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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나라 55. 전개

55. 전개

by 정완기

55. 전개(展開) (627)



양신은 중원 땅을 다시 밟게 되었다.

먼저 주랑의 무덤부터 찾으니 7년 전 붉은 흙무더기에 불과했던 무덤의 잔디가 늦봄의 햇살 속에 새파랗게 윤기가 돌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소매로 눈시울부터 닦아내었다.

"주랑, 너무 오래간 만에 찾아왔소. 저 세상에서 부친을 만나 뵈었소? 내 가슴엔 평생을 두고 주랑에 대한 죄의식과 아픔을 담아두겠소."

해는 다 저물어 가고 양신은 꿈속에서나마 주랑을 보고 싶어 무덤에 기대인 채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그러나 밤새 꿈을 꾸지 않은 채 아침을 맞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주랑, 곧 사부님으로 곁으로 가서 있게 해 드리겠소."

양신은 남쪽으로 향했다. 당이 들어선 뒤로 중원 땅은 어디나 활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지난 5년간을 허망했던 지난날을 극복하고 새 삶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의 후원 세력을 만들기 위한 떠돌이 생활을 했다. 속말부를 비롯해 호리소코루, 실위국, 두막루, 지두우 등에 갈사무문 도장을 세워 젊은이들에게 검술을 가르쳤다. 그렇게 해서 상당한 문생들을 길러내자 다음은 재물을 축적을 위해 중원 땅으로 온 것이다. 장사를 하는 데는 인총이 많고 물화가 다양한 곳이 유리했다. 그러나 또 다른 무슨 위험을 겪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위험을 무릅쓰지 않곤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는 생각에 결단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구려촌은 양신이 다시 돌아오자 석부를 비롯해 마을 사람들 전부가 반겨주었다. 마을은 부촌으로 소문이 날만큼 집들이 번듯해졌고 사람들은 신수가 훤해져 활력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석부는 7년 전 절망에 빠진 채 북쪽으로 떠난 양신이 겪고 해온 일들을 소상하게 듣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갈사국 왕실의 후손? 조상의 나라를 재건한다?"

석부는 중얼거리며 자신의 예견이 맞아떨어진 일보다 회돌이 치는 운명에 대한 무서움을 더 크게 느끼며 말을 이었다.

"만춘, 목적 달성을 위해 매진을 해야 하고말고! 그러기 위해선 중원 땅에서 많은 사람들을 접촉하고 더 배우도록 하게. 창업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재물 축적일세. 그 일을 위해서도 중원 땅에서 착실하게 발판을 다진다면 큰 뜻을 펼쳐나가는데 지름길이 될 것이게."

양신은 자신의 계획을 밝히고 석부의 의견과 충고를 듣기로 했다.

"저는 구려촌을 발판으로 교역상단을 만든 뒤 말갈을 비롯한 새외 종족들과 교역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 젤 먼저 세운 구려촌의 도장과 다른 곳 도장들을 연계시켜 협력 체계를 구축할 것입니다."

"참으로 좋은 생각일세."

석부는 말하고 양신 앞에 장부책을 펼쳐놓았다.

"만춘, 그동안에 자네 몫을 따로 뫄뒀으니 한번 보게나."

양신은 장부책을 들여다보고 물었다.

"촌장님, 이게 다 제 몫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럴세. 그만하면 교역을 시작할만한 밑천이 될 걸."

"이 돈을 전부 금으로 화산을 한다면 얼마나 되는 양일까요?"

"자네가 구려촌에 내놓은 금덩이 크기로 친다면 30개쯤 될 걸세."

구려촌은 전에 양신이 여러 번에 걸쳐 쾌척한 금덩이로 장사를 다시 시작해 막대한 재물을 축적하게 되었다. 석부는 양신의 몫으로 원금과 이익금의 몫까지 모아 따로 돌려놨던 것이었다.

"만춘, 구려촌 도장은 본 궤도에 오르게 되었네. 널리 소문이 나서 각처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고 있네. 그동안에 도장을 잘 꾸려온 경계의 열성과 공이 큼을 알아주기 바라네."

"저는 도장으로 가서 경계를 만나보겠습니다."

양신은 말하고 곧장 도장으로 갔다. 경계(莖季)를 만나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했다. 문생들의 검술실력을 알아본 뒤 크게 만족했다. 특히 경계는 문생들의 단합을 위해 여러 모로 힘을 써 믿음이 갔다.

이튿날부터 도장에선 양신이 직접 문생들의 검술 지도를 했다. 북3국 의 도장들처럼 불함도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디서나 갈사무문 문생들끼린 서로 알아보고 동료의식을 갖게 함이었다.

