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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치한 삶이 좋아 Mar 03. 2023

선을 긋고 나니 아픔이 밀려온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 사랑2

계란 한 판을 넘긴 나이로 접어든 자식들의 입에서 서서히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기뻐하고 축하해 주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슬쩍 던지는 몇 마디에도 자식들 얼굴엔 진지함이 있고, 비정함마저 감돈다.

당장 어떻게 하자는 것도 아니고 단지 부모의 말을 들어보자는 것임에도

부모 된 자는 가벼이 들리지 않는다.

가슴 깊숙한 곳에 뭔가 묵직한 것이 쿵하고 떨어지는 듯했고, 몸 안 모든 세포가 빨 딱 빨 딱 일어나는 듯했다.

말하는 쪽보다 듣는 쪽이 더 긴장을 한다.

말의 속도는 탱크의 움직임처럼 거침없고 압도적이다.

부모 된 자의 긴장감은 말이 길어질수록 확산되어 가고

마치 고구마 만 개를 먹은 것처럼 답답한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부모 입장에서야  자식들에게 취향에 맞는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반갑고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다.

감사하고 다행이라 생각하니  자식들의 선택을 존중하려 한다..  

계절이 바뀌면 자연의 산물도 바뀌 듯, 사람 살이가 평안해지려면 주변 흐름에 따라 말도 행동도 변해야 하기에 부모 된 자는 그렇게 함을 실행 중이다. 

부모다움이 점점 어렵게 느껴지는 건 나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

섣불리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며 앞에 나서다 꼴 사나워지고 감정 상하게 될까 봐 한 발 물러서서 그들의 말을 경청한다.

속내가 드러나지 않도록 덤덤한 척하고

자식들의 말이 끊기지 않도록 인내하며 귀 기울여 듣는다. 

언제 이리도 컸나. 나의 주니어들. 

서두르지 않고 신중하게 선택한 어휘로 부모 된 자 안색을 살피며 예의에 벗어나지 않게 말을 이어간다.

밀당도 아주 세련되게. 강약도 적절하게. 제법이다. 

이렇게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니 뿌듯함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같은 몸에서 빠져나온 뒤 또 다른 같은 뱃속에서 서로 다른 개체로 세상 밖으로 나온 나의 주니어들. 

아롱다롱한 유전자답게 말하는 기질도 어찌 그리 다를까. 

내가 생산했지만 세계 불가사의에 포함시켜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방목은 아니었어도 자유분방하게 자라도록 양육한 영향도 있을 것이고,

직장인으로서 연차가 어느 정도 되니 입담도 제법 다듬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협상 테이블을 두고 마주한 것처럼 팽팽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간다.

아들은 넌지시 간을 보듯 측면으로 돌려 말하고

딸은 단도직입적으로 '얼마해 줄 수 있어?' 한다.

어라! 요것 봐라 하면서도 불쾌하게 들리기보단 웃기고 귀엽기까지.

주니어들의 기세에 졸리고 밀리기 전에 빨리 평정을 찾아야 했다.

세월을 탓하는 것은 아니지만 점점 눈도 침침해지고 잘 들리지도 않고 말도 단조로워지고

문해력도 떨어지니 젊은 기세를 상대하는 것은 버거운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장 결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부모 된 자의 생각을 듣고자 하는 자리였으니까

일단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 주려 애를 써 본다.

복합적인 생각이 교차되는 부모 된 자의 머릿속은 점점 공황 상태로 접어든다,

티 나지 않게 애꿎은 들숨날숨만 반복한다. 

미안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무얼 주어도 아깝지 않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목숨까지 양보할 수 있는 

내 살점 하나라도 자식을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떼어 주며 느껴야 할 통증보다 흐뭇함이 더 큰

내 전부라고 살아온 자식 앞에서 부모는 끝내 져 주는 존재이다.

 

무책임한 부모가 되고 싶은 이가 있을까. 아니다. 그래서 열심히 사는 것이다.

자식들이 대학 졸업하고 무난히 취업하니 거기서 부모 된 자 의무가 끝난 줄 알았다. 

그제야 미뤄 두었던 자신들 미래를 들추니 더 정신이 번쩍 든다.

심신의 뿌리가 약해져 쇠도 씹어먹을 젊은 혈기도 이제는 없다.

잇몸이 내려앉아 치아가 흔들려 염증이 나고 뿌리마저 녹아내리면 임플란트라도 해서 더 강해지련만.

