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회한(悔恨) (629)
삼국은 어느 나라건 질병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이 많아서 약재상(藥材商)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었다. 양신은 신분의 노출을 피해 신라 지경에선 의술(醫術)을 지닌 약재상으로 위장했다.
양신은 수노가 그려준 지도를 갖고 고구려의 동해안에 있는 철산지들을 은밀히 돌았다. 그중 해안과 가까운 생산량이 많은 두 곳을 마음에 정해 두고 신라와 국경 지대를 넘었다.
어느 곳에서나 약제상 행세를 하고 다니면서 병자들에게 약을 지어주면 잠자리나 식사 대접을 후하게 받았다. 그렇게 신라 땅을 별 어려움이 없이 여행한 끝에 서라벌에 당도했다.
서라벌에서 오래간만에 해론의 집을 찾아갔다. 대문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는데 때마침 해론과 판에 박은 듯 닮은 청년이 대문을 나섰다. 해론과 착각할 정도였으나 그동안 세월이 흐른 것을 생각하며 물었다.
"젊은이, 해론님은 집에 계신가?"
양신이 좀 떨리는 음성으로 묻자 청년은 행색을 살피다가 반문했다.
"손님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내 이름은 양신이라고 하네."
"아, 그러시면 제 선친을 찾아오셨군요?"
영지(英志)는 양신이란 사람에 관한 얘길 들은 터라 가슴이 뛰었다.
"그럴세, 젊은이는 해론님의 자제인가?"
"예, 제 이름은 영지입니다."
"영지라고? 그런데 부친을 왜 선친으로 부르는가?"
"아버님은 돌아가셨습니다."
"해론님이 돌아가셨다고?"
양신은 너무도 놀라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손님께선 할머님 말씀대로 다시 오셨군요?"
"할머니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단 말인가?"
영지는 갑자기 주변을 살피고 말했다.
"손님, 저하고 잠시 한적한 데로 가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세."
양신은 앞장을 서는 영지를 따라 뒷동산으로 들어갔다. 영지는 으슥한 곳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고 엄숙한 음성으로 말했다.
"대부님, 절부터 받으십시오."
"영지, 자네는 내게 왜 대부란 호칭을 쓰는가?"
"할머니께선 대부님으로 모시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할머니께서 날 대부로? 할머니는 집에 계신가?"
"할머님은 지난해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셨다고? 내가 한 해만 일찍 왔어도 뵐 수가 있었을 텐데."
양신이 낙담을 하자 영지가 말했다.
"할머니께선 돌아가실 때까지 대부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날 친자식처럼 보살펴 주셨던 분이셨는데 난 사람값을 못했네."
"저로선 사부님을 뵙게 되는 게 아버지를 뵙는 것 같습니다, "
양신은 미안하고 슬픔이 더해질 수밖에 없었다.
"영지 군, 자네는 금년에 몇 살인가?"
"열여덟입니다."
"열여덟이면 내가 자네 선친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나이로군? 우연치고는 너무도 신기하지 않을 일이 수가 없네."
양신은 젊은 날의 해론의 얼굴을 떠 올리고 있는데 영지가 땅바닥에 넙죽 엎드려 큰 절을 했다. 양신은 절을 받고 나서 물었다.
"해론님은 언제 무슨 일로 돌아가셨단 말인가?"
"십여 년 전 가잠성 회복 전투에서 전사하셨습니다."
양신은 그 말에 가슴을 저미는 아픔이 일었다. 부친과 아들이 똑 같이 한 성에서 목숨을 잃다니 어찌 이런 운명이 있을까 싶었다.
"영지 군, 나는 부끄럽고 면목이 없지만 자네 모친을 뵙고 싶네."
영지는 좀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대부님, 그 일은 어머님에게 말씀을 드려봐야 하겠습니다."
양신은 어딘지 난처한 기색을 보이는 영지에세 물었다.
"위로의 말씀이라도 드리는 게 도리인데 무슨 사정이 계신가?"
영지는 또다시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집에 의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의부가 계신다고?"
"어머님은 재혼을 하셨습니다."
양신은 비로소 영지의 태도에 이해가 되었다.
"대부님, 할머니 묘소가 여기서 조금 떨어진 데 계십니다."
