다. 문생들을 많이 지도한 덕분에 힐리 칸의 큰 신임을 받게 된 몸입니다."
치얼루는 고개만 끄덕였고 양신이 말을 이었다.
"저는 대수전 때부터 실위국을 비롯해 두막루와 지두우에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친근감도 크게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런가?"
"저는 실위국에도 무문을 열고 싶은데 전하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무문을 열고 싶다?"
"실위국도 이젠 내부 통합을 다지고 상비 군사력을 갖춰야 합니다. 제가 동돌궐에 연 검술 도장이 큰 호응을 얻게 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실위국에서도 열면 전하께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치얼루의 안색이 묘하게 변했고 양신은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전하께선 군사력을 강화시켜 내부 통합을 다지셔야 합니다."
"군사력을 강화시켜 내부 통합을 다진다?"
"그렇게 하시면 권위도 서게 되시고 통제력도 갖게 되십니다."
"그건 나도 바라는 바이나 쉽지가 않을 일일세."
"그런 말씀만 하실 게 아니라 적극 실천에 옮기셔야 합니다."
"실천에 옮긴다? 그렇다면 자네와 한번 의논을 해보고 싶군!"
치얼루는 내심 마음이 크게 동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그에 관한 얘기를 나눈 결과 양신은 대안으로 먼저 무문을 세우게 해 줄 것을 청했고 치얼루는 바람직한 일로 여겨 응낙을 했다.
실위국에도 양신이 무문을 세운다는 소문이 났다. 5부의 추장들은 환영 일색인 분위기 속에 도장은 문을 열게 되고, 상층부의 자제들을 비롯해 많은 젊은이가 입문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어느 나라건 무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이유는 고수 전쟁 때문이었다. 또 고구려의 승리는 주변국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다. 그 영향은 을 우리라고 못할 게 뭐냐는 자각이 생겼다. 그로 인해 무예에 대한 관심들이 커져 열풍(熱風)이 불게 만들었다.
양신은 실위에서도 1년간의 검술 지도를 해서 궤도에 올려놓은 뒤 치얼루의 아들인 졸주(䪼朱)를 사범으로 삼아 도장의 책임자로 앉힌 뒤 이번엔 두막루로 향했다.
실위국의 동남부엔 두막루, 서남부엔 지두우가 있었다. 두막루는 농경과 목축이 반반인데 반해 지두우는 전체가 유목을 했다. 그런 두 나라 백성들은 실위국의 남부를 제 땅처럼 옮겨 다니고 있었다.
두막루는 본래 북부여(北夫餘)의 일파인데 고구려에 쫓겨나 속말수(粟末水)의 중하류로 밀려났다. 나라는 6부로 나뉜 채 추장들이 추대한 대수령(大首領)은 상징적인 정점이었다.
양신이 실위에 갈사무문 도장을 열어 활기가 넘친다는 소문은 두막루에도 전해져 은근히 부러워들 했다. 그런 판에 추장들은 양신이 오자 다투어 초청을 했다. 그러나 양신은 의도하는 바가 있어 추장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말을 꺼냈다. 그리고 대수령 밑에 도장을 둬야 모두에게 공평성을 기할 수 있겠다는 설득으로 합의를 이끌어냈다.
대수령인 낙계저는 자신의 밑에 도장을 두게 된 것을 여간 반기지 않았다. 양신은 추장들의 합의를 이끌어내기에 매우 힘이 들었음을 생색냈고 낙계저는 크게 감사를 표했다.
"양신, 자넨 대수 전 때 고구려에서 가장 무공이 큰 무장일세. 그걸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음에도 조국에선 학대를 받고 타국 땅을 떠도니 하늘도 무심할세. 나는 자네가 두막루에서 살았으면 하네."
"말씀은 고마우시나 저는 힐리 칸의 보호를 받는 몸입니다."
양신이 그런 대답으로 일관했다. 그 이유는 상대에게 아쉬움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낙계저는 그 점을 인정하며 말을 돌렸다.
"을지문덕님의 수제자인 자넨 어디서나 각별한 대접을 받을 걸세."
"전하께서 합하에 관한 말씀을 하시니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떤 점을 묻고 싶은가?"
"두막루는 고수 전쟁 때 고구려를 크게 도왔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그에 대한 보답을 어떻게 했는지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낙계저는 고구려의 옹호 아래 그나마 자리를 지키는 처지였다. 대답을 망설이자 곁에 있던 아들인 낙발투(諾拔套)가 입을 열었다.
"아무런 보답도 없음은 세상이 다 아는 일입니다. 우린 고수 전쟁 때 고구려의 요구대로 많은 병력을 내어 도왔으나 보상은커녕 홀대만 받았습니다. 그런 일은 언제까지나 계속이 될지 모를 형편입니다."
낙계투는 말하고 부친의 눈치를 보았다. 양신은 그의 말이 모든 두막루의 백성들의 분위기임을 모르지 않아 반문을 했다.
"누군들 그런 홀대를 받으려고 하겠습니까?"
