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포기한다는 건 그만큼 잘 합격한다는 거니까
1학년, 변리사를 도전하다 (brunch.co.kr)의 하편이니
상편을 안 보신 분들은 상편을 먼저 봐주세요~!
나는 하나에 꽂히면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몰입한다. 이번엔 변리사였다.
초반에는 활활 불태웠지만 끝까지 지속되지 않았다. 그렇게 변리사를 포기했다.
예전에는 나의 이런 성격이 싫었다.
발만 담그고 빼니까 뭐라고 내세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요즘은 내 성격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 순간 즐거움을 느끼면 된 거고, 즐거움의 대상이 쉽게 바뀌어도 괜찮다고 말해준다. 이때는 이걸 해서 좋았고 그때는 그걸 해서 좋으면 된 거지
그게 문제 될 건 아니니까. 즐거움 자체를 즐기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급하게 해치우려 한 건 문제가 되는 부분이다. '급함'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를 느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내가 남들보다 뒤처지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늘 불안에 시달렸다. 또래에 비해서는 많은 것을 접하다 보니 너무 일찍 눈을 뜬 것 같다. 이런 분야도 있구나라는 눈의 트이면서 해야 할 게 참 많다는 거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노력의 기준은 높아지기에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만족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어떤 순간에도 이 정도면 됐다며 만족한 적이 없다.
좋게 말하면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를 장점이라 믿으며 살았지만
이건 좋게 볼 문제가 아님을 에리히 프롬을 통해 깨달았다.
이기심은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불만족 감을 포함하며, 그 결과 진정한 만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탐욕은 바닥이 없는 구덩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항상 불안하게 자신을 걱정하지만, 절대 만족하지 못하고 충분히 얻지 못하거나 뭔가를 놓치거나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늘 사로잡혀있다.
그는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에 대한 불타는 질투심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무의식적인 역학 관계를 좀 더 관찰해 보면, 이런 유형의 사람은 기본적을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며, 사실은 자신을 몹시 혐오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 자신을 좋게 생각지 않는 사람은 항상 자신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
그에게는 진정한 사랑과 긍정의 기반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내면의 안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기본적으로 안정과 만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걱정해야 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차지하려고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중-
어릴 때부터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사실 그 부끄러움은 자기애의 부족이 아녔을까.
성격이 급하고 승부근성이 강한 것도 마찬가지다.
나의 모든 행동은 자기애의 부족에서 비롯되었다.
변리사 인강만 끊어놓으면 내가 정말 열심히 할 것 같았는데, 막상 인강을 끊으니까 공부가 하기 싫어졌다(??)
차이고 나서는 앞으로의 빈 시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몰라 두려웠다.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 너무 아깝고 싫었으니까.
불안을 느끼지 않기 위해선 뭐라고 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인강을 끊으니까 안정을 얻었다. 뭐라도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이 좋았으니까.
공부야 하기 싫었지만 이런 식으로 포기하는 건 정말 못할 짓이라고 생각해서 꾹 참고 민법을 공부했는데
생각보다 민법이 재밌었고 이때까지 쌓아왔던 능력들이 민법에 발휘되어 감사함을 많이 느꼈다.
사실 고3 때 나름대로 정말 애썼지만, 수능은 그리 잘 치지 못했다.
노력의 결과가 성공으로 남아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수능도 실패로 남으니까 우울해하면서 방학을 보냈었다.
내가 고3 때 들인 노력이 하나도 부질없이 느껴지고 도대체 뭐했냐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고3 때는 지금 성적이 바로 나오지 않아도 앞으로는 공부를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고, 그 방법대로 평생을 공부하면 걱정이 없겠다,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니까 끝까지 힘내자는 생각으로 힘냈는데
결과를 망쳤다는 이유로 과거를 죄책감과 패배의식으로 도배했다.
그런데 민법은 고3 때의 공부가 전혀 헛되지 않았고 나는 제대로 하고 있었다는 확신을 주었다.
과거의 치유를 민법을 통해서 해냈다.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는데 왜 포기했냐면, 흥미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흥미가 떨어진 이유는
1. 민법 말고도 세상엔 재밌는 게 너무 많다는 걸 알아버렸다.
