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작품으로 본 나는 너를 단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by 전영칠

1. 쉘 실버스타인의 그림 소설 :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


쉘 실버스타인의 그림 소설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은 나머지 한쪽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완벽한 한쪽을 만난다.

그러나 완벽한 한쪽을 만난 덕분에 동그라미는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동그라미는 찾은 한쪽을 뱉어낸다.

그리고 다시 찾아 헤맨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


평생을 애타게 찾던 나의 한쪽은 마침내 나타나나, 뱉어내고 다시 헤맨다...?

나의 한쪽은 평생을 함께 하는 천생연분의 반려자이기기도 하고, 완성된 내 삶의 가치관 철학과 인생관 철학일 수도 있다. 평자들과 독자들은 이 소설이 현대인의 강박적인 완벽주의를 꼬집는 철학적인 동화라고 박수를 친다.

'평생을 찾던 한쪽을 뱉어낸다' - 이 것은 똑같은 3차원 형국일 뿐이다. 그리고 이 속에는 거시, 미시의 우주관에 부정적 요소가 단단히 숨어 있다.


나는 이럴 것이라 판단한다.


동그라미는 평생을 헤매다 드디어 나의 한쪽을 찾았다. 한쪽이 나와 정확하게 맞아 동그라미가 완성이 되니, 동그라미는 기쁨과 환희에 차 둥글게 회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환하고 밝은 빛으로 화해 자유자재, 4차원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대화도 텔레파시로 종래 입으로 대화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아무런 오해가 없는 섬세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둘은 하나가 되어 마침내 우주와 하나로 살게 되었다...



2.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 : 아브락사스


쉘 실버스타인이 '외적인 짝'을 찾는 과정을 그렸다면, 헤세는 내면의 양면성이 하나로 합쳐져 '자기 자신'이라는 우주와 합일되는 과정을 그렸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주인공 싱클레어는 평생을 '두 세계' 사이에서 방황한다. 부모님의 온기와 질서가 있는 '밝은 세계'와 욕망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어두운 세계'. 그는 쉘 실버스타인의 동그라미처럼 자신의 빈 곳을 채워줄 빛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마침내 '데미안'이라는 존재를 통해 자신을 완성할 마지막 조각을 발견한다.


많은 이들은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나 자아를 찾고 독립된 개체가 된 것에 주목하며, 이를 청춘의 성장통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만남의 본질은 단순한 성장이 아니다. 그것은 내 안의 결핍과 과잉, 선과 악이라는 양 극단의 조각이 완벽하게 맞물려 '아브락사스(Abraxas)'라는 신에게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아브락사스는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인 존재, 즉 모든 대립물이 하나로 녹아든 궁극의 합일을 상징한다.


세상은 싱클레어에게 "밝은 쪽만 택하라"라고 강요하며 반쪽짜리 삶을 권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어두운 조각을 뱉어내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 조각들이 맞물려 마침내 '알'이라는 3차원의 세계를 깨고 나왔을 때, 싱클레어는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나는 이 결합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싱클레어와 데미안, 즉 내면의 두 자아가 서로를 단 한 번도 버린 적 없이 마침내 하나로 맞물리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어 지식인들의 논리로 스스로를 증명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쉘 실버스타인의 동그라미가 완벽한 조각을 만나 빛으로 화했듯, 싱클레어 역시 자신 안의 우주를 발견하며 4차원적 존재로 거듭난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결합을 넘어선 영적인 공명이다. 내 안의 '너'를 단 한 번도 버리지 않고 온전히 품어 안았을 때, 인간은 비로소 나라는 좁은 감옥을 벗어나 우주의 거대한 흐름과 하나가 된다. 결핍은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있던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 빛을 발하는 것일 뿐이다.


쉘 실버스타인의 '한쪽 찾기'와 헤세의 '자아 찾기'는 본질적으로 같은 궤를 그리지만, 헤세는 이를 좀 더 형이상학적이고 우주적인 합일로 끌어올린다.

쉘 실버스타인의 소설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에서 보았던 '4차원적 존재', '텔레파시적 소통', '우주와의 합일'이라는 키워드는 데미안의 '알을 깨고 나오는 새'와 '아브락사스'와 연결된다.



3. 생텍쥐페리의 동화 <어린 왕자>


unnamed.jpg 어린왕자와 여우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여우'와 '길들임'의 철학은 내가 지향하는 '단 한 번도 버린 적 없는 합일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가장 아름다운 소재다. 쉘 실버스타인의 동그라미가 형태적 결합을 찾았다면, 어린 왕자와 여우는 투명한 관계의 맺음을 통해 서로의 우주가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생텍쥐페리의 동화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왕자에게 '길들인다'는 것의 비밀을 건넨다. 여우에게 어린 왕자는 수많은 소년 중 하나일 뿐이고, 왕자에게 여우 역시 수천 마리의 여우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길들이는 순간, 그들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 쉘 실버스타인의 동그라미가 자신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온 세상을 헤맸던 것처럼, 여우 역시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줄 '너'를 기다린다.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길들임은 구속이자 소유다. 누군가에게 매이는 것이고, 그가 떠날 때 눈물 흘려야 하는 슬픈 약속이다. 그래서 평자들은 여우가 왕자를 보내주며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한 대목에서 이별의 미학을 찬양한다. 하지만 나는 이 지점에서 3차원적 해석을 넘어선 합일의 세계를 본다.


