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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바람에 금빛을 잔뜩 머금은 공손한 벼들이 리듬에 맞춰 춤을 추고 있고, 늦더위의 바지 끝을 붙잡고 애원하던 녹음의 푸르름은 이내 체념한 듯 노랗고 붉은 옷들로 갈아입고 있는 1966년 10월 22일 가을끝자락의 하루. 끝이 없이 펼쳐진 논, 밭이 수평선까지 펼쳐진듯한 너른 들판 한 귀퉁이에 키가 제각각인 청회색의 철지붕들이 느타리버섯처럼 다다귀다다귀 줄지어 자리 잡아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곳은 내 고향 전남 능주면 모산리.
1966년 10월 22일. 신명스럽게 온마을 어귀를 덮고 돌며 마음사람들 귓전에 소식을 전해주며 피어오른 맛있는 연기들로 가득 찬 모산리 마을. 연기의 근원은 마을 가장 속에 위치한 모산리 이장의 집마당이었다. 마을사람 머릿수를 모두 헤아려봐야 열손가락 가진 사람 세명이면 족했을 정도임에도 오늘 이장네 집에 모인 사람수는 짐짓 헤아려 봐도 50명이 넘는다. 마당에 광이 있는 한편에서는 남정네들이 이제 막 솥에서 건져 올려 김을 펄펄 뿜어내는 돼지고기 몇 덩어리를 큼지막하게 썰어 연신 접시에 담아내고 , 힘 좋게 생긴 한 사내는 여인네가 리듬에 맞추어 펼쳐놓은 찹쌀지에밥을 구슬땀을 흘려가며 절굿공이를 내리치고 있고, 앞치마를 허리춤에 둘러싼 아낙들은 종종걸음으로 잔칫날에나 볼만한 기름지고, 때깔 좋은 음식들을 마당 가운데 잔칫상 위에 탑을 쌓듯이 켜켜이 쌓아 놓고 있었다. 오늘은 김백만인 내가 장가가는 날이었고, 김막내인 나의 아내가 시집오는 날이었다. 2남 6녀인 집안의 첫 혼삿날이요, 26살의 노총각 장남인 김백만이 장가날이다 보니, 아버지 김철문 이장님이 기쁘지 않을 수 없고, 그 기쁨을 먹을 것 넘쳐나는 잔칫날로 채우지 않을 수 없던 날이었다.
연지, 곤지를 찍은 볼은 보기 좋을 만큼 빨갛게 익어있고, 윤기 나는 곱고 검은 머리꼭대기에 족두리를 얹은 혼례상 건너편에 서 있는 나의 아내 김막내는 한 달 전 처음 봤을 때보다 한층 고아 보인다. 모산리 건넛마을 금정리에 살고 있던 김막내는 나보다는 5살 아래로 이번에 당숙어른의 중매를 통해 맞보기 전에는 오다가다 뒷모습, 옆모습 정도만을 볼 수 있던 사람이었다. 적당히 작지 않은 키, 쌍꺼풀이 진 큰 눈, 납작한 코, 도톰한 입술이 얼굴에 어느 정도 질서 있게 자리 잡은 얼굴.. 아쉽다면 큰 눈에서 시작된 인물됨을 널찍하고 납작한 코에서 사람들의 평판이 굳어진다는 것이다. 당숙어른의 중매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된 나의 아내 김막내는 인물도, 처가살림도 별 볼 일 없는 나 김백만에게 딱 맞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신랑! 신부! 교배례~'
김막내와 큰절을 주고받고서야 부부의 연을 시작할 수 있었다. 보릿고개를 걱정하지 않는 집이 대부분인 시골마을에서, 보릿고개 시절에도 광에 곡식이 남아있던 김철문 이장님 댁은 동네 부자로 통하고 있었다. 그 가세 덕분에 아버지는 몇 해 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오랜 세월 동안 동네 이장을 맡고 있었고, 이장직 덕분에 동네와 가깝고 기름진 땅들에서 곡식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내어주신 논 두 마지기와 동네 끝자락에 위치한 부엌 딸린 단칸방에서 시작한 신접살림은 내 주제에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내는 보기보다 손이 옹골졌고, 알찼다. 부지런한 천성에 옹골지고 알찬 살림재주 덕분에 보릿고개 시절에도 끼니 걱정 없이 두 해를 지낼 수 있었다. 굳이 걱정이라고 하나를 뽑자면 같이 사는 두 해 동안 아내에게 태기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둘째 치고, 노총각 장남 놈 큰 잔치를 열어 장가보내 놨으니, 멀지 않은 때에 떡두꺼비 같은 손자를 안아보리라 당연스레 여겼던 부모님의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내보다 위로 세명의 처형 모두 시집가서 아들, 딸 잘 낳고 살고 있으니 집안 내력으로 자식을 못 볼리는 없었을 것이고, 뭔가 '때가 안 맞았나 보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두해하고도 반년쯤이 지날즈음.. 유난히도 혹독했던 겨울이 가고, 향긋한 냉이와 달래가 겨우내 물들여왔던 몸뚱이들을 부끄럽게 세상에 내놓는 따사로운 봄녘 어느 날, 아내가 입덧을 하기 시작했다. 동네 한의원에서 진맥을 짚어보니 정확히 수태임을 확답받을 수 있었다. 자식을 갖게 된 나보다, 손주를 갖게 된 김철문 내외분이 더 신명이 나셨고, 며느리가 애를 못 갖는 것은 아닌지... 티 내지 못하고 명치에 걸려있던 체증도 말끔히 몸 밖으로 사라졌음을 두 분의 모든 것에서 알 수 있었다. 손주를 위함인지, 며느리를 위함인지는 몰라도 그 위함덕분에 아내는 임신 3개월부터 어떠한 노동도 허락되지 않았고, 덕분에 아내는 무탈하게 산달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간 아내는 입덧도 가라앉아, 먹는 것부터 시작하여 뒷간에 거름을 주는 일까지 막힘이 없었다. 다만, 동네 어른들이 임신한 배 모양이나, 애기가 노는 것이 얌전한 것 등을 미뤄 딸아이 같다는 점괘가 있었지만, 예쁜 딸아이를 얻는 것이 나쁘지 않았던 나는 전혀 괴념치 않았다.
