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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드조이 Oct 27. 2024

수상한 돈방

- 1 -

아직 딸 아아가 집에 오지 않았을 오후 7시.

늦가을을 지나 재빠르게 겨울 문턱으로 흘러가는 이 절기의 밝음은 달려드는 어둠에 밀려나가는 시간이 점점 짧아져 7시임에도 사방이 암흑천지다. 문득 걸음이 멈춰진다. 아무도 없어야 할 집에 거실등이 환하게 켜져 있다. 방금 전까지 딸아이는 친구와의 약속으로 많이 늦을 것 같다고 통화한 후였다. 딸아이와 나, 여자 둘이 사는 집에, 주인도 없는 집에 불이 켜져 있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여자라도 같은 여자가 아니었다. 딸아이 하나 들어 메고 악다구니를 쓰며 살아온 나는 그냥 여자가 아니었다. 112가 새겨진 핸드폰의 통화 버튼에 손을 올린 채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었다. 


깨끗하게 닦아 놓은 거실에 거친 발자국이 가득하다. 방안에서는 뭐라고 떠들어 대는지 모를 자기들끼리의 목소리가 내 귀에 박힌다. 분명 남자들의 목소리다. 신발을 신은 채로 불이 켜져 있는 안방을 들여다본다. 거구의 남자 두 명이 땀을 뻘뻘 흘리며 나의 가구들을 빼내고 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비명 비슷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고함을 받는 쪽이나, 고함을 지르는 내쪽이나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당신들 뭐예요~!!"

"아니 이 아줌마가 미쳤나~?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뒷목이 뻐지근하다. 내가 집을 잘못 찾아온 건가? 아니다. 어젯밤에 내가 자고 일어나 아침에 열고 나간 현관문에 201호가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내 가구들을 허락도 없이 빼고 있는 저 자들이 오히려 내게 호통을 치고 있다. 입 밖으로 무슨 말이라도 내뱉어야 하는데, 욱신욱신한 머릿속에서 분명하지 않은 몇 개의 단어들만이 부딪치고 있을 뿐. 입은 뻥긋거리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하고 있다. 나의 등장과 고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남자는 내 화장대를 들어 옮기고 있다.


"정말, 그건 안돼!!"


외침과 동시에 팔다리에 힘이 풀린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주저앉아있는 내 모습에 입을 삐쭉거리던 까만 얼굴의 남자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내게로 다가온다. 


"아줌마~ 우리도 돈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니깐.. 아! 김 씨~ 우리 일 시킨 사람 이름이 뭐라고 했지? 명함이 여기 어디... 아! 김진만 아쇼? 그 사람이 시킨 일이니 연락 함 해보슈."  


그 남자는 땀을 닦던 장갑 낀 손으로 명함 한 장을 건넨다. 아... 김! 진! 만!

내가 모를 리 없는 이름이다. 3개월 전부터 정확히 하루 두 번씩 내게 전화를 했던 남자. 때론 퉁명스럽게, 때론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내게 전화하던 남자. 바로 내가 살던 집의 집주인이었다. 눈치챘겠지만 그가 3개월 전부터 전화를 하고 있는 이유는 밀린 월세 때문이었다. 아무리 월세가 밀렸다 해도 엄연히 살고 있는 집 열쇠를 박살 낸 뒤, 남의 살림살이를 맘대로 뺄 수는 없는 법이다. 김진만이고 뭐고 당장 내 집에서 나가라고 두 남자에게 으르렁거렸다. 거칠고 억세게 들이대고, 사내들의 팔뚝도 물어버릴 수 있다는 기세로 한 사내의 팔에 입을 갖다 대었다. 그때 뒤쪽에서 익숙한 쇳소리가 들린다. 


"고영미 씨! 남의 집에서 살면서 3개월이나 월세를 밀렸으면 염치가 있어야지! 내가 하는 얘기를 귓등으로 들었나 본데. 내가 분명히 오늘까지 입금 안되면 짐 다 빼라고 얘기했지! 아줌마가 안 빼니깐 내가 빼는 거야!

문제 있으면 경찰서에 신고하든가, 없으면 얼른 용달이라도 불러서 아줌마 짐이라도 싣고 가던가~!"


짤 딱 만한 키에 민둥머리의 집주인 김진만이었다. 전화상으로 오늘 낮까지만 해도 존댓말을 쓰던 그가 지금은 나를 너무 얕보는 하대의 극치였다. 하대라도 말은 맞는 말이다. 그는 계속해서 밀린 월세를 재촉했고, 해결되지 않으면 모든 짐을 강제로라도 빼겠다고 엄포를 놓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모든 게 그의 말이 맞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럴 수는 없는 법이다. 이대로 이들에게 순순히 물러나 길거리로 나앉을 수는 없었다. 나는 대답 대신에 살짝 들려진 나의 화장대를 제 자리에 다시 껴 넣으려고 화장대를 들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른 채 어찌할 바 모르던 두 일꾼은 눈만 꿈벅대고 있었고, 김진만이 내 팔을 잡아채며 빨리 짐 빼서 나가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남아있던 악다구니가 내 입이 내 팔을 잡아챈 김진만의 팔뚝으로 향하게 했다. 그렇다. 난 집주인 김진만의 팔뚝을 사정없이 물어버린 것이다. 순간 퍽~! 소리와 함께 방 귀퉁이로 날아가 쓰러졌고, 주변의 불빛들이 희미해져 갔다. 우뚝 서있던 성난 집주인의 모습도 점차 어두워져 갔다.