양신의 말에 낙계투는 더욱 강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홀대를 면할 방법이 없으니 문제입니다."
"홀대를 면할 방법은 국방력을 키우는 일밖에 더 있습니까? 제가 두막루에 무문의 도장을 열면 국방력을 강화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낙계저도 양신의 말대로 국방력을 강화시키는 건 바람직했다. 그러나 그랬다간 자신에게 어떤 악영향을 끼치게 될지 몰라 입을 못 떼었다.
부친이 대꾸를 않자 낙발투는 또 거침없이 말했다.
"두막루에 갈사무문 도장을 세우면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두막루는 힘이 솟아나게 될 일입니다."
낙계저는 아들을 말을 가로막듯 입을 열었다.
"양신, 나도 고구려에 반감이 클 수밖에 없으나 사정이 있네."
"전하, 저도 그 사정을 모르지 않습니다."
양신의 대답에 낙계저는 입을 열었다.
"고구려는 대수 전 때 많은 도움을 받고도 주변국들에 보답은커녕 불공정한 교역을 자행해서 큰 반감과 원성을 사고 있네. 그런데 당이 동돌궐의 무릎을 꿇게 만들자 여러 주변국들은 다시금 우려가 커졌네. 특히 어느 나라보다 긴장감이 더 클 수밖에 없는 고구려는 여러 면으로 사정이 더욱 좋지가 않을 형편일세."
양신도 그 사정을 잘 알기에 그걸 이용해 고구려 주변국을 자신의 후원 세력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두막루의 여러 추장들을 모두 상대를 하기보다 대수령인 낙계저를 먼저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게 더 효과적이란 판단이었다.
낙계저는 힘이 없는 상징적 존재에 지나지 않으나 실위국의 치얼루처럼 실질적인 국왕 자리를 노릴 야심을 품지 말란 법은 없었다. 양신은 그 점을 부추겨 움직이게 만들 생각이었다.
"전하, 두막루도 다른 나라들처럼 병력 증강과 군사 체계를 정비할 일이 시급합니다. 특히 중요한 국방력을 키우는 일을 제대로 해내실 수가 있는 분은 대수령님 뿐이란 생각입니다."
막계저는 그 말에 흐뭇함을 느끼며 반문했다.
"내가?"
낙계저는 반문하고 또 고구려를 떠올리게 되었다. 양신도 고구려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형편을 잘 알기 때문에 20대 초반인 낙발투에게 눈을 돌렸다. 젊은이를 우호 세력으로 만들어야 이끌기도 다루기도 쉽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왕실은 대수전 이후로 욕살들이 여타 부를 밀어젖히고 직접 교역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강압과 불공정한 거래만 자행해서 두막루만이 아닌 여러 나라에 폐해를 끼쳐 모두 분개하게 되었습니다."
낙계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구려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긴 주저가 되지만 국방력을 강화시킬 필요성은 컸다. 더욱이 갈사무문의 도장을 자기 밑에 두게 된 것에 희망적인 마음이 생겼다.
"저는 앞으로 전하의 자제분과 각별한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양신이 불쑥 꺼낸 말에 낙계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앞으론 자네 편에 서서 적극 일을 돕겠네."
그런 대화로 두 사람은 암묵적인 결속이 이뤄졌다.
그때부터 낙계저와 추장들의 적극 지원으로 도장을 세우는 일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도장이 문을 열자 추장들의 자제들을 비롯해 많은 젊은이가 입문하는 폭발적인 호응을 보였다.
양신은 어느 나라보다 두막루를 고구려에 가장 크게 휘둘리는 대상으로 보았다. 때문에 문생들에겐 검술만이 아닌 자주 의식을 심어주기에도 많은 힘을 기울이며 자주 하는 말도 있었다.
"두막루는 수백 년간 영토와 역사를 지닌 엄연한 독립국이다."
두막루는 실위보다 국력은 떨어지나 중요시할 점은 철을 생산할 수가 있는 나라였다. 다만 대부분 빈광(貧鑛)이라 수익성이 떨어지는 데다 고구려가 생산을 못하게 해서 폐광 상태로 있었다.
양신은 무엇보다 철 생산을 적극 권했으나 낙계저는 회의적인 반응만 보였다. 그 이유로 고구려가 대수 전 때 많은 철 생산과 과도하게 많은 무기를 만든 게 주변국들에게 많이 넘어갔다. 때문에 아직도 충분히 지니고 있어 별 아쉬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아직 철은 급할 게 없네."
양신은 낙계저의 말에 수긍이 가나 또다시 강조를 했다.
"전하, 소요될 철의 확보를 언제까지나 등한시해선 안 됩니다."
"철정은 달리 확보할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네."
"철정을 달리 확보할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말씀입니까?"
양신의 질문에 낙계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들려주었다.
"대수 전 이후로 고구려는 내부적인 철 통제가 느슨해졌네. 그 때문에 백성들은 은밀히 철정을 생산해 타국과 하는 사적 거래가 늘어났네."