여우는 왕자가 떠난 뒤에도 결코 혼자가 아니다. 왕자의 머리카락을 닮은 '금빛 밀밭'을 볼 때마다 그는 왕자의 숨결을 느낀다. 밀밭은 더 이상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왕자와 여우가 하나로 연결된 4차원적 통로가 된다.

나는 이들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어린 왕자가 자신의 별로 돌아갔을 때, 여우는 그를 잃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우의 내면에는 왕자라는 우주가 완벽하게 이식되었다. 쉘 실버스타인의 동그라미가 조각을 찾아 빛으로 화했듯, 여우와 왕자 역시 '길들임'이라는 고차원적 대화를 통해 서로를 단 한 번도 버린 적 없는 영원한 일체가 된 것이다.

둘은 떨어졌으나 한 마음이라는 확장된 철학적 깨달음을 공유한 것이다. 3차원적 공간에서는 이별했으나 근원으로는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이제 입을 열어 사랑을 고백할 필요가 없다. 바람에 흔들리는 밀밭의 소리, 밤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방울 같은 별들의 웃음소리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은 언어를 넘어선 텔레파시이며, 시공간을 초월해 우주와 하나로 사는 존재들의 대화법이다.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으나 질량과 에너지는 공유되는 상태,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단 한 번도 버린 적 없는' 존재들의 진정한 완성이다.



4. 에필로그


동그라미, 어린 왕자와 여우, 아브락사스 - 우리는 단 한 번도 서로를 버린 적이 없다



쉘 실버스타인의 동그라미, 헤르만 헤세의 싱클레어, 그리고 생텍쥐페리의 여우.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의 한쪽' 혹은 '너'를 찾아 헤맨 이들은 결국 세상이 말하는 '이별'이나 '결핍'과는 다른 형태의 완성을 경험한다. 겉보기에는 각자의 길을 가거나, 다른 존재로 변화하는 듯 보이지만, 그들 모두는 공통적으로 3차원적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선 합일을 이룬다.

동그라미는 완벽한 조각을 찾아 뱉어냈지만, 그것은 기존의 형태적 한계를 깨고 4차원적 빛으로 화하기 위함이었다.


싱클레어는 내면의 선과 악을 모두 품어 아브락사스라는 우주적 합일을 이루며 알을 깨고 나왔다.

그리고 여우는 어린 왕자를 떠나보냈지만, 그의 금빛 밀밭은 영원히 왕자의 숨결을 품은 텔레파시의 통로가 되었다.


이 모든 이야기에서 나는 하나의 진실을 발견한다.

우리가 평생을 애타게 찾고 헤맨 '나의 한쪽' 혹은 '너'는 결코 외부에 존재하는 '타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내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그러나 세상의 잣대로 인해 부정되거나 잊혔던 또 다른 나였다. 그리고 그 '너'는 결국 내 우주의 일부이자, 나를 3차원의 한계에서 벗어나게 해 줄 열쇠였다.


동그라미(쉘 실버스타인)는 '나의 한쪽'이라는 형태적 완성을, 싱클레어(헤르만 헤세)는 '내면의 빛과 어둠'이라는 심리적 완성을, 여우(생텍쥐페리)는 '너와 나'라는 관계적 완성을 이룬다.

이 세 가지는 결국 '4차원 이상의 존재로서의 합일'이라는 결론으로 수렴하게 되는 것이다.


단 한 번도 버린 적 없는 너. 그것은 물리적 존재의 곁을 지킨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내면의 결핍과 외면의 욕망을 인정하고, 타인의 존재를 나의 우주 안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말과 글이 필요 없는 텔레파시로 소통하는 존재가 된다.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는 존재, 이미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서로를 '잃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를 '발견하고 품어 안으며' 우주를 확장하는 여정이다. 이별은 환상이고, 결핍은 착각일 뿐이다. 나는 너를 단 한 번도 버린 적이 없으며, 너 또한 나를 단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우리는 애초에 하나였고, 영원히 하나일 것이다.




[작가의 한마디] 젊은 시절에 읽었던 쉘 실버스타인의 동그라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그리고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의 세계는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행위(Doing)의 세계’에서 살지라도 늘 ‘존재(Doing)의 세계’를 확인하는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요? 우주는 하나로 이어져 있고, 전체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전체가 있으니까요.


다음 연재 예고: 호접몽(胡蝶夢), 경계가 지워진 자리에서 만난 온전한 '우리'

문학(동그라미,데미안,여우)에서 철학(장자)으로 확장하여 중국의 성자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통해 경계가 지워진 자리에서 만난 온전한 '우리'라는 제목으로, '나는 단 한번도 너를 버린적이 없다'라는 주제를 다뤄보고자 한다. 나는 이 시리즈의 글들이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차원으로 지평이 넓어져 삶의 에너지가 충전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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