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째 단편소설 습작
"얘, 그 남자 잘 만나고 있니?" 친구가 물었다.
윤주는 씩 웃으며 말했다. "잠수 탔어"
"뭐? 아니 왜, 싸웠어?"
"야, 남의 연애사 너무 알려고 하지 마" 옆에 친구가 말을 끊었다.
"묻지 마라, 나도 모르겠다" 윤주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윤주는 친구들과 헤어지고 택시 안에서 창 밖의 화려한 불빛을 보며 가로등이 하나 지날 때마다
"하나 둘 셋 넷.." 속으로 세었다. 머리를 비우는 데는 제일이라고 늘 생각했다.
택시 안에 트로트 음악이 흐르고 있다. 윤주의 기분과는 상반되는 기사의 흥에 맞춘 음악이다.
아버지가 아프다며 사표까지 내고 시골집으로 내려갔다는 말까지는 들었다.
그 후의 연락도 없고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 확인도 안 한다.
"힘들면 힘들다고 얘기를 해주지, 작은 위로라도.."
핸드폰의 사진을 넘기다가 멈췄다. 그와 마지막 울산에서 둘이 나란히 앉아 찍은 뒷모습의 사진이다.
"하필 뒷모습이냐"
동네의 조그만 호프집에 윤주와 동생이 앉아 맥주잔을 부딪힌다.
"와 우리 둘이 정말 오랜만이다." "그러게.. 그렇게 바쁘지도 않은데 간만이네" 동생이 거든다.
"근데 언니 그 잠수 탄 놈 아직 안 올라왔어?"
"얘 5개월이 넘었는데 이제 오면 뭐 하냐, 우리가 뜨겁게 사랑한 20대 초의 청춘도 아니고"
"나 요즘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사람 있어" "그래?"
"한 달 정도 지났는데 10번 이상 봤어" 윤주는 치킨대신 무를 하나 입에 넣었다.
"그래? 잘 됐네, 그놈은 잊어버려"
윤주가 손을 입에다 갖다 대며 그만하라 한다. "그 보다 나 이번에 해외취업에 면접까지 마치고 아마도 곧 출국할 것 같아" "어? 그래 어딘데? 뭐 하는 회사야?"
"이 사람이 나 해외 간다니까 자기도 사표 내고 따라오겠대"
"ㅋㅋ 언니가 그렇게 좋데? 사표까지 내고 따라간다니"
윤주는 대답대신 맥주잔을 들었다. 찬 맥주가 입술 위를 덮었다.
어느 주말, 두 사람은 쿠알라룸푸르의 도심을 걷고 있었다.
"우리 여기 온 지 벌써 5개월이네, 그쪽 회사는 어때? 출퇴근하기 편해?" 남자가 물었다.
"어, 25분 정도?" "오빠, 나는 여기가 나하고 맞나 봐 공기도, 환경도, 뭣보다 음식이 좋아, 오빠는 어때?"
"뭐 싫고 좋고 가 어딨어 맞춰서 사는 거지" "여기 네가 가까이 있으니까 무조건 좋지 주말이 기다려지잖아"
둘이는 한 카페에 들어가 앉았다. 커피를 앞에 두고 마주 않아 남자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윤주는 창 밖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드르륵"하고 테이블 위의 윤주 핸드폰이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가 화면에 떴다.
처음 보는 번호지만 망설이지 않고 받았다. "여보세요, 윤주?" 순간 멈칫했다. 익숙한 목소리다.
남자와 헤어져 집에 돌아온 윤주는 씻지도 않은 채 침대에 걸터앉았다.
카페에서 전화를 받고 흠찟한 모습에 앞의 남자가 뭐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떠올랐다.
전화기를 들고 아무 말 없이 화장실로 가 한참만에 자리로 돌아온 윤주를 바라보며
"누구야? 무슨 일이야?" 하고 물었다. "아냐, 아무것도 그냥 친구" 윤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지만 찜찜한 얼굴로 쳐다보는 남자에겐 그렇게 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다섯 달은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그는 책임질 이유를 말하지 못했고, 윤주는 이제 자신의 무대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고 윤주 자신의 모노드라마도, 꿈꾸던 삶도 될 수 있었다.
이제 와서 어쩌란 말이냐고 되뇌며 잊어버렸던 아픈 기억을 들쑤시는지 답답했다.
"오빠, 난 지금 좋아, 알잖아 나 예전에 싱가포르에서 직장 2년 다녔잖아, 그리고 서울에 호텔 다니다 그만두고 유럽 여행도 몇 달 했잖아 그때 아예 눌러살려고도 했어, 그만큼 난 해외에서 사는 게 좋거든, 이제 오빠도 오빠의 삶을 찾아" 윤주는 단호하게 말했다.
"윤주야..." 상대의 침묵이 길어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해대는 통에 짜증이 났다.
쿠알라룸푸르의 바람이 창문 틈으로 부드럽게 불어왔고, 윤주는 옷을 벗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며 생각한다. "뭐 어쩌라고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하자는 거야 뭐야?"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서 윤주는 깨달았다. 누군가는 도망치기 위해 사표를 냈고, 누군가는 붙잡기 위해 사표를 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을 위해 사표를 던지고 이곳으로 온 사람은 자기 자신 뿐이었다.
수증기에 뿌옇게 덥힌 거울을 손바닥으로 씻어내고 윤주는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샤워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선 윤주는 자신의 뒷모습을 본다. 사진 속 그 남자의 뒷모습은 도망치는 자의 것이었지만, 지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뒷모습은 단단하게 서 있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어 그 사진을 삭제한다.
쿠알라룸푸르까지 따라와 반찬에 밥까지 해다 바치는 그 남자, 헌신적인 그 남자가 마음에 걸렸다.
따라온 남자가 해준 따뜻한 밥을 먹으면서도, 윤주는 창밖의 이국적인 밤거리를 본다. '고맙지만, 오빠가 없어도 난 이 거리를 사랑했을 거야.' 윤주는 그에게 결혼 대신, 각자의 삶을 존중하는 새로운 거리를 제안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녀의 가슴속에는 슬픔과 결심이 함께 있었다.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입구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마지막 진동이 울린다. 윤주는 전화를 받는 대신 전원을 꺼버린다. 쿠알라룸푸르의 습한 열기가 에어컨 바람에 씻겨 나간다. 비로소 완벽한 소음 차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