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박수근(1914~ 1965) 나무와 두 여인
괴테가 발견한 구원의 열쇠, '영원히 여성적인 것'
세상은 오랫동안 이성과 논리, 그리고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인류는 분석하고 비판하며 정복하는 '남성적 원리'를 통해 문명을 발전시켰으나, 그 끝에서 마주한 것은 고립과 파편화된 영혼의 갈증이었다. 이제 우리는 멈춰 서서 물어야 한다. 우리를 진정으로 완성시키고 도달하게 하는 힘은 어디에 있는가? 그 답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과 영성가들이 입을 모아 말했듯, '여성적인 것'에 있다. 구원은 차가운 머리가 아니라 뜨거운 가슴, 즉 감성과 자비의 파동을 타고 온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그의 역작 《파우스트》를 마무리하며 위대한 선언을 남겼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린다(Das Ewig-Weibliche zieht uns hinan)." 이 문장은 방대한 파우스트의 서사를 관통하는 핵심이자, 인류 영성의 종착지를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주인공 파우스트는 지식과 쾌락, 권력을 갈구하며 끊임없이 방황하는 남성적 역동성의 상징이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우주의 비밀을 풀려했고,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하며 세상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를 지옥의 문턱에서 건져 올린 것은 그의 지적인 성취나 논리적 변증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를 위해 기도하는 그레트헨의 숭고한 사랑이었으며,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천상의 자비였다.
여기서 '여성적인 것'이란 단순히 생물학적 여성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만물을 품어 안는 포용성, 자신을 내어주는 자기희생, 그리고 모든 생명을 연결하는 사랑의 원리다. 암탉이 자신의 온기를 다해 알을 품어 새 생명을 탄생시키듯, 여성적 원리는 존재를 보듬고 길러내어 마침내 신성(神性)으로 상승시키는 견인력이다. 사랑은 생명으로 이어지고, 그 생명은 다시 영원한 구원의 빛으로 승화된다. 따라서 여성적인 것이야말로 구원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길상사의 관음상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 들어서면 우리는 독특한 형상의 관음보살상을 마주하게 된다. 법정 스님의 뜻에 따라 조각가 최종태 교수가 만든 이 불상은 언뜻 보면 천주교의 성모 마리아를 닮았다. 불교의 관음보살이면서도 가톨릭의 성모상을 연상시키는 이 오묘한 조화는 "종교는 달라도 진리는 하나"라는 화합의 메시지를 온몸으로 웅변한다.
성모 마리아와 관음보살은 인류 역사 속에서 '여성적 신성'의 양대 산맥으로 존재해 왔다. 마리아가 고통받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자애로운 어머니라면, 관음보살은 세상의 모든 소리(觀世音)를 듣고 구제하는 자비의 화신이다. 길상사의 관음상은 그 형태적 경계를 허물어뜨림으로써, 구원이 특정 교리에 갇힌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구원은 인간의 고통을 가엾게 여기는 '어머니의 마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임한다.
이러한 여성적 신성은 분석하고 구별하는 이성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다. 관음보살의 미소는 논리적 설명이 필요한 대상이 아니라, 그저 마주 보는 것만으로 마음의 응어리가 녹아내리는 감성적 체험의 대상이다. 우리가 길상사 관음상 앞에서 평온을 얻는 이유는 그 모습에서 우리 영혼의 고향인 '자비로운 어머니'를 보았기 때문이다.
한국 불교의 관음 성지와 나의 경험
한국 불교의 4대 기도 도량인 양양 낙산사(홍련암),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 여수 향일암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바다를 마주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여성형인 '관음보살'을 주불로 모시는 기도처라는 점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삶의 극한 고통에 직면했을 때 이 여성적 신성의 현현인 관음보살을 찾아갔다. 거친 바다와 같은 인생의 풍랑 속에서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한 구원을 갈망한 것이다.
나 역시 이러한 여성형을 통한 기도와 묵상에서 형용할 수 없는 큰 효험을 보았다. 구인사는 천태종의 본산이자 강력한 관음 기도 도량이다. 그곳에서 마음을 다해 관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자비의 에너지에 나를 맡겼을 때, 나는 이성의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세계를 목격했다. 한민족의 미래와 나의 생의 경로가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펼쳐지는 경이로운 체험을 한 것이다. 그것은 머리로 추론한 미래가 아니라, 우주의 근원적 자비가 감성의 창을 통해 직접 보여준 계시였다(도보명상 후편 10: 구인사에서 미래를 보다 참조).