어느 날 양신은 석부에게 말을 꺼냈다.

"촌장님, 교역에 나설 상단을 꾸릴 대원은 충분히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타국의 교역선이 집결하는 여양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그건 좋은 생각이나 여양은 호상들의 텃세가 매우 심한 곳일세. 때문에 사람은 발을 붙이기가 쉽지 않음을 염두에 두고 가게나."

"저는 전에 여양의 호상인 사근이란 사람 밑에 있었습니다. 그분에게 도움을 얻을 방도가 있을지 대해 의논을 해보려고 합니다."

"지금 사근이란 호상이 그곳에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네."

"그분이 여양에 살지 않는다면 혹시 타계를 했다는 말씀입니까?"

"그 사람은 난리 때 여양을 떠났는데 돌아왔다는 소문을 못 들었네."

양신이 좀 실망하는 빛을 보이자 석부는 화제를 돌렸다.

"여양을 둘러본 뒤 폐하가 계신 국도엘 한번 가보면 어떨까?"

"제가 국도는 무슨 일로 가라는 말씀입니까?"

"자네는 황제를 경계할 점이 없지는 않네. 그러나 중원 땅에서 장사를 하자면 배경이 필요하므로 이세적 장군을 한번 만나보면 어떨까?"

"이세적 장군은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서세적일세. 황제로부터 사성을 받고 이세적이 되었네."

이세적은 내전 때부터 공을 많이 세우고 장군이 되었고, 간의대부(諫議大夫)인 위징과 더불어 각기 황제의 오른팔과 왼팔 역할을 하며 상당한 권세를 누리는 위치에 있었다.

양신은 황제가 자신에겐 위험한 인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꺼리는 마음임을 아는 석부는 중원 땅에서 장사를 하자면 자연 노출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일단 시험을 해볼 필요성에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을 하고 싶네. 황제가 되기 전엔 칼집을 벗어난 칼 같았으나 황제가 된 지금은 칼집 속에 든 칼일세. 그 말은 좀 덜 위험한단 말일세. 그러므로 장사를 위해 상류층 고객을 많이 갖기에 힘을 쓰게."

"촌장님 말씀대로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

며칠 뒤 양신은 구려촌을 떠나 여양으로 떠났다. 만춘장에 당도하자 여선과 지냈던 시절을 떠올리게 되어 쓸쓸한 심경으로 대문 앞에서 안을 기웃거렸다. 그때 마당을 지나가던 숙수 아주머니가 반색을 했다.

"거기 계신 분, 혹시 만춘 대정이 아니신지요?"

"아주머니, 참으로 오래간만에 뵙겠습니다."

숙수 아주머니는 양신임을 확인하고 급히 어디로 달려갔다. 잠시 후 숙수 아주머니를 따라 사근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양신을 발견하자 매우 놀라며 큰 소리로 외쳤다.

"만춘 대정이 아닌가!? 꿈인가 생시인가?"

"어른께선 난리 통에 무사하셨군요?"

양신은 허리를 숙여 절하고 바라보았다. 그간에 사근은 노인으로 변해 몸도 수척해진 편이었다. 사근은 양신의 팔을 덥석 잡고 사랑채로 끌고 가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만춘 대정이 찾아왔다니! 나는 여간 고맙고 기쁘지가 않네."

"저도 반갑고 여간 기쁘지 않습니다. 어른께서 만춘장에 안 계신단 소문을 들었지만 그래도 한번 와보고 싶어 왔는데 뵙게 되었습니다."

"나는 수말에 산해관으로 피난을 갔다가 얼마 전에 돌아왔네. 조용히 여생을 보내려고 일체 바깥출입을 않았네. 그래서 그런 소문이 났네."

"어른께선 상포를 운영하고 계십니까?"

양신은 궁금한 점부터 물었고 사근은 고개를 저었다.

"나이를 먹은 데다 후계자도 없으므로 그만 접었네."

"전에도 사람을 두고 부리셨는데 다시 해보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다시 해보라고? 못할 건 없지만 이 나이 다시 해서 뭘 하겠나?"

사근은 그런 대답을 하고 자신의 지난 일들을 들려주었다.

산해관으로 피난했던 공백 기간이 너무 길었다. 돌아와 보니 부리던 자들은 각자 독립해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더욱이 당이 들어선 뒤로 관인들 중엔 통할 자가 없고 수국 때의 호상들은 거의가 밀려났다. 반면 신진 세력들이 관을 등에 업은 기세가 등등해서 기를 펼 수가 없었다.

"그 같은 사정이 있으셨군요?"

