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오 년 지기의 아픔으로.
어지간히 취기가 오른 남편이 꺼낸 이야기.
'나는 연명 치료를 거부할 거야.' 취중진담이었다.
술기운 때문이라고 하기엔 남편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멀쩡했을 때도 늘 주창했던 말이라 농담으로 들리진 않았다. 남편은 언제가 속내를 드러내리라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나 보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평소에 하고 있었던 터라 나도 그렇게 해달라 했다.
주말 저녁 식사를 외부에서 하고 귀가한 남편과 딸은 저녁 식사를 하면서 마신 술이 부족했던지 냉장고에서 소주 2병을 꺼내었다.
집에 남아 있던 게 2병이라 다행이지 더 있었더라면 마저 다 마셨을 소위 주당이라고 불리는 부녀라서 술자리가 있는 날은 내가 염려 섞인 서릿발과도 같은 눈총을 쏘아도 도통 자제할 기미가 없다.
한술 더 떠 아들까지 합류한 날은 더 마시니 환장할 노릇임에도 아예 내가 포기하고 동석하는 것이 최선이다.
기나긴 많은 나날 술을 그리도 들이부어 왔건만 그 셋의 주량이 얼마나 되는지 아직도 가늠이 안된다.
여태 술자리가 마무리될 때까지 주사를 부린 적이 없었고,
하하 호호 웃다가 간간이 이 말 저 말 맥락 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걸 듣고 있자면 참 가관이었다.
그러다 얌전히 잠을 자니 낸들 당할 재간이 있겠나.
이미 술에 지배를 받고 있는 이들을 향해 내가 행하는 걱정과 자제의 말,
그것은 쓰잘 떼기 없는 잔소리 잔소리로 어느 여름날 귓가에서 웅웅 거리는 모기의 날갯짓과도 같은 성가심일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 가슴속엔 아마도 거대한 사리탑이 자리하고 있을 거다) 으이구.
하지만 건강이 허락되는 전제하에 가능한 이런 자리가 얼마나 지속될지 장담할 수도 없으니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쓰린 나의 속을 달래고 있었다.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나. 딸아이에게는.
아파서 자리를 보존하고 있는 아빠 엄마도 아니고, 아직은 건강한 중년인데 이런 이야기를 자신이 왜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딸아이는 시선을 식탁 위로 떨어뜨렸다.
'아까워야 왜 그렇게 울었니? (*아까워는 딸아이의 애칭)
너의 눈에서 눈물이 한동안 흐르는 걸 보니 말하는 내가 더 당황스럽더구나.
적절한 때인가 싶어 말 나온 김에 꺼낸 이야기가 너를 그리 슬퍼할 줄은 몰랐다.
그런 너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미안했던지,
사랑하는 아까워를 덜 힘들게 한다는 것이... 그게 아니었나 봐.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한참을 울던 딸아이가 눈물을 훔치며 우리에게 던지듯 건넨 한마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 건보공단 지사, 주요 종합병원, 노인복지관에 제출하면 돼.'
보건직 공무원답게 명확한 제시였다. 슬픈 건 슬픈 거고 정보를 제대로 알려줘야겠다는 한마디에
남편과 나는 그대로 넉다운되었다.
취중진담은 다큐로 시작해서 블랙코미디로 끝나버렸다.
지난 2023년 4월 3일 중앙일보 사회면에 실린
"병원에서 죽느니 극단 선택" 가족들 놀란 아버지 "헤어질 결심"이란 기사를 읽었다.
무척 마음이 아팠다. 자신의 죽음마저 자신이 챙겨야 하는 현실이 슬프다기보단 병든 몸을 기댈 데가 없다는 현실을 대비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두려움이 컸다. 살아내느라 급급했었으니 말이다.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했는데 죽을 준비를 하라니. 생각이 많아진다.
50의 강을 지나고 60이라는 강이 코 앞이다. 여기저기 몸에서 보내는 신호가 감지된다.
슬슬 질병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문턱을 넘어가고 있다.
백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60도 안되어 인생을 마감하는 이들의 부고도 요즘 들어 적지 않게 받고 있다.