양신도 고구려의 동해안 지대에 철산지가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혹시 고구려 동해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럴세. 그곳 백성들은 몰래 생산한 철정을 비밀리에 말갈족과 거래를 하고 있네. 그 양도 점점 늘어나서 지금은 두막루에도 들어오네. 어려움을 많이 해소시키게 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대외 교역은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네. 이래저래 타격이 커지게 될 수밖에 없네."
양신은 그 말에 수긍이 가지만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야만 했다.
"철을 생산하는 건 하지 않는 것보다 나으며 중요합니다."
낙계저는 계속 고개만 저어 양신은 입을 다물었다.
두막루의 도장도 1년 만에 정상 궤도에 올랐다. 양신은 낙발투를 사범으로 삼아 책임자로 세운 뒤 마지막 목적지인 지두우로 향했다.
지두우는 도이하(陶尒河)와 시무라렌에 이르는 긴 지역에 걸친 위치였다. 위치상 이웃 나라들과 교역이 성했다. 그런 지두우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고구려는 유연과 함께 분할 점령을 획책했었다. 그로인해 내부 결속을 다지게 된 지두우는 동돌궐이 당에 완전히 무릎을 꿇자 경계심이 커졌다. 그런 마당에 실위와 두막루에 갈사무문 도장이 세워진 소문이 나자 기대감을 품었는데 양신이 찾아오자 쌍수를 들어맞았다.
지두우의 수장(首長)인 막하돌(莫賀咄)은 양신을 기꺼이 만났고 특히 을지문덕과 양신이 겪은 일들부터 화제를 삼았다.
"을지문덕과 양신에 대한 내 마음은 항상 우호적일세. 그대는 을지문덕의 죽음에 대한 원한이 매우 클 것일세. 을지문덕의 혼백을 달래주기 위해서라도 나는 복수심에 차 있을 자넬 돕겠네."
막하돌도 을지문덕의 불행에 대해 누구보다 분개했고 양신이 처한 사정도 크게 동정했다. 거기다 고구려에 대한 반감이 큰 두 사람은 자연스레 한 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무문의 도장을 세우는 건 부수적인 일처럼 여기듯 앞으로 전개될 국제 정세에 더 관심들을 보였다.
지두우에서도 갈사무문 도장을 여는 일은 일사처리로 추진되었다. 문을 열자마자 어느 나라보다 문생이 되려는 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도장은 포화상태가 될 지경이었다.
양신은 지두우에서도 1년 간의 검술 지도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4년이란 세월이 훌쩍 흘러갔다. 그동안에 북3국에서 그동안 길러낸 문생들을 전부 합치면 2천여 명에 이르렀다.
갈사무문 도장은 어디서나 불함도기(不咸刀技) 검법을 교본으로 썼다. 양신이 불함산에서 창안한 검법인데 그 목적은 북3국의 문생에게 체계적인 지도를 하고 통일성을 이루려는 데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북3국의 문생들 간엔 일체성과 유대감이 형성될 수가 있었다.
양신이 그러면서 또 다른 노력도 기울였다. 문생들과 끈끈한 유대감을 강화시키는 일이었다. 실력이 떨어지는 문생들일수록 잘 챙겨주기에 애를 썼다. 못할수록 자상한 지도를 함으로써 감복하게 된 문생들은 문주(門主)와 연대감을 끈끈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종족들마다 자주성과 자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에 힘을 썼다. 그렇게 키워진 자긍심은 고구려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런 모든 일은 모든 문생들의 구심점이 된 양신의 입지를 강화시켜 어느 나라도 무시할 수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각 나라에 국방력 증강을 건의하면서 문생들이 많이 군관으로 발탁되게 만들었다.
그런 복합적인 목적 하에 문생들을 배출한 것은 1차 목표였다. 2차 목표는 북3국의 문생들로 하여금 연합체를 이뤄내는 것이었다. 그런 궁극적인 계획을 달성하고자 안함로에게 배운 역사 지식을 많이 활용했다. 북방의 여러 종족들은 거슬러 오르면 모두 단군 조선에 연결되었다. 때문에 어느 나라 문생이건 삼신족의 후예를 자처함엔 거부감이 없었다.
그런 양신에게도 큰 고민이 있었다. 그 이유는 북3국의 문생들은 거의가 가난으로 생활에 어려움이 컸다. 대부분이 하층민이라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을 못하는 자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 문제를 해결하자면 문생들과 도장에서 쓸 재원을 확보해야만 했다. 문생들로 상단을 꾸려 교역에 나설 수도 있겠으나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때문에 문생들로 하여금 각국에서 나는 산물들을 조사시켰다. 그 결과 실위국의 흑수 변에선 사금(砂金)이 많이 났다. 그러나 사금을 채취하고 싶어도 백성들은 하질 못했다. 그 이유는 무뢰배나 도적떼의 습격을 받고 금은 물론 목숨까지 잃는 위험이 왕왕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점을 착안한 양신은 어느 날 치얼루에게 말을 꺼냈다.
