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새김질

: 한번 삼킨 먹이를 다시 게워 내어 씹는 짓.

by 배돌쌤

12마리의 동물 중 소띠를 갖게 된 건 우연이 아닌 듯하다. 98년(호랑이띠)생임에도 학교에 일찍 들어갔고 97년생과 친구가 되었다. 나도 친구들처럼 소띠겠거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문득, 년도 별로 갖게 되는 띠인데 왜 나는 소띠인가라는 의문을 자연스레 가지게 됐고, 어린 마음에 좀 더 멋있어 보이려고, 더 커서는 출생 연도에 맞게 나는 호랑이띠 아니냐고 부모님께 여러 번 우겨봤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상하리만치 확고하게도 소띠라 말씀하셨다. 음력 생일부터 시작해 친구로 지냈던 97년생까지 이야기하며 소를 도대체 얼마나 좋아하시길래 이렇게까지 강조하나 싶을 만큼 나를 세뇌했다. 나이 많은 사람을 존중하는 우리나라 사회에서 한 살 어린 만큼 손해볼까 걱정하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좀 더 나중의 사실이다.


우연이 아니라고 느꼈던 것은 나의 행동도 소와 많이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느릿한 행동과 걸음걸이, 다소 큰 덩치, 시키는 대로 일하는 것에 딱히 불만 없는 성격, 아는 듯 모르는 듯한 눈빛까지 심지어는 되새김질도 소처럼 미련스럽게 하고 있다. 입으로 먹은 음식들로 그러는 것은 아니고 이미 지나갔던 일들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위로 올려보내 다시 소화하려 든다. 이쯤 되면 소화되지 않았을까 했던 기억은 잊지도, 배출하지도 못해 위와 장 곳곳에 들러붙고 이 사이에 끼어 빠지지도 않는, 이 나쁜 습관은 조용하고 까만 밤에 더욱 심해진다.


소화해 낼 엄두도 내지 못하게 명치 언저리에서 체한 듯 막혀있는 기억들도 있다. 생각의 흐름을 꼼꼼히도 틀어막고 있는 이것들은 누군가에게 실수한 것들로 이뤄져 있다. 말로 친구에게 상처를 줬거나, 수업 시간에 말을 더듬어 발음을 이상하게 하거나, 일하다 실수한 것들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줬던 것들, 그리고 그 아이의 기억들.


얼떨결에 연락처를 줬다가 밤새도록 이어지는 연락 폭탄을 견디다 못해 다시 그 학교에 선생님으로 가지 않겠다는 예상과 합리화를 칼로 삼아 끊어냈던 그 아이.

1년 만에 똑같은 학교에 다시 갔을 때 저번보다 훨씬 야위어버린 모습을 알아보지 못해 더 나를 미워했던 그 아이.

공부도 못하고 성격도 모난 탓에 다른 아이들처럼 살갑게 대해주지 않았던 그 아이.

방학 직전에야 미안했다 사과하니 이미 늦었다며 홱 하고 돌아서 버렸던 그 아이.

그날 밤까지도 친구와 함께 웃으며 찍은 사진을 공유했었는데.

1월의 겨울에, 그 깊은 새벽에 만연하던 차가운 추위는 왜 그날 밤의 불길을 멈춰주지 못했을까.


온몸에 불이 붙은 채 발견돼 아직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안도했다가도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떠올리곤 포기해도 괜찮을 거란 잔인한 생각을 해버린 내가 너무 미웠다.

선생님도 수많은 학생도 다녀간 장례식장, 그 문 너머로 들리는 끔찍한 절규에 겁을 먹고 들어가지도, 마지막 인사를 하지도 못했던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뒤늦게 찾아간 너의 자그만 무덤 앞에서도 난 미안하다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는 내가. 나는. 너무. 정말.


생각을 다시 하고 기억을 되짚어가는 일은 전혀 나쁜 일도, 때로는 누군가에게 권장되는 일이기도 하건만, 이 습관이 끼워진 나의 삶은 잘못한 일을 잊을 수 없다는 조그만 장점을 제외하곤 끔찍하고 생생한 악몽을 계속해서 틀어주는 영사기와 함께 방에 갇힌 것 같았다. 갑자기 눈앞에서 떨어지는 먼지 한오라기에도 작동되는 이 미련한 되새김질은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수차례, 각각 다른 기억들이 역행하여 범람하게 만든다. 이런 소 같은 모습이 원망스럽고 내 친구들이 1년만 어렸다면 달라졌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거짓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아주 조금씩 쌓여간


학생들을 향한 속죄의 다정함과

친구에게 건네는 반성의 따뜻함과

수업할 때, 일할 때 발휘되는 창피의 꼼꼼함이 밉지 않으니까

어차피 버릴 수 없는, 떼어내 보려 괜한 힘을 뺄 수 있을 만큼 활력이 넘치는 사람도 아니니까 그저 살아가고 또 되새긴다.


그 아이가 공유했던 많은 노래 중에 가수는 모르지만, 제목만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날 잊지 말아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

내가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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