양신의 말에 사근은 진지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만춘에 대해 알아본 게 있었네. 중원 땅을 떠난 지가 오래된 일로 알고 있었네. 왜 다시 돌아왔는지를 말해 줄 수는 없겠나?"

"저는 중원 땅에 정착해 살아갈 생각으로 왔습니다."

"여전히 고구려 땅에선 살 수가 없는 형편이라 그렇군?"

사근은 안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양신이 말을 꺼냈다.

"저는 앞으로 여양에서 장사를 했으면 합니다."

"여양에서 장사를 하고 싶다?"

"저도 돈을 벌어서 어엿한 가정을 꾸려 살아보려고 합니다."

양신의 대꾸에 사근은 안색이 변하며 물었다.

"그럼 자네가 지금 한말 사실인가?"

"어른, 제가 왜 공연한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자네가 새장가를 들지 않았다고 했는가?"

"새장가를 들다니요? 홀몸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사근은 이젠 기쁨을 참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또 물었다.

"새 장가를 들지 않은 게 확실하단 말이지?"

"저는 새 장가를 들 엄두를 낼 처지가 못 됩니다."

"왜 엄두를 못 내는가? 아직도 여선부인을 못 잊어 그러는가?"

"어르신, 저는 과거사는 전부 접고 지우려고 합니다."

사근은 더욱 눈이 번해지면서 또 물었다.

"과거사를 접겠다는 말은 여선 부인을 잊겠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삶을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양신의 대답에 사근은 기쁨을 참지 못해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 말이 진심이면 나로선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세."

"어르신, 뭐가 다행이란 말씀입니까?"

"나는 자네 때문에 여간 속을 끓이며 살았는지 아는가?"

"어르신이 왜 저 때문에 속을 끓이며 사셨단 말씀입니까?"

"사오 때문일세."

"사오양 때문이라고 하셨습니까?"

"사오는 자나 깨나 오직 자네만 기다리는 계집이 되었네."

"사오양이 절 기다렸다니요?"

양신은 큰 궁금증에 사로잡히는데 사근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큰 결단을 내린 듯 자못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만춘, 자넨 사오를 아내로 맞아줘야 하네."

사근의 말이 너무도 뜻밖인 양신은 크게 놀라며 물었다.

"어르신, 저보고 사오양을 아내로 맞으라고 하셨습니까?"

"그럴세. 사오는 지금 자네가 반듯이 찾아올 것으로 믿고 있네."

그 말을 들은 양신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양현감의 명을 받고 동돌궐로 떠났던 때였다. 가족을 두고 떠나는 암담한 심경으로 만춘장의 대문을 나섰는데 사오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저씨, 언니들을 제가 잘 보살피겠으니 염려 말고 다녀오세요."

"사오양, 우리 가족들을 잘 보살펴 줄 수가 있겠는가? 사오가 그렇게 해준다면 나는 마음을 놓고 떠날 수가 있겠네."

"그 대신 아저씨는 제게 약속을 해주셔요."

"무슨 약속을 하라는 말인가?"

"꼭 돌아와 주셔야 해요."

"나는 그러고 싶지만 마음대로 될 수가 있을지는 모르겠군."

"아저씬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돌아오셔야 해요. 꼭 그러실 거예요. 저는 그렇게 되도록 매일처럼 빌겠어요. 꼭 돌아오게 되실 거예요."

"사오가 빌어주겠다니 나도 꼭 돌아오게 힘을 쓰겠네."

"아저씨는 저와 약속을 하셨으니 저는 믿고 기다리겠어요."

"사오, 나는 약속을 꼭 지키겠으니 우리 가족들을 부탁해요!"

양신은 그런 약속을 했던 걸 떠올리는데 사근이 몸을 돌려세웠다.

"나는 집 사람과 사오에게 만춘이 온 걸 알려주고 오겠네."

사근은 휑하니 안채로 달려갔고 잠시 후 그의 아내가 흥분된 얼굴로 달려와 양신의 팔을 덥석 잡더니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만춘 대정이 이렇게 돌아오다니?! 꿈인가 생시인가 모르겠소."

"아주머니, 저도 다시 뵙게 되어 여간 반갑지가 않습니다."

양신의 말에 사근의 아내는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양대정이 이렇게 돌아오니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겠어요."

사근은 엉엉 우는 아내를 달래면서 음성이 단호해졌다.

"여보, 나는 사오와 만춘을 혼인시키겠소."

양신은 사근의 음성이 하도 엄숙해 숙연해지는데 사근의 처가 물었다.