이러한 체험은 내가 '나'라는 개별적 이성을 내려놓고, 만물을 품는 여성적 감성의 주파수에 나를 맞추었을 때 비로소 가능했다. 여성형 기도는 신과 나 사이의 거리를 없애고, 존재의 근원과 즉각적인 합일을 이루게 한다.
감성의 시대를 여는 여성적 구원
현대 사회는 너무나 오랫동안 이성의 과잉 속에서 살아왔다. 효율과 경쟁, 분석과 비판은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었을지 모르나, 영혼은 더욱 고독해지고 메말라 버렸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가운 정답이 아니라 따뜻한 품이다.
'여성적인 것'은 약함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을 잉태하고, 기르고, 마침내 완성시키는 가장 강력한 창조의 힘이다. 기도를 할 때도, 삶을 대할 때도 우리는 좀 더 '여성적'이어야 한다. 이성적으로 계산하기보다 감성적으로 공감하고, 정복하기보다 포용하며, 주장하기보다 수용해야 한다.
구원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내 안의 여성성을 회복하고, 자비로운 성모와 관음의 마음으로 세상과 연결될 때 구원은 이미 시작된다. 괴테가 말한 '영원히 여성적인 것'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우리를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 올리고 있다. 그 따뜻한 이끌림에 몸을 맡기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시대 우리가 걸어가야 할 진정한 구원의 길이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게 한다.
세상은 오랫동안 이성과 논리, 그리고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인류는 분석하고 비판하며 정복하는 '남성적 원리'를 통해 문명을 발전시켰으나, 그 끝에서 마주한 것은 고립과 파편화된 영혼의 갈증이었다. 이제 우리는 멈춰 서서 물어야 한다. 우리를 진정으로 완성시키고 도달하게 하는 힘은 어디에 있는가? 그 답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과 영성가들이 입을 모아 말했듯, '여성적인 것'에 있다. 구원은 차가운 머리가 아니라 뜨거운 가슴, 즉 감성과 자비의 파동을 타고 온다.
인류의 위기마다 찾아오는 어머니의 사랑, 성모발현
신성한 여성성의 가장 극적인 현현은 가톨릭의 성모 발현을 통해 나타난다. 하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는 인류가 고통과 혼돈으로 위기에 빠질 때마다 직접 지상에 내려와 자비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는 차가운 교리가 아니라, 자녀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절박한 '감성'으로 인류에게 다가온 사건들이다.
과달루페의 성모 (1531년, 멕시코): 식민 지배의 고통 속에 있던 원주민들에게 나타난 성모는 원주민의 모습과 언어로 그들을 위로했다. 성모가 남긴 신비로운 초상화(틸마)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기적이며, 이 사건을 통해 수백만 명의 영혼이 치유와 구원을 얻었다.
루르드의 성모 (1858년, 프랑스): 가난하고 병든 소녀 베르나데트에게 나타난 성모는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라고 밝히며 치유의 샘물을 솟아나게 했다. 오늘날까지도 이 샘물을 통해 수많은 불치병 환자들이 의학을 뛰어넘는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하고 있다. 이는 '은혜'란 논리가 아니라 믿음과 감성을 통해 흐른다는 것을 증명한다.
파티마의 성모와 예언 (1917년, 포르투갈): 제1차 세계대전의 비극 속에서 세 어린이에게 나타난 성모는 인류의 회개와 평화를 촉구했다. 특히 '파티마의 세 가지 비밀'로 알려진 예언은 세계 대전의 종식, 공산주의의 발흥과 몰락, 교황에 대한 암살 기도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7만 명의 군중이 목격한 '태양의 기적'은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킬 만큼 압도적이었으며, 인류의 운명이 어머니의 자비로운 전구(轉求)에 달려 있음을 알렸다.
성모 발현의 공통점은 그들이 지적인 엘리트가 아닌, 순수한 마음을 가진 어린이들이나 가난한 자들에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는 구원의 은혜가 이성적 분석이 아닌, 순수한 감성의 통로를 통해 가장 빠르게 전달됨을 의미한다.