2. 나랑 친한 사람들한테 변리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해주었다.(나는 MBTI가 P이다.)
1. 민법 말고도 세상엔 재밌는 게 너무 많다는 걸 알아버렸다
세계사, 철학 책에 푹 빠지게 되었을 때 변리사에 합격하고 책을 읽어도 되지 않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도 내가 책에 푹 빠져 있을 거란 건 장담할 수 없다.
책을 그렇게도 안 읽던 내가 책에 빠져서 사는 건 기적이라고 생각했고 이 기적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우연히 접한 서평 쓰기(인터넷에 올리면 원고료를 준다)를 통해서 글쓰기에도 관심을 가지고, 소통의 기쁨도 알게 되었다.
자연스레 SNS 활동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민법-> 책-> 서평-> 블로그-> 브런치 이렇게 이어졌다.
단순히 책을 좋아함을 넘어서 어떻게 업으로 삼을 수 있을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취업 걱정에서 시작한 변리사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플랫폼이 주는 기회를 하루빨리 붙잡아야 했고, 미룰 수 없었다.
"변리사 공부는 해야지, 근데 지금 보는 책이나 다른 활동이 더 재밌으니
언젠가 내가 변리사 공부를 하고 싶은 순간이 오면 그때 할 거야"
이런 마음가짐으로 변리사를 아예 포기하진 않은 채 보냈다.
사실 책이 그렇게 재밌었던 이유도 변리사 공부를 미뤘기 때문이다.
해야 될 일이 있는 와중에 딴짓을 하면 즐거움이 배가 되니까.
2. 나랑 친한 사람들한테 변리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해주었다.(나는 MBTI가 P이다.)
나는 남한테 내가 하는 일을 말하면 그게 동기 부여가 되어서 더 잘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남한테 말하니까 더 하기 싫었다. 속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창 민법에 빠져 있을 때 친한 언니한테 변리사 공부가 꽤 잘 맞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동기 언니는 진심 어린 걱정을 해주었다.
너무 빨리 끝내려고 했기 때문에 흥미를 잃어버릴 수도 있어.
빨리 하는 것보단 오랫동안 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혼란스러웠다.
빠르게 하려다 보니 흥미를 잃게 되었다는 건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빠름과 흥미가 동시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둘 중 하나는 버려야 하는 가치였던 것이다.
고시 공부는 오랫동안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나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오래 하기 위해서 힘을 빼는 게 무슨 말인지 감을 잡았을 때쯤,
민법에 흥미를 잃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람들한테 내가 변리사를 도전한다고 말한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생각,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변리사를 더 싫어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변리사를 놓지 않았다는 안정감과 동시에 하기 싫다는 혐오감이 들었다.
친구에게 변리사를 공부해야 되는데 책에 빠져서 고민이라고 한 적이 있다.
"중독의 대상이 책인 건 좋은 일이고 네가 변리사를 포기하진 않을 것 같은데?"
나도 내가 변리사를 포기하진 않을 것 같고 끝에 가서는 준비를 하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2/19일에 시험을 쳤고 아는 만큼만 풀고 나왔다.
정말로 고시를 포기한 것이다.
나는 내가 포기할 줄 몰랐고 나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감이 잡혔다.
절대 내가 하는 일을 남에게 알리지 말 것
쾌락을 추구하면서 행복을 느낄 것
내면의 안정을 찾을 것
포기해도 괜찮다는 것
포기를 잘한다는 건 그만큼 잘 합격한다는 것
예전에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찾고 싶다는 이유로 고시를 포기하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왜 진작 자신이 좋아하는 걸 찾지 않았을까", "이미 고시에 많은 걸 투자하고 나서야 그 생각이 들까"
그런데 내가 그 상황에 처해보니까 충분히 이해가 간다.
고시를 공부해야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새롭게 눈을 뜨는 게 더 중요한 거지 고시 합격 자체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변리사 합격보다 더 귀중한 경험을 얻었고 그 경험을 눈덩이로 삼아 크게 굴려낼 자신이 있다.
그래서 포기가 당당하다. 그만큼 새로운 것도 시도해 보았다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