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를 독재자라 불렀다
총칼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권이라 치부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내가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어 역사와 현실을 마주하며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그는 단순히 권력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아니었다. 무너진 나라의 기둥을 다시 세우고 절망 위에 희망의 돌을 얹은, 대한민국의 반석을 다진 사람이었다.
그를 비난하던 나의 생각은 부분만을 본 눈이었다. 부끄러웠다
이제 나는 깨달았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나이를 먹어가며 현실의 삶 속에 대한민국이 어떻게 살아왔나를..
그 이름이 시간 속에서 더욱 크고 깊어지는 졌다는 것을.
그는 고통과 고뇌의 순간이 없었을까. 누구보다 더 무겁고 외로운 결정 앞에 가슴으로 울었을 것이다.
비난도, 외침도, 침묵도 모두 짊어진 채 그는 묵묵히 걸었을 것이다. 자신보다 나라를 먼저 두고.
또한 민주화 운동에 대해 말하고 싶다. 물론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운 열망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국민 중에 민주화의 뜻을 품지 않은 이가 있었던가? 앞장서 주도한 인물들은 있었지만,
그것은 그들만의 자격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화운동을 정치적 자산으로 포장해 결국 권력을 차지한 뒤, 오히려 국정의 실패와 내로남불의 행태로 국가의 발전을 후퇴시킨 사람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똑똑히 보아왔다.
일부 좌파 정치인들은 권위주의 타도를 외치면서 또 다른 권위로 국민을 억누르지 않았는가?
군사정권 시절, 인권 탄압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분명한 과오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의도한 일어 었는가? 국가의 급격한 근대화 속에서 발생한 불가피한 충돌과 오류는 있었지만, 그가 대한민국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력마저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철저한 산업화, 수출 주도경제성장, 새마을운동, 교육확대 등 박정희 대통령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가장 결정적인 인물 중 하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통치 중에 있었던 '한일국교 정상화' 일명 6.3 사태가 있었다.
한일국교 정상화의 방침에 제2의 경술국치다, 을사조약이다라고 나라가 뒤집어졌다.
정치인을 비롯한 학생들 종교단체 등 거의 모든 집단들이 한일국교 정상화 반대와
철회 투쟁에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당시는 우리나라는 북괴의 남침으로 인한 한국전쟁이 끝나고 정치고 경제고
나라 전체는 혼란 속에 있었으며
세계 최빈국의 입장이었고 국토에 자원과 재원은 텅 빈 곡간이었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은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한다.
과거 일제의 만행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고, 국민의 정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과거의 상처를 딛고, 미래를 선택했다.
당시 국교 정상화를 통해 얻은 5억 달러는 단순한 돈이 아니었다.
그 자금으로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산업기반이 세워졌다.
1960년대 한국은 최빈국 수준의 경제 상황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금과 기술이 절실히 필요했고, 미국도 한국이 일본과 수교하길 강하게 권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과의 수교를 통해 3억 달러의 무상 원조, 2억 달러의 차관을 받아
경제개발의 마중물로 삼은 것이다.
누군가는 굴욕이라 말했지만, 그 선택이 있었기에 지금의 ‘세계 10위권 경제국가’가 가능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점령했던 수많은 국가들도 보상을 받아냈던 것이었지만
그 국가들의 지도자들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돈을 사용하기보다 착복을 하였지만 박대통령을 달랐다.
개인적으로 사용한 돈은 한 푼도 없는 청렴결백한 사람이었다.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받지도 못했고 얻은 것이라고는 구걸한 돈이었다고 지금까지도
친일 논쟁이 끊이지 않지만,
그럼 좌파가 정권을 잡았을 오랜 시간 동안 과연 일본의 사과를 받아냈나?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전 대통령들이 집권했던 시절에 무엇을 했나?
친일파라는 사람을 억지로 찾아내 망신주기 조리돌림 정도로 자기들의 정권유지를 위한 정치적 이용만 하였다.
오부치 일본 총리와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통해 "통절한 반성과 사죄"라는 표현을 이끌어냈다고 자찬했지만,
그 선언은 법적 책임이 없는 '표현상의 유감 표명'이었다.
또 하나의 진보정권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은 모두 소멸됐다”는 입장을 공식화했다.
즉, 박정희 정부의 입장을 다시 확인해 준 것이다.
또 다른, 스스로 진보정권을 자처하는 정권은 또 어떠했던가, 박근혜 정부 시절 일본과 체결한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파기했지만,
새로운 대안을 내놓지 못한 채 국제적 신뢰만 손상시켰다.
피해자들을 위하는 척하면서도 결국 감정만 자극하고 해결책은 내지 못한 정치적 쇼에 그쳤다.
박정희 정부는 최소한 국민의 생존을 위해 실질적 이익을 얻어냈다.
반면 좌파 정권은 ‘진정한 사과’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계속되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시대가 지속되었고
그 와중에 당시 월남에서 공산세력과 정부군 간의 내전 사태로 미국이 개입을 하며 더욱 혼란스러운 세계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1950년 북괴의 남침으로부터 세계최초이자 마지막이었던 유엔에서의 국제적 전쟁개입으로 16개국이 한국전쟁에 지원을 해준 결과 전쟁을 끝낼 수 있는 혜택을 받은 세계 유일의 나라가 되었다.