성모 마리아와 관음보살은 인류 역사 속에서 '여성적 신성'의 양대 산맥으로 존재해 왔다. 마리아가 고통받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자애로운 어머니라면, 관음보살은 세상의 모든 소리(觀世音)를 듣고 구제하는 자비의 화신이다. 이 여성적 신성은 분석하고 구별하는 이성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다. 관음보살의 미소는 논리적 설명이 필요한 대상이 아니라, 그저 마주 보는 것만으로 마음의 응어리가 녹아내리는 감성적 체험의 대상이다.
왜 '여성형'을 통한 기도가 빠른가?
영성 수련의 길에서 "여성형을 통해 기도하는 것이 응답이 훨씬 빠르다"는 가르침은 매우 실천적인 지혜를 담고 있다. 이는 기도의 본질이 '이해'가 아니라 '연결'에 있기 때문이다.
'연결'에서 이성적 접근은 느리고 감성적 접근은 빠르다. 빠른 정도가 아니라 즉각적이다.
이성은 날카로운 칼과 같아서 주체와 객체를 나누고 상황을 분석한다. 이성으로 기도하려 하면 자꾸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 기도가 합당한가"를 따지게 되어 몰입을 방해한다. 반면 감성은 물과 같아서 경계를 허물고 대상과 하나가 된다. '여성적인 것'은 바로 이 감성의 영역을 주관한다. 간절한 그리움, 애절한 자비심, 모든 것을 맡기는 순종의 마음은 차가운 논리를 뛰어넘어 신성한 파동과 즉각적으로 공명한다.
힌두교에서도 이 원리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지고의 신 크리슈나에게 도달하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은 그의 여성적 동반자인 '라다(Radha)'의 마음을 통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라다는 크리슈나를 향한 완전한 사랑과 헌신의 상징이다. 수행자가 자신을 라다와 같은 여성적 수용성의 상태로 두었을 때, 신의 은총은 가로막힘 없이 흘러 들어온다. 기도는 내가 신을 설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나를 비워 신의 자비가 머물 수 있는 따뜻한 둥지(여성성)를 만드는 과정인 것이다.
감성의 시대를 여는 여성적 구원
현대 사회는 너무나 오랫동안 이성의 과잉 속에서 살아왔다. 효율과 경쟁, 분석과 비판은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었을지 모르나, 영혼은 더욱 고독해지고 메말라 버렸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가운 정답이 아니라 따뜻한 품이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과 그가 남긴 예언들, 관음보살의 자비로운 미소, 그리고 괴테가 말한 '영원히 여성적인 것'은 모두 하나의 진리를 향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머니의 마음'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구원이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여성적인 것'은 약함이 아니라, 생명을 잉태하고 기르고 완성시키는 가장 강력한 창조의 힘이다.
기도를 할 때도, 삶을 대할 때도 우리는 좀 더 '여성적'이어야 한다. 이성적으로 계산하기보다 감성적으로 공감하고, 정복하기보다 포용하며, 주장하기보다 수용해야 한다. 그 따뜻한 이끌림에 몸을 맡기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시대 우리가 걸어가야 할 진정한 구원의 길이다.
참고: <개신교와 가톨릭의 성모 마리아를 둘러싼 견해 차이>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서 성모 마리아를 둘러싼 견해 차이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깊은 갈등 중 하나다. '여성적 원리'와 '구원'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논쟁은 신성(神性)을 어떻게 이해하고 접근하느냐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 차이를 보여준다.
성모 공경을 부정하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성모마리아에 대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
가톨릭 (Catholic)
핵심 원리 : 성경과 성전의 조화
마리아의 지위 : 하느님의 어머니, 천상의 모후
중재 역할 : 인정 (그리스도의 중재에 협력하는 모성적 중재)
성모 교리 : 인정 (성경의 정신과 교회의 전승)
개신교 (Protestant)
핵심 원리 :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마리아의 지위 : 믿음의 본보기이나 평범한 인간
중재 역할 : 부정 (오직 예수만이 중재자)
성모 교리 : 부정 (성경에 근거 없음)
<작가의 한마디> '나는 너를 단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라는 연재물 중에서 이번 '여성적인 것이 구원을 완성하게 한다' 편은 '구원'과 '자비'라는 주제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녀를 포기하지 않는 어머니의 마음, 즉 성모 마리아나 관음보살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바로 "나는 너를 단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는" 그 마음입니다.
이 문장은 읽고 또 읽어도 우리들에게 다시없는 삶에 위로와 확신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