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비목의 곤충 가운데 낮에 활동하는 무리를 통틀어 이르는 말.
기억이 가물할 만큼 어린 시절, 네모나고 똑똑한 기계는 어른들의 전유물이었던 때가 있었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어떻게 하루를 보낼지 모르는 지금의 생각이 무색하게 그때의 나는 친구들과 온 동네를 쏘다니며 즐겁게 놀았던 추억이 있다. 그런 흐린 기억 속에 어느 날, 유치원에서 색종이로 나비를 접는 법을 배웠는데 짝퉁은 화가 나고 진품을 좋아하는 사람의 본성인지, 종이가 아닌 진짜 나비를 잡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어느새 사냥꾼처럼 비장하게 잠자리채, 채집통을 챙겨든 한 무리의 아이들은 가장 똑똑한 아이의 주장대로 아파트 단지 내 꽃밭으로 갔다. 노랗고 빨간 꽃들 사이로 희고 검고 샛노란 나비들이 아까 만든 나비보다 더 얇은 날개를 팔랑거리고 있었다. 손이 닿으면 바스러질 것들이 빳빳한 고급 색종이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고 지나가는 어른들의 웃음 어린 시선을 뒤로한 채 열심히 잠자리채를 휘둘러댔다.
가장 그림자가 짧을 때부터 시작한 사냥은 거의 내 키와 비슷해 보일 때쯤 성공할 수 있었다. 초록색 그물망 속 펄럭이는 노란 날개가 손 모아 기도하듯 하나로 합쳐져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있었고 손으로 날개를 조심스레 집어 관찰했다.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도화지에 나비를 그릴 때 날개는 커다랗고 예쁘게, 몸과 더듬이는 선으로 죽 긋고 말았던 나는, 빽빽한 겹눈이 달린 머리, 지렁이를 말아놓은 듯한 입, 기분 나쁜 털이 숭숭 달린 가슴, 딱딱한 여러 개의 껍질이 꿈틀거리는 배를 보고 서늘한 한기와 어쩐지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발끝부터 머리카락 끝까지 모든 털이 곤두서는 느낌도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는지 몇몇의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거칠게 손을 휘저었다. 날개를 집었던 아이의 손이 탁 하고 부딪혔고 그 충격에 날개는 메마른 낙엽처럼 부서지고 말았다. 힘없이 툭 떨어져 파르르 떨던 나비는 금세 움직임을 멈췄고 길어진 그림자보다 더 멀리서 지켜보던 우리는 미안함, 섬뜩함, 호기심에 뒤섞여있다가, 한 친구의 부모님이 부르는 소리에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나비의 눈과 입과 가슴과 배는 꽤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트라우마처럼 인생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비를 바라보던 나의 시선이 화려한 날개가 아닌, 그 사이로 고정됐고, 예쁜 곤충의 대명사인 나비가 좀 큰 날개가 붙은 파리가 돼 버렸다. 시, 소설, 영화에서 아름다운 결말을 날아가는 나비로 표현할 때마다 머릿속에 떠오른 나비의 사실적인 몸은 더 이상 그 작품의 결말이 해피엔딩으로 끝맺을 수 없게 만들었다. 단어에게서 느껴지는 의미가 대다수의 사람들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생각보다 불편한 일이었다.