11월 27일 새벽 3시. 첫 아이임에도 큰 산통 없이 아내는 용한 동네 사람들의 점괘대로 예쁜 딸아이를 내 품에 안겨 주었다. 아직 핏덩이었지만 그 작은 것에 눈, 코, 입 다 붙어있고 손가락, 발가락 다 열 개씩 붙어있는 것이 신통방통했다. 처음 안게 된 첫 내 새끼라는 생각에 심장에서 더운 기운이 눈가로 솟아와 사람들 보기 민망하여 얼른 소매로 눈을 비벼 댔었다. 큰 눈매의 아내 눈을 닮은 것을 제외하면 나와 판박이인 딸아이의 이름을 하루빨리 지어주고 싶었다. 김철문 이장님께서 돈 많이 벌고, 큰 부자가 되라는 뜻에서 내 이름을 '백만'이라고 지어주셨지만 이름 덕분에 어릴 적부터 꽤나 놀림받은 아픈 기억 때문인지 딸아이의 이름만큼은 세련되게 지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큰 복을 받고 살아라는 의미로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복자'라는 이름은 백만이라고 내 이름을 지어주신 아버지 다웠고,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 삼일동안 신문지에 수많은 이름을 쓰고, 지우며 생각해 낸 이름이 수미였다. 빼어날 수에 아름다울 미...
김수미!!!
김수미라는 이름에 아내는 환한 웃음으로 동의를 표했고, 김천문 이장님은 계속되는 헛기침을 통해 못마땅함을 내색하셨지만 결국 호적에 등재된 내 딸아이의 이름은 '김수미'가 되었다. 아내의 쌍꺼풀 진 큰 눈을 닮고, 다행히도 넓적하고 낮은 아내의 코는 수미의 얼굴을 비껴갔다. 나의 코가 수미의 얼굴 한가운데 자리 잡으면서 동네에서도 '이삔 가시네'로 통했고, 어느새 수미는 돌을 맞이하고 있었다. 돌잡이 때 아이들에 비해 체구가 조금 작고, 걸음마가 느리고, 예사 아이들과 기어 다니는 모습이 조금 틀린 것 같다는 수군거림이 있었지만, 워낙 먹성이 좋고 작게 낳아 크게 키운 아이들이 건강하다는 동네 어른들의 말을 위안 삼아 어떤 걱정도 하지 않았던 터였다. 돌을 두 달 무렵 지났을 즘, 수미는 걸음마를 시작할 시기임에도 기어 다니는 시간보다는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 보였다. 바쁜 농번기에도 읍내 병원에서 비싼 예방주사도 몇 방 맞혔고, 의사 선생님도 별 말이 없었기에 안심하고 있던 우리 부부였다. 수미가 며칠 째 콧물과 가래 섞인 기침을 거칠게 내뱉기 시작하더니 저녁에는 열이 40도를 넘나들고 있었다. 아내는 밤새 찬물과 수건으로 아이의 몸을 닦아가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수미의 열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동이 틀 무렵 수미를 둘러업고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읍내병원 문을 두드렸다. 10분 후쯤 눈을 비비고 나온 의사 선생님은 내 눈에는 부처님이고, 하느님 같았다. 발가벗겨진 불같은 수미의 몸덩이에 청진기를 대보고, 반쯤 뒤집어진 눈에 불을 비쳐 보이고는 선생님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로 우리 부부에게 물었다.
"애기.. 예방주사는 다 맞혔제라~?"
"그라믄요. 정확히 이름은 몰라도 병원에서 맞혀야 한다고 한 것은 다 맞혔지라"
"애기가 감기치고는 증상이 좀 틀려라. 원래 애기들이 어릴 때 감기가 심해서 열이 오르믄 경기를 하기도 한디, 경기 때문에 애기들 손, 발 마비증세가 오기도 해라. 근디 수미는 증세가 좀 심헌 것 같소. 언능 채비해서 광주 전대병원으로 데려가는 것이 좋겄소."
