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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Mar 28. 2023

연고 없는 타지에서 하루 만에 집 구하기(5)-무지함

무지함은 죄였다.


09.
"그 가격으론 안 되겠다고요?"
하루 만에 바뀌는 집주인의 마음


들뜬 마음으로 소파에 앉아 계약서 작성을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리길 몇 분, 분위기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실장님과 소장님은 집주인과 통화를 하는 듯했고, 작게나마 통화 내용을 엿들으며 마음이 점점 불안해졌다. 그것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집주인은 그 층수로 계약하려면 월세를 5만 원 더 올려야 한다고 했다. 안내받았던 금액이 이제 와서 안 된다는 거다. 내용상 우리가 방문하기 전이었던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그 가격에 OK를 했다더니, 오늘, 하필, 지금 와서 안 된다니. 황당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없는 상황에 맥이 쭉 빠졌다. 박봉에 월세 5만 원 추가는 내게 맥시멈 그 이상이었다. 여기서 더 올릴 수는 없었다.


오피스텔은 회사 소유의 건물이었고, 그 회사 직원은 선심 쓰듯 낮은 층수 2곳은 그 가격에 줄 수 있다고 했다. 아까는 8층 밖에 집이 없다고 했는데 이제 와 다른 층수도 있다니. 짜증도 나고 화도 났지만 화를 낼 수 없었다. 어떻게든 적게 내고 싶은 임차인과 어떻게든 많이 받으려는 임대인의 입장을 피부로 체감했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우리도, 부동산 실장님도 한 번 더 고생해야 했다. 돈이란 이런 것이구나 느꼈다. 부족한 사람만 아쉬운 것. 화가 나도 그 화를 낼 수 없게 만드는 것.


집을 다시 보러 갔다. 둘러봤던 집마다 해의 방향을 체크한 것이 무색하게도 둘 다 북향이었다. 마찬가지로 첫 입주였지만 깔끔해 보였던 겉모습과는 달리 자세히 들여다보니 군데군데 하자들이 보였다. 실리콘 처리라던지 문짝을 열면 천장에 쓸려서 향후 손을 봐야 한다던지, 가구의 틈새가 벌어져있다던지. 모든 것이 처음 봤던 8층보다 못했다. 하지만 별 수 없었다. (자취 2달 차가 된 지금에 와서야 다른 집으로 갔더라면 더 나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동일한 건물에 달라진 것은 층수와 호수뿐이었지만 처음 봤던 곳과는 다른 것을 체감했다. 이 호수와 처음 봤던 호수는 같은 금액일 수 없었다. 그럼 진작 알려줬으면 좀 덧나냐고. 집주인이 야속해진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내겐 역시 투머치였다. 집이 아니라, 부모님이 지원해 준다는 사실이 투머치였다.


두 호수 중 조금 더 낫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결정을 내렸다. 사무실로 돌아와 보증금의 10%를 계약금으로 지불했다. 내일 짐을 싸고, 모레 이사를 오기로 했다. 입주 청소도 추천을 받아 예약했다. 10만 원 초반대의 값이었는데 선금 1/2를 입금하고, 청소가 끝난 뒤 잔금을 입금하는 방식이었다. 원래는 주말이라 오전까지만 근무하는데, 부동산에서 연결해 줬으니 특별히 해준다는 느낌이었다. 여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하나씩 진행이 되고 있었다.




10.
돈의 맛과 무지함

집을 둘러보며 가장 크게 체감했던 건 무지함이었다. 부동산, 집값, 경제 등 뉴스를 볼 때면 수없이 등장하는 소식을 보며 생각했었다. '언젠가 빠삭하게 공부해야지.'


유식한 나는 상상 속 존재였고 현실은 철저한 무지였다. 그리고 그건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껏 부동산을 관심 있게 지켜보거나 공부해 본 적이 없었다. 책에서 얼핏 얼핏 본 것이 전부였다. 적어도 언젠가 내가 살 집을 계획한다거나, 부를 누릴 생각이 있다면 이런 공부들이 삶에서 수반되어왔어야 함을 깨달았다. 그동안 바람과는 반대로 현실을 외면한 채로 살아왔단 것을 알았다. 집 하나 둘러보는 것도, 그 과정에서 생기는 수많은 궁금증들도, 부동산 측에서는 어이없다 싶을 정도의 질문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분야엔 너무나도 청순한 뇌였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렇다고 모른다면 좋은 조건을 여유 있게 볼 자금을 가진 것도 아닌 내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공부. 해야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한 세월이었고, 문을 연 식당이 없어 이번에도 패스트푸드점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 어느새 밤 1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재활 중이라 다리가 좋지 않았음에도 하루 종일 함께해 준 오빠에게 고마웠다. 오빠, 언제 복직하냐고 속으로 욕해서 미안. 맨날 싸가지없이 대답해서 미안. 가끔은 못 들은 척 무시해서 미안. 욕실 청소 안 해서 미안.


엄마는 내가 챙겨야 할 것들 리스트를 작성해 두었다. 그리고 주방용품을 담은 짐을 몇 박스 챙겨두었다. '성림이가 챙겨야 할 것들'이라고 적힌 A4용지를 보자 울컥해서 눈물을 참느라고 혼났다.



(다음 편)

본격 이사 준비 / 평안하지만은 않은 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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