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아이 증후근

자아를 찾아가는 나

by 굥이


나에게 사춘기란 없었다. 김정은도 무서워한다던 15세 청소년들 사이에서 나의 ‘착함’은 빛났다. 어른들이 듣고싶어 하는 말을 골라서 하고, 또래 친구들의 고민을 잘 들어주던 나는 누구보다 ‘착한 아이’였다. 또래 친구들이 방황을 끝내고 각자 자신을 찾아 정착할 때, 나는 여전히 열 다섯에 머물러 있었다. 아파야 할 때 아프지 못했던 나는 결국 뒤늦게야 열병을 알았고, 때 늦은 사춘기는 늦은 만큼 오랫동안 머물렀다.


중학교 2학년, 언니의 유학비를 감당하기 위해 어머니는 고모와 함께 감자탕집을 시작했다. 시댁의 등쌀에 밀려 매일 해가 뜨기 전 가게를 나가던 그녀의 몸과 마음은 헤질대로 헤졌고, 고모의 동생인 그녀의 남편과는 자연스레 불화가 시작됐다. 그녀를 도와 깍두기를 손질하던 어느 날, 그녀는 평소와 같이 나에게 쌓인 감정을 내뱉었고, 내가 할 수 있었던 말은 “그래, 아빠가 나빴네, 아니 고모는 왜 그런대?”뿐이었다. 조금은 시원해졌는지, 그녀가 잠잠해지자 나는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이 툭 튀어 나왔다. “근데 엄마랑 아빠 그만 싸우면 안 돼?” 나의 말실수에 그녀의 입에서는 바늘이 쏟아져내렸다. 그녀에게 미움 받지는 않을까, 다시는 나에게 말을 걸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녀에게서 쏟아진 바늘이 온 몸에 박혀 피를 철철 흘리던 나는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한 마디 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를 24시간 감시해야만 했다. 어떠한 일에도 속마음이 튀어 나와 말실수를 하지 않도록. 나와 다른 타인의 관념에 흠이 나지 않도록. 아무에게도 버려지지 않도록. 그렇게 나의 존재를 지웠다.


내 안에는 빨간 풍선이 하나 있다. 나의 온갖 말들을 꾹꾹 눌러담을 수 있는 아주 고마운 풍선 말이다. 풍선을 들고있는 나는 놀이동산의 삐에로가 되어 항상 미소짓고 있었으며, 때로는 광대가 되어 다른 사람을 웃게할 수도 있었다. 헬륨가스 처럼 위로 올라가려는 풍선은 나를 주저앉지 않도록 지탱해주었다. 오랜 시간동안 버텨주던 나의 풍선이 어느 날 굉음을 내며 펑!하고 터졌다. 산산조각난 풍선의 잔해는 힘 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고, 풍선에서 빠져나온 오물은 밖으로 흘러나가지도 못하고 내 안에서 썩어 악취를 풍겼다. 도피처가 사라진 나에게 도망칠 곳은 없었다. 삐에로는 풍선 없이는 웃을 수 없었다. 광대는 풍선으로 밖에 사람들을 웃길 줄 몰랐다. 열 아홉이 되도록 빨간 풍선을 들고 있던 나는 풍선이 사라지자 더 이상 삐에로가 되지도, 광대가 되지도 못했다. 손에 땀이 나도록 꼭 쥐고 있던 나의 풍선이 터져버리자, 나는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었다.


내 안의 풍선이 사라졌기에 타인의 도움이 절실해졌다. 여름 내내 악취를 풍겨내던 나는 오물을 바깥으로 내뱉기로 결심했다. 스스로 병원을 찾아 나의 상태를 직면했다. 그러나 더 큰 숙제가 남아있었다. 가족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가족들이 느끼게될 나를 향한 죄책감과 수많은 걱정들이 또 다시 나를 짖눌렀다. 나의 우울을 들은 가족에게는 큰 슬픔이 찾아왔고, 아버지는 나 몰래 한참을 우셨다. 제일 처음 든 감정은 후회와 죄책감이었다. 가족들을 힘들게 했다는 생각이 들어 괴로웠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이 들었다. 나를 위한 첫 걸음이었다는 생각 덕분이다. 가족들의 나를 향한 이해와 도움은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했다. 지금의 나는 두 번째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바로 나를 욕망하는 것이다. 그림을 향한 나의 욕망은 전시 기획자라는 꿈을 갖게했다. 그림을 그릴 줄만 알았던 내가, 김한들 큐레이터의 ‘혼자 보는 그림’이라는 책을 읽고 새로운 직업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욕망이 되었다. 작가와 관람자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작가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 하고, 그들의 손길이 담긴 커다란 그림을 내 손으로 벽에 건다는 생각이 비로소 내 심장을 뛰게 했다.


나는 여전히 착한 사람 증후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비로소 내가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됐다. 때로는 고집스러우며, 항상 새로운 것을 이해하려 하고, 그것이 마음에 든다면 하려는 사람이다. 큐레이터라는 꿈이 생기고, 목표점을 갖으며 나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할 수 있었다. 나의 욕망이 입을 열게 해주었고, 타인에게 도움받을 용기를 불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