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쥬흐 프랑스, 투르? Tours! #1
2월의 런던은 춥지만 그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원래 계획했던 5일의 여행을 그 전날 숙소를 다시 잡을만큼 볼 것이 많은 소프트파워를 가진 무궁무진한 곳이었다. 2015년 고등학생의 눈으로 봤던 런던과, 2022년 2월 방랑객처럼 자유롭게 거닐던 런던, 그리고 가장 날씨가 좋았던 5월의 런던까지 갈 때마다 새롭고, 늘 하고 싶은 것이 넘치지만 늘 클래식한 멋을 간직한 도시였다.
목화언니와 나의 20일 세계일주 마지막 행선지는 프랑스였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프랑스. 하지만 그 첫번째 행선지는 나의 마음의 고향 파리도, 정겨운 니스도, 까눌레의 보르도도 아닌 투르였다. 난 아직도 이 명칭이 정확한지도 사실 모른다. 'Tours'라는 이름의 현지인 유행하는 여행지라고 구글에는 나와있었지만 정작 스카이스캐너에서는 '투어스'라는 알 수 없는 명칭으로 나오고, Tours를 검색하면 프랑스의 투어 프로그램이 나오는 그런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곳이었다. 본토의 발음은 '뚜흐' 같은 발음이려나, 표현하는 게 애매해 목화언니와 나는 줄곧 '투르'로 부르고 있다.
이 이름도 모를 도시에 우리는 왜 갔는가, 때는 2월, 언제 나갈지도 모르는 전 세입자의 답변을 기다리며 곧 플랫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함께 집도 없이 22kg, 10kg짜리 캐리어 두 개와 터질듯한 배낭을 각각 하나씩 매고 어떤 겨울도 춥지 않을 '바지 위에 바지 위에 바지 위에 롱치마'라는 4단 껴입기 패션을 선보이며 떠도는 중이었다. 부유하진 않아도 꿈은 많던 우리는 런던의 살인적인 물가에 매끼 맥도날드 오늘의 meal만 먹는 한이 있더라도 킹스크로스 역에서 스니치를 사야했고, 포트넘 앤 메이슨의 비스킷과 차를 즐겨야 했으며 길을 잃은 패딩턴을 집으로 데려가야 했다. 매일 밤 호텔 바닥에 널브러진 짐을 정리하며 라이언에어의 수하물 요금을 걱정했지만 껴입은 옷에 비행기에서 땀을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버킹엄 궁전의 근위병 테디베어는 품에 꼭 안고와야했다. 매일매일 통장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캐리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터질듯한 지퍼를 애써 모른척하며 위에 앉아 잠그는 것이 일상이었다. 다음 행선지는 우리 20일 세계일주의 마지막이 되어야 할 텐데,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경로와 지갑사정을 생각했을 때 유럽 본토에 가야 할 것 같았다. 어쨌든 비행기를 타야 했는데 라이언에어는 좌석 가격은 저렴해도 수하물 가격은 저렴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초과되는 무게에 한해서는 아주 깐깐하게 검사해 왕복 여행을 몇 번은 할 수도 있을 정도로 벌금을 받는다고 들었기에 우리가 비행기를 여러 번 타는 것은 무리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만인의 인생 여행지인 포르투갈의 포르투, 혹은 처음 보는 프랑스의 투르였다. 목화언니와 나는 이상하게 이런 부분에 있어서 잘 맞았는데, 포르투는 말라가에 있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인 것 같았고 황금 같은 이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는 아쉬운 선택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정한 곳은 이름도 모르는 투르. 프랑스행을 택하게 된 것이다.
일단 비행기를 예매하고 도착 바로 전날 에어비앤비를 예약했다. 우리는 그때 둘 다 좀 지쳐있었던 것 같다. 마드리드에서 런던까지 약 2주 정도를 주구장창 돌아다녔으니.. 아무리 여행이라도 명확하게 돌아갈 곳 없는 떠돌이 생활은 힘든 법이었다. 그리고 둘 다 성격상 '오늘은 호텔에서 맛있는거 먹으면서 놀자!' 하는 위인이 못됐다. 여기까지 왔는데 볼 수 있는 것은 다 봐야지라는 생각으로 부단히 돌아다녔다. 그러니 '일단 행선지는 정했으니, 대중교통이나 세세한 부분은 가서 알아보자'라는 조금은 안일한 생각으로 이름 모를 도시에 발을 들인 것이었겠지.