"만춘 대정, 그렇게 해주겠어요? 사오는 지금까지 만춘 대정이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꼭 돌아올 것을 철석같이 믿고 여러 군데서 혼처가 들어왔어도 응하질 않고 만춘 대정만 기다렸어요."

사근도 절절한 표정으로 부인의 말을 거들었다.

"사오에겐 오직 만춘밖에 없었네. 때문에 우리 부부는 얼마나 속을 태우며 살았는지 모르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간절했던 사오의 연모가 오죽이나 간절했으면 만춘이 이렇게 돌아오게 만들었겠는가?"

그런 말로 시작해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털어놓았다,

사근의 가족이 산해관으로 피난을 갔다가 돌아와 보니 두 통의 서찰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태원에서 계영이 보낸 것이었고 또 하나는 고구려에서 여선이 보낸 것이었다. 사오는 두 서찰을 읽고 나서 양신과 옹장이 벌인 대결 중 주랑이 목숨을 잃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행방을 모르게 된 양신을 기다리게 되었다.

사오가 양신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욱 굳어지게 된 것은 여선이 이젠 고구려 왕실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양신에게 향하는 마음은 나이를 점점 먹어도 다른 남자는 일체 돌아보질 거들떠보질 부모가 권하는 혼사에 응하질 않았다.

양신은 그런 사정을 듣고 나자 감격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사오의 애절한 마음이 가슴에 저미어들고 사근 내외의 고충이 얼마나 컸음에 대해 죄송함을 금치 못했다.

사근의 아내는 눈물을 훔치고 나서 간곡한 음성으로 말했다.

"만춘 대정, 사오의 갸륵한 마음을 생각해주오. 사오에게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받아주오. 사오를 아내로 맞아주면 당장 눈을 감게 된다고 해도 여한이 없겠어요. 부디 간곡한 청을 받아주어요."

양신은 사근의 내외가 얼마나 속을 태우며 자신을 원망했을 것을 생각하면 몸 둘 바를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사근이 큰 소리로 선언을 하듯 말했다.

"만춘은 이제부터 내 사위이다!"

기정 사실화시키듯 하는 그 말에 양신은 가슴이 먹먹해질 만큼 큰 감동을 느끼며 마음속으론 예하고 대답을 했다. 사오가 그토록 기다려온 만큼 무슨 보답이든 해야만 했다. 그러나 혼인은 자신에게 너무도 과분 하단 마음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사오를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도리요 의무일 것 같았다. 아니 이참에 혼인을 해서 자신의 과거를 한꺼번에 접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혼인을 해서 중원 땅에서 중원 땅에서 새 출발을 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저는 너무도 과분해서."

양신이 말끝을 흐리자 사근은 버럭 소릴 질렀다.

"만춘, 사오를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거절하겠다는 소린가?"

"아닙니다. 저도 사오를 아내로 삼고 싶습니다."

그때 사오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

"이제야 돌아와 주셨군요?"

사오는 그런 말을 흘려내고 그리운 사람 앞에서 소매로 눈물을 찍어냈다. 양신은 어엿한 여인으로 변한 사오를 바라보았다.

"사오. 오래간 만이요,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너무도 기쁘오."

사오는 연륜과 늠름한 기상이 더해진 양신에게 간절함이 담은 눈길만 던졌다. 그대로 몸을 던지고 싶었지만 절절한 마음은 몸을 땅바닥에 주저앉게 만들었다. 양신은 얼른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사오가 믿어준 만큼 나도 평생을 아끼며 보답을 하겠소!"

양신의 강렬한 눈길을 받는 사오는 살포시 웃었다. 사오는 이제 소녀가 아닌 성숙한 여인으로 변해서 양신은 아름다움에 매료가 되며 숨이 좀 막히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오, 내 아내가 되어주오."

"오래전부터 이미 서방님의 아내로 살고 있어요."

사근은 그런 말을 나누는 양신과 사오의 팔을 함께 잡고 대청 위로 올라가 좌정을 했다. 사근의 처는 하녀들에게 상을 차릴 것을 지시했다. 잠시 후 네 사람은 음식상을 받게 되었다.

사오는 부친과 양신의 잔에 차례로 술을 따랐다.

"사오야, 네가 마침내 소원을 풀게 되었구나?!"

부친의 말에 사오는 활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님, 너무 기쁘지만 한편으론 어깨가 무거워지네요."

사오의 대답에 양신도 입을 떼었다.

"사오는 왜 어깨가 무겁다는 말을 하오?"

양신의 질문에 사오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제가 훌륭한 아내가 될 수가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왜 그런 말을 하오?"

"세상엔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사랑스러운 여인은 허다하지만 완전한 여인은 없답니다. 앞으로 저는 이런 아내가 되고자 합니다."