육신의 밑동이 건들거리면 치료제도 없다는데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어

메말라 가는 전우 둘이 세상 둘도 없는 한편 먹고살아보려고 하는데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도 솔직하게 털어놓는 자식이  원망스럽지 않다. 야속하지도 않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려려니 한다.

고슴도치 사랑이고

가시고기 사랑이겠지.

뭐라도 뜯어 줄 게 있나 자식의 말을 경청하며 조용히 부모 된 자 내면을 들여다본다. 

고혈이라도 쥐여 짜 볼 심산으로.


어리나 크나 늙으나 자식은 그저 보호해 주고 싶고 울타리 되어 주고 싶은 게 부모 된 자이다.




남편이 비교적 안정된 직장인으로 33년 차. 정년까진 4년 정도 더 버티기가 가능하기에 퇴직 준비를 얼마 전부터 시작했다. 

다행히 그동안 input을 하면 그에 상응하는 output이 되는 시절을 거쳐 왔기에 탄탄하게 바닥을 다지며 

한 계단 한 계단 올라타며 자산을 축적했다. 감사한 일이다.

그에 따른 부채도 있었지만 감당할만했다. 

연금 생활자로 살기엔 생활이 빠듯할 것 같고 거기에 월세 수입이 더해지면 금상첨화겠지 했다. 

퇴직 후 제2의 직업을 갖길 원한 남편의 바람도 있었고 해서 감행한 일이 부메랑이 될 줄 몰랐다.

인생사 새옹지마이니 우리의 바람대로 되길 기도하며 살아간다.


알뜰살뜰 가계 재정에 이바지하느라 사치스러움, 호사스러움과는 무관하게 살았다. 

남편도 아들도 딸도 기꺼이 협조해 주니 힘들지 않게 그럭저럭 살아왔다. 

차도 결혼 후 10년이 지나서야 소형차로 마련해서 20년을 운행했고 

무엇이든 내 손에 들어오면 10년은 기본이고 20년을 넘겨야 물건들이 회전되었다.

그렇게 마련한 총알(현금)들. 딱히 쓸 일이 없으면 아들 딸이 가정을 이룬다고 할 때 주려고 했다. 

잘 자라 준 것만으로도 효도를 다했으니 선물을 주고 싶었다.

자식들 앞에서 당당하게 폼생폼사하고 싶었다.


지하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결혼 생활의 힘듦을 자식들은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도움닫기가 되고 싶어서,

마중물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다. 능력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힘든지도 모르고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다. 




젊은 남자들 젊은 여자들 사이에서 비혼이니 딩크니 하는 개념들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는데  

나의 주니어들이 결혼이라는 말을 꺼내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내가 결혼할 때만 해도 여자의 결혼 적령기는 크리스마트 케이크였다.

요즘은 결혼 연령의 기준선도 당위성도 없어 보인다. 

애면글면하는 부모의 숫자도 덩달아 늘고 있다.


남들 하는 대로 여친 남친 있으면 부모 된 자로서 더 진도 빼기를 부추기거나 종용하는 일은 되도록 지양하려 한다. 

사랑만으로 결혼에 입문한다는 것은 거의 기적을 바라는 일이라 여기는 내게 묻는다면 이기적인 답을 할 것이다. 나의 주니어가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살길 바라면 욕심인 줄 알지만 더 크게 욕심을 낼 것이라고.


엎질러진 물이 되고만 투자의 종착역에 서있는 나와 남편은 사무치도록 미안했다. 

돌부리에 걸려 생채기투성이어도 앞에 있는 주니어들에게 더 주지 못해 마음이 아팠다. 

목이 매여 목소리는 잘 나오질 않았지만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은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어.

너희들이 결혼 상대에 대한 확신이 서는 날 때쯤 되면 그때 우리도 안전하게 탄탄한 땅 위에 설 수 있을 거야.

지금은 각자도생을 해야 한다.'

면도날이 가슴을 횡단한다.


협상 테이블의 대화는 잘 마무리가 되었다.

부모 된 자의 맘을 잘 헤아려 주는 나의 주니어들. 참 고맙다. 

건실한 나무로 뿌리를 잘 내리고 있어 참 고맙다.

아직 깨어 있어야 할 빌미를 주는 나의 주니어들을 위해서라도 살아가는 데 정성을 놓지 않으려 한다.

이쁘게 영글어 가는 사랑이 숭고한 열매를 맺길 날마다 날마다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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