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치한 삶이 좋아 Feb 28. 2023

만인의 놀이터

                             

친구, 돈, 딸, 찜질방. 반려동물.

늙어 가는 여자들에게 나이 들어 가매 절체절명 필요충분해야 할 것들이란다. 

그런데 배우자와 아들이 없다. 형제와 자매도 없다. 그들이 반려동물에 포함될 것이란 우스꽝스러운 추측은 안 하련다. 

늙어 가는 남자에겐 마누라, 애들 엄마, 집사람, 아내가 필요하다니

이사 갈 때 마눌님이 예뻐 죽는 반려견을 꼭 끌어안고 있어야 한다는 우습고 서글픈 항간의 풍문을 두고

당사자 되는 이들이 과연 인정할까 의구심도 들지만 

내가 늙어지기 전까진 맞다 그르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믿거나 말거나 하란 이야기다. 


얼마 전 등 떠밀리다시피 갔었던 곳에서 아주 흥미로운 풍경을 만났다. 

불. 가. 마.

태어나 머릿털 나고 처음으로 경험한 불가마 찜질 문화코드였다. 


뼈마디가 쿡쿡 쑤시는 병치레를 하는 것도 아니라서, 

고온에 나의 육신을 찜하는 일을 좋아하지도 않아서,

땀이라는 나의 육즙을 굳이 뜨거운 열을 받으며 내야 하는 일도 아니라서 

여태껏 찜질, 사우나, 온천욕이라는 것들과 무관하게 살아왔다.


먹어봐야 그 맛을 안다고 했던가

가서 멈추어야 비로소 보인다고 했던가

나의 부실한 메타인지를 반성하는 심정으로 그 곳을 경험했다.


질풍노도 중2는 피시방에 가고, 

고딩 대딩은 스트레스 풀러 노래방에 가고, 

갱년기 접어든 이는 찜질방에 가고. 

방 중의 방은 찜질방이라는 연구가 있던데 그렇다면 갱년기가 최고봉?


홀로 온 이는 없어 보였다. 

친구들, 부부, 조손이 포함된 가족, 연인, 노모를 동반한 젊은 부부, 이웃지간 등등.

연결고리가 다양하게 묶인 사람들이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가마 안에서 묵직하게 조여드는 열기를 즐기기도 

집에서 준비해 온 음식들을 풀어놓고 허기를 맛있게 채우기도

그냥 앉아 있기 심심하니 한 잔 두 잔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도

숯불에 구운 고구마가 뜨거워 호호 불어가며 꿀꿀한 단맛에 취해 보기도

엄마 아빠 따라온 꼬맹이들은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재미있어라 하기도

은밀한 손길을 오가던 연인들의 교감이 치명적이기도 하고

평상 위에 이불 깔고 벌러덩 누워 코를 골고 맛있게 낮잠을 자는 배 나온 아재들을 보고도 불편함이 없다.



가마에서 뿜어져 나온 열기를 감당할 수가 없었던지 등 돌리고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이야기가 주변에 들리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고 자기들 이야기 삼매경에 빠진 아지매들.

그녀들은 아는지 모르겠다. 옆에 있는 사람들은 일부러 듣고자 했던 것이 아닌데 청각이 그쪽을 향해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지매들의 입담은 대범하고 거칠 것이 없다. 성적인 이야기 마저. 어쩔 수 없이 듣다 폭소가 터진다. 

에둘러 말하기보단 오히려 속 시끄럼까지 시원하게 잠재워 버렸다. 고마웠다


병원에서 치료받은 것이 성에 차지 않아 그곳을 찾은 여인의 등엔 얼룩이 선명했다. 부항 자국과는 다른 얼룩. 자신이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들이고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사느라 몸이 그 지경이 되도록 참았으리라. 우리 부모님도 그랬는데. 자신들이 잘 만들어 놓은 것들을 생각하며 그 긴 시간이 좋기만 했을까. 

어쩌면 그녀들은 자신들의 첫 단추가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알았을지도 모른다. 

시간을 돌이켜 되돌아갈 수도 없으니 얼마 남지 않은 단추라도 제대로 끼어 볼 심산인지도 모른다.

용광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을 제대로 볼 용기도 내지 못하고 등을 돌린 채 고통을 상쇄시키는 중인지도 모른다.  

주변 사람들이 묻는다. 찜질 효과가 있냐고, 호전 반응은 있냐고. 그렇다고 하더라. 

명현 반응이라면 좋으련만.


밥 먹고 나서 배가 불러도 디저트 들어갈 공간은 있다고 한다. 군고구마를 먹는 순간은 그 말에 부정할 수 없었다. 집에서 먹던 것과는 비교 불가.

은박지를 두른 고구마를 숯불에 넣으려니 쉽지가 않아 끙끙거리고 있었다. 애를 먹고 있던 내가 답답했는지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초면인 아재가 도와주었다. 고구마 굽는 팁도 알려주고 30분 정도 지나 꺼내라고 한다. 친절한 아재 감사합니다. 아재도 뿌듯한지 얼굴에 넉넉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체온이 올라가니 훈훈함도 한결 높아지고 경계심도 약해지나 보다. 

덕분에 수월하게 익힌 고구마를 아주 달달하게 먹었다. 

숯불엔 오겹살, 고구마, 라면이 필수 아이템.

추운 날씨에 호호 불며 먹는 맛, 말해야 뭐 하랴 입만 아프지. 또 먹고 싶다.

                                        


요즘은 기업체에서도 회의를 찜질방에서 한다던데. 찜질방 간담회. 

사무실을 벗어나 색다른 공간에서 똑같은 옷을 입고 땀을 흘리며 공동체 의식을 높인다는 취지라고 한다. 

허심탄회한 대화가 오고 가고. 사기 진작은 덤이고. 아이디어가 분출되는 건 시간문제 아니겠는가.


등 떠민 이가 아니었더라면 나의 편린적 사고로 죽기 전엔 가보지 못했을 불가마였다. 

하루 나들이 치고 저렴하게 다녀왔다. 

온종일 불만 쪼이다 오는 것도 아니고. 

미적지근한 평상 온돌에 누워 자다 깨다 하고, 누운 채 동행한 일행과 사적인 이야기도 나누고.  

민낯을 보이는 것과 같아도 전혀 부끄럽지 않으니

한 잔 음료를 사이에 두고 담소를 나누는 카페나 술집에선 느낄 수 없는 맛이었다. 


버킷리스트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살아왔는데 생각이 조금씩 달라진다. 

나이에 따른, 성별에 따른, 형편에 따른 선을 긋고 자신을 제한하는 어리석음은 이젠 지양하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낯선 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