"선우 전하께 건의를 드릴 게 있습니다."
"무슨 건의를 하려는가?"
"도장의 문생들 중 귀족 자제들만 철 장도를 지녔습니다. 때문에 열에 아홉은 목검으로 수련을 합니다. 그런데 대련을 할 땐 철 장도에 목검이 잘려나가는 일이 잦고 목숨마저 위험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은가?"
"모든 문생들이 철 장도를 지닐 수 있게 해주려고 합니다."
"그러면 좋겠지만 자네에게 그럴 만큼 큰 재물을 지닌 게 있는가?"
"지닌 재물이 없으므로 다른 방법을 찾고자 합니다."
"무슨 방법을 찾을 수가 있단 말인가?"
"사계절 중 겨울철을 빼곤 무문의 도장을 흑수 변으로 옮기겠습니다."
"무엇 때문에 흑수 변으로 옮긴단 말인가?"
"흑수변에서 재원을 마련해 볼 계획입니다."
"흑수 변으로 옮긴다고 해서 어떻게 재원을 마련할 수가 있는가?"
"흙수변에선 사금이 많이 나는 걸로 알려졌습니다. 거기서 사금을 채취해서 그걸로 철정을 사들이면 해결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건 추장들과 먼저 상의를 해야만 가능한 일일세."
"추장들의 허락이 없으면 못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럴세."
"저는 이미 문생들에게 말을 했으므로 실행에 옮겨야 하겠습니다."
"문생들에게 벌써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그러니 전하께서 추장들과 의논을 하셔서 해결을 봐주십시오."
양신의 말에 치얼루는 난감한 표정만 지었다.
"전하께선 이번에 추장들을 한번 휘어잡아 볼 기회로 삼아 보십시오. 그렇게 하실 수가 있다고 믿고 하시면 꼭 이뤄질 걸로 생각합니다."
"짐은 힘이 없는 내가 어떻게 말을 꺼낼 수가 있겠는가?"
"전엔 힘이 없으셨으나 지금은 달라지셨습니다."
"달라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실위국에서 배출한 갈사무문의 문생들은 삼백여 명에 이릅니다. 그 세력은 이제 추장들을 능가할 만합니다. 그런 문생들이 전하 편에 서게 되면 한번 시험을 해보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치얼루는 양신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만했다. 갈사무문 문생들의 지지를 배경으로 삼을 수가 있다면 한번 용기를 낼 마음이 생겼다.
"곧 추장들을 만나서 얘길 꺼내 보겠네."
양신은 그 말에 더욱 배수진을 칠 말도 했다.
"만약에 추장들의 동의를 못 받을 경우라도 문생들을 끌고 떠날 것입니다. 저로선 그런 사태가 벌어지질 않기만을 바랍니다."
치얼루는 그 말을 강한 압력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추장들에게 그대로 전하라는 의미도 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만큼 갈사무문의 문생들은 어느 나라건 무시할 수가 없는 집단이 되었다. 처음엔 상층민 자제들이 무문을 주도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변화가 일어났다. 그 이유는 하층민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며 분위기가 바뀐 때문이었다. 하층민의 압도로 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상층민은 차츰 열기가 식고 도장엘 잘 나오질 않아 하층민의 판이 되고 만 것이었다.
추얼루도 그 점을 잘 알아서 용기를 더욱 낼 수가 있었다. 모든 추장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양신의 말을 꺼냈다. 그런데 추장들은 서로들 얼굴만 바라볼 뿐 의사 표시가 없었다. 무문에 관해선 함부로 입을 열기를 삼갈 만큼 압력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간파하고 난 치얼루는 모처럼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말을 했다.
추장들의 분위기를 전해 들은 양신은 즉각 문생들을 끌고 흑수 변으로 향했다. 도착하자 강변의 마을들을 돌면서 의논을 했다. 문생들이 백성들을 보호하고 대신 사금을 채취를 한 뒤 3등분 해 나라와 백성과 문생들이 공평하게 나누기로 합의를 봤다.
백성들은 매우 기뻐하며 사금 채취에 나섰다. 문생들은 백성들을 보호하면서 강변에서 검술을 수련했다. 목적을 달성한 양신은 더욱 자신감을 얻고 북3국의 전체적인 해결책을 찾기로 했다.
다음엔 두막루로 가서 낙계저에게 실위국 문생들이 사금을 채취하게 된 것을 알리고 두막루도 철 생산을 또다시 건의했다.
"두막루의 철광산은 빈광들이라 별 수익을 못 낼 것이네."
막계저가 말끝을 흐렸는데 양신은 굽히질 않았다.
"빈광이라고 해도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게 났습니다."
"빈광인 탓도 있으나 고구려가 생산을 못하게 막는 압력이 클세."
"두막루는 언제까지나 고구려에게 휘둘리며 지내야 하겠습니까? 문생들을 위해서라도 철 생산을 즉시 시작을 해야 합니다."
