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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Feb 22. 2022

[싱어게인2]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부른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싱어게인을 보면서 숫자로 사람을 나타내는 게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름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숫자를 보니 이름의 가치에 대해서 새삼스레 생각해보게 되더군요.

이번에는 싱어게인의 성공 요인(숫자/심사위원/참가자들)을 분석한 뒤, 

맨 처음 던진 질문의 답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숫자

사람들이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야 TV 프로그램이 흥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기회의 평등'과 '개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싱어게인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잠시 설명해드리자면,

참가자들의 이름은 비밀이고 73호 같이 숫자로 표현됩니다. 결승에 가까워질 때 이름을 공개하죠.

(숫자는 제작진이 정해준 것도 아니고, 참가자가 원하는 숫자도 아니고 본인이 운으로 뽑은 수입니다.)


우리는 숫자에 선입견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름으로 선입견을 가지니까요.

우리는 은연중에 타인의 이름과 겉모습을 매치해보며 그 사람과 잘 어울리는지 판단해보죠.

그러나 숫자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청자들이 노래에만 집중할 수 있죠.


시청자들은 숫자를 보자마자 어떻게 행동할까요?

먼저 참가자의 이름부터 찾아봅니다.

그 사람을 더 알고 싶으니까요.


비록 숫자로 표현되어 있어도 사람들은 가수를 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나만 알고 있는, 나만의 가수라는 느낌을 가진 채로요. 일종의 관음증과 비슷합니다.(좋은 의미로)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팬층이 되다 보니 참가자가 실수를 했어도 응원해 주거나 

더 잘했으면 하는 마음에 진심 어린 조언을 남기기도 하며 훈훈한 분위기를 형성하더군요


'심사위원

다양한 연령과 직업으로 구성된 심사 위원을 통해 다채로운 시각으로 참가자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여러 명이서 상의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남의 의견을 신경 쓰지 않고 참가자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심사평을 남깁니다.


기존의 서바이벌 프로는 심사위원들 간의 상의를 거쳤기 때문에 권위적인 느낌이 강하지만,

싱어게인은 심사가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기에 동등한 관계라고 인식되는 것이죠.

덕분에 시청자든 참가자든 열린 마음으로 조언을 곱씹어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의도가 잘 드러나도록 말을 못 하는 사람, 

자신의 견해에 빠져서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가득한 요즘 시대에

소통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건 시청자들에게 큰 기쁨을 안깁니다.

김이나 작가의 섭외가 의외였는데 말의 전달력을 생각해보니 바로 이해되더라고요.


'참가자들

에리히 프롬의 말을 빌리자면, 진정한 자유는 자신답게 사는 것입니다.

사회가 원하는 대로 나를 맞춰 사회라는 틀 안에서 묻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만의 색깔을 찾아서 사회가 나를 원하게 만드는 것이죠

딱 봐도 후자가 더 다채롭고 재미있지 않을까요?ㅎㅎ

아쉬운 점은 우리 인류는 아직도 전자에 익숙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전자에선 합격하지 못한 사람을 패배자로 취급하죠.

하지만 후자에선 승패가 없습니다. 각자 자신의 색깔로 빛나니까요.

싱어게인의 참가자들 실력은 기본적으로 좋기 때문에 여기서 패배했다고 나무랄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계속 보지 못하니까 아쉬움이 남고, 응원하게 되죠.

최선은 다하되 결과는 통제 밖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남의 성취에 대해선 나의 일처럼 기뻐해 주는 것이 아름다운 사회가 아닐까요?

싱어 게인 같은 프로가 많이 나와서 실패에 너그러운 사회로 변하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실패에 너그럽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실패도 깎아내리는 것이니까요.


내가 나다울 때 사람을 끌어당긴다는 걸 싱어게인은 보여줍니다.

내가 나답기 위해선

새가 알을 깨고 나와 아프락사스가 되듯이 고통과 불안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렇게 이겨낸 사람들을 보며 위안과 용기를 얻게 되죠.


싱어게인 분석은 여기에서 마치고, 마지막으로 제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전하겠습니다.


맨 앞에서 제가 드렸던 질문이 기억나시나요?

"이름을 부른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였습니다.

싱어게인은 최근에 참가자들의 이름을 공개했습니다.

사람들은 더욱 반갑게 참가자들을 맞이했습니다.

이름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깨닫는 순간이었죠.

보통은 타인에 대한 선입견을 가진 채로 이름을 대하지만, 

싱어게인은 타인의 본모습을 알고 나서 이름을 마주합니다.


사실 본모습을 안 상태에서 이름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입니다.

나의 이미지에 맞는, 혹은 반전으로 작용할 수 있는 이름이라는 판단을 내리면서 살지만,

내가 내 이름을 바라보는 대로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타인을 알기도 전에 너무 속단해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그 사람의 모습을 알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걸까요

저는 최근에서야 사랑은 기다림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싱어게인은 회차를 거듭하면서 기다림을 당연함으로 바꾸어 놓았죠.

기다림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서니까 가수를 향한 사랑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가 나에게 뚜렷하게 남아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이름의 가치를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요


동생도 제 의견에 공감하더군요

자매일기3에서 나온 개구리 굴개('개비얀')는 저희 집의 유일한 개구리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한 마리 더 있었죠.('개하얀'입니다)


자매일기3을 안 보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봐주세요!

자매 일기3: 동생이 집에 개구리를 들여왔다 (brunch.co.kr)


동생은 개하얀이라고 이름을 붙여도 그 개구리를 하얀이라고 부르지 않더군요

그래서 제가 굴개처럼 개명을 해주었죠.(굴비였습니다)

이번에도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결국 어떤 이름도 부르지 않은 채 개구리를 대했습니다.

굴개만큼의 애착 관계는 하얀이와 형성하지 못하더군요


사실 이름을 안 불러서 애정이 안 갔기보단 그 개구리의 존재를 동생이 알지 못하는 게 아닐까요?

굴개만큼 하얀이한테는 마음을 쓰지 않은 것이죠

결국엔 내가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기다림과 여유가 없다면 사랑이 들어설 자리는 없죠.


어릴 때부터 누군가가 저를 성을 빼고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묘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 감정의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내가 내 이름을 확인한다는 것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 한 번 더 생각해 되는 것이니까요.

마지막으로 김춘수의 꽃을 남기고 가겠습니다.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여러분들은 싱어게인2를 어떻게 보셨나요?

저는 이주혁을 응원합니다.(T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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