사오의 말은 모두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훌륭한 남자를 만드는 것은 여인의 몫이랍니다. 저는 서방님을 진정으로 크나 큰 사나이로 만드는 아내가 되고자 합니다."

양신은 사오의 말이 비장하게 들릴뿐더러 마치 자신의 마음속을 다 들여다보고 있는 듯해서 엄숙해지는 기분이었다.

"사오, 나로선 감격한 말이요. 그런 말을 들으니 사오에게 답하겠소. 남자가 여자를 믿는 건 도적을 믿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말이 있소. 그러나 나는 사오의 마음을 믿고 부탁을 하겠소. 나는 앞으로 사나이로 품을 수 있는 가장 큰 일을 하려고 하오. 사오는 그런 내가 어리석고 하찮은 짓을 못하게 채찍질을 해주기 바라오."

사오는 고개만 끄덕이고 사근은 감탄을 금치 못하듯 입을 열었다.

"장하다, 사오. 암, 현모양처가 될 것이다."

사근의 아내는 자신이 못 이룬 일을 딸에게 당부했다.

"사오야, 아들을 꼭 낳아주기 바란다."

"어머님, 아버님, 꼭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사오에 대답에 사근은 만족해하며 물었다.

"만춘은 금년에 나이가 몇인가?"

"설은 셋입니다."

"사오는 스물여섯 일 세. 길일을 잡아 혼사를 치르겠네."

사근의 아내도 맞장구를 쳤다.

"영감, 나는 내일 당장 점집에 가서 날짜를 받아오겠어요."

이튿날부터 만춘장에선 혼사 준비로 들어갔다. 집안은 온통 활기차게 돌아가는 가운데 사근은 양신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고을의 유지들과 큰 상포(商鋪)들을 돌면서 양신을 인사시켰다. 그리고 상포를 다시 열겠다고 하자 모두는 냉담한 반응들을 보였다.

양신은 중원 땅을 근거지로 삼고 사근의 지역 기반을 최대한 활용을 해서 교역을 할 생각인데 호상들인 배타적인 반응을 보여서 위축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근도 그 점이 걱정되어 말했다.

"분위기가 녹녹지가 않을 것 같네."

"장인어른, 너무 걱정하자 마십시오."

"무슨 방도가 있겠는가?"

"거래선부터 뚫기 위해선 호상들에게 적극 접근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름대로 해결할 방도를 꼭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양신은 그런 대답을 하고 마음을 다졌다. 지금까진 의미가 없는 삶을 살아왔으나 앞으론 다르게 살 결심을 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은 달라져야 했고 이미 전과는 크게 변했다는 생각이었다.

"잘 되면 좋겠는데 쉽지가 않겠네."

"혼사를 치르기 전에 저는 다녀올 데가 있습니다."

"어딜 무슨 일로 다녀오겠다는 말인가?"

"국도로 가서 이세적 장군을 한번 만나보려고 합니다."

"자네가 이세적 장군을 어떻게 만날 수가 있단 말인가?"

양신은 의아해하는 사근에게 이세적과 얽힌 사연을 들려주었다. 머리 회전이 빠른 사근은 대뜸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이 사람아, 그런 얘길 왜 지금 하는가? 당장 가서 만나보게."

"장인 말씀대로 곧 떠나겠습니다."

양신은 이튿날 비장한 심경으로 당의 국도인 장안성으로 향했다. 당도한 뒤 이세적의 근무처로 찾아가 면회를 신청했다. 그러나 관리들은 낯 모를 자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질 않아 퇴근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다.

해가 질 무렵에 업무를 끝낸 관리들을 퇴청을 시작했다, 젤 먼저 이세적이 10여 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보무도 당당하게 밖으로 나왔다. 양신은 다가들면서 크게 불렀다.

"이세적 장군님!"

이세적은 자길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날 부른 분은 누구요?"

"양만춘입니다."

양신의 대답에 이세적은 놀라며 양팔을 크게 벌렸다. 양신도 달려가서 두 사람은 서로들 끌어안고 여간 반기지 않았다.

"만춘님, 이게 얼마만이요?"

"장군께서 절 알아봐 주시니 고마울 데가 없습니다."

"만춘님을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내가 만춘님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아시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늘이 도와주신 모양이요."

이세적은 말을 하고 나서 또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만춘님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또 있소."

"누구를 말씀하십니까?"

"위징이오."

"아, 위징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위징도 잘 지내오. 만춘님을 여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요."

이세적은 말하고 군관을 불러 무슨 지시를 내렸다. 군관은 급히 어디로 달려갔다가 말을 한 필 끌고 오자 이세적은 양신에게 타게 했다.