물론 한반도가 공산화가 되는 것을 막으려는 미국의 국익으로 개입이 되었다고는 하나 대한민국이 현재 굳건히 나라를 지키고 있는 것은 미국과 세계 우방국들의 지원이 없었으면 현재의 북한처럼 일인 독재의 공산정권 아래에 있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았으나 대한민국은 가난했다. 자원도 없었다.
월남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미국이 주한미군을 빼내어 월남전에 투입하려 했었다.
주한 미군의 전투병력을 빼내 간다는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원조를 줄인다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이른 간파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미국 측에 우리의 병력을 보내 준다고 설득을 한다.
설득이라는 차원은 그냥 병력만 파병한다는 차원이 아니다.
국가 안보상 엄청난 위험한 상황을 주한미군을 유지하고 파병에 대한 모든 전쟁물자와 파병에 대한 대가로 대한민국은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보게 된 것이다.
해병대 등은 자신해서 파병을 요청했고 국가 지도자의 힘든 결정에 발맞추었다.
수많은 청년들이 목숨을 걸고 참전했고, 그로 인한 희생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결정의 이면에는 국가의 생존이 있었다.
미국과의 관계 강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쟁 특수로 벌어들인 외화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또 하나의 동력이 되었다.
당시 병사들은 고통 속에서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싸웠고,
그들의 땀과 눈물은 결국 우리 모두의 더 나은 내일을 위한 희생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가 재건과 경제발전을 위해 또 한 번의 결단을 내린다.
1960~70년대, 한국은 너무 가난했다.
국가는 젊은이들을 독일의 탄광과 병원으로 보냈다.
광부들은 지하 수백 미터 땅속에서, 간호사들은 낯선 땅에서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그들의 송금이 국가 외환 보유고의 절반을 차지했고,
그 돈은 결국 국가 재건과 산업화에 직접 연결되었다.
박 대통령은 그들을 '국민 영웅'이라 불렀고,
정권이 아닌 국민을 중심에 둔 국가 정책의 상징이었다.
아직도 당시의 파견된 광부나 간호사들이 현지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
과연 그들은 박대통령에 속아서 파견되어 생고생을 했다고 생각하고 원망할까?
당시 파독 광부·간호사들은 어려운 한국의 현실 속에서 ‘기회’를 찾아 자발적 독일행을 선택한 경우가 많았다. 물론 당시 정부는 현실보다 낙관적인 정보로 모집을 유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속아서 왔다”는 것보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가족을 부양하고자 했던 절박함이 더 컸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파견 정책 덕분에 생계를 유지하고 자녀 교육과 가족의 미래를 바꿀 수 있었다고 말하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파독 간호사·광부 출신 중에는 지금도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을 집에 걸어놓고, 그의 결단에 감사한 마음을 가진 분들도 계시다고 한다.
물론 박정희 시대에 인권 탄압도 있었고, 정치적 자유는 제한되었다.
그 또한 지도자의 무거운 책임 아래 포함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모든 지도자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빛과 그림자를 함께 안고 간다.
중요한 것은 그 그림자가 전체를 덮지 않도록,
공과를 구분하고 공은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점이다.
오늘날도 세계 곳곳에는 힘없는 국가들이 주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고통받고 있다.
그들은 침묵해야 할까, 아니면 고통을 감내하며 일어 서야 할까?
우리는 이미 한 번 그런 길을 걸었다. 그리고 굳건하게 일어섰다.
바른 깃발을 든 지도자, 국민의 희생, 그리고 후세를 위한 결단.
누가 그 길을 다시 걷겠다고 한다면,
그 고통을 되풀이하겠다고 한다면
많은 이들이 주저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바로 그 선택의 결과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많은 국가의 흥망성쇠가 단순히 다른 나라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지도자란 미래를 준비하고 현실을 직시하며
고뇌와 결단 속에서 국가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많은 나라들이 한 지도자에 의해 잘되고 못 되는 것을 봐왔고 배웠다.
대통령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엄청난 고통을 감수함이 단순한 결정일까?
그는 수 없이 고뇌하고 고뇌하는 깊은 고심을 했을 것이고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분명히 국가와 국민을 위한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그의 선택은 모든 국민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아픔을 동반한 현실적 선택이었을 수 있겠지만,
그 결과는 압축 성장의 기반이 되었지만,
역사적 정의라는 측면에서는 분명 미완의 과제를 남긴 최선의 선택이기도 하다.
극단적으로 좌우 성향이 대립되는 작금의 대한민국에선 더욱 그렇다
미래에 어떤 진정한 평가를 받을지는 끝없는 논쟁이 있겠지만,
현재의 국내 상황을 보면 그 답은 뻔히 보인다.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그를 다시 본다.
완벽하지도, 모든 면에서 옳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그는 나라를 살리기 위한 결단을 내렸고
그 결과로 지금의 우리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 이름은, 내 기억 속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더 크게 남는다.
그는 ‘독재자’였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건설자’였다.
나는 그를, 그렇게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