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접몽(胡蝶夢)
동양 철학의 정수이자 '경계 허물기'의 상징인 장자(莊子)의 호접몽(胡蝶夢)을 묵상해보자.
앞선 서양의 이야기들이 결핍을 채우거나 대립을 통합하는 과정이었다면, 장자의 이야기는 애초에 나눌 수 없는 거대한 하나됨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연재 주제인 '단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합일'의 가장 궁극적인 형태가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서양의 우화와 소설을 빌려 '나'와 '너', '빛'과 '어둠'이라는 이분법적인 세계가 어떻게 서로를 갈구하며 하나로 통합되어 가는지 이야기했다. 동그라미는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헤맸고, 싱클레어는 내면의 선악을 끌어안았으며, 여우는 어린 왕자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우주를 확장했다. 이들의 여정은 치열했고, 때로는 고통스러웠으며, 마침내 감동적인 합일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 그 치열한 분투조차 필요 없다고 말하는 한 노인이 있다. 2천여 년 전 중국의 사상가 장자(莊子)다. 그는 무거운 철학적 논변 대신, 나른한 오후의 낮잠 속에서 꾼 꿈 이야기 하나를 우리에게 던진다. 너무나 유명해서 오히려 그 깊이가 가려진 이야기, 바로 '호접몽(胡蝶夢, 나비의 꿈)'이다.
어느 날 장자는 꿈을 꾸었다. 그는 꿈속에서 사람이 아닌 나비가 되었다.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것이 어찌나 즐겁고 유쾌한지, 자신이 장자라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는 완벽한 나비였다. 꽃 사이를 노닐며 바람의 결을 느끼는 그 순간, 그에게는 어떤 결핍도, '나'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잠에서 깼다.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영락없이 투박한 육신을 가진 장자였다. 나비의 가벼운 날갯짓은 사라지고, 인간의 무거운 현실이 그를 짓눌렀다. 이 순간, 장자는 깊은 혼란에 빠지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아까 나비가 되었던 꿈을 장자가 꾼 것인가, 아니면 지금 장자가 된 꿈을 나비가 꾸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흔히 이 이야기를 인생의 덧없음이나 꿈과 현실의 모호함을 말하는 비유로 읽는다. 하지만 '나는 너를 떠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우리의 테마 안에서, 호접몽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을 연다. 이것은 혼란이 아니라, 나와 타자, 주체와 객체 사이의 견고한 벽이 무너져 내리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이로운 순간이다.
우리가 사는 3차원의 현실 세계는 엄격한 경계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너'가 아니고, '인간'은 '나비'가 아니다. 이 경계 때문에 우리는 외롭고, 타인을 갈망하며,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느낀다. 앞서 살핀 서양의 이야기들은 이 경계를 전제한 상태에서 그것을 넘어서려는 노력이었다.
하지만 장자의 시선은 다르다. 그에게 '나비'는 장자가 잠시 빌려 입은 옷이 아니었다. 꿈속에서 나비가 된 장자는, 나비 그 자체로서 온전했다. 그 순간만큼은 장자의 의식은 사라지고 나비의 의식만이 우주에 존재했다. 그리고 잠에서 깼을 때, 나비의 의식은 다시 장자의 의식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장자가 던진 질문의 핵심은 이것이다. 장자와 나비는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생명력이 때로는 장자의 모습으로, 때로는 나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뿐이라는 깨달음이다. 이것을 그는 '물화(物化, 만물의 변화)'라고 불렀다. 우주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나'라는 파도와 '나비'라는 파도가 잠시 일렁였을 뿐, 그 본질인 물은 언제나 하나인 것이다.
잠시 8세기 인도의 성자 샹카라의 철학을 살펴보자.
샹카라 철학의 핵심은 불이일원론, '아드바이타', 즉 '둘이 아님(非二)'이라는 개념이다. 이는 궁극적 실재가 오직 하나뿐이며, 그 외의 모든 것은 그 하나의 실재가 현현(顯現)한 모습이거나 환영(幻影)이라는 사상이다.