"오냐, 할머님 묘소에 참배를 하겠다."
영지가 앞장을 서자 양신은 따라서 한참을 걷다가 물었다.
"해론님 묘소는 어디에 모셨느냐?"
"선친의 묘소를 서라벌에 모시지 못했습니다."
"영지 군, 그럼 어디에 모셨는가?"
"가잠성 밖에 모셨습니다."
"가잠성 밖에?"
"선친의 유언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해론님은 어떤 유언을 남기셨기에 그렇게 해야 했는가?"
"선친께선 늘 가잠성을 되찾아 조부님의 원한을 풀어드리려고 하셨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가잠성 회복 전투에 참가하시고 선봉에 스셨답니다. 그러나 성을 회복할 수가 있었지만 전사를 하셨고 그때 가잠성 성 밖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셨답니다."
두 사람은 두 개의 묘소가 나란히 있는 곳에 이르렀다. 일길찬찬덕지묘(一吉湌贊德之墓)란 비석이 있는 무덤 옆에는 부인의 무덤도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양신은 두 묘소에 차례로 절을 올렸다.
"대부님, 할아버님과 할머님이 매우 반가워하시겠습니다."
"나로선 그저 죄송할 뿐일세."
양신은 미안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묘소 앞에 앉았다. 영지도 따라 앉으며 물었다.
"대부님은 약재상이 되셨습니까?"
"실은 서라벌에서 날 알아볼 사람이 있어서 변장을 했네."
"그러셨군요? 대부님은 어디서 살고 계시는지요?"
"나는 중원 땅에서 살고 있네."
"그러시면 당나라 백성이 되셨습니까?"
"당나라에서 살 뿐이지 그 나라 백성이 될 생각은 없네."
"대부님은 고구려에서 살 수가 없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양신은 그런 말을 하는 영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자네는 그런 일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
"어려서부터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양신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저는 대부님에게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뭘 알고 싶은가?"
"대부님은 제 선친과 의형제를 맺으셨고 나중에 자식들을 두면 서로 대부가 되기로 약조를 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엊그제 같은 일이라 감개가 무량할세."
"대부님은 그 약속을 지키시렵니까?"
"여부가 있는가? 그런데 자네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저는 지난해까진 화랑도였으나 지금은 아닙니다."
"그럼 무슨 관직을 맡고 있는가?"
"관직도 없습니다."
영지의 음성이 힘이 없어서 양신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해론님은 신라 화랑도 중 귀감이 되실만한 하셨네. 자네는 그런 분의 자제인데 그런 처지로 지낸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네."
영지는 굳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저는 곧 타국 땅으로 떠나려던 참이었습니다."
양신은 그 말에 놀라고 심상치 않게 여겼다.
"영지 군, 무슨 사정이 있기에 그런 말을 하는가?"
"선친을 폄하하는 이 나라에서 살고 싶지가 않습니다."
양신은 표정이 아연 굳어들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러는가?"
"대부님께 그 사연을 말씀드리고 싶지가 않습니다."
"나를 대부로 생각한다면 말을 못 할 게 뭔가?"
영지는 고뇌하는 표정으로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대부님은 가잠성이 함락당할 때 그곳에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럴세."
"대부님은 그때 사정을 소상히 알고 계시겠습니다."
"나로선 그 시절을 떠 올리면 죄스럽기만 하네. 왜냐하면 내가 신라로 오게 됨으로써 자네 집안에 큰 누를 끼쳤기 때문일세."
"대부님, 저는 그렇지만은 않은 걸로 압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하는가? 나로 인해 자네 선친께선 큰 폐해를 입으셨네. 그럼에도 이렇게 뒤늦게 찾아왔으니 부끄럽고 죄스럽네."
"대부님, 저희 집안에선 대부님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양신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영지 군, 그런데 해론님이 폄하를 당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저는 매년 아버님의 묘소에 성묘를 하러 갑니다. 그럴 때마다 가잠성의 야장들로부터 선친과 대부님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됩니다."
영지는 그렇게 입을 열고 부친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특히 양신과 해론이 전투에서 크게 활약한 것을 큰 화제로 삼고 있다고 했다.
"당시에 나는 가잠성에서 부상병의 치료를 했네. 그때 신라군은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성은 함락되고 말았네. 자네 조부께선 함락된 책임감에 자결을 하셨고 자네 부친도 큰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으셨네."
