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 펴고 접을 수 있어 비가 올 때에 펴서 손에 들고 가는 물건.

by 배돌쌤

약속이 생길 때마다 비가 온다던 친구의 한탄 섞인 말이 떠오른다. 미리 잡든, 즉흥적으로 잡든 밖에 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기가 막히게 비가 내렸단다. 자랑처럼 들릴 진 모르겠지만 난 정확히 반대의 징크스가 있다.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세차게 내리던 비도 살짝 수그러들거나,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날씨에 밖을 돌아다니다가 실내 안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비가 오는, 어감은 이상할지라도 난 날씨의 요정이었다.


그러다 인생에 딱 두 번 정도 기억에 남는, 날씨가 내 편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다. 중학교 2학년쯤 집에 가려고 하니 비가 억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금방 그치리라 생각했던 비는 30분 넘게 계속됐고 사정이 있어 부모님은 올 수가 없었다. 심지어 우산을 빌려 쓸 친구도 없었다. 몸이 아파 치르지 못했던 수행평가를 남아서 풀다가 같이 쓰고 갈 친구들도 모두 집으로 가버렸다. 혹시 퇴근하는 선생님이 없을까 하고 계단에 앉아서 떨어지는 비를 보며 얕은 생각에 잠겼다. 보도블록을 뚫을 듯 바닥을 때리는 비는 휑한 소리가 들릴 만큼 강한 바람에 날리지도 않고 일직선으로 바르게 떨어졌다. 비가 하늘이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라기엔 오열의 수준을 넘어섰다고 느끼는 찰나, 앳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혹시 우산 없으면 같이 쓰고 갈까?"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명찰 색이 초록색인 걸 봐서 나보다 한 살 많은 선배였다. 낯선 사람과 함께, 더군다나 우산을 같이 쓰고 가는 것은 내향인에게 너무 버거운 일이었기 때문에 거절하려는데


"지금 학교에 너랑 나밖에 없어. 정류장까지만이라도 바래다줄게. "


선택권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하고 꾸벅 인사를 하곤 분홍색 접이식 우산을 같이 쓰고 걸어갔다. 정류장까지는 꽤 멀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선배는 나와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대화는 마치 탁구처럼 이어졌다. 대신 서브는 무조건 선배가 먼저였다. 서툰 솜씨로 주제를 간신히 받아치며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이젠 처음 보는 사람이 아닌 누군지 조금은 알 것 같은 사람이 되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는 나와 다르게 649번 버스였고 오늘은 내일 있을 과학고 면접을 준비하다가 늦게 집에 간다고 했다. 그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윤곽이 잡혀갈수록 어색함은 풀려갔고 좁혀진 마음처럼 옅었던 샴푸향이 점차 가까워졌다. 선배였지만 나보다 키가 10cm 정도 작아서 우산을 잡은 손을 내려다보다 문득, 그 선배의 얼굴을 바라봤다.


새하얀 피부, 작지만 오뚝한 코에 짙은 쌍꺼풀이 진 눈, 해맑은 웃음을 다 담을 만큼 적당히 큰 입, 오른쪽 눈 밑에는 시선을 고정할 닻처럼 작은 점이 있었다. 누군가의 첫사랑일 것이 틀림없는 예쁜 얼굴이었고 이런 친절한 성격마저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좋은 사람을 만날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작년부터 이미 다른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있던 나마저도 얼굴이 붉어졌다. 낯가림 때문에 얼굴을 보지 못한 짧은 시간이 아깝다고 느껴질 때, 누나의 투명하고 새까만 눈동자에서 나온 시선이 나의 텅 빈 동공 속을 들여다보았다. 저항도 못 한 채 내 속을 다 들여다보여 주다 우산을 때리는 처마에서 흘러내린 빗물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예쁜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는 이번엔 내가 주제를 꺼냈다.


"사람은 어떤 사람을 좋아할까요?"

"글쎄.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봐?"

"....네. "

"음. 딱 정의하기엔 힘든데, 이렇게 비가 올 때, 날이 추울 때, 뭐 심심할 때도 내가 다른 물건이 필요한 게 아니라 사람이 필요한 순간, 어떤 사람이 내 생각을 하고 있어서 타이밍 좋게 나타나면 그 사람을 가장 좋아하게 되는 것 같아. "

"결국 타이밍이라는 거네요? "

"아니지. 여기서 타이밍보다 중요한 게 있지. 항상 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 근데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마음을 생각해 주는 거야. 그냥 외롭고 사귀고 싶은 자기 욕심이랑은 다르게 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내 마음까지도 헤아려주는 사람을 얘기하는 거지. '나의 어떤 행동에서 호감을 느낄까?',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싫어하지 않을까?', 상대의 마음에서 생각할 수 있고, 평범한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결국엔 호감을 느끼지 않을까? "

"그렇구나. 어렵네요. "


말이 미처 끝나기 전, 저 앞에서 우산 두 개를 들고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큰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 다소 말랐지만 다부진 몸, 짧게 쳤지만 촌스럽지 않은 머리, 선명한 이목구비에 담겨져 있는 시원한 미소. 여러 이야기 속에서 남자 주인공으로 나올법한 선배였다. 그러자 누나는 그보다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짧은 우산을 내 손에 쥐여준 뒤 그 선배에게 뛰어갔다.


"난 얘랑 같이 쓰고 갈게. 나중에 학교에서 우산 돌려줘. "


분명 우산은 3개, 사람도 세 명이었지만, 펴져 있는 것은 2개뿐이었다. 두 사람을 방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그 자리에 서 있었고 하늘에서 본 두 개의 원은 점차 멀어졌을 것이다. 어쩐지 허전한 마음과 부러운 마음으로 지켜본,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은 생각보다 더 행복해 보였다. 도대체 몰입할 수 없었던 잘생기고 예쁜 배우가 나와 연기하는 드라마를 보는 기분을, 그리고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대로 한참을 더 서 있다 내리는 비가 무대의 커튼처럼 두 사람을 가려줄 때 천천히 조용한 찰박임을 들으며 걸어갔다.


그 뒤로 난 그 두 사람을 볼 일은 없었다. 항상 있던 대로 교실에 있었고 우산은 3학년 교무실에 맡겨두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사랑이란 것에 대해 한 사람이 말로도, 직접 행동으로도 보여준 날이었고 그때는 15살의 어린 나이에 그 말을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실패한 첫번째 연애를 하고 나선 이해할 수 있었다. 기껏해야 16살이었던 그 소녀는 어떻게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까. 누군가에게 많이 받아서인지, 누군가에게 많이 줘봤기 때문인지, 성인이 된 후 지금껏 사랑에 대해 생각할 때도 슬그머니 떠오르는 말이다. 세찬 비가 내리는 날, 우산을 함께 쓰고 걸으며 나눴던 가벼운 대화이기에 살대 끝에 맺혀 떨어질 법도 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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