건강식품을 먹어서라도 질병에 관한 예방을 해보려 용을 쓰는 일이 최우선이 되어 버렸고,
만나면 건강에 대한 이야기로 말을 트고 말을 맺었다.
인생 뭐 있나 하는 시크한 말속엔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는 욕심도 가득한 것 같고.
그럼에도 신체 변화에 따른 이상 징후로 먹는 약이 하나둘씩 늘어가니 점점 마음의 맷집도 예전과 같지 않은 게 사실이다.
피고 지는, 생성하고 소멸하는 자연적인 섭리를 따라야 하는 삶에 그저 순응하며 살아왔더라도
인생 터닝 포인트를 한참 전에 지나온 지점에 서 있는 이들에겐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초록초록했던 나무 잎이 알록달록한 단풍이 되고 명이 다해 지면으로 떨어지는 버석한 이파리가 되어 생을 마감하는 자연의 섭리처럼 사람의 몸도 그렇게 노화되고 쇠약해지면 좋으련만.
갑작스러운 불의의 사고, 치명적인 질병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순간이 나에게도 올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소소한 일상은 서서히 붕괴되고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겪어야 하는 시련을 생각하면 겁이 나고 마음이 무겁고 잔뜩 움츠러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한 생명의 연장이 더해진다면 현생 지옥이나 다를 게 없을 테니 말이다.
늘어나는 의료비를 감당해야 하는 무촌 일촌들에겐 형벌과도 같은 일이 되어 버리고,
그들이 사악한 이기심을 부린다 해도 비난해선 안 되는 이유는 생채기로 이미 그들은 충분히 고통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남아서 삶을 지속해야 하는 이들의 이기심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고 책임져야 할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누구의 탓도 아니니까.
'언제까지'라는 예측만이라도 있다면 그나마 견디기 쉬울 텐데 현실은 사방 벽으로 차단되어 암흑 속에 당한 이들을 가두어 버린다.
좋아질 거라는 말로 스스로 위안을 삼아 보지만 슬픔과 우울감에서 헤어 나오기 어렵고 서서히 지쳐만 갈 것이다. 병색이 짙어가는 이도, 간병하는 이도.
나는.
이미 부모의 질병과 죽음을 경험한 세대.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는,
숭고한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몹쓸 사랑으로 변질되는 걸 경험한 세대,
자신의 병으로 주변인 특히 무촌, 일촌 되는 이들이 겪어야 할 험한 시간이 무조건 짧길 바라는 세대,
그것이 이제 자신이 될 것이라는 것을 잊고 산 적이 단 한순간도 없는 세대이다.
내가 부모 세대와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용기 내어
만약에 내가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된다면 자식들에게나 주변에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말하고
의식이 없거나 향후 의료 처치가 무의미해질 경우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죽음의 문턱에 이르면 서서히 숨을 거두게 해 달라 일러두는 것이다. 고통이 따르더라도.
일러두기가 그들에게 그 순간 가혹하게 들리겠지만 내 일생의 종료는 내 뜻대로 하고 싶고
기꺼이 내 의지대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다.
나의 주장보다는 세상 시스템에 의해 타협하며 여태껏 살아왔으니 마감하는 시점에서
한 번쯤 나만을 위한 나의 고집을 부려도 될 듯하다.
그래서 딸아이에게 넌지시 꺼낸 말.
'나는 연명치료를 안 할 거야.'라는 말에 아이는 가혹한 말 앞에서 심한 통증을 애써 참으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동년배보다 건강한 아빠 엄마가 눈앞에 있는데 상상도 못 한 상상하기도 싫은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남편과 내가 너무도 이기적인 짓을 했을 수도.
건강할 때, 좋을 때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슬프고도 코믹한 당부였지만 말하길 잘한 것 같다.
아들과 딸에게 물질적인 것을 어떻게 물려줘야 하나 고민하는 것도 좋겠지만
남편과 나를 당부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고 그런 생각이 더 단단해진다.
이십오 년 지기가 아프다는 소식에 생각이 참 멀리도 왔다.
잘 아는 이의 통증이 데칼코마니 되어 내게로 고스란히 왔다.
그녀를 위해 기도합니다. 쾌유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