투르로 가는 길은 마드리드, 런던을 가는 길보다 더 설렜다. 고백하자면 이번 학기 내가 제일 기대하는 것은 프랑스였다. 그것도 프랑스의 파리를 걷는 것. 에펠탑의 야경을 보고, 파리에서 내가 좋아하는 디저트를 맘껏 먹는 것이 가장 최우선의 목표였다. 만약 집 문제가 꼬이지 않아 바로 가볍게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더라면 내 목표는 단 하나, 개강까지 남은 몇 주동안 파리의 어느 카페 테라스에 앉아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며 평화를 찾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계속 다른 곳을 여행하기로 한 상황이라 학기 중으로 미뤄뒀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가게 된 것이었다.
비행기에 타서 런던에서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정리하는데 내려다본 하늘은 왜 이렇게 또 좋은 건지. 그때까지 여행한 말라가, 마드리드, 런던 모두 좋았지만 프랑스는 비행기 타고 떠나는 그 순간부터 이미 꿈꾸는 기분이었다. 내가 사랑한 프랑스, 나의 조국은 대한민국이지만 내 마음의 고향은 프랑스입니다, 를 시전 하며 다니던 지난 몇 년간의 내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때 갔던 파리에서 에펠탑 사진만 40장 정도 찍어댄 내가, 전공인 스페인어보다 교양 프랑스어를 열심히 공부하던 내가. 투르는 또 어떤 곳일까, 현지인의 휴양지 같은 곳이라던데 또 어떤 눈부신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 무렵, 투르에 도착했다.
잔뜩 기대를 안고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공항으로 바로 이어지는 게 아닌, 비행기에서 바로 내려 바로 땅을 밟게 되었다. 눈앞에 내려서 본 투르의 공항은 아주 작았다. 내 고향 청주의 국제공항이 투르 공항의 3배보다 큰 것처럼 느껴질 만큼, 2층도 아닌 것이 당황스러웠다. 주변을 둘러보는데 저 멀리, 3km 앞까지도 높은 건물, 사실 그 어떤 건물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뭐지..?
일단 코로나 상황이었으니 입국심사를 하려고 줄을 서는데 왠걸, 내가 그간 겪어오던 입국심사 부스의 느낌이 아니었다. 두 직원분들께서 우리의 백신 증명서와 여권을 확인해주시는데 그게 너무 평화로웠다. 공항 특유의 최첨단, 깨끗하다못해 가끔 혼자 남겨지면 삭막하기까지 하던 그 분위기가 아닌 정다운 느낌. 통과해서 공항 안으로 들어가니 밖과 안이 똑같았다. 심지어 시기가 시기인지라 공항 안 몇몇 곳은 닫기까지 했었다. 짐을 찾아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우리 같은 여행객은 어떻게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건지, 모두 기다렸다는 듯 자신을 기다리던 사람을 찾아가 안고 반가운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우린 당황했다. 일단 짐이 많으니 숙소에는 가야 했고, 런던은 영어가, 마드리드는 스페인어가 통했지만 상대는 프랑스어였다. 이리저리 돌아보며 도심으로 향하는 버스를 예매하는 부스를 찾아 헤맸는데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심지어 런던에서 그렇게 잘되던 우버나, 스페인에서 자주 쓰인다는 Cabify조차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말라가 공항 앞에 그렇게 호객행위를 하던 택시 드라이버분들조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맘에 주차장에 나가자 아까 그 가족, 친구들을 만나러 온 사람들이 그들의 자동차에 짐을 실으며 하하호호 행복하게 하나둘씩 떠나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어떡하지, 에어비앤비 호스트분에게서 언제 체크인할 예정인지 물어보는 메세지가 때마침 왔고, 우리 앞엔 아무것도 없는 주차장만이 남아있었다.
히치하이킹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막막한 마음으로 구글맵을 켜자 다행인지 불행인지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우리의 숙소가 있었다. 이미 하루에 박물관 2개씩 다니던 하루 3만보 공식을 쌓아가던 우리였다. 캐리어가 있지만 그건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강한 자만 살아남는 법이다, 이것도 다 나의 팔근육이 될 예정이니 겸허히 받아들이자, 하며 구글맵이 인도하는 방향으로 캐리어를 끌고, 애써 목화언니와 '그래도 30분이면 힘들지만 가서 맛있는거 해먹자. 에어비앤비니까 호화로운 저녁을 즐길 수 있을 거야'로 서로를 달래며 걷기 시작했다.
주차장, 공항을 벗어나니 마켓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었다.
여길 벗어나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돼.
