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과 30분의 연장전

두 번째 단편소설 습작

by 대전은하수 고승민

호텔 커피숍의 맨 구석의 테이블에 앉은 현주는 팔의 시계를 연신 내려다본다. 약속시간이 5분이 넘어가는데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다.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나온 자리에 시간마저 지키지 않으니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짜증 속에 궁금증도 생겼다. "딸랑딸랑" 호텔 커피숍 여직원이 손에 알림판을 들고 종을 치며 테이블을 돌고 있었다. 알림판에는 "현주 씨 전화 왔습니다"라는 글씨가 보였다. "뭐야? 내 이름 아냐?" 커피잔을 내려놓고 가방을 들고 카운터 옆의 전화기로 향했다. "아 현주 씨? 미안합니다. 일이 늦게 끝났는데 차가 너무 막혀서 중간에 내려 공중전화로 먼저 전화를 드립니다." 현주는 어이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서둘러 뛰어갈게요 명동복판을 가로질러가면 5분 내로 도착합니다" 현주는 전화기를 걸고 자리로 돌아가 식은 커피를 들이마셨다. "참 나 기가 막혀서..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 얼굴이나 보고 가야겠네"하고 생각했다.

현주는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숨을 고르듯 창가를 바라봤다. 유리 너머로 명동의 저녁이 번져 있었다. 네온은 하나 둘 불이 켜지며 자동차의 라이트와 함께 도시를 물들여 갔다.

전화기 너머의 남자의 목소리는 미안하다고는 했지만 믿음은 가지 않았다. 현주는 미도파 백화점 앞에서 퇴계로의 호텔까지 남자가 뛰어오면 5분 정도라고 믿고 싶었지만 10분이 넘어가며 말한 시간은 희망에 가까웠다. 믿음과는 달랐다. 현주는 시계를 다시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보는 순간, 시간이 더디게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

종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번엔 알림판이 아니라 문이었다. 회전문이 한 박자 늦게 돌아가며 한 남자를 밀어냈다. 코트 자락이 아직 숨을 몰아쉬듯 흔들렸다. 그는 안을 둘러보다가, 마치 누군가를 오래전에 잃어버렸다가 이제야 찾았다는 얼굴로 현주 쪽으로 걸어왔다.

“현주 씨죠?”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았고, 생각보다 조심스러웠다. 현주는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키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번듯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가장 얄미운 종류였다. 기억에 남지 않을 것 같은 얼굴.

“늦으셨어요.”

“미안합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고, 변명은 더 짧았다. “뛰어오느라 정신이 없어서요.”

현주는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은 채 다시 커피를 들었다. 이미 식어 있었다. 그는 그제야 맞은편 의자를 조심스럽게 당겼다.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울렸다.

“엄… 커피 다시 시킬까요?”

“아니요.” 현주는 컵을 내려놓았다. “곧 가려던 참이었어요.”

그의 표정이 잠깐 흔들렸다. 기대가 무너질 때의 얼굴은 누구나 비슷했다. 현주는 그 흔들림을 보며, 이상하게도 짜증이 조금 가셨다. 사람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하려는데 부장님이 갑자기.." 대기업에 다닌다는 그는 변명을 늘어놓을 참이다.

현주는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았다. “뭐 회사일이니 어쩔 수 없죠” 잠시 말을 고른 뒤 덧붙였다. “중요한 건 지금이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크게 끄덕여서, 마치 시험에 합격이라도 한 사람처럼 보였다.

창밖에서 누군가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플래시가 번쩍였다. 현주는 그 빛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오늘이 기억에 남을지, 아니면 이 도시에 흘러가는 수많은 이야기처럼 지워질지.

“그럼,” 현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부터는 연장전이네요.”

그는 놀란 듯 올려다봤다. 현주의 가방이 어깨에 걸렸다.

“따라오실 거면,” 그녀가 덧붙였다. “이번엔 제가 먼저 걸을게요.”

명동의 소음 속으로 둘은 섞여 들어갔다. 걷는 동안은 주변의 소음만이 들려왔고 두 사람은 침묵했다.

현주는 명동 골목을 내려걸으며 "배고프니까 밥을 먹죠, 칼국수 괜찮으시죠?" 음식에 알레르기가 있어 아무거나 못 먹는 현주는 일방적으로 메뉴를 통보하 듯하고는 계단을 올랐다. 일부러 복잡하고 시끄러운 식당으로 들어선 것은 서둘러 식사하고 헤어지고 싶은 심산이었다.

