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계급사회

by 전영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경쟁이라는 룰 속에 던져진다. 학교, 직장, 사회 어디를 가도 끊임없이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리라고 채찍질당한다. 이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곧 성공이며, 그것이 곧 행복이라는 착각이 뇌리에 각인된다.

하지만 이 경쟁 구도가 낳은 가장 어둡고 비극적인 부산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혐오의 시선이다.

경쟁이 절대선(絶對善)으로 군림하는 사회에서, 패배는 단순한 좌절이 아니라 개인의 실패로 규정된다.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사회 구조의 희생자가 아니라, 노력이 부족하거나 능력이 모자란 '자격 없는 자'로 최면에 걸리게 한다. 우리도 알게 모르게 혐오사회가 형성된다.



1. 루저군(群)의 탄생


우리는 모두 성과주의 이데올로기의 굳건한 신봉자가 되도록 길러졌다. 네가 열심히 노력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고, 만약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온전히 너의 책임이라는 논리 말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경쟁의 룰이 공정하고 투명하다고 전제하며, 경제 침체, 불안정한 고용 시장, 부의 대물림 같은 사회 구조적 문제나 불평등은 은폐된다. 그리하여 신종 계급계층이 형성된다. 루저군(群)이다.



1) '루저'의 뜻

루저(Loser)는 영어 단어로, 경쟁이나 싸움에서 패배한 사람, 혹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이 단어는 단순히 '패배자'라는 의미를 넘어, 특정 사회적 기준(경제력, 직업, 외모, 학력 등)에 미달하여 사회적으로 열등하거나 가치가 없는 존재로 치부되는 사람을 비하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개인의 실패를 노력 부족이나 능력 결함으로 몰아붙이는 성과주의 사회의 희생양을 지칭하는 경멸적인 뉘앙스를 강하게 담고 있다.



2) 유래

'Loser'라는 단어 자체는 고대 영어의 'lēosan (잃다)'에서 유래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부정적이고 사회 계급적인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루저는 19세기말 ~ 20세기 초 스포츠나 도박 등에서 경쟁에 진 사람을 뜻하는 일반적인 단어였다.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 이후 신자유주의와 성과주의가 확산되면서, 경제적 성공을 거두지 못한 사람들을 비난하는 용어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Winner'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회경제적 계층을 구분하는 상징적 언어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2000년대 이후 극심한 입시 및 취업 경쟁, 그리고 자산 격차가 심화되면서 이 용어의 사용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특히 2009년 '루저 발언 논란'을 기점으로 한국 사회의 외모 지상주의, 물질 만능주의, 그리고 청년 세대의 좌절감을 상징하는 단어로 각인되었다.



3) 2025년 대한민국 20~30대 '루저'의 현실

2025년 현재, 대한민국 20~30대 청년 세대는 '경쟁'의 압력과 '패배자'라는 낙인이 가장 첨예하게 맞닿아 있는 세대다. 여기서 '루저'는 단순히 실패한 개인이라기보다 경쟁 시스템이 낳은 구조적 불안정 세대를 의미한다.


청년 체감 실업률은 공식 실업률보다 훨씬 높은 20% 내외 (취업 단념자, 주 36시간 미만 근로자 등 포함)이다. 그들은 장기간 미취업 또는 불안정 고용으로 인해 '무능력자'로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다.

청년층의 비정규직 비율은 전체 청년 취업자의 약 30~40%가 해당된다. 이들은 비정규직 및 특수고용 형태로 노동 시장에 진입했다.

이들은 대기업 정규직 '승자'와 대비되는 '불안정 노동자'라는 경제적, 사회적인 루저의 대상에 해당된다.

그리고 20~30대 중 약 15% 이상이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을 받고 있다.


일하지도, 교육을 받지도, 훈련을 받지도 않는 청년 인구가 100만 명 육박한다. 이른바 '니트(NEET)족'이다.

사회 활동에서 완전히 배제된 '투명 인간' 취급을 당하며 스스로도 자존감이 하락해 있다.



4) 자산 격차

20~30대 '루저'의 현실은 일자리뿐만 아니라 자산 격차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2020년대 초반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인해 20~30대가 정상적인 근로 소득만으로는 수도권에서 집을 살 가능성이 거의 사라졌다. 이들은 부모의 도움('금수저') 없이 자력으로 자산을 축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며 '계층 사다리'의 붕괴를 경험하고 있다.


본인들이 경쟁에서 밀려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산을 가진 기성세대나 부모의 배경이 좋은 동년배들을 보며 '나는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심각한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린다.



5) 심리적 낙인과 혐오의 대상

경쟁에서 밀려난 20~30대는 사회가 알게 모르게 가고 있는 '혐오사회'의 주요 타깃이다. "눈높이를 낮춰라", "노력이 부족하다"는 식의 비난을 기성세대와 일부 성공한 동년배로부터 끊임없이 듣는다.