양신이 철 생산을 굽히지 않는 데는 또 다른 의도가 있었다. 두막루의 백성들이 철을 생산함으로써 고구려에 대한 대항 심을 키울 수가 있고 두려움도 떨쳐내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전하께선 두막루의 앞날을 위해 적극 앞장서주십시오."
낙계저는 양신의 끈질긴 요구에 생각에 잠겼다. 망설여지나 한편으론 자신도 그만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거기엔 실위국의 문생들의 지지로 치얼루의 영향력이 커진 것에 자극을 받았다.
"철 생산을 하되 고구려가 모르게 은밀히 하도록 하세."
낙계저도 마침내 응낙을 했다. 그러자 양신은 또 다른 요구를 했다.
"철 생산은 갈사무문의 문생들이 주도할 것입니다."
낙계저는 그 말에도 고개만 끄덕였다. 철 생산을 관철시킨 양신은 즉시 문생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철 장도를 지닐 수 있게 된 문생들은 열광적인 호응을 했고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반면 철 생산을 놓고 추장들은 우려를 금치 못했지만 드러내 놓고 반대는 못했다. 만약에 고구려를 두려워하는 태도로 비쳐지면 문생들로부터 비겁자로 몰릴 게 두려워서 유규무언이었다.
양신은 뜻을 관철시키고 나자 또 다른 구상을 하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많은 철정을 확보하기 위해선 고구려와 거래를 할 수밖에 없어 문생들로 상단을 꾸려서 교역에 나서기로 했다.
욕망의 동물인 인간은 누구나 얻고 싶은 것은 꼭 얻으려고 했다. 환경과 사정이 어려울 경우도 어떻게 해서든 뚫고 나가려 했는데 특히 재물 축적하는 일은 무모하고 실현성이 적어도 불사하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어느 나라 건 상단의 대원이 되는 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먼저 지두우에서 상단을 꾸리기로 했다. 그래야 쉽고 효과도 클 것으로 판단했다. 그런 다음에 실위국과 두막루에서도 점차 만든 뒤 우선은 북3국 간에 교역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고구려의 개모성은 호시(互市)를 여는 곳이었다. 그곳은 지두우의 상단들이 가장 많이 드나들었다. 문생들로 꾸린 상단은 기존의 상단들을 따라다니며 장사를 배우게 하기로 했다.
지두우로 간 양신은 상단을 꾸리는 일을 착수했다. 그와 동시에 또 다른 착상을 펼치기로 했다. 그것은 무문의 상단들이 교역에 나서면 재물과 조직을 관리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고 갈사문문을 영구히 보존시키고 지위를 다지는 일도 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 북3국의 무문들마다 보위부(保衛部)란 조직을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교역을 수행해 나갈 책임자를 따로 둘 계획이었다.
그런 목적에 곧 북3국엔 무문들마다 보위부를 설치했다. 그 책임자는 무문의 사범들이 아니고 문생들 중 눈여겨 봐뒀던 자를 앉혔다. 그리고 교역과 상단을 관할하고 관장하게 했다.
그때부터 파루를 은밀히 다갈촌으로 보내 은밀히 순태와 접촉을 하게 해서 야장 세 명과 함께 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두막루에 야장방을 설치하고 각종 철제품을 만들 준비를 시켰다.
양신이 추진한 일들은 서서히 그 성과가 나타났다. 특히 지두우의 상단은 실위국의 사금을 고구려에 넘기고 철정으로 바꾸어 왔다. 또 두막루의 철 생산량도 날로 늘어나 갈사무문의 문생들은 오래 걸리지 않고 전원이 철 장도를 지니게 되었다.
문생들은 철 장도를 지니게 되자 자긍심이 커지고 위상도 높아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양신은 문생들로부터 맹약(盟約)을 받았다. 무문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고 문주의 명령은 목숨을 걸고 수행할 것을 요구했다. 만약에 어길 경우엔 장도의 회수는 물론 무문에서 퇴출당했다.
한편 말갈의 백산부에선 백장(栢暲)이 갈사무문 도장을 열게 되었다. 그 소식을 접한 양신은 도장을 돌아보기로 했다. 북3국의 문생들 중 검술실력이 뛰어난 1백 명을 차출해서 거느리고 떠났다.
이때 속말부의 걸마루는 양신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별렀다. 그 이유는 자신과 상의도 않고 백산부에 도장을 세운 데 있었다. 그러나 호위 세력을 거느린 양신이 위풍당당하게 나타나자 움찔했다. 문주를 맞은 걸사비우를 비롯한 문생들은 열렬히 환호성을 질러서 걸마루는 자기도 모르게 아부성 말이 나왔다.
"양신 형님, 오래간만이요."
"대막불님, 그동안에 잘 지냈소?"
두 사람은 그런 말을 나누고 서로 포옹도 했다.
양신이 호대한 수행원을 거느리고 온 것은 걸마루의 속내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위세를 과시해 걸마루와 동급이란 인상을 심어줄 속셈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그렇게 비쳤다.
