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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레드포드를 기리며

by 대전은하수 고승민

로버트 레드포드, 품격 있는 반항아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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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로버트 레드포드를 만난 건 스크린 속이었다.
어린 시절 TV에서 우연히 본 영화 <스팅> 속의 그는, 양복을 빼입은 젊은 사기꾼이었다.
더 나쁜 놈의 돈을 속여 빼앗는 ‘가벼운 범죄’였지만, 그의 미소와 눈빛은 그 어떤 도덕적 무게도 지워버리고 경쾌한 즐거움으로 바꿔 놓았다.


톡톡 튀는 피아노 선율의 OST가 손과 발을 저절로 움직이게 하듯, 그는 그 자체로 스크린 위의 음악이었다.

얼마 전, 1936년생인 그가 2024년 9월 16일,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접했다.
기사 속 그의 사진을 보며 ‘잘생김’ 이상의 무언가가 가슴에 남았다.


그는 헐리우드의 스타였지만, 단순히 외모 좋은 배우가 아니라 한 시대를 상징하는 얼굴이었다.

<내일을 향해 쏴라>(1969)에서 그는 친구이자 동료인 폴 뉴먼과 함께 시들어 가던 서부극에 낭만을 되살려 놓았다.
OST “Raindrops Keep Fallin’ On My Head”는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한 번쯤 들어봤을 선율이다.
이 영화에서도 그는 사랑스러운 악당이었고, 폴 뉴먼과의 브로맨스는 사나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궜다.
그의 반항은 파괴가 아니라, 품격과 낭만을 품은 자유의 선언이었다.


<은밀한 유혹>

억만장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중년의 멋진 모습.

돈으로 가정있는 아름다운 여인(데비 무어)을 유혹하는 통속적 이야기지만

품위있는 분위기로 바람둥이 같은 역을 멋지게 소화하는 로버트 레드포드는 저속한 이야기를

격조 높은 감동의 이야기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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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 오브 아프리카>(1986)에서의 레드포드는 또 달랐다.
광활한 아프리카 대자연 속에서 메릴 스트립과 함께 펼쳐낸 로맨스는 중후한 중년의 품격을 보여줬다.

내가 사랑하는 모짜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이 배경에 흐를 때 서정적 낭만이 극에 달한다.


이후 그가 감독으로 선보인 <흐르는 강물처럼>은 한층 더 내성적이었다.
잔잔히 흐르는 강물에 인간과 가족의 사랑, 자연의 의미를 담아내며 그는 우리에게 조용한 위로를 건넸다.

사실 로버트 레드포드는 헐리우드의 가장 세련된 얼굴이면서도, 누구보다 자연과 독립영화를 사랑한 인물이었다.


유타에 ‘선댄스 영화제’를 열어 수많은 젊은 감독과 배우들에게 길을 열어주었고, 환경운동에도 힘썼다.
그가 스크린 속에서 보여준 자유와 낭만, 그리고 카메라 뒤에서 보여준 섬세한 내면은 모두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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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그가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단순히 한 배우를 잃었다는 생각보다, 한 시대의 정신이 막을 내린 듯한 허전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의 영화들은 여전히 내 머릿속과 가슴속에서 살아 있다.
젊은 날의 ‘품격 있는 반항아’와, 중년의 ‘자연과 사람을 품은 감독’의 모습은 내 삶의 어떤 장면과도 닮아 있다.

스크린 속 레드포드는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자유롭되, 품위를 잃지 말라.”
그의 삶과 영화가 남긴 메시지는, 경쾌한 피아노 선율처럼 오래오래 귓가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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