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소리가 머물던 시간

승민의 성장기 1. (서정 산문)

by 대전은하수 고승민

승민이는 구들장 아랫목에 등을 대고 누워 멍하니 빗소리를 즐기고 있었다.

부모를 따라 상경한 곳이 깡촌인 김포공항 바로 옆 방화동이었다. 첫 번째 세 들어 살던 집에서 연탄가스에 중독된 동생이 큰 곤욕을 치른 후 이사 간 집이 옆동네 개화동이었고 그 집은 초가집에서 기와집으로 개조된 지 얼마 안 된 시골집이었다. 낮은 담장과 너른 마당의 옆에는 텃밭이 있어 여러 가지 식물들이 심어져 있었는데 뭔지는 알지 못했다. 마당 가운데는 펌프가 있어 수도 대용으로 사용되는 낭만의 집이었다.

승민이는 마중물을 붓고 힘차게 팔을 저으면 콸콸 쏟아지는 지하수를 보는 재미에 물을 길을 때면 자청해서 나서곤 했다. 집을 조금만 벗어나면 사방에 논과 밭이었고 지척에 공항이 있었다. 김포국제공항이었다.


장마철은 아직 멀었는데 웬 비가 이렇게 내리는지 밖에 나갈 길은 없고 옆집에 동생을 데리고 놀러 가신 어머니가 집에 안 계시니 혼자 방에서 뒹굴 거리고 있었다. 쏴쏴 내리는 빗소리에 "웅~~ 웅~~"거리는 비행기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들려오니 그 비행기 소리를 들으며 승민 자신이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상상을 하니 미소가 절로 얼굴에 배어 나왔다.

"저 비행기를 타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공항 옆에서 나는 비행기 소리는 승민에겐 소음이 아니라 세상에 펼쳐지는 주파수였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비행기 소리가 잦아들 무렵 들려올 그 맑은 종소리가, 그리고 그 종소리 아래서 만날 한 소녀가 자신의 평생을 따라다니는 긴 여정의 시작이 될 줄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신 부모님은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교회를 다니셨고 동생과 나는 그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김포를 빠져나가는 큰 대로변의 낮은 언덕 위에 양철 지붕의 자그만 교회가 있었다.

교회를 가기 위해서는 큰길을 벗어나 논두렁을 타고 가는 지름길을 택했다.

일요일 교회의 종탑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뎅 뎅 뎅" 울리고 그 영혼의 소리에 이끌리는 부모와 달리 승민에게는 그저 일요일의 배경음악이었으며 종종걸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조그만 성경책을 옆에 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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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마당에는 승민과 비슷한 또래가 십여 명 모여 있었다. 어느 날, 선생님은 아이들의 신앙심을 북돋우겠다며 퀴즈 대회를 열었다. 과제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암송이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음, 아버지여...”

승민은 머리를 긁적이며 버벅거렸다. 글자도 겨우 뗀 일곱 살에게 주기도문은 너무 길고 험난한 산이었다. 짜증이 밀려오려던 찰나, 옆에 앉은 한 여학생이 일어섰다.

‘혜연’이었다.

다소곳하게 모은 두 손, 밝고 환한 옷과 맵시, 그리고 시작된 나지막한 목소리. 혜연은 마치 노래를 부르듯 막힘없이 주기도문을 읊어 내려갔다. 승민은 숨을 멈춘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혜연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단어들이 높은 벽의 창문을 통해 비치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날, 승민의 처음으로 가슴속에 종소리가 들렸다. 종탑의 쇳소리가 아니라, 혜연이라는 아이의 목소리가 만든 아주 작고 예쁜 종소리였다. 승민은 자기도 모르게 성경책을 꽉 쥐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건,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보다 훨씬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혜연이 차분하고 다소곳한 모습이 자신과는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느껴졌고 쉽게 말을 걸 수 없는 존재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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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민이는 동네의 국민학교에 입학을 못하고 서울 중심 원효로에 있는 큰아버지 댁에 머물며 '금양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주중에는 큰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주말에만 김포의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항 입구 쪽에 있는 '송정국민학교'에 전학이 되었다.

첫 등교날이었다. 때 빼고 광 낸 모습으로 자신도 있으면서 의기소침하게 교실 문을 들어섰다.

선생님의 간단한 소개와 빈자리를 가리키며 "승민이는 저쪽 자리에 앉지"하고 말하셨다.

자리로 가 가방을 내려놓고 앉아 두리번거렸다. "앗"하고 소리 낼 뻔했다.

옆 분단에 그녀 '혜연'이가 앉아 있었다. 고고한 듯 고개를 들고 선생님을 주시하면서.

전학 온 학생에 눈길 한번 안주는 혜연의 모습에 섭섭했다. 일요일이면 교회에서 얼굴을 마주 보는 사이지만

시크한 그녀는 무심한 듯 나를 대했다.

그렇게 한 반에서 공부하면서도 말 한번 제대로 못하고 눈만 힐끗 거리며 쳐다보곤 했다.

어린 승민의 눈에는 학교 운동장이 그렇게 넓어 보일 수가 없었다. 큰 도로변으로는 방음을 위해서이니 아름드리 포플러 나무가 열을 지어 있었고 그 아래는 뜨거운 햇빛을 피하는 친구들이 말타기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비가 와도 해가 나도 어린 승민이와 남자 친구들은 축구공 하나에 온몸에 땀을 흘리며 뛰고 또 뛰었다. 가끔 여자아이들도 섞여 있었으나 남자아이보다 빨리 성장하는 여자애들도 무시 못하는 운동실력을 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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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되었고 학교는 방학을 했다. 시골의 논과 밭은 모두 동토로 변하였고 얼어붙은 논바닥은 아이들의 썰매장이 되었다.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썰매를 가지고 들판으로 나갔다. 아이들이 열심히 썰매를 타고 있었고 간혹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스케이트는 나에게는 언감생심이었다.

저쪽 논의 얼음 바닥에 스케이트 타는 사람이 몇 있었는데 익숙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천사처럼 보이는 그는 혜연이었다.

혜연의 스케이트 타는 모습이 넘어가는 해의 빛에 실루엣으로 아른 거렸다.

겨울의 들판은 금빛으로 물들이고 썰매질 하는 아이들의 천진함 모습과 옆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몇몇 부모의 모습은 시골풍경 그 자체였다.

높은 학년의 남자애들은 외발 썰매를 서서 지치고, 승민처럼 어린아이들은 무릎을 꿇고 타는 낮은 썰매였다.

승민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고 시골 생활은 가슴속에 머릿속에 스며들고 각인되어 정서가 풍부하게 되어갔다.


승민이는 몰랐다.

그 시절의 시골 생활이 어떤 의미로 승민의 정서와 인생에 작용하게 되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승민은 친구의 썰매를 밀다 말고, 얼음 위를 가르는 스케이트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종소리와는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같은 자리에서 울리고 있었다.

김포의 생활은 서울 마포로 전학을 가면서 아주 짧게 끝이 났지만 김포공항의 비행기 소리와 들판에 쏟아지는 빗줄기와 소리, 교회의 종소리와 썰매를 지치는 소리, 그리고 혜연의 주기도문 낭독의 소리는 그 이후로 한 번도 멎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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