"저는 대부님이 그때 선친을 살려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해론님의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고구려로 돌아가야만 했었네. 그 뒤에 해론님이 서라벌로 돌아갔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처럼 폄하를 당하셨을 줄은 몰랐네."
"선친께서 조부님처럼 자결을 않고 살아서 돌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그런 비난을 듣고 얼마나 괴로워하셨을지 모릅니다."
양신은 어이가 없어할 말이 없었다.
"선친께선 그 일로 나중에 결국은 자결을 하셨다고 합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저는 그에 대한 얘기를 가잠성의 야장들로부터 들은 게 있습니다."
"어떤 얘기를 들었기에 그러는가?"
"선친께선 가잠성을 회복하는 전투에서 자진을 하셨다고 합니다."
"왜 그러셨단 말인가?"
영지는 갑자기 서러움이 복받쳐 양 무릎에 얼굴을 처박았다. 한동안을 소리 죽여 울다가 고개를 들고 부친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해론은 조정에 가잠성 회복을 여러 번 건의했다. 그러다 마침내 신라군은 가잠성을 탈환전에 나서게 되었다. 그때 신라 조정은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특단의 방법을 쓰려고 했었다. 그것은 해론에게 목숨을 바치는 희생을 요구한 것이었다. 해론은 너무도 노골적인 요구를 받고 반감이 없지도 않았으나 부친의 불명예와 자신의 한을 풀고자 자진(自盡)을 택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단기로 적진에 뛰어들어 장렬한 전사를 함으로써 장병들의 분발을 이끌어내 성을 회복시키게 만들었다.
양신은 그런 사정을 듣고 해론이 스스로 산화(散華)하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알게 되었다. 때문에 김춘추와 김유신을 비정한 사람들로 여겨 만나볼 생각을 접고 말았다. 어느 나라건 백성들에게 충성과 희생만 강요했지 되돌리는 게 없듯 두 사람도 그런 부류로 치부해 버렸다.
"전군님과 김유신님은 자네 선친과 매우 가까웠던 사인데 곤경에 처한 해론님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니 나는 상종을 하고 싶지 않네."
"두 분께선 그 일에 대해선 그냥 입을 다물고만 계실 뿐입니다."
영지의 대꾸엔 큰 불만이 서려 있었다.
"해론님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으셨기에 끝내 자진을 택하셨겠나? 나는 그 심경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고 자넬 위로할 말도 없네."
"대부님, 우리 집안은 본래 가락국 후예입니다. 저는 가락국 사람들이 이주해 세웠다는 왜국으로 건너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이 마음에 걸려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양신은 영지의 말을 듣고 그의 고통과 반감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만했다. 한숨을 흘려내면서 입을 열었다.
"영지 군, 그렇다고 젊은이로 너무 회의적인 생각만은 말게."
양신은 말하고 너무 안타까워서 영지를 끌어안고 말았다.
"저는 아버님이 조국에서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나라에서 더는 살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 심경 이해가 가네. 그런데 두 분이 혹시 나에 관한 말씀들을 하시는 것을 들은 적은 없는가?"
"두 분은 대부님에 관한 얘기는 가끔씩 나누시는 걸로 압니다."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모르나?"
"한 때는 대부님의 행방에 대한 수소문을 하기도 했답니다."
"내 행방을 수소문했다고?"
"대부님이 중원 땅으로 떠나신 소문이 전해진 뒤로 고구려인이 서라벌에 왔습니다. 그는 대부님의 행방을 알아보려고 왔답니다."
"고구려인이 여기에 와서 내 행방을 알아보았다고?"
"그때부터 전군님은 고구려 쪽과 밀통이 계속된 걸로 압니다."
"전군님과 밀통하는 고구려인이 누군지 모르는가?"
"그 이름이 도해선이라고 들었습니다."
"도해선? 그 자가 이곳에 온 적이 있는가?"
"도해선이란 사람이 직접 오지는 않았으나 그가 보낸 사람이 가끔씩 왔는데 그 사람은 대부님과 한 마을에서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나하고 한 마을에서 살았다고? 혹시 이름을 기억하는가?"