청년 실업자, 미혼 남녀 등은 '세금을 축내는 복지 수혜자' 또는 '이기적인 개인'으로 몰리며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기 쉽다. 이는 심리적 고립과 우울증으로 이어지는 주요 원인이다.



6) 대한민국 20~30대 '루저' 규모(2024년 기준, 2025년 근접 추정치)

'루저'는 명확한 통계적 정의가 있는 용어가 아니기에, 공식적인 인원수를 산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루저'의 의미인 '경쟁 시스템에서 밀려나 경제적·사회적 불안정 상태에 놓인 청년'을 대변하는 주요 지표 인구수를 종합하여 규모를 추정할 수는 있다.


* 청년 니트(NEET)족 : 100만 명 내외(15~29세 비경제활동인구 중 미취업자 및 구직 단념자 등)

* 단기 계약직 및 불안정 노동자 (20~30대) : 150만 명 이상(비정규직 및 기간제 근로자 수 (고용 불안정의 핵심)

* 주 36시간 미만 불완전취업자 : 100만명 내외(일하고 싶지만 충분한 근로시간을 얻지못하는 청년층)

* 결혼 및 출산 포기 세대 : 수백만 명(미혼, 비출산의 주요 이유가 경제적 불안정으로 꼽힘)


2025년 대한민국 20~30대 청년층(약 1천만 명) 중에서,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를 얻지 못했거나, 자산 축적의 희망을 잃고 경제적, 심리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구조적 루저군'의 규모는 최소 200만 명에서 300만 명 이상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들은 통계적으로도 사회의 주류 경제 시스템에서 소외되어 있으며, 경쟁의 낙인 속에서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다. 그들을 일괄적으로 개인의 실패로 치부할 수는 없다. 경제 침체, 불안정한 고용 시장, 부의 대물림 같은 사회 구조적 문제나 그들이 태어난 후 이미 구조화된 불평등한 바탕 등이 있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 즉 '루저'를 향한 비난은 다음과 같은 메커니즘을 통해 강화된다.

구조적 문제는 아예 논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모든 것이 개인의 의지력, 근면성, 능력 문제로 축소된다.


실업, 빈곤, 낮은 학력 등 '경쟁의 패배'를 나타내는 지표는 곧 게으름, 나태, 무책임함 같은 도덕적 결함과 동일시된다. "그렇게 될 줄 알았다", "노력을 안 했으니 당연하다" 같은 멸시가 쉽게 따라붙는 이유다.


성공한 '위너'들은 자신의 성과를 오로지 개인의 노력의 산물로만 해석한다. 그들은 자신이 밟고 올라선 발판(부모의 배경, 우연한 기회, 타고난 재능 등)을 외면한 채, 패배자들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우월감과 기득권을 정당화한다.

특히, 이 비난은 '자기 계발' 강박과 결합하면서 더욱 강화된다.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아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잠시 멈추거나 뒤처진 사람들은 은연중에 "자기 관리도 못 하는" 무능력자로 취급받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2. 아티스트 이찬혁의 무대



이찬혁과 뮤지컬 배우들



2012년 ~ 2013년 <K팝 스타 시즌2> 출연 및 우승하고 2014년 YG 엔터테인먼트와 계약 후 정규 1집 <PLAY>로 정식 데뷔한 악동뮤지션 (AKMU) 이찬혁 & 이수현이 있다.

이찬혁이 출연한 2025년 KBS 열린 음악회와 제46회 청룡영화상에서의 '멸종위기사랑'과 'VIVID LALA LOVE' 무대를 보면 21세기 미래사회의 화두가 숨어 있다.

예언자의 역할은 이사야 예레미아 등의 선지자만 해당되지 않는다. 문화인과 예술가도 예언의 한몫을 한다.


그 무대에는 이찬혁 외에도 9명의 현역 뮤지컬 배우와 5명의 현역 가수를 코러스로 세워 합동공연을 한다. 이찬혁은 이들에게 '각자의 개성을 살려 한 명 한 명이 주인공 같고, 각자가 예민한 포인트가 있는 인물이었으면 좋겠다'라고 하며 협업을 요청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멸종위기사랑'과 'VIVID LALA LOVE' 가사지를 주고 외우며 노래도 함께 불러주기를 원했다.


그가 이 무대에서 원한 것은 "우리 모두는 주인공이다"라는 것이다.


이 무대의 신선함은 이찬혁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나머지는 보조역인 기존 무대의 틀을 깨버린 것에 있다. 이 무대는 옷이 다 다르다. 모두가 주인공이고 저마다의 개성을 존중해 주인공이 되고 주연이 되니, 무대가 갓 잡은 생선이 튀어 오르는 것처럼 신선하고 활기찰 수밖에 없다.