샹카라에 따르면, 브라흐만은 유일하고 절대적인 실재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브라흐만은 형언할 수 없고, 속성이 없으며(니르구나 브라흐만), 순수 의식, 순수 존재, 순수 지복 그 자체이다. 이는 인격적인 창조주 신과는 구별되는 개념으로, 우주 만물의 바탕이 되는 비인격적 절대자를 의미한다. 아트만은 개별적인 영혼, 또는 '참된 나(진아, 眞我)'를 의미한다.
우리가 '나'라고 인식하는 육체, 감각, 마음, 자아의식 등은 아트만의 참모습이 아니다.
만약 브라흐만이 유일한 실재라면, 우리가 경험하는 이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현상 세계는 무엇인가? 샹카라는 이를 마야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마야는 일종의 우주적 환영 또는 환상으로, 유일한 브라흐만 위에서 다채로운 현상 세계가 나타나도록 하는 힘이다.
마야는 실재하는 것도 아니고 실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형언하기 어려운 성질을 지닌다.
마치 밧줄을 뱀으로 잘못 보는 것처럼(밧줄-뱀의 비유), 우리는 마야 때문에 유일한 브라흐만을 다원적인 세계로, 그리고 개별적인 '나'를 참된 아트만과 분리된 존재로 착각한다. 즉, 브라흐만이 실제로 세계로 변한 것이 아니라, 마야로 인해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샹카라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아트만이 브라흐만이다"라는 것이다.
장자에 의하면, "장자와 나비는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아니다". 장자와 나비가 된 장자 사이에는 경계가 없었다는 무경계의 사상은 맥을 같이 한다.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현상 세계(마야) 때문에 아트만과 브라흐만이 경계라는 금으로 그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호접몽을 보자.
장자가 나비였을 때, 그는 인간 장자를 버리고 떠난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그가 잠에서 깨어 다시 장자가 되었을 때, 그는 나비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장자'와 '나비'는 서로가 서로를 품고 있는 존재, 단 한 순간도 분리된 적 없는 하나의 우주였다. 꿈과 현실이라는 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차원의 '나'를 경험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하는 4차원적 의식, 즉 '우주적 자아'의 모습이다. 이 거대한 관점에서는 '떠남'도 '잃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너는, 나와 다른 육체를 가진 타인이 아니라 또 다른 모습으로 현현한 '나의 확장'이다. 우리가 이별이라 부르는 것은, 나비의 꿈이 깨고 장자의 현실이 시작되는 것처럼, 존재의 방식이 변화하는 과정일 뿐이다.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진정한 나'를 찾고, '완벽한 타인'을 갈구하며 고독해한다. 나라는 좁은 감옥에 갇혀 벽 밖의 세상을 타자화하기 때문이다. 장자는 호접몽을 통해 그 감옥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호접몽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비로소 안도한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나의 반쪽은, 어딘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내 옆을 스쳐 가는 바람 속에, 창가에 앉은 작은 새의 눈빛 속에,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의 미소 속에 이미 온전히 녹아들어 있다.
우리는 서로를 떠날 수 없다. 장자가 나비이듯, 나는 당신이고 당신은 나이기 때문이다. 경계가 지워진 그 아득하고 평화로운 자리에서,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함께 날갯짓하고 있었다.
이면에서 장자와 샹카라는 다른 말을 하고 있지 않다.
[작가의 한마디] 가장 깊은 위로는 '다시 만날 것'이라는 약속이 아니라, '애초에 헤어진 적이 없다'는 깨달음에서 옵니다. 장자의 나비가 되어 당신의 경계를 사뿐히 넘어가 보세요. 그곳에 당신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모든 우주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다음 연재 예고: <경계 너머의 시선들>
- 양자역학이 말하는 '얽힘', 우리는 입자이자 파동이다
문학(동그라미, 여우)과 철학(장자)을 넘어 이제 현대 과학의 정점인 양자역학을 통해 '우리는 단 한 번도 분리된(떠난) 적이 없다'는 주제를 다뤄보고자 한다.. 나는 이 글들이 시리즈의 논리를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차원으로 확장하는 계기와 근거, 그리고 삶의 에너지가 되기를 희망한다.
이어지는 후속편들을 통헤 이 거대한 주제를 심리학, 종교, 예술, 자연과학 등 다양한 프리즘으로 비추어 함께 묵상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