"이름이 장대라고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아직도 신라에 오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양신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을 노출시켜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부님은 서라벌에 언제 오셨으며 어디서 머물고 계십니까?"
"서라벌은 오늘 들어왔고 머물 데는 없으나 걱정하지 말게."
"제가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동안에 약재상 노릇을 해서 어디서나 쉽게 잠자리를 구할 수가 있었네. 자넬 만나 봤으니 아쉬움이 크나 그만 떠나야 하겠네."
양신의 대답에 영지가 말했다.
"저는 대부님과 이대로 헤어지기가 섭섭합니다."
"나도 그럴세. 허지만 어찌하겠는가? 여기서 해가 질 때까진 자네와 좀 더 많은 얘기를 나누다가 떠나려네."
"대부님은 어디로 가시게 됩니까?"
"남가라를 잠시 들려볼 생각일세."
"남가라는 무슨 일로 가시려고 하십니까?"
"지물촌에 가면 만나볼 사람이 있네."
"지물촌의 누구를 만나시려고 하십니까?"
"지물촌 거수인 구미님을 비롯해 만나 볼 사람은 많네."
"대부님은 사정을 모르고 계시는군요?"
"무슨 사정을 모른다는 말인가?"
"지물촌은 없어졌습니다. 구미님도 왜국으로 떠났습니다."
영지는 지물촌이 없어지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자신도 왜국으로 가게 되면 구미 거수를 찾아갈 생각이라고 했다. 그곳에서 교역에 관할 일을 알아보려고 했던 양신은 실망이 컸다.
"지금도 신라와 백제 사이엔 전쟁이 계속되는가?"
"그렇습니다."
"한삼국 간에 벌어지는 철 전쟁은 언제나 그치려나?"
양신이 중얼거리자 영지가 뜻밖의 말을 했다.
"저도 선친 못지않을 검술 실력을 지니고 싶습니다."
"자네도 검술을 익혔는가?"
"그렇지만 요즘은 그만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왜 그랬는가?"
"화랑도에서 나오고 나서부턴 등한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님을 만나 뵙게 되니 새삼 의욕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가?"
"대부님이 제게 검술을 지도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내가?"
양신은 그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겨 들었다. 실의에 빠진 영지의 마음을 어떻게든 북돋아 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의 불함도기 검법을 전수해 주면 여러 잡념과 실의를 떨쳐내는데 도움이 될 것도 같았다. 그러나 자신은 신라에 있을 수가 없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도 자네에게 검술을 지도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네만."
양신의 말에 영지는 반색을 했다.
"대부님, 정말 지도를 해 주시겠습니까?"
"허지만 내가 신라에 머물 수가 없으니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제가 대부님을 따라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를 따라 중원 땅으로 올 수가 있겠는가?"
"대부님은 중원 땅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요?"
"나는 장사를 하고 있네."
"저는 대부님의 일을 거들면서 배우면 안 되겠습니까?"
"영지군, 나는 생활에 여유가 있는 편이라 자네를 데리고 있을 수가 있네. 다만 자네가 신라를 떠나는 걸 어머님이 어떻게 생각을 하실지 모르고 그 일로 또 다른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되네."
"제가 신라에 있건 없건 관심을 가질 사람은 없습니다."
"허지만 자네 모친께서 허락을 하실까?"
"어머님껜 벌써부터 왜국 땅으로 떠나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머님도 늘 제 걱정만 하십니다. 제 마음을 잘 아시고 이해를 하시는 데다 대부님을 따라간다면 크게 마음이 놓이실 것입니다."
"후견인인 전군님과 김유신님껜 알려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분들이 허락할 리는 없으나 저는 희망이 없는 신라를 떠나고 싶을 뿐입니다. 또 그 일을 전군님과 당주님에게 말씀을 드릴 이유도 없습니다. 게다가 이런 생각까지 하는 저입니다."
"어떤 생각을 한단 말인가?"
"이건 어디까지나 제 추측에 지나지 않습니다. 두 분께선 제가 어디로 떠나버리면 아마도 홀가분해질 일로 여기게 됩니다. 그보다는 제가 어디로 떠나버린 것을 이해해 줄 사람들이 많을 걸로 믿습니다."