"오늘은 만춘님과 밀린 회포를 한번 풀어봅시다."

이세적은 말하고 양신을 데리고 떠났다. 잠시 후 으리으리한 요정에 이르자 주인이 달려 나와 정중하게 내실로 안내를 했다. 양신도 좌정을 하자 기녀(妓女)들이 진수성찬의 상을 들여놓았다.

"만춘님, 축하주를 듭시다."

"세적님의 입신을 축하부터 드립니다."

"만춘님 덕분으로 여기오."

잠시 후 위징이 달려왔다.

"만춘님이 오셨다니 어디 봅시다."

양신은 일어나 맞았다.

"위징님, 오래간만에 뵙겠습니다."

"오, 무사하셨구려!"

위징은 반기면서 이세적을 나무랐다.

"이장군, 잠시 기다렸다 나하고 함께 와야지 이럴 수가 있소?"

이세적은 껄껄 웃고 위징은 술잔을 받아 들고 죽 비웠다.

"만춘님은 태원에서 불행한 일을 당한 뒤 정처 없이 떠난 것만 알고 있었소. 그런데 그간에 어디서 대체 뭘 하면서 지냈소?"

위징의 질문에 양신은 서로 간에 헤어진 이후 겪게 된 일들을 전했다. 그러나 앞으론 중원 땅에 정착해서 장사를 하며 살 뜻을 밝혔다.

위징은 그 말을 듣고 반기듯 입을 열었다.

"대당의 황제 폐하께선 덕치를 펴 백성들이 태평성세를 누리는 세상이 되었소. 만춘님도 장사보다 관직을 얻고 폐하께 봉공을 하면 좋겠소."

양신은 그냥 웃기만 하자 이세적이 입을 열었다.

"위대부, 폐하께서 전부터 권하셨던 일이 아니잖소? 만춘님이 관직에 뜻을 두었다면 벌써 우리와 같은 반열에 서고 남았을 것이요."

이세적의 말에 양신은 겨우 말문이 트이게 되었다.

"폐하께서 이룩하신 평화와 번영으로 중원 땅은 두루 밝아져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 감축입니다. 저는 살기 좋은 세상에서 장사를 해서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만 여전합니다."

양신의 말에 위징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우리도 만춘님이 잘 살아갈 수가 있도록 돕겠소."

양신은 바라던 말이 나오자 말을 꺼냈다.

"그런 말씀들을 해주시니 저는 청을 드릴 게 있습니다."

"무슨 청인지 들어봅시다."

"두 분도 잘 아시다시피 저는 중원 땅에선 사고무친입니다."

"그렇긴 하오. 그러나 걱정하지 마오. 우리가 있지 않소?"

이세적의 말을 받아 위징도 입을 열었다.

"만춘님은 무엇보다 먼저 가정부터 꾸려야 하지 않겠소?"

"저도 그 말씀을 드리려던 참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곧 여양에서 새장가를 들게 되었습니다."

"만춘님이 새장가를 든다고 했소?"

"호상의 따님을 아내로 맞게 되었습니다."

"축하하오. 그보다 더 좋을 일은 없겠소."

"호상의 사위가 되면 앞으로 살 걱정은 없겠소."

두 사람의 말을 받아 양신이 입을 열었다.

"저는 두 분께 감히 청을 드릴 게 있습니다."

"무슨 청을 하려고 하오?"

"두 분께서 짬을 내실 수가 있으시면 제 혼례식에 참석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그렇게 해주시면 제겐 더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양신은 두 사람 중 한 사람만이라도 참석해준다면 자신의 입지에 도움이 될 일이었다. 눈치만 보고 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가 이세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만춘님이 새장가를 드는데 마땅히 참석할 일이요."

위징도 대답했다.

"나도 참석해서 축하를 하겠소!"

두 사람이 똑이 응할 뜻을 표하자 양신은 안도의 한숨을 흘려냈다. 지난날 양신에 의해 이세민 밑으로 들어갔던 두 사람은 그에 보답을 하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앞으로도 계속 우의를 유지해 나가기로 했다.

세 사람은 요리 집에서 회포를 풀고 양신은 사슴을 활짝 편 채 여양에 돌아갔다. 혼례식 날 여양 바닥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그 이유는 조정에서 이름난 두 명의 고관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여양의 관리들은 말할 것 없고 모든 유지들은 놀라며 이세적과 위징에게 인사를 하려고 황망히 만춘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도 그럴 것은 황제의 좌문(左文)과 우무(右武)로 일컫는 이세적과 위징이 혼사에 참석한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크게 놀란 여양의 상인들은 양신을 다시 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모두 다투어 달려와 얼굴을 디밀고 많은 부조금을 내는 부산을 떨었다.