걸마루는 진수성찬을 차려 양신을 대접을 했으나 속이 상해서 진탕 술만 퍼마셨다. 이튿날 양신은 백산부의 도장을 둘러보겠다는 말을 걸마루에게 남기고 지체 없이 떠났다.
백산부에 당도한 양신은 먼저 도장으로 가서 문생들과 대면했다. 문생들이 문주를 대하는 걸 큰 영광으로 여기는 가운데 도장을 둘러보고 나서 비로소 대막불인 수노를 만났다.
수노는 양신에 관한 일들을 속속들이 알아 화제도 남다르게 고구려에 대한 적대감부터 드러내었다.
"지난해 신라는 고구려의 낭비성을 함락시켰소."
"낭비성이 떨어졌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렇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오? 신라는 낭비성의 방비가 허술함을 알고 들이쳐서 빚어진 일인데 고구려는 아직 회복을 못했소."
"그런 중요한 성을 신라에 빼앗겼다면 고구려도 한 물 갔습니다."
"국상인 고돌기는 모반을 했소. 그러나 실패하고 싹싹 빈 끝에 겨우 목숨을 건진 뒤 낭비성 성주로 쫓겨났소. 그리고 울분 속에 매일처럼 술만 퍼 마시다가 당하고 만 일이요."
두 사람은 그런 대화를 나누며 서로 간에 협조 관계를 찾을 의논을 했다. 양신은 신라와 교역을 모색할 방법을 찾고자 물었다.
"전에 신라의 제울 상단은 고구려와 거래를 했는데 여기도 옵니까?"
"낭비성 함락으로 고구려가 막아서 지금은 못 다니고 있소. 백산부와도 교역을 했지만 역시 끊겨서 아쉬움이 큰 편이요. 상단의 우두머리인 제울이 연 전에 타계를 해서 상단도 전과 같지는 못할 것이요."
"제울님이 타계를 하셨군요?"
"양신님은 그런 걸 왜 묻소?"
"신라와 교역이 가능할지 알고 싶어 그럽니다."
"나도 신라와 교역을 하고 싶으나 산물이 변변치 않아 못하고 있소."
수노의 말에 양신은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저는 대막불님과 함께 신라와 교역을 구상해 보고 싶습니다. 앞으로 대막불님도 관심을 갖고 함께 해봤으면 합니다."
"나도 바라는 바이므로 기대를 하겠소."
양신은 교역을 하기로 합의를 한 뒤 백산부의 방문을 마쳤다. 호리소코루로 돌아가는 길에 북3국의 갈사무문을 차례로 들려 점검을 했다. 그간에 보위부들마다 교역으로 상당한 재력을 축적하게 고무적이었다. 그러나 무문의 사범들이 소외감을 느끼는 듯해서 또 다른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북3국의 문생들 간에 교류도 늘리고 연대의식을 강화시킬 필요성에 불함도기 검술대회를 열기로 했다. 춘하추동으로 북3국을 돌면서 대회를 열겠다는 뜻을 밝히고 사범들에게 준비를 시켰다.
바로 첫 번째 부함도기 검술대회를 실위국에서 열었다. 행사에 참가한 북3국의 문생들은 자신들이 호대한 세력임을 깨닫고 백성들 또한 큰 관심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시작된 검술대회는 회를 거듭할수록 자리를 잡아가면서 북3국 간의 연합을 더욱 촉진시켰다.
어느 듯 고수 전쟁이 일어난 지 14년이 흘렀다. 고구려는 그동안에 순무를 하지 않다가 동돌궐이 당의 침략을 받고 주변국들의 분위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다시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순무는 대주부(大主簿)인 도해선이 맡았다. 그는 첫 번째 순무지를 말갈로 정하고 7부의 대막불들에게 추이성에 모일 날짜를 통보했다. 그런데 순무 병단이 당도해보니 대막불들은 한 명도 모이질 않았다.
도해선 뜻밖의 사태에 당하자 성주인 광두(匡荳)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광두는 그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밝혔다.
"이런 일이 벌어진 원인에 대해선 나름대로 추측은 갑니다."
"어떤 추측을 한단 말인가?"
"대주부께서도 말갈과 관계가 전과 같지 않음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도해선은 고개를 만 끄덕이며 낭패감에 잠겨 들고 말았다. 그렇게 된 원인이 고구려에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대수 전 때 많은 무기를 획득한 말갈족이 그런 태도를 보인 데는 분노를 금치 못했다.
"고구려는 철제품 수요가 줄어들어 재정 악화를 초래했습니다. 그걸 벌충하고자 공급가를 자꾸만 올려서 말갈의 반감만 키운 결과입니다."
광두는 그런 말을 하면서 도해선에 대한 반감이 더 커졌다. 국왕과 더불어 을지문덕을 독살한 일에 반감이 컸다. 그 점은 주변국들이 더해서 고구려에 대한 반감은 국에 달한 분위기였다.
"대주부께 이런 말씀을 드려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인데 그러는가?"
