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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치한 삶이 좋아 Apr 13. 2023

세상에서 제일 거침없는 입

유연 근무 시간을 운용하는 직장의 시스템에 맞춰 출근하는 남편은 유아나 초딩 저학년과 아파트 승강기에서 자주 마주친다. 이때 가벼운 인사라도 하지 않으면 승강기를 타고 내릴 때까지의 몇 십 초는 그야말로 알 수 있는 불편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한 평 남짓한 사각 공간 안에서 대부분 심정지와도 같은 답답함을 느끼고 있겠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려려니 견디는 것 같다. 승강기가 자신이 원하는 층에서 문이 열리길 기다리느라 이미 다들 기린목이 되어버렸을지 모른다. 스마트폰에 시선을 두는 이도 있고, 멍하니 있기도 하고, 어떤 이는 허공에 영혼을 잠시 이탈시키기도 한다. 나도 때론 눈이 침침해지면 그저 승강기 층수가 변하는 곳을 바라보며 따라 읽어간다. 소리는 없이 입만 오물오물거린다. 


'용기 있는 자만이 편안함을 가질 수 있다'는 나의 반짝반짝한 지론과 기질은 

이런 곳에서 특효약이 된다는 사실!

물론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라는 것에 한정적이지만. 


아파트 같은 라인에 거주하고 있는 이들과 원활한 소통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승강기 안의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고자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넨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고개를 까딱이기도,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먼저 건네기도 하고, 구면인 이웃에겐 전혀 궁금하지도 않은 안부까지 물어본다. 더러더러 이러는 나를 오지라퍼라고 할 수도 있고, 되레 받는 인사조차 불편해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내가 알지만 그래도 강행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러면 내가 얕은 숨이라도 쉬어지기 때문이지. 

내가 너무 이기적인 인간이기 때문이지.


늦은 오전 시각, 승강기에서 24층에 사는 꼬맹이 형제를 만났다. 아마도 어린이집으로 등원하는 길이었던 듯했다. 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큰 꼬맹이, 작은 꼬맹이가 수줍은 듯 시선을 허공에 대고 쭈빗쭈빗 나와 남편에게 인사를 한다. 말소리가 올망졸망했다. 말하는 인형이었다. 아유 귀여워.

남편을 향해 큰 꼬맹이가 꼬물거리며 말을 건다.

'할아버지, 우리는 기차 타고 어쩌구 저쩌구 #####' 꼬맹이 말을 다 들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란 호칭에 남편도 나도 그 애 부모도 순간 당황했었으니까. 아직 남편의 비주얼이 그 정도, 할아버지 관상은 아니었는데 완전 충격이었다. 남편의 얼굴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미 KO패 당한 면상꼴.

쥐방울만한 존재에게 말로 기습을 당했다. 

아침저녁으로 울퉁불퉁한 남편 얼굴에 세 가지 화장품을 발라 주었던 나의 노력도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 뭐 한 거지. 전 날 밤에 팩까지 해 주었는데 좀 어이없네했다.

하긴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는 건 아니니까 꼬맹이 말에 인정.

나는 분명 억울해서 치를 떨고 있었는데 내 입꼬리는 반달 모양으로 한껏 올라가 있고 큭큭큭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의 얼굴은 하회탈. 남편의 얼굴은 오만상.

꼬맹이 엄마가 급하게 수습한다. 시아버님이 우리 또래라고. 

그래도 이미 늦었다. 패닉 상태인 남편은 서 있는데 서 있는 게 아니었다. 

정신줄 놓은 표정으로 계속 자신이 할아버지라고 꼬맹이를 향해 소리 내고 있었다.

강한 긍정은 강한 부정인 듯.


요즘 연예인병이 들어 자신의 스타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남편은 차츰 초연하게 웃고 있었다. 

포기한 거지 뭐. 주홍글씨가 남편의 이마에 꽝 찍혔다.