양신은 그런 말을 듣고 영지의 속마음이 어떤 것임을 잘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데려가질 않아도 더는 신라에 남아있을 사람으로 보질 않았다. 더욱이 김춘추와 김유신에 대한 반감이 매우 큰 데다 두 사람 역시 영지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굳이 허락을 받을 일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영지 군, 자네 검술 실력을 한번 보고 싶군."
"대부님,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입니까?"
"그럴세."
영지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허리에 찬 장도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천관검법(天官劍法)의 기본기 동작을 한동안 펼쳐 보였다. 야신은 다 마치고 칼을 칼집에 꽂는 영지에게 말했다.
"자네의 검술을 보면서 해론님을 떠올리게 되었네. 전반적으로 유연함을 느낄 수가 있으나 정확한 자세와 속도감을 보완되어야 하겠네. 그런데 지금 자네가 쓴 검법은 전에 해론님이 쓰던 검법과 다를세."
"대부님, 제가 배운 검법은 김유신 당주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김유신님이 만든 검법이라고?"
"당주님이 검법을 만드신 이유는 대부님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 때문이라니?"
"대부님은 당주님과 검술을 겨룬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당주님이 대부님을 이기셨다고 하는데 할머니는 제게 뜻밖의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으십니다."
"할머니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그러는가?"
"할머니는 대부님이 일부러 져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당주님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혼자서 검술연마를 오래 하셨고 자신의 검법을 만들고 천관검법으로 명명을 하셨다고 합니다."
양신은 그 말을 듣고 몸을 일으켜 세운 뒤 긴 죽장(竹杖) 속에서 밀두도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굵은 소나무 밑으로 가더니 나직한 기합성을 터뜨리며 한 순간 칼을 휘둘렀다.
"영지, 이리 와서 나무를 보면 뭔가 발견하는 게 있을 것일세."
영지는 다가들어 양신이 칼을 휘두른 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대부님, 뭘 발견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나무 기둥에 뭔가 변화가 생긴 게 보이지 않는가?"
영지는 자세히 살펴보니 그때부터 나무 기둥에서 수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부님, 나무 기둥에서 수액이 흘러나오는데 칼날에 베인 나무가 어떻게 그대로 서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찰나적으로 베어졌기 때문에 나무는 멀쩡한 줄 아는 모양일세."
양신의 대답과 더불어 나무는 서서히 쓰러졌다.
"검술은 빠르기와 정확성이 중요시되네. 그걸 중점으로 수련을 하면서 거기에 보탤 것은 강한 체력 단련일세."
"대부님의 말씀대로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네 어머님께 인사도 드리고 드릴 말씀도 있으니 뵙게 해 주게."
"대부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영지 군, 나는 몹시 시장 끼를 느끼는데 뭘 좀 먹게 해 주게."
"대부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영지는 부리나케 그곳을 떠났다가 잠시 후 모친과 함께 다시 왔다.
"대부님, 어머니를 모시고 왔습니다."
양신은 벌떡 일어나서 여인에게 허리를 굽혔다.
"부인,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양신입니다."
영지의 모친은 들고 온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양신님, 잘 오셨습니다. 우선 요기부터 하십시오."
"부인, 잘 먹겠습니다."
"대부님, 드시고 있는 동안에 저는 어머님과 얘기를 나누겠습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둠이 깔려 들었다. 영지와 모친이 자리를 피하자 몹시 허기가 진 양신은 밥을 먹었다. 금세 밥그릇을 비우고 물을 마시고 있는데 영지와 모친이 다가들었다.
"부인, 잘 먹었습니다. 허기를 끄고 나니 살 것 같습니다."
영지 모친은 공손히 대답했다.
"너무 급해 변변치 못한 식사를 대접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부인, 저는 영지 군과 얘기를 나누면서 도무지 마음을 잡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했습니다."
"영지가 그렇게 된 이유는 모두 어미 탓입니다. 어미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영지의 모친은 그런 말을 하고 자신의 처지를 들려주었다.
해론의 아내인 덕유(德維)는 남편을 여의자 영지를 키우며 수절하기로 했다. 그런데 한 관리가 형편이 곤궁한 친정에 금전적인 도움을 많이 주었다. 그 이유는 젊은 나이로 과부가 된 덕유를 탐냈기 때문이다. 덕유의 친정 부모는 관리가 상처를 한 몸인 데다 하도 졸라서 응낙을 했다. 그런데 관리는 덕유의 집에서 눌러살면서 영지를 매우 탐탁잖게 여겼다. 때문에 모자는 마음고생이 여간 심하게 되지 않았다.
