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그친 겨울밤의 독백

by 대전은하수 고승민

또 한 주가 갔다.
술 한 잔에 내 생명 한 주의 단축을 갈아 마신다는 남자들 특유의 핑계를 대지만, 사실 이건 나를 여기까지 버티게 한 시간들에 대한 예우다.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 없는, 나 자신의 체념 같은 묵묵한 루틴이다.


에어프라이어 안에서 몇 번이고 뒤집으며 공들인 삼겹살이 노릇하게 익어갈 때, 창밖엔 겨울의 진수라도 보여주겠다는 듯 눈발이 흩날렸다. 차가운 밤을 등지고 형광들을 끄고 노란 스탠드 불빛 아래 자리를 잡는 순간, 이 작은 공간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나의 요새가 된다.

소주와 맥주가 섞이며 만들어내는 하얀 포말은 내가 토해내는 나의 삶같이 보인다.
그 시원한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면, 평일 내내 나를 괴롭히던 악마의 소리들, 끝없는 정치 이야기의 피로함도 쓸어낸다. 돼지기름의 고소함과 무김치의 아삭함이 입안에서 어우러지는 이 시간만큼은, 누구도 부럽지 않다. 이건 사치가 아니라, 나만이 갖는 작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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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 정적을 깨는 아내의 한마디.
“불 끄고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아직도 청춘이냐?”
돼지고기 냄새를 유난히 싫어하는 아내에겐 미안하지만, 이런 핀잔조차 싫지 않다. 이 노란 조명 아래선 그 잔소리조차 내 인생 한 부분 삶의 배경음악처럼 들린다.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말이다.

이문세의 서정적인 선율을 지나, 프랭크 시나트라의 묵직한 재즈가 밤을 채운다. 나는 달아오르는 술기운에 더해지는 추억의 음악은 그제야 나에게 조금 관대해지기로 한다. 세상이 들이대는 유능함의 잣대 대신, 이 고요한 낭만을 즐길 줄 아는 나의 ‘무능함’을 기꺼이 용서하기로 한다.

문득 떠오르는 문장 하나 있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에서.


사실 이 시를 처음부터 외우고 있던 건 아니다. 눈에 띄어서, 어쩌다 마음에 걸려 남겨둔 한 문장이었다. 내가 제대로 외우는 시는 많지 않다. 딱 두 편이다. 하나는 부친이 작사한 조두남 작곡의 ‘그리움’.
"기약 없이 떠나가신 그대를 그리며…"
어릴 적엔 그냥 흘려들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문장은 점점 무게를 얻었다.

그리고 또 하나, 「길」이라는 시다. 아마 김소월의 시일 것이다.


“어제도 하룻밤 나그네 집에
가마귀 가왁가왁 울었소.”

"오늘은 또 몇 십 리 어디로 갈까."

...

"갈래갈래 갈린 길

길이라도

내겐 바이 갈 길이 하나 없소."


이 시를 나는 술에 취해 차를 두고, 버스를 타고 들어가던 다음 날 처음 만났다. 출근길 버스정류장 유리창에 붙어 있던 시였다. 한 달에 한두 번쯤, 몇 년을 같은 자리에서 그 시를 읽었다. 특별히 외우려 한 적도 없는데, 어느 순간 문장이 머릿속에 각인돼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내 삶도 그랬다.
의식적으로 붙잡은 것보다, 무심히 반복해 마주한 것들이 결국 나를 만들었다. 버스정류장의 시 한 편처럼, 겨울밤의 술 한 잔처럼.

그래, 눈이 그친 겨울밤이다.
나는 지금 무아지경 속에 살아 있다.
잠시라도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는 이 짧은 시간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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