'멸종위기사랑'에 이어 'VIVID LALA LOVE'에는 성장이 멈춘(난쟁이) 뮤지컬배우 김범진이 등장한다. 그는 무대 예술계에서 탄탄한 경력을 인정받은 실력파 배우이다. 그는 무대 중앙에서 몸을 웅크린 채 쪼그려 앉아 있었다. 'VIVID LALA LOVE'가 시작되자마자 우측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와 무대중앙에 선다. 그리고 김범진으로 상징 되는 '비주류', '결함이 있는 아름다움'과의 협업이 시작된다. 이것은 이찬혁이 치밀하게 계산한 연출력이다.

김범진의 등장은 무등(無等) 세계 도래의 메시지다. 무등의 세계는 평등의 세계이고, 평등의 세계는 곧 개성 존중의 세계이다.


아래의 댓글 몇 개를 보자. 이 두곡의 메시지가 전달한 것에 대한 온,오프라인 관객들의 호응도를 짐작할 수 있다.


- 댄서들을 그저 백댄서로만 세운게 아니라 예술의 일부로 포함시켜 버림.

- 코러스의 노래가수뿐만 아니라 댄서들 표정 하나하나가 예술 같음.

- 요새 KPOP은 아이돌 음악으로 도배가 됨. 획일의 극치! 우리도 이런 것이 있다... 라며 글로벌하게 보여주면 좋겠음.

- 한바탕 놀고 가자! 하는 패거리 같음. 자유분방한 듯하면서 조화로운 느낌임.

- 출연자 모두가 각자만의 사연이 있고, 각자가 모든 무대의 주인공처럼 느껴짐. 그게 위로가 되어서 자꾸 보러 옴. 나도 별것 없는 내 인생의 조연이 아니라 주연임을 상기시켜 줘서 고맙다.



이 무대의 순수함과 광기는 21세기 사회의 예언적 메시지로 이어진다.


21세기 사회는 "우리 모두는 주인공이며 주연인 세계이다"


혐오계급사회, 경쟁지옥의 사회는 눈을 씻고 봐도 이 무대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여기서 확인 할 것이 하나 있다.

무대 출연자의 게런티 문제다. 종래는 승자독식에 따라 인기있는 주연과 보조 출연자의 게런티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심지어 보조출연자는 아르바이트 급의 출연료를 받으며 혹사당하기도 했다. 이찬혁과 함께 한 이들의 게런티 차이가 궁금하다. 모두가 주인공인 무대에서는 공평하게 대우해줘야 한다고 본다.


물론 청룡영화상 무대는 이찬혁이 노래, 연출, 작곡, 작사 등을 하였으니 당연히 그 대가가 계산에 포함 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머지 코러스, 뮤컬배우 등도 '주연'이므로 그에 상당하는 게런티로 대우해줘야 하는 것이 맞다. 주최측 또는 방송사의 예산에는 한계가 있으니, 주연(이찬혁)의 게런티를 줄여서라도 종래 승자독식의 벽은 허물어야 할 것이다. 공정하고 공평한 게런티계산서는 합리적인 행복감을 주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그래야 이런 '모두가 주연'인 무대는 공연계에 뿌리를 내릴 수 있다.



3. 혐오계급사회, 경쟁 환상을 걷어내야만 끝난다



혐오계급사회는 '경쟁만이 살 길이다'라는 환상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결과다. 경쟁에서 이긴 자는 패배자를 멸시하고, 패배자들은 더 약한 고리를 찾아 분노를 전가하는 악순환의 고리. 이 고리를 끊지 않고서는 우리는 영원히 혐오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지향해야 할 사회는 승자와 패자를 가르지 않는 사회, 즉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는 사회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성공과 실패가 오로지 개인의 노력에 달렸다는 환상을 깨야 한다. 사회 구조적 불평등과 시스템의 실패를 직시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논하는 것이 우선이다.


또한 서로를 경쟁자가 아닌, 함께 사회를 구성하는 동료 시민으로 인식해야 한다. 경쟁의 압박으로 분산된 분노를 시스템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과 사회적 연대로 전환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소득, 직업, 학력과 무관하게 모든 시민이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존중받을 수 있는 보편적 사회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경쟁은 환상일 뿐이다.


그리고 그 환상이 만들어낸 혐오사회는 우리 모두를 병들게 한다. 이 독소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경쟁이라는 낡은 룰을 폐기하고, 공존과 연대라는 새로운 가치 위에 사회를 재건해야 한다. 혐오를 걷어내는 유일한 길은 '경쟁'의 신화를 무너뜨리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