잃어버린 나의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뿌옇게 보이던 눈앞의 광경들이 카메라 렌즈가 클로즈 업 되듯이 조금씩 선명하게 드리워졌다. 눈이 퉁퉁 부어 벌게진 딸아이의 눈이 희미하게 눈에 비쳤다. 손에 꽃아 진 링거 주사, 환자복을 입은 다른 사람들이 누워있는 것으로 어림잡아 병원임을 알게 되었다. 일련의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제정신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내가 집주인의 팔뚝을 문 이후로의 상황은 이랬던 것이다. 팔뚝을 물린 집주인 김진만은 본인도 모르게 나를 발로 차버렸고 내동댕이 쳐진 나는 침대 모서리에 뒷머리를 부딪쳐 20 바늘 가량의 봉합술이 필요한 외상을 입고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찢긴 내 몸보다 집이 궁금했다. 엠뷸런스로 내가 병원으로 이송된 후 집주인은 경찰서로 연행되었고, 나의 상해 정도가 전치 7주로 판명된 이상 형사처벌이 불가피하며, 그나마 합의되지 않으면 구속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다. 내가 의식이 없던 이틀 동안 뒤집어 놓은 201호를 모두 제 자리로 원상복구 한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끔하게 정리해 놨다고 한다. 그것으로는 부족했던지 내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고 내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무릎을 꿇고 기다렸다고? 돈으로 나를 모욕하고, 짓밟던 그가 무릎을 꿇었다니... 가진 것 없고, 힘없던 나는 나의 머리를 찢기고 나서야 인간으로 취급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가진 것 없는 나였지만 나의 존엄성을 누구도 이런 식으로 짓밟을 수는 없는 것이다. 마지막 남은 나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치러야 만 했던 수많은 홍역들. 이혼녀에게 가해지는 따가운 시선, 식당에서 참아야만 했던 수많은 희롱들. 인간의 존엄성이 무엇이란 말인가? 철학자들이 외쳐대는 고고한 철학론은 모르겠다.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모욕할 수 있는 한계선, 피정복민의 입장에서 짓밟힐 수 있는 임계점에 인간의 존엄이 있지 않을까 싶다. 꼭대기부터 깨부수어지고 산산조각이 나도 끝내 지켜야만 했던 심장 속의 원석 한 개. 이 것이 나의 그것이었다.


내가 정신이 든 이후로 하루가 멀다 하고 병실로 찾아오는 김진만 씨를 나는 끝내 외면했다. 나의 그것을 지키고 싶었고,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런 김진만 씨에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당신의 말을 듣지 않고 뛰쳐나가 덜컥 애까지 낳고, 이혼의 훈장까지 달고 돌아온 둘째 딸을 눈엣 가시처럼 여기던 친정아버지였다. 친정아버지가 병원까지 친히 행차하신 이유는 둘째 딸을 살피기 위함 보다는, 집주인에게 맞아 머리가 터진 사람이 친정아버지의 둘째 딸이라는 사나운 소문이 퍼지기 전에 얼른 진화하기 위함일 것이다. 김진만에게 아버지는 구세주였던 것이다. 경찰이 정해준 합의 기일이 임박해 오며, 갖은 합의 조건을 내걸어도 통하지 않아 속을 태우던 그에게 아버지는 좋은 타협의 상대였던 것이다. 머리를 연신 조아리던 김진만 씨의 등을 토닥여 주는 너그러움까지 보여주던 아버지는 합의서를 들고 와 더 이상 아비 얼굴에 똥칠하기 싫으면 가만히 있으라며, 내 엄지손가락에 인주를 묻히고는 합의서에 내 지문을 새겼다. 찢어진 머리가 아닌, 생채기 난 오장육부 어딘가에서 꿰맨 상처가 터져 피가 흐르는 듯하다. 터져 나온 상처를 본 것인지, 아님 내 오장육부의 썩아가는 냄새를 맡은 것인지 아버지는 갖은 인상을 쓰면서 못마땅하게 날 쳐다보고 있었다. 이만하면 됐다며 돈 5백만 원을 내 발치에 던져주고는 발길을 돌린다. 아버지에게는 그랬던 것이다. 돈 5백만 원이면 나에게는 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만하면 됐다는 말은 5백만 원이면 내 주제에 족하다는 표현임이 분명했다. 잔인하게 돈을 던지고 돌아서는 아비지의 뒷모습에 손발이 부들거린다. 부들거리는 내 손을 딸아이가 꼭 잡아준다. 27살의 딸아이가 있다. 언제가부터 이 아이 하나면 모든 게 되었다. 세상의 멸시도, 손가락질도, 아버지의 멸시까지도....


그래! 이 아이 하나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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