으레 아이들이 크면서 겪는 감기와 고열인 줄로만 알았던 우리는 가슴속에 뭔가 '툭'하고 떨어지는 듯하더니
사지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써준 소견서를 받아 들고서 생전 처음으로 택시를 타고 광주에 있는 전남대병원으로 향했다. 택시에서 아내는 그럴 일 없다는 눈빛으로 자꾸 갈고리 모양으로 휘어지는 수미의 손, 발을 연신 주무르고, 또 주무르고 있었다. 응급실에 도착하자 수미의 상태를 확인한 젊은 의사선생은 우리 수미가 중병에라도 걸린 듯 호들갑을 떨며 간호사들에게 뭐라고 하고 있었고, 간호사들은 어딘가에 전화를 바쁘게 돌리는 듯하더니 조금 지나지 않아 하얀 가운의 의사 선생 두 명이 응급실에 도착하였다. 급하게 오느라 거의 잠옷바람이었던 아내는 조금 전의 수미처럼 오그라드는 두 손을 펴대며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나는 큰 병원에 가보라는 읍내 선생님의 말에 툭하니 떨어진 무언가로 인해 휑하게 뚫어진 가슴팍을 떨리는 손으로... 그 가슴팍을 연신 쓸어대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니여... 애기들이 다 아픔서 크는 것이지.. 별일이야 있겄어.'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간 의사들이 간간히 응급실에서 나와 수미에게 몇 가지 검사가 필요하다고 알려준 뒤로 새벽녘에 도착한 수미는 오후 3시가 넘도록 얼굴 한 번을 볼 수가 없었다. 흙냄새, 구수한 거름냄새에 익숙해진 농사꾼에게 병원의 소독냄새는 불안감을 더해줬고, 엠뷸런스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실려오는 환자들의 신음소리는 그들의 것이기보다는 우리의 것에 가까웠다. 해 질 녘이 다 되어서야 지친 표정의 의사 선생님은 앉지도 못하고 복도에 서성이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다가와 무서운 입을 떼기 시작했다.
"더 정밀한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따님의 증상은 소아마비 증상으로 보입니다. 몇 가지 검사결과 폴리오 바이러스가 검출되었고, 이 폴리오 바이러스가 척수에 감염될 경우 몸에 마비증상이 오곤 하는데 아직은 섣불리 속단하기는 이르니 추가적인 검사를 위해 입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태풍이 불어와 나락이 다 쓰러져도, 멸구로 인해 한 해 농사를 다 망친해에도 까딱하지 않고 강단 있게 헤쳐왔던 김백만이었다. 그런 김백만이 무너지고 있었다. 아내는 의식을 잃고 뒤로 자빠지고 있었고, 나도 의식이 희미해져 갔다. 살면서 천벌 받을 짓은커녕 가끔 누군가를 속이기도 하고, 싫은 소리를 했지만서도 죽일 놈처럼 누구의 살이며, 속을 헤치며 살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나한테.
수미에게 사형선고와 같은 진단을 내린 사람이 무능해서, 뭘 잘못 알아서 일 것이다. 서울 큰 병원의 똑똑한 선생님은 우리 수미를 달리 볼 것이다. 논 한 마지기 팔고, 그래도 안되면 한 마지기 더 팔더라도 서울에 있는
똑똑한 의사 선생님께만 데려가면 우리 수미는 오그라든 팔다리도 펴질 것이고, 언제 그랬냐는 듯 동내 애기들마냥 폴짝폴짝 뛰다가, 놀다가 흐르는 콧물을 소매로 훔치고 훔치다 볼때기로 번져 반지르르하게 말라버린 세상 이쁜 우리 수미로 해 질 녘에나 집에 들어올 것이다.
모든 것이 내 예상대로 되었다. 논도 한 마지기 팔고, 모질라면 남은 논과 밭도 더 팔고, 서울 똑똑한 의사 선생님 몇 분이 우리 수미를 봐주었다. 검사받고 치료하고 둘러업고 또 검사받고 치료받는 데 1년의 시간이 흘렀다. 모든 것이 들어맞았다. 단, 딱 한 가지만이 내 예상을 빗나갔다.
'척수와 뇌까지 퍼진 몹쓸 바이러스는 우리 수미의 자그마한 몸뚱이와 평생을 같이 해야 한다.'는 딱 한 가지
사실만이 내 예상을 빗나갔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달구어진 아랫목에서 우리 이쁜 수미가 제 어미의 젖가슴을 파헤치며 젖을 찾는다. 초점 없는 시선, 삐딱하게 흔들리는 고개, 오그라든 제 손으로 어미의 젖가슴을 파헤친다. 젖가슴을 내준 어미의 눈에서 말간 무언가가 바닥을 적시고 적신다. 혹독한 추위와 눈보라 속에 해 질 녘 붉게 물든 노을은 서러운 마음에 더욱 분탕질을 해댄다.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매운 연기 때문인지 연신 눈가를 쓸어대며 혼잣말을 해댔다.
'연기 한번 맵다. 연기 한번 맵다'
매운 연기는 그날 이후로 내 눈가를 쉽게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