하고 말하며 고개를 들자 내 앞에는 씽씽 지나다니는 자동차들이 보였다. 목화언니의 당황한 표정이 보였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내 귓가를 울렸다. 눈앞에 있는 도로는 우리나라에도, 어느 나라에도 있을법한 익숙한 도로의 풍경이었다.
그곳은 고속도로였다.
정확히 고속도로는 아니었겠지만 차들이 씽씽 달리는 인도는 없는 도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길을 잘못 찾은 것 같다며 서로 휴대폰을 돌려보고 이리가고, 저리가도 그 방향이 맞았다. 이 아름다운 구글맵이 우리에게 그 길을 알려준 것이다.
몇번을 고민하다가 호스트의 메세지는 오고, 시간은 가고, 곧 해는 저물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밤이 되면 여기서 뭘 해야할지, 할 수 있을지도 몰랐고 막연히 택시를 기다리기는 어려울 것 같아 가다 보면 인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도로 갓길에 있는 풀이 심긴, 걸을 수 있는 곳으로 가봐야 하나 생각하며 잔디를 성큼성큼 5보쯤 옮겼을까, 뒤쪽 주차장에서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놀라서 얼른 주차장 쪽으로 가보니 프랑스 아주머니 두 분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프랑스어로 무언가를 말해주시는데, 그쪽으로 가면 안 된다고 말씀해주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에어비앤비의 주소를 보여드리며, 온갖 바디랭귀지와 영어 조금을 섞어 이곳으로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하냐고 여쭤보자, 이야기를 나누시더니 우리를 맞은편에 있던 트램 정류장으로 데려가 주셨다. 주소를 다시 유심히 보시더니, 어느 역에서 내리면 된다고 천천히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설명해주셨다. 기계까지 우리를 데려가 주시더니 티켓을 사서 쥐어주시며 일행분을 먼저 보내시면서까지 함께 트램에 타 주셨다.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를 강조하시며 트램에서 내리셨고, 우리는 연신 감사를 표했다. 하마터면 이름 모를 도로를 헤맬지도 모르는 낯선 관광객을 이만큼까지 도와주실 수 있을까, 싶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이렇게까지 해주신다는 게 너무 따뜻했다. 내가 겪은 투르는 처음부터 파란만장했으나, 그래도 왠지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오랜만에 느끼는 소도시의 정이 있는 곳이었다.
사실 아주머니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길은 다른 길이었다. 그러니까 트램에서 혹시나 틀릴까 확인하는데 점점 숙소와 멀어지고 있는 게 보였다. 더 멀어져서 호스트 분과 약속한 시간에 완벽하게 늦기 전에 길을 제대로 찾아야 했다. 우선 아주머니께서 트램 티켓 사는 법을 가르쳐주셨으니 그대로 제일 가까운 곳에 내려 티켓을 사고, 제대로 길을 찾아 숙소까지 향하는 버스를 탔다. 버스에 올라타자 은은하게 꽂히는 시선이 보였다. 이 넓은 버스에 동양인은 우리뿐이었고, 우리가 받은 것은 차별의 시선이 아닌, 보통 더 큰 관광도시에 있을법한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한 호기심 어린 시선이었다. 그제야 이 '투르'라는 곳이 한적한 도시라는 것, 우리가 지금까지 있던 마드리드, 런던과는 조금 거리가 먼 소도시라는 것을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숙소는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있었다. 교외지역 부촌의 느낌이 컸다.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의 빌라단지였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조금 늦게 숙소에 도착해 메시지를 보냈더니, 베란다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호스트 분이 보였다. 호탕한 프랑스인 아주머니였다. 우리를 방으로 안내해주시고 집을 소개해주시며, 문은 어떻게 여는지, 아침으로는 무엇을 먹으면 되는지, 와이파이 등 정보를 알려주셨다. 그리곤 영어를 조금 할 줄 안다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왜 투르로 왔는지 질문하시기 시작하셨다. 이곳까지 찾아온 우리가 궁금하셨던 듯, 주로 영어로, 좀 전달이 어려우면 번역기를 사용하며 대화를 나눴다.
다사다난한 하루였다. 그래도 성공적으로 안전하게 숙소에 도착한 것, 마침내 런던의 호텔 신세와 물가에서 벗어나 직접 밥을 해 먹을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며 축배를 위한 장을 봤다. 프랑스는 프랑스인지, 미식의 나라는 황홀했다. 마트 빵 코너에서 구입한 레몬 머랭 타르트, 밀푀유를 접할 수 있음에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아주 저렴한 와인코너에서 환호를 지르며 목화언니와 조촐한 만찬을 끝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