언젠가 결혼식에 갔다가 식당에서 일하시는 여사님이 자신을 가수 송 대관씨라고 불렀다고 좋아라 자랑하더니 그 후로 옷 구매가 잦아졌고 머플러도 날마다 두르고 다녔다. 사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으니 제대로 보일리가 없었겠지. 차림에 뭔가 부족함을  느꼈는지 짧디 짧다고 구박하던 나의 안목을 귀담아 듣기까지 한다. 그 전까진 자기가 백화점밥 먹은 게 얼만데 하면서 자신의 안목을 추켜 세우며 은근 나를 깔아 뭉개며 본인이 걸치는 모든 것은 알아서 귀하디 귀한 손으로 직접 구매했었다. 덕분에 내가 수고 하지 않아도 되니 고마웠다. 씁쓸하게 엄청 고마웠다. 남편이.

기온이 높아지면 목에 두른 머플러는 어찌할꼬. 스타일이 안 설 텐데. 우짜스까.


자신이 엄청난 사태를 몰고 왔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야구모자를 눌러쓴 꼬맹이 얼굴은 반쯤 가려져 있어도 초롱초롱한 눈빛은 그늘을 뚫고 반짝거렸다. 무엇을 해도 귀여우니 원 참.

'오구오구 귀여운 것들' 

보면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지는 꽃처럼 그 꼬맹이 형제는 분명 사람꽃이었다. 

나의 손을 살포시 대보고 싶지만 그렇게는 할 수 없는 일. 

부모가 싫어할 것이고, 손 대면 톡하고 터질 것 같아서 꾸욱 이 악물고 참는다. 


꼬맹이들과 나누는 인사는 언제나 입맛, 귀맛 그리고 눈맛으론 최고다. 정직함의 극강인 꼬맹이의 입과 눈. 최고봉이다. 거침이 없다. 두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리고 몸은 배배 꼬면서 할 말은 다 한다. 나도 그러고 싶다.

'고놈 참!' 

그런 녀석에게 남편이 기습적으로 당했다. 나는 아줌마로 보았는지 무탈했다. 다행이다.

나의 입은 벙글벙글 거리고 이마 아래 눈썹과 눈은 나란히 초승달이 되었다. 


어제도 만났다. 고 녀석들.

승강기 문이 열리고 꼬맹이들이 서 있다.

안면이 있는 아즈매란 걸 그 꼬맹이들도 알고 있는 눈치다. 만날 때마다 내게 던지는 말이 점점 길어지고 구체적이다. 콩알만한 존재에게 인정을 받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니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엄마 아빠 뒤로 몸을 감추곤 빼꼼히 실눈 뜨고 나를 쳐다본다. 

숨는다고 안 보이냐 요 꼬맹아.

나는 다 보이는데 어쩌지. 귀여워 죽을 지경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해피바이러스가 내게로 전이된다. 

내겐 그들이 천사였다. 

다시 승강기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오는 나의 뒤통수에 꼬맹이 말이 와닿는다.

 '안녕히 가세요'라고. 덕분에 그 이후 하루의 시간은 해피해피했다. 

거저 얻은 행복의 맛은 참으로 달달하기만 하네. 좋다.


뒤끝 장렬한 남편은 오늘도 말끝마다 나는 할아버지니까를 한다. 진짜로 손주가 생기면 어쩌려나. 

곧 조카가 낳은 딸의 돌잔치에 가야 하는데 그땐 괜찮으려나. 

아마도 자신을 젊은 할아버지라고 우기겠지. 젊다는 것에 강한 악센트를 주면서 우기겠지.

나의 주니어들이 그럴 때가 있었을 텐데 이젠 생각이 가물가물하다. 

그 때도 이 맘이었다면 야단치고 맴매하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는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길거리에서 자신의 아들이나 딸을 향해 우거지 상을 하고 악다구니를 치는 젊은 엄마나 아빠를 보게 되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까지 안해도 아이들은 부모가 그어 놓은 울타리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걸 모르니 그러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내게 다시 기회가 온다면 과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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