명동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현주의 발걸음에는 실망감이 실려 있었다.

지하도를 올라서자 대한극장의 간판에 '도신'이라는 홍콩영화의 그림이 보였다. 극장 앞의 표를 사려고 늘어선 사람들을 뚫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동국대학교 후문 쪽을 지나며 남녀 학생들의 왁자지껄 웃음소리를 듣고는 지난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좋을 때다"

약국문을 열고 들어섰다. "엄마! 아빠 또 나갔어? 엄마가 약사야? 왜 맨날 엄마가 약국을 지키고 있어!"

괜히 엄마한테 짜증을 부렸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실망이야? 어땠는데? 마음에 안 들디?"

"엄마, 숨 좀 쉬고..." 약국매대의 안으로 돌아들어가 난로옆의 의자에 앉았다. "사람은 그냥 순진하고 그냥 그런데.. 완전 마마보이야! 말끝마다 우리 엄마가, 우리 아빠가.." 코트의 앞 단추를 풀며 한숨까지 쉬었다.

"그러게 먼저 소개받았던 변호사와 좀 잘해보지 그랬어, 넌 도대체 의사도 싫고 변호사도 싫고 어쩌자는 거야?" "엄마 걱정하지 마 나 이제 27이야 아직 멀었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위층의 집으로 올라갔다.


현주는 화장실의 떨어진 휴지를 가지러 복층계단을 올라 커다란 수납장을 열었다. 두루마리 휴지가 쌓여있고 뒤쪽에 웨딩드레스를 입은 결혼식 사진이 큰 액자에 실려 있다. 낮은 한숨이 조용히 새어 나왔다. "이쁘긴 이뻤네" 휴지를 하나 꺼내 들고 돌아서니 방에서 큰 딸이 나온다. "엄마, 오늘 좀 늦을 거야. 친구들하고 약속 있어" 앞서 계단을 내려가는 딸 뒤로 현주는 천천히 내려가며 "또 친구들.. 남자는 안 만나?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너 나이가 몇이니 이제 곧 30 중반이야"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그리고 나 결혼생각 없어"

결혼은 안 하고 그냥 연애만 하겠다는 큰 딸의 말에 크게 반대하지도 못하는 현주는 "그래, 니 알아서 해라"라고 말을 이어가지 못한다.

출근한 큰 딸을 뒤로하고 거실소파에 앉아 옆의 조그만 서랍장을 바라본다. "으이그 저 놈의 약장, 세상에 약을 아주 쌓아놓고 살아요 살아" 남편의 약이 꽉 들어찬 서랍장을 보며 내뱉는다.

"여보, 60 중반에 나 만큼 약 안 먹는 사람이 어딨어?" 언제 들었는지 뒤에서 남편이 한마디 한다.


현주는 조용히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옆에 놓인 엄마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엄마, 일찍 잘 가셨어 엄마 계셔서 우리 이런 꼴 보면 어쩔 뻔했냐고.." 한숨을 내쉰다.

리모컨을 쥐고 티브이를 틀었다. 화면에는 홈 쇼핑 프로가 방영되고 있었다. "자 보셨죠 이렇게 손바닥을 살살 펴서 문지르고 토닥토닥 두드립니다. 어때요 금방 눈에 보일 정도로 표가 나죠?" 이쁘고 젊은 여성이 열심히 화장품을 설명하고 있다. 현주는 채널을 돌린다. "어때요 이렇게 반짝이는 긴 목걸이에 짧은 목걸이를 이중으로 목에 걸면 한층 우아한 분위기가 살아나죠? 이게 바로 품격입니다" 보석 제품이 화면을 채운다. 현주는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눈요기로 대리만족하며 위안을 삼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벽에 걸린 시곗바늘이 11시 10분 전이다. 벌떡 일어난 현주는 주방으로 가서 반찬통을 몇 가지 꺼내 들고 냉장고를 열었다. 마른반찬을 이것저것 덜어내어 반찬통에 담는다. "얘는 밥은 제대로 챙겨 먹고 다니는지.."

반찬과 냉동 갈비탕 등 몇 가지를 챙겨 가방에 담아 들고 소형차에 오른다.

30분 거리에 독립해 나간 작은 딸의 집으로 향했다.


작가의 이전글김포, 소리가 머물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