혼례식에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자 사근은 입이 귀에 걸렸다. 평생에 이번처럼 기쁘고 감격할 일은 없었다. 창고의 물자를 아낌없이 풀어 하객들을 대접하게 했다. 그러나 손님들이 워낙에 많아 식기가 모자라 쩔쩔매게 되었다. 일반 구경꾼들에겐 곡식을 나눠주고 각자 집에서 조리를 해서 먹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세적과 위징은 미리 황제에게 양신의 혼례를 보고하고 특별 휴가를 얻어서 온 터였다. 그날 밤을 만춘장에서 묵었는데 술자리에서 양신은 세 개의 궤짝을 내놓았다.

"만춘 새 신랑, 웬 궤짝들을 내놓소?"

위징이 묻자 양신이 대답했다.

"이번에 들어온 축의금을 3 등분했습니다."

"축의금을 왜 3등분 한단 말이오?"

"제 혼사에 두 분이 참석해 주신 것은 일생일대의 영광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많은 하객들로 어마어마한 축의금이 들어왔습니다. 친분도 없는 사람들이 과분한 성의를 보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 두 분의 낯을 봐서 이뤄진 일입니다."

양신의 대답에 이세적이 물었다.

"별말씀을 다하오. 그런데 축의금을 3등 분해 어쩌려고 그러오?"

"조정에 계신 두 분은 공적 사적으로 돈이 쓰일 데가 많습니다. 그런 씀씀이를 감당하시기에 여유가 많지 않으실 겁니다. 제가 장사를 해 돈을 벌면 보탬을 드릴 생각입니다. 우선 축의금부터 삼등분을 했습니다."

양신의 대답에 위징과 이세적은 서로 마주 본 뒤 입을 열었다.

"장사를 해 번 돈을 우리와 나누겠다니 무슨 말이요?"

이세적은 점잖게 타내면서도 환히 웃는데 기대를 위징이 입을 열었다.

"만춘님은 왜 점점 모를 소리만 하시오?"

"앞으로 장사를 해서 나올 수익금을 두 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러는 이유가 무엇이요?"

"두 분께서 쓰실 재원은 제가 책임을 질 생각입니다."

양신의 대답에 이세적이 물었다.

"그러면 우리에게 바라는 바는 무엇이요?"

"장사를 하는데 두 분의 도움을 얻기 위함입니다. 서로 간에 상부상조를 함으로써 함께 상생관계가 이어져 나가길 바랍니다."

양신이 의도를 솔직하게 표하자 이세적은 노골적으로 반겼다."

"그 말씀 진정이요?"

"이게 농담으로 할 수가 있는 말이겠습니까?"

그런데 의외로 위징 역시 계면쩍은 웃음만 머금었다. 그건 관료들이 상하를 가리지 않고 익숙하게 바라는 바였다.

"두 분께선 부디 궤짝을 거둬 주시길 바랍니다."

위징은 그 말을 뜻밖의 말을 했다.

"새신랑, 지필묵을 내주시오."

양신이 물었다.

"지필묵은 뭣에 쓰려고 하십니까?"

"재물 궤짝을 받았으니 영수증을 써 드려야 하지 않겠소?"

위징은 양신이 지필묵을 내놓자 붓을 들고 글을 써 내려갔다.


여양의 만춘장을 대통 속으로 들여다보니

해동의 신검(神劍)이 그 속에 들어앉았네.

밀두도를 한번 휘둘러 낙구창을 제압했네.

그 사람 누구인가 의(義)로운 대인이로세.

존경하는 양만춘에게 이세적과 위징이 씀.


양신이 글을 받아 들고 매우 기뻐하자 이세적이 입을 열었다.

"새신랑, 부탁할 일이 있으면 당장 말해보시오, "

"그렇지 않아도 이장군님께 부탁을 드릴 게 있습니다."

"어떤 부탁이요?"

"저는 구려촌에 무문을 세우고 검술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상단을 운영하는데 쓸 대원을 얻을 목적이오?"

"그렇습니다만 또 다른 목적도 있습니다."

"또 다른 목적이란 무엇이요?"

"중원 땅에서 살게 된 백성으로서 폐하께 작은 보답을 하렵니다."

"폐하께 어떤 보답을 하겠단 말이요?"

"지도한 문생들 중 무예가 뛰어난 자를 군관으로 발탁시켜 주십시오."

"검술이 우수한 자는 상단의 단원으로 쓰는 게 유리하지 않소?"