"어미로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양신은 그런 사정을 듣고 영지가 더 안 돼 보였다.
"영지 군이 여러 면으로 회의적인 데가 많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더욱이 해론님이 당하신 불행에 대한 원망은 큰 마음의 상처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 영지 군의 마음을 다스려 주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어미로선 고맙기 그지없겠습니다."
덕유가 한숨과 함께 허락하자 양신이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허락해주시면 영지를 데리고 중원 땅으로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큰 폐가 되겠으나 그렇게 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신라를 떠나 넓은 세상을 경험하며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게 해 주면 좋겠습니다."
"부인, 저는 지금 떠나야 하는데 곧 준비를 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어쩔 수가 없으므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덕유가 대답을 하자 영지가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은 떠날 수가 없습니다."
영지의 말을 듣고 덕유는 한숨만 쉬었다.
"영기, 당장 안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양신의 질문에 영지는 대답을 않고 덕유가 입을 열었다.
"영지야, 잠시 자리를 피해 다오. 대부님과 상의를 드릴 말씀이 있다."
영지는 모친의 말을 듣고 말없이 몸을 일으켜 자리를 떴다.
덕유는 그때부터 또 다른 사연을 양신에게 들려주었다.
김춘추의 부인인 문희는 실은 해론의 첫사랑이었다. 때문에 영지를 각별히 아끼며 어려서부터 자주 집으로 데려다 지냈다. 그런데 김춘추에겐 첫 부인의 소생인 고타소랑(古陀炤娘)이란 딸이 있었다. 영지는 동갑 나기인 고타소랑과 붙어 지내며 정이 들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서로는 은애 하는 사이가 되었다. 문희는 그런 두 사람을 짝 지워 줄 마음을 먹었으나 김춘추는 신분적 차이를 들어 반대했다. 영지는 그로 인해 받은 마음의 상처가 매우 큼에도 고타소랑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중원 땅으로 가게 되면 함께 데리고 갈 길을 모색할 것으로 보았다.
양신은 고개만 끄덕여야 하는데 영지가 다가들었다.
"대부님, 어머님에게서 제 사정을 들으셨겠습니다. 저는 중원 땅으로 가자면 좀 시간이 걸리겠습니다. 대부님이 계시는 곳을 알려주십시오."
양신은 그 말을 듣고 물었다.
"중원 땅의 여양이란 곳으로 와서 만춘장을 찾게."
"대부님, 그리로 가겠습니다."
양신은 그런 말을 듣고 물었다.
"중원 땅엔 어떻게 올 것인?"
"남가라 포구엔 중원을 오가는 배들이 많습니다. 거기서 배편을 얻어 타고 안전하게 중원으로 갈 수가 있는 방도를 찾겠습니다."
양신은 그 말을 듣고 품속에 지닌 금덩이 중 한 개를 꺼냈다.
"이 금의 절반은 영지 군이 중원 땅으로 올 때 뱃삯으로 충당하고 나머지 절반은 부인께서 가용에 보태 쓰셨으면 합니다."
"대부님, 이런 거금을 제가 어찌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덕유는 사양을 하는데 영지가 말했다.
"어머니, 받으세요. 소생이 나중에 그 돈을 꼭 갚아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게나. 나는 이만 떠나야 하겠네."
"대부님, 지금부터 어디로 가십니까?"
"영지군, 해론님의 묘소를 찾아뵙고 나서 백제를 향할 생각일세."
양신은 자신과 해론은 어딘지 모르게 일맥상통하는 슬픔의 응어리를 지닌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의 무덤에 앞에서 실컷 울고 싶었다.
"대부님, 그러시면 가잠성까지 제가 동행을 하겠습니다."
"영지군, 나는 혼자서 가는 게 좋겠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서 내가 이곳에 왔던 일도 비밀에 붙이는 게 좋겠네."
"저도 그러시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요즘 남가라의 사정은 어떤가?"
"대부님, 남가라엔 임나부도 없어졌고 구미 거수님도 없으십니다."
