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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치한 삶이 좋아 Apr 25. 2023

데페이즈망스럽게.

사진을 배우며 4

비가 내렸다. 전 주부터 날씨 체크하기를 여러 번. 출사가 예정된 날에 비가 올 것이란 기상예보.

변함은 없었다. 기어코 세로 세로 반듯하게 비가 내렸다.

연이어 발생했던 산불을 생각하면 너무도 감사한 일이었지만 이 순간만큼 극도로 이기적인 생각에 나는 빠져 있었으므로 제발 비가 멈추기를 빌고 또 빌었다.

내 입은 주절주절 쏟아내는 주술사의 입으로 한동안 있어야만 했다.

여지없이 빨간 불줄기가 올해도 봄의 산야를 망가뜨리고 있었다.

거대한 화마는 마치 불사조의 날갯짓처럼 넘실거렸다. 연일 보도되고 있는 산불 뉴스에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만 할 뿐, 자연의 폭력 앞에서 사람과 산야는 한없이 무기력해지고 말았다. 어쩌면 먼저 망가뜨린 쪽에 대한 자연이 되돌려 주는 대가인지도 모르겠다.

부디 피해가 크지 않길 바랐다.

서서히 비가 잦아들더니 이슬이슬거리는 비로 바뀌어 있었다.





동대문역에서 하차, 3번 출구로 나왔다.

목적지는 산마루 놀이터.

출사 과제는 데페이즈망 기법을 활용해

                      낯설게 찍기.

                      유리창에 비친 창신동의

                      이미지를 초현실적으로 찍기.

                      심도는 깊게.

                      카메라의 다중 노출 기능을

                      이용하여 찍기.

                      이미지가 중첩되어 조각조각

                      이어지는 느낌을 구현해 입체

                      의적으로 찍기.

                     시공간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현되도록 찍기.


*데페이즈망은 어떤 물건을 맥락과는 상관없는 이질적인 환경으로 옮겨서 본래의 성격을 지우고 물체끼리의 기이한 만남을 연출하여 강한 충격 효과를 노리는 것으로 르네 마그리트의 피레네의 성, 골콩드가 대표적이다.

   



백지상태로 덤벼야만 했다. 제시한 과제대로 피사체를 찾아야 하는데 동네길은 무척 어수선했다.

다 집어치우고 '낯설게 하기'라는 주제로, 작정하고 사냥감을 찾아 어슬렁거렸다.

구불구불 S자 곡선으로 이어진 급한 경사로가 눈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아뿔싸. 

마주한 순간 나의 전투력은 공중으로 산화되어 버렸다. 

또 등산길이구나.

다른 길을 찾아볼까, 아니 아니.

반드시 올라야 하는 길목에서 나의 갈등은 밀푀유처럼 겹쳐져만 갔었다.

잔뜩 머금고 있는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니 얼기설기 연결된 전선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펼쳐진 거미줄을 닮아 있었다.

어떻게 찍지.

전선의 색도 하늘의 색도 우중충스럽고, 거무죽죽했다. 더 어수선했다.

적갈색으로 즐비한 골목은 내렸던 비를 흠씬 담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 아니 간사한 나의 마음은 어느새 갬성이란 놈에게 지배 당하고 있었다.

비 내리는 장충단도 아닌데 왜 이리 좋지. 비가 그쳐 걷는데 다행히 불편함은 없었다.

우산을 쓰고 느리게 느리게 발길을 옮겨도 좋았겠다 했다.

사람은 아니 나의 흔들리는 욕심은 어디까지 뻗칠지 원 참.




거대한 거미줄에 갇혀 언제 먹잇감이 될지도 모른 채 발버둥 치고 있는 동네. 더디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주거 환경이 보편적인 현재라고 치자면 그곳은 시간을 거슬러 객관적인 과거 속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 나라 시간의 속도가 같음에도 불구하고 여긴 많이 동떨어져 있어 보였다.

한 블록만 벗어나도 혼잡한 서울 거리를 만날 수 있는 그곳. 왠지 모를 심리적인 간격이 느껴졌고 더 커 보였다.




점차 날이 밝아졌다. 잿빛을 멀찍이 밀어낸 하늘은 청초하기 그지없었다.

좁다란 동네길에도 따스한 햇살이 반짝거렸다.

기온이 올라갔는지 살짝 더웠다.

변덕스러운 봄은 날로 날로 청출어람스럽다.




산마루 놀이터 도착. 설마 했는데 진짜 놀이터였다.

황토 놀이터, 큐빅 구조물, 정글짐, 작은 도서관이 그 곳에 있었다.

하긴 내가 지나오면서 아이들이 뛰어놀 공간도, 주민이 쉴 만한 공간도 보지 못했다.

원단을 실어 나르는 오토바이가 골목길에 즐비했고, 급경사로엔 주차된 차들로 나열되어 있었다.

놀이나 휴식과는 멀어 보였다.

바랜 주황빛이 도는 웅장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골무홀이라던데.

소규모 봉제 공장이 많았던 창신동의 상징인가 추측해 보았다.

달팽이관처럼 동글동글 거슬러 올라가니 정상이었다.

그 곳에서 내려다 보니 서울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원래 아파트를 지으려던 땅이었는데 주민의 요청으로 용도 변경한 것이라 했다.



물건의 실용적인 성격을 배제해 있어서는 안 될 곳에 그 물건을 둠으로써 일상적인 관계가 아닌 이상한 관계로 두는 것, 즉 낯설게 데페이즈망스럽게 찍어보자고 했었던 나의 노력이 얼마나 부합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아직은 미숙한 판단자인 나이므로.

불충분한 소재를 탓하며 시선을 빛으로 돌려 찍기도 했다. 언제 쯤 찍을 것이 많네라는 말이 나의 입에서 나올지 모르겠다.

그날이 막연하여도 나의 기대는 오늘도 내일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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