절대 바뀔 리 없다고 생각했던 색안경이 깨진 것은 2 ~ 3년 전이었다. 6월 이맘때쯤엔 할아버지 제사가 있어서 시골에 있는 산소에 간다. 할아버지가 좋아하셨던 음식과 술, 과자를 챙겨 부모님과 함께 뵈러 가는데 꽃 한 송이 없는 묘지에, 그것도 특별히 꽃이 필 달도 아닌 6월에 항상 흰나비가 팔랑거리며 날아다닌다. 군대에서 벌레는 지겹도록 봤고 먹은 나이만큼 모든 것에 무뎌져서인지 거부감은 없었지만 죽지도 않고 항상 묘지 곁을 맴돌고 있는지 궁금해질 만큼 매번 있었다. 살짝 스쳐간 바람처럼 든 의문이어서 금세 사라졌다가 어느 날, 인터넷에서 다른 사람이 남긴 질문에 나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 딸이 묻혀있는 곳에 가면 나비가 여러 마리 날아다니더라고요. 어쩔 땐 어깨에 앉았다가 음식에 앉았다가 해서 손으로 쫓아 보냈는데 이상하게 다른 벌레처럼 밉지는 않았어요. 몇 년간 날아다니다가 요즘엔 안 나타나는데 혹시 무슨 이유인지 아시는 분 있나요?
옛날부터 나비는 영적인 존재를 상징합니다. 특히 흰나비는 영혼을 인도한다고도 알려져 있어요. 미신처럼 들리겠지만 49재 이전에 나타나는 흰나비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나비의 몸을 빌려 가족을 만나러 온 거라고 해요. 사실 그 이후에 나타나는 흰나비들은 그저 떠돌아다니는 애들이겠지만 어쩌면 어머님을 만나러 계속 오는 게 아닐까 하네요.
과거에 만났던, 아니 우리가 해쳤던 그 나비에게 새삼 미안해졌다. 겨우 몸을 빌려 날아가던 중이었을지도 모를, 유난히 느리게 날던 나비가 웬 아이들의 허술한 잠자리채에 걸려 자신의 가족을 보러 가지 못한 일이 그리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소중한 사람이 어떤 의미로 나에게 다가오는지 이젠 알 나이니까. 노란 나비였으니 영혼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합리화도 그랬을까 걱정되는 찝찝함이 없었다면 하지도 않았을 텐데. 징그러운 것에서 미안함과 뭉클함이 느껴지는 것이 된 나비였다.
누군가 사랑, 꿈, 행복, 희망과 같은 추상적인 단어의 의미를 물었을 때 국어사전에 담긴 의미로 이야기를 하다 문득, 진짜 그 의미가 맞는지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다. 가끔 원래부터 쓰던 평범한 단어들이 낯설게 느껴져 입안에서 몇 번이나 되뇌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그 단어의 의미와 나의 거리가 무한대로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생각할 시간이 주어질 때면 대개 엉뚱하다고 하는 상상을 하며 나의 생각을 완성해 가곤 하는데 앞서 말한 내용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려 끝내 결론 내릴 수 있었다. 단어의 의미는 나의 경험으로 빚어내는 것.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 있는 것부터 다소 거리가 먼 것까지,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인류인 이상 우린 모든 것에 이름 붙이고 그것의 본질이 그 이름에 담겨있는 것이라 착각하며 살아간다. 사실 그 본질의 일부분이 이름일 뿐이고 이름에 담긴 건 글자와 음성 이외에는 없다. 누군가에게 묻고, 공부해서 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우리의 경험을 덧붙여가며 의미를 완성해 간다. 사랑, 꿈, 행복, 희망과 같은 추상적인 단어부터 명확한 사물을 지칭하는 단어까지, 다른 사람들과 다가오는 의미가 달랐던 나의 '나비'처럼 말이다. 이젠 나에게 나비는 아름답고, 징그럽고, 미안하고, 뭉클했던, '의미'의 의미를 알게 해 준 한 사람의 영혼이다. 소제목의 정의와는 다르게.
올해 6월에 할아버지 산소에 찾아갈 때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나비와 영혼 이야기를 해드렸다.
" 엄마, 저기 날아가는 흰나비 보여? "
" 응, 보이네. "
" 내가 어디서 봤는데 무덤에 나타나는 흰나비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래. "
" 그래? 맞을 수도 있겠다. "
" 왜?"
" 항상 할아버지는 우리 00이 보고 싶다고 얘기하셨거든. 돌아가시고도 계속 보고 싶으신가 보다. 이렇게 찾아오시는 걸 보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