"양신은 갈사무문 도장을 처음 속말부에 세웠는데 계속 주변국으로 퍼져나갑니다. 말갈이 순무에 응하지 않는 것과 무관하지 않겠습니다."
"양신이 무문의 도장을 세웠다니 그걸 왜 지금에 알리는가?"
"각 나라들이 그걸 숨겨 와서 저도 근래에 알게 된 일입니다."
"각 나라들이 그걸 숨겨왔다?"
도해선은 중얼거리며 심각하게 안색이 굳어들었다.
"대막불들이 모이지 않은 게 그와 연관이 있다?"
광두는 반문하는 도해선에게 고소함 같은 것을 느꼈다.
추이성에서 사흘간을 더 머물며 기다려 봤던 도해선은 끝내 대박불들이 나타나지 않자 할 수 없이 순문 병단을 끌고 속말부로 향했다. 그런데 국경지대에서 1천여 무리가 앞을 가로막았다.
속말부의 걸사비우는 앞으로 나서 도해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속말부는 더 이상 고구려의 순무를 받지 않기로 했소."
"감히 그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수가 있는가?"
도해선이 분노한 음성으로 외쳤지만 대답은 더욱 단호했다.
"속말부는 고구려의 속방이 아니요."
"그대가 지금 한 말은 속말부 대막불님의 뜻인가?"
"아니요. 나는 갈사무문 보위부 부장으로 문주의 명을 받드오."
"갈사문문의 보위부는 뭐고 문주란 자는 누구인가?"
"문주는 양신님이시오."
도해선은 그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신이라? 이 일도 대막불님이 모르시는가?"
"모르시오."
선도해는 너무도 뜻밖인 대답에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순무 병단은 여기서 회군하시오."
걸사비우에 말에 도해선은 벌컥 화를 냈다.
"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럴지 어디 두고 봅시다!"
두 사람의 대화는 피장파장으로 끝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은 도해선의 순무 병단은 5백 명에 불과한데 반에 걸사비우의 무리는 배나 되었다. 수적인 열세인 데다 상대는 검술을 익힌 무리로 교전이 벌어지면 낭패를 당할 쪽은 순무 병단이었다.
도해선은 항의를 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수치감을 안은 채 병력을 돌려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번엔 두막루로 향했다. 그런데 그쪽 국경에도 1천여 무리가 대기하고 있었다.
순무병단은 모두가 입을 딱 벌일 뿐이었다. 더욱이 이번 무리는 모두 철 장도를 지닌 데다 정규군처럼 군복을 차려 입었다. 도해선은 두막루에 그만한 상비 병력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전에 고구려에서 동원 명령을 내리면 추장들이 동원한 백성들은 평복을 입고 나왔었다. 그런데 말쑥하게 군복까지 차려입은 데다 한 눈에도 규율이 잡혀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세 무리였다.
그런데 무리들마다 장수인 듯한 자들이 한 명씩 있었다.
"나는 실위국 갈사무문의 보위부 부장 석궁이요."
"나는 두막루 갈사무문의 보위부 부장 도마요."
"나는 지두우 갈사무문의 보위부 부장 막갈이요."
차례로 입을 열 세 사람은 하나같이 보위부장이란 호칭을 썼다. 어안이 벙벙한 할 도해선은 겨우 목소를 흘려내었다.
"그대들은 대체 누구인가?"
실위국의 석궁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우린 삼국의 갈사무문 문생들이요. 고구려의 순무를 막으려고 나왔소. 피차 살상을 일으킨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 즉각 회군을 하시오."
도해선은 그 말을 듣고 난감하기만 했다. 무슨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속말갈에선 협박이라도 했지만 그 마저도 되지가 않았다. 큰 충격 속에 생침을 삼킨 뒤 겨우 물었다.
"실위국, 두막루, 지두우의 국주들은 이 일을 알고 있는가?"
"모르시오. 어찌 되었건 간에 더는 묻지 마시오."
"그대들도 갈사무문의 문생들인가?"
"그렇소."
도해선은 그 말을 듣고 회군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순무 병단의 병력들도 순순히 말머리를 돌려세웠다. 모두는 도해선을 향해 입들을 비죽거리고 고소하단 표정들이었다.
순무병단 병사들은 설사 도해선이 공격 명령을 내린다고 해도 따를 자는 하나도 없었다. 속말부에서 양신에 관한 말이 나왔을 때부터 을지문덕에 관한 일을 떠올리며 반감을 느꼈다.
도해선도 그런 장졸들의 속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두 말없이 조용히 떠나는 게 상책이나 뒤통수가 뜨거웠다. 일생일대의 수치감 속에 계속 얼굴을 들지 못한 채 겨우 말 잔등에 앉아 있었다.
건무왕은 회군해온 도해선의 보고 받고 아연실색을 했다.
"폐하, 신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를 줄은 몰랐습니다."
"어떤 사태를 두고 하는 말인가?"
"어떤 사태를 말함인가?"
