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수대교 네거리에서 보았던 자본주의의 얼굴 **
88 서울 올림픽 전후의 대한민국은 흔히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 불린다.
과장이 아니다. 그 시절을 직접 살아온 사람에게는, 이 말이 실감나게 느껴질 것이다.
저달러·저유가·저금리.
이른바 ‘3저 호황’ 속에서 한국 경제는 거침없이 질주했다.
서울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해, 1986년 초 160포인트에 불과하던 종합주가지수는
1989년, 마침내 1,000포인트를 넘어섰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숫자 자체는 소박하지만, 그 상승 속도와 체감은 거의 광풍에 가까웠다.
9시 뉴스의 대통령 동정 다음으로 나오는 기사가 주식에 대한 이야기였다.
당시에는 스마트폰도, HTS도 없었다.
주식을 하려면 증권사 객장으로 가야 했다. 객장은 늘 사람으로 가득 찼다.
주부, 대학생, 퇴직자, 심지어 스님까지...
신문에는 “전 국민이 주식에 눈을 떴다”는 표현이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전광판. 주가가 오르면 빨간 불, 내리면 파란 불이 켜졌다.
상승장이 이어지던 날이면 객장 전체가 붉게 물들었고,
그 빛이 사람들의 얼굴까지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종이 주문표를 손에 쥐고 창구 앞에서 줄을 서던 풍경, 담배 연기가 자욱한 객장,
수익이 나면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박수를 치던 순간들.
지금 생각하면 금융이라기보다 축제에 가까웠다.
뉴스에 이런 기사가 날 정도였다.
증권사 여직원은 결혼 시장에서 최고의 인기 직군이라는.
이유는 분명했다.
업계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고, 보너스는 수백 퍼센트씩 쏟아졌다.
정보는 곧 돈이던 시절,
증권사에 근무한다는 사실 자체가 ‘미래를 미리 아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의도 증권가의 전문직 여성이라는 이미지는 당시 사회가 부여한 하나의 상징이었다.
나는 그 무렵, 신입사원의 티를 막 벗어나던 시절에
성수대교 네거리 인근 쌍봉빌딩 내 분점에 파견 근무를 나가 있었다.
대학 시절, 그러니까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만 해도
하교길 버스 창밖으로 보이던 압구정동은 배밭이 대부분이었다.
시골 풍경과 다를 바 없던 그곳이 어느새 아파트 숲으로 변했고,
강남의 노른자위이자 젊은이들의 거리로 탈바꿈해 있었다.
성수대교 네거리는 현대아파트 단지와 인접해 있었고,
증권사 객장에는 소위 ‘큰손’이라 불리는 자산가들이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뒤에 서서 전광판을 올려다보던
세상물정 모르던 신입사원의 눈에는 그저 화려한 불빛으로만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그 빨간 불빛과 숫자들은 단순한 주가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중진국의 문턱을 넘어 선진국으로 향해 흔들리며 건너던
거대한 파동의 심장 박동이었다.
그 시절을 통과한 우리는 축제 한복판에 서 있으면서도 그것이 역사라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다만, 눈부시게 깜빡이던 그 불빛만이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 왜 하필 오늘 아침, 그 시절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아직도 그 불빛이 내 안 어딘가에서 깜빡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