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by 배돌쌤

다시 시작하는 것이 두려울 때가 많다. 그 이유는 계획을 세우고 지키지 못한 스스로가 부끄럽고 미워지기 때문이다. 여러번 쌓인 실패들이 내 어깨와 등허리에 돌무더기로 얹어져 있으니 한 발짝 떼는 것도 버거워진다. 그럼에도 기어이 걸음을 딛고자 노력하는 이유는 성장과 발전이 삶을 살아가는 이유라 생각하기 때문에. 국어 선생님이니까 학생들에게 부끄러울 정도로 부족한 글솜씨를 가지고 있어선 안 된다고 객관화에 들어가고 나선 꾸준히 수필을 써보겠다고 다짐했다. 계획형 인간이지만 게으른 성격 탓에 지킬 수 있는 계획만 세우고 구름처럼 두루뭉술한 삶을 살아왔는데 학생과 서로 민망한 얼굴로 교실에서 마주할 수는 없으니 머리에 힘을 주어 글을 짜내본다.


글을 쓸 때 항상 어려웠던 점은 주제를 고르는 일이었다. 소설을 집필할 수 있을 만큼 수려한 글솜씨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발표나 누군가와 대화할 때 문장을 적는 일이 재밌었고 또 칭찬을 안 들어왔던 것은 아니어서 언젠가 한 번은 나의 글을 써보자고 생각해왔다. 그렇지만 글을 쓰는 이유가 가벼워서인지 몇 자 적고 나면 어느새 주제는커녕 적을 의지조차 입바람에 훅 하고 날릴 수준이었으니 당연하게도 여러 번의 시도는 물에 떨어트린 소금처럼 투명하게 녹아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골랐던 갈래가 바로 수필이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수필에 대한 문학강론 교수님의 의견은 한 단어로 줄일 수 있었다. 신변잡기. 자신의 주변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가벼운 문체로 쓴 글이라는 뜻인데 단어 안에 잡(雜)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것만으로 갈래의 위치가 밑바닥에 있는 느낌이었고 그러기에 떨어트린 물건을 집을 때처럼 불쑥 손이 갔다.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글이지만 잘 쓰지 않는 글. 원대한 목표는 없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닌 나와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쓸 수 있는 갈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글을 써볼 마음이 생겼다.


주제에 대한 문제는 수필이라는 갈래를 선택한 것만으로 해결되었다. 내 삶 자체는 지루한 인간의 것이지만 태풍의 눈처럼 한 발짝 걸어 나간 바깥에선 재난과도 같은 난리가 펼쳐져 있기 때문에 문제없이 글을 써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재밌는 규칙도 하나 추가했는데 집에 있는 국어사전을 펼쳐서 나온 무작위 단어 중 하나를 골라 수필의 주제로 삼는 것이다. 다음에 학생들에게 이 글들을 공개하면 그들에게 단어를 하나 골라달라고도 해볼 생각이다.


넓은 공터에서, 메아리칠 산도 없는 들판에서 소리지르는 것처럼 편안하게 글을 써보리라 생각하니 손가락이 한결 가볍다. 혹시나 들을 리 없는 이소리를 만나게 된다면 애처로운 사람의 별 볼 일 없는 글을 조금이나마 응원해주신다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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