"양신 때문에 순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양신 때문에 순무를 못했다고?!"
도해선은 그런 말을 하고 겪은 일들을 보고했다.
"양신의 문생들 무리가 순무 병단의 두 배가 넘었다고?"
"폐하, 신은 그보다 더한 다른 걱정을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다른 걱정이라니 무엇인가?"
"양신의 무리가 순무 병단을 막은 걸 삼국의 국주들이 모릅니다."
"삼국의 국주들조차 그 사태를 모르고 있다?"
"폐하, 그만큼 사태는 심각해진 지경입니다."
"대주부는 사태가 일어난 이유에 대해서 알아본 게 있는가?"
"폐하, 북3국의 국주들만 아니고 말갈의 대막불들도 모릅니다. 그만큼 지략이 큰 양신에게 모두가 말려든 상태가 된 것 같습니다."
"양신의 지략에 말려들었다?"
"갈사무문 도장은 북3국만이 아닌 호리소코루와 속말부에도 세워 많은 문생들을 배출했는데 거기엔 어떤 저의가 있을 듯합니다."
"어떤 저의라니?"
"양신은 북3국은 물론 말갈까지 고구려에 대한 반감을 조성하려는 음모가 깔고 하는 일 같습니다. 뿐더러 갈사문문 문생들에겐 고구려 식 군사훈련까지 시킨 듯 제법 군제를 갖춘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댄 양신이 그런 일을 하는 걸 그토록 몰랐단 말인가?"
"신이 모를 수밖에 없을 만큼 모든 나라들이 달라진 때문입니다."
"모든 나라가 어찌 그렇게 달라질 수가 있단 말인가?"
"신은 그만큼 사태가 심각해졌다는 생각입니다."
"그건 양신을 감싸려고 든다는 말이 된다."
"신은 북3국의 국주들이 양신의 손아귀에 들었다고 봅니다."
도해선의 대답에 건무왕은 한숨을 흘려내고 말았다.
"짐은 대주부부터 문책을 하고 싶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순무를 거부한 무리들에 대한 응징이 급하고 톡톡히 대가를 치러주겠다."
"폐하, 신은 응징이 쉽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도해선, 쉽지가 않다면 응징이 불가하단 뜻으로 들린다. 감히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는가? 대주부는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
"폐하, 신은 감히 간단히 처리해선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간단히 처리할 수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인가?"
"이번 사태로 북3국의 국주들에게 책임을 묻기는 애매합니다. 폐하께서 실질적인 보복 대상은 양신의 문생들입니다. 그들이 하찮은 도당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병력을 내시는 건 삼가실 일이옵니다."
건무왕도 그 말에 수긍이 갔다. 양신에 대한 보복은 회의적인 일로 사필귀정이었다. 모든 게 양신에게 가했던 핍박의 결과인데 이젠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순무에 참가했던 여타 부 병력의 반응이 무관심이란 점 때문이었다.
"짐도 더 큰 문제를 판도 내 타 종족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본다."
"폐하, 지금까지 타 종족 배후에 숨었던 양신이 정체를 드러낸 이상 신은 여러 모로 정탐을 강화해 어떻게든 도모해 버리고 말겠습니다."
도해선의 대꾸에 건무왕은 의외로 고개를 저었다. 사태의 심각성 때문이었다. 앞으론 북3국의 국주들에게 책임을 묻기가 쉽지 않았다. 그들을 칠 명분도 없고 남은 것은 부끄러움뿐이었다.
"폐하, 신은 또 다른 걱정도 있습니다."
"또 다른 걱정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앞으로 철제품을 팔기가 더 어려워져 국고가 파탄날 지경입니다."
"그건 수긍이 가나 짐은 그보다 더 큰 걱정이 있다."
"폐하께선 어떤 걱정을 말씀하십니까?"
"전엔 상비 병력 초자 없던 하찮은 소국들에 지나지 않던 북3국이 어떻게 나올지가 걱정이다. 갈사무문의 무리들이 상비군 역할을 하게 되었으니 함께 움직이면 만만치가 않을 전력이다."
건무왕은 그런 말을 하고 을지문덕의 죽음에 대한 주변국의 분노와 반감이 전부 고구려에 대한 반감으로 작용할 게 더 걱정이라 말했다.
"일단은 덮어두자."
도해선은 국왕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양신도 호리소코루로 돌아간 뒤 반성을 거듭하고 있었다. 고구려에 가한 도발은 감정 극복이 안 된 지극히 삼갈 일이었다. 모든 일은 치밀하고 은밀히 수행해 보복성 위험을 자초하지 않기로 했다.
때문에 당분간은 중원 땅으로 몸을 피하기로 했다. 북3국 간에 국한된 교역은 규모가 작아 상단의 유지조차 힘들어 보다 넓은 땅과 많은 인총을 상대로 수익을 키워야 했다. 그리고 당의 황제가 된 이세민과 새로운 관계를 모색할 필요성을 느껴 그쪽으로 눈길을 돌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