양신은 뜻밖의 말에 매우 놀라며 물었다.
"구미님이 남가라에 계시지 않다니 무슨 말인가?"
"구미 거수님은 왜국으로 떠나셨습니다."
영지는 대답하고 구미에 관한 일들을 들려주었다. 양신은 좀 난감해진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이며 까닭을 모를 낭패감에 젖어들었다.
"임나부가 없어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구미 거수님은 가락국을 부활시키려고 하다 실패했습니다."
"가락국을 부활시키려 하다가?"
"그 일엔 백제와 왜국이 개입을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영지는 신라 침공군을 이끈 백제국 장수가 계백이었던 것도 밝혔다. 그 이유는 양신이 해론과 계백을 다 교류를 했던 사이였기 때문이다.
양신은 구미 거수의 도움을 받아 신라의 철정을 공급받을 길을 모색했던 계획은 불가능해졌다. 다음은 백제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이젠 백제로 가서 계백이란 장수를 만나려는데 가는 길에 가잠성도 들릴 생각일세."
"가잠성엔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전에 자네 선친과 더불어 가잠성에 있었지 않는가? 그리고 꼭 해야 할 일은 자네 선친의 무덤을 찾아보고자 함일세."
"대부님, 그러시면 제가 길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네. 내가 이곳을 다녀간 일은 비밀에 부쳐야 하는데 자네와 함께 움직이는 것은 여러모로 좋지가 않을 일일세."
양신은 그 자리에서 작별하고 서라벌을 떠났다.
가을이 깊어져 가는 들판에선 농부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양신은 가잠성에 도착하자 어렵지 않게 해론의 묘소를 찾았다. 그 고장 사람들에게 양신은 가잠성의 수호신(守護神)으로 받들어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론님! 양신이 왔소. 대체 어찌 된 일이요?"
양신은 해론의 비석을 부여잡고 울음부터 터뜨렸다.
두 사람은 18년 만에 이승과 저승 간의 해후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양신은 불함산으로 숨어들 때처럼 슬픔과 그리움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해가 지는 가운데 무덤에 등을 기대고 지는 해를 바라보다 지친 몸엔 졸음이 쏟아져 들었다. 깜빡 눈을 붙였는데 꿈속에서 해론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생시의 만남처럼 얘기를 나누었다. 말은 주로 해론이 하는 편이었다. 자신이 가잠성을 되찾는 전투에서 벌인 무용담이 주로였는데 어찌나 신이 나서 떠드는지 양신은 말을 할 틈이 없었다.
해론은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양신님, 주랑낭자가 곧 이곳에 올 것이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해론의 등 뒤에서 주랑이 얼굴을 내밀었다.
"주랑 낭자!"
양신이 큰 소리로 외치자 해론이 말했다.
"해론님, 나는 주랑 낭자와 함께 지내고 있소."
"두 분은 서로가 은애 하는 사이였소?"
"그렇소! 이렇게 된 것은 양신님의 덕분이요!"
양신은 해론의 말에 눈을 번쩍 뜨이고 말았다. 어느새 하늘엔 큰 검은 구름 자락이 달을 가려놓아 사위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이내 구름 밖으로 달이 나왔고 중원 땅에서 주랑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오라버니, 서라벌의 해론님도 저 달을 보고 있을까요?"
그 생각에 몸이 으스스 떨리는데 소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언젠가 주랑 언니는 해론이란 사람을 은해 했다는 했어요."
양신은 하늘을 다시 올려다보자 달 속에서 주랑이 웃고 있었다. 다시금 검은 구름에 달이 가려졌다. 양신의 머릿속의 주랑의 얼굴은 추억의 잔상으로 남게 되었다.
선뜻 스치는 바람결에 무덤에 난 풀들이 흔들렸다. 양신은 그걸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흘러나왔다.
"나도 해론님과 주랑 낭자가 은해 했던 사이였음을 알고 있었소."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무덤의 풀들이 또 흔들렸다.
"해론 님, 저승에서나마 두 분은 행복하게 지내기 바라오. "
양신은 그런 말을 던지고 약 상자를 다시 등에 졌다.
"해론님, 영지군에게 검술을 지도하기로 했소. 편안히 계시오."
양신은 서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