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

첫 번째 단편소설 습작.

by 대전은하수 고승민

한 겨울 냉기가 도는 밤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귀가 길에 오른 상준은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한적한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길을 건너기 전 친구와 헤어졌다. 친구는 귀갓길에는 무조건 택시를 탄다. 흔들어 주는 상준의 손길이 부끄럽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건널목 앞에 아직 문이 열려있는 복권방이 눈에 띄었다. 택시는 못 타지만 복권은 산다. 상준은 당첨의 꿈을 꾸며 복권을 사는 게 아니라 이젠 일주일에 한 번 습관처럼 복권 사는 게 일상처럼 되어 버렸다. 맞춰보고 힘없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복권에 "에이 그럼 그렇지 뭐"하며 체념한다.

그의 핸드폰에는 그 흔한 주식 관련 앱이 하나도 깔려있지 않다. 그는 당근이라는 중고물품을 팔고 사는 앱이 있어 무료 나눔에 아까운 물건이 나올까 기대하며 가끔 들여다보며 시간을 죽이기도 한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한 잔 걸치고 여름 같으면 아직 빛이 있을 7시 반쯤 되었다. 그다지 바쁜 일도 없어 일찍부터 만나 한 잔 걸친다. 상준과 친구는 자주 만나는 친구이지만 만날 때마다 했던 얘기 또 하고 뻔한 화재거리로 대화하지만 지칠 줄 모르고 술이 넘어가면 바로 입으로 이야기를 엮어낸다.

원래 세 사람의 친구가 만나지만 오늘은 친구 한 사람이 사정이 있어 못 나와 둘이 술잔을 기울였다.

60세 중반이 된 두 사람은 예전처럼 많이 마시지도 못하고 2차 3차 새벽까지 술을 찾아 헤매는 짓도 이제 힘이 부쳐 못하고 세월의 아쉬움만 들먹거리며 후회의 지난 시절을 토로하지만,

"아 그래도 우리 예전에 참 좋았잖아" 뒤돌아 보면 화려했고 꿈에 부풀었던 직장인으로의 시간도 참 많았다고 서로 웃음으로 한 마디씩 한다.

인생은 운이 70이라 농담처럼 회자되는 이야기지만 상준도 그 범주에 들어간다고 스스로를 위안함의 기준으로 삼는다.

정류장 나무벤치의 차가운 기운이 엉덩이를 파고든다. 일어서서 전광판에 상준이 기다리는 버스가 몇 분이나 남았나 보고 또 보며 추위를 넘긴다.

도착한 버스를 타려고 버스입구로 가는데 젊은 친구가 서둘다가 상준의 발을 밟았다. "아 어르신 죄송합니다"

상준은 괜찮다는 듯 손을 저었지만 충격파를 맞은 듯 술이 확 깨버린다.

"어르신? 아니 나보고 어르신?" 기가 막히다는 듯 차창에 얼굴을 비춰본다.

"어르신 죄송합니다." 그 말은 사과라기보다 선고에 가까웠다. 발등의 통증보다 '어르신'이라는 세 글자가 상준의 가슴에 먼저 박혔다.

평생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대리인, 누군가의 아버지로 불려 왔지만 '어르신'이라는 이름표는 아직 상준에게 낯설고 서먹한 옷이었다. 버스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다. 가로등 불빛이 번질 때마다 희끗한 머리카락이 파도처럼 일렁였고 겨울밤 풍경을 바라보며 안경을 쓸어 올렸다.


상준의 집 앞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도 마다하고 지하철도 마다한다. 이제는 지하철도 더욱더 거부감이 있어 "지하철 공짜 좋아하지 마라, 아직 문제없잖아" 중얼거리며 발길을 옮겼다.

젊은이 때문에 술이 깨어 오늘은 환승역을 지나치지 않고 제대로 환승역에 내렸다.

버스에 내리면 바로 옆은 공원이었다. 상준은 공원의 나무들을 올려다보며 겨울 밤하늘에 간간이 보이는 별을 찾아본다. 바짝 마른 나뭇잎을 발로 밟으며 아삭거리며 부스러지는 소리에도 귀 기울인다.

환승버스에 내려 집까지 200여 미터를 가는데도 8차로의 넓은 한적한 도로를 보며 바람에 뒹구는 낙엽을 바라본다. 터덜터덜 계단을 오르는 발 길엔 취기가 오른다.

상준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말했다."여보, 나 염색해 줘. 흰머리가 많이 올라왔어"


6년 전쯤인가, 아내와 딸 둘, 네 식구가 모처럼 저녁을 같이 먹던 날, "아빠, 이게 뭐야?" 작은딸이 상준의 얼굴에 손을 갖다 대며 말했다. "얼굴에 뭐 묻었어? 어? 이거 검버섯인가?" "무슨 소리야? 검버섯이라니?" 상준은 거울을 들어 얼굴을 살폈다. "그렇게 자기 관리를 안 하는데 안 생기겠니? 선크림 바르라고 사다 줘도 안 바르고 염색하자고 해도 싫다 하고, 세상에 너희 아빠처럼 자기 관리 안 하는 사람 드물어"

상준은 거울을 내려놓으며 허허허 쓴웃음을 지었다.

아내는 말없이 욕실 수납장에서 오래된 염색약상자를 꺼내왔다. "웬일이야, 그렇게 귀찮아하더니. 오늘 누구 만났어?" 상준은 '어르신'이라는 단어를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대신 어깨에 비닐을 두른 채 거울 속 검버섯을 손으로 쓱 문질러 보았다. 6년 전 딸애가 가리켰던 그 자리가 이제는 제법 진한 섬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냥... 거울 보니까 너무 허옇더라고. 나 아직 버스 타면 내 발로 꼿꼿이 서 있을 수 있는데 말이야." 아내의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독한 염색약 냄새가 코끝을 찔렀지만, 상준은 그 냄새가 차라리 반가웠다.

어젯밤 염색한 머리색이 잘 나왔는지 살피며 출근길에 오른다. 어제 산 복권을 지갑에서 꺼내 들고, 당근마켓 앱을 열어 아무 생각 없이 화면을 넘긴다.


나의 첫 단편소설 습작.

"60대 중반의 주인공을 통해 우리 시대의 평범한 가장들이 느끼는 쓸쓸함과 작은 희망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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