"상단의 대원은 무예가 아주 뛰어난 자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대원은 뛰어난 검술 실력보다 끈기 있게 여러 가지 어려움을 잘 견디는 자가 더 필요합니다. 또 무예가 뛰어난 자는 피해야 할 이유도 있습니다."

"무예가 뛰어난 자를 피할 이유란 게 무엇이요?"

"그런 자는 무예를 믿고 도도해지기 쉽고 말썽을 일으킬 소지도 큽니다. 그러므로 일찌감치 앞길을 터주게 되면 나라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런 자는 나라에도 도움이 될 게 없고 골칫거리만 되오."

"저는 달리 생각합니다. 나라엔 장군님 같은 분들이 계시오. 그들을 다잡고 잘 이끌면 큰일에 적합한 인재로 키우실 일을 맡으십시오."

양신의 대답을 듣고 이세적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나 양신의 속셈은 다른데 있었다. 문생들을 관계(官界)로 많이 진출시켜야 여러 모로 도움을 받을 수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세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양신은 밤늦게야 신방(新房)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사오는 만감이 교차하면서도 기쁨을 금치 못했다. 속 깊은 아내를 맞게 된 양신은 사오의 연정과 좋은 결실을 맺기 바랐다.

이튿날 부부는 늦게야 겨우 눈을 떴다. 창문에 비쳐 드는 햇살 아래 행복한 미소를 나누며 양신이 먼저 아내에게 아침 인사를 했다.

"사오, 잘 잤소?"

"예, 저는 행복해요."

부부는 서둘러 아침 문안을 드리고자 장인과 장모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사근과 아내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신혼부부를 맞았다.

"사오는 하룻밤 사이에 더욱 아름다워졌구나!"

사근의 처가 한 말에 사오는 행복한 미소만 지었다.

양신은 혼인을 하고 며칠 뒤부터 상포로 나가서 장사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상인들은 양신을 대하는 태도가 완연히 달라졌다. 어마어마한 배경을 가진 자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신혼의 단꿈에 젖은 속에서도 양신은 본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여양의 상포를 중심으로 삼고 구려촌 상단을 앞세워 중원 땅 내부 거래 범위를 넓혀나가는 일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할 수가 있는 데는 이세적과 위징이란 배경이 큰 작용을 했다. 어디를 가던 상인들은 먼저 양신을 알아보고 접근하려 들어 거래처는 급속도로 불어나게 되었다.


양신은 구려촌 상단으로 하여금 호리소코루와 거래를 시작하게 했다. 모두가 갈사상단이란 공통 명칭을 쓰며 연계와 협력 체계를 구축했다. 북3국의 상단들도 거래량이 늘어나며 전체적인 장사 규모는 날로 커졌다. 그에 따라 재물 축적도 급속도로 불어나 무문의 도장들은 규모가 커졌고 무엇보다 이세적과 위징을 후원하는 돈도 늘려나갔다.

그런데 장사를 하기엔 어려움이 적으나 북방 새외족들에게 철정과 철제품 공급을 충분히 할 수가 없었다. 가장 큰 수익을 낼 수가 있는 철제품은 교역의 안정과 지속에도 중요한 물화였다. 그러나 철정을 해결하고자 이세적과 위징에게 도움을 청할 수가 없는 금기 사항이었다.

양신은 철정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신라와 백제를 둘러보기로 했다.

"사오, 나는 긴 여행을 해야만 하겠소?"

"서방님, 그러셔요. 집을 지키는 것은 제 몫이고 본분 예요."

사오는 기꺼이 찬동하며 이해하는 태도를 보였다.

"사오, 얼마쯤의 기간을 잡으면 되겠소?"

"무슨 말씀이세요? 일을 보실 데까지 다니셔야죠."

"고맙소. 아무리 길게 잡아도 반년은 넘지 않을 것이요."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로선 더 바랄 게 없지요."

"사오, 날 기다리는 일로 외롭고 힘들지는 않겠소?"

"십년을 기다렸던 사람인데 반년을 못 참겠어요?"

사오의 흔쾌한 응낙을 받았지만 양신은 매우 미안하게 여겼다.

드디어 여행을 떠나 먼저 구려촌으로 가서 상단의 행수(行首)인 경계(莖季)와 함께 호리소코루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북3국의 갈사상단들을 따라 흑수 말갈 지경을 거쳐 백산부로 갔다.

백산부의 수노는 양신이 부탁을 들어 고구려의 동해안 철산지를 지도로 만들어서 내주었다. 양신은 백산부에서 파루와 작별한 뒤 혼자서만 비밀리에 남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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