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은 누운 채 왼쪽 검지에 깊이 파인 상처자국을 보았다.
시다 시절 수출물량으로 재촉하는 박반장과 밤 10시의 피곤함으로 서둘러 쪽가위질을 하다가 왼손 검지를 쪽가위에 베였었다.
선홍색 피가 튀고 옷감 한쪽에 붉은 피가 묻었다. 옥순 언니가 재빨리 최연을 보고 순간접착제와 빨간약과 붕대, 그리고 테이프를 건넸다.
- 피를 닦고 접착제를 조금 발라. 붕대로 감고 테이프를 돌려.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면서 재빨리 말했다. 최은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자 옥순이 와서 상처를 닦고 빨간약을 발랐다. 그리고 빨간약을 대충 닦고 나서 상처 난 부위에 접착제를 바른 후 붕대를 감고 테이프로 돌렸다.
시다 기간 동안 최은은 주변에서 밤늦게 일하다가 쪽가위질에 손가락을 베인 모습과, 심지어는 미싱사가 순간적으로 졸다가 미싱 바늘에 검지 속가락을 관통당하는 모습도 보았다.
그것을 본 박반장은 옷감에 피 묻는다고 호통을 쳤다. 그녀들이 긴급하게 조치하는 것을 본 최연은 기가 막혔다. 이번에는 최연이 그런 모습을 당할 줄 몰랐다.
벌집은 벽이 얇아 옆방에서 속삭이는 소리, 라디오 소리, 심지어 숨소리까지 다 들렸다. 프라이버시가 전혀 없는 공간이었다. 좁은 복도에 수십 켤레의 작업화가 놓여 있어 고무 냄새와 발 냄새가 진동했고, 공동 화장실에서 올라오는 악취가 방안까지 스며들었다.
창문이 제대로 없어 빨래를 방 안에 줄을 매달아 널어야 했고, 그 때문에 방안은 늘 눅눅하고 곰팡이 냄새가 났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의 코 고는 소리가 마치 최연의 귀에 대고 내뱉는 숨결처럼 생생했다. 어둠 속에서 최은은 아픈 몸을 뒤척이며 천장을 보았다. 이곳은 또 다른 무덤인 것인가. 나는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인가.
그녀에게 동생이 묻힌 망월동의 붉은 흙들의 모습이 스쳤다. 이곳 가리봉동의 벌집은 광주 망월동의 무덤보다 조금 더 따뜻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옆에 누워 있는 이들은 법에 맞는 처우를 받아야 한다. 인간은 법 앞에 동등하다. 최은은 오랫동안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출근 시간이 되었다. 30여 명의 거주자가 단 하나의 화장실 앞에 줄을 선다. 최은은 배 속에서 신호가 오지만, 앞선 사람의 시간이 길어지자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는 이웃들과 섞여 아수라장을 경험한다.
화장실에 줄 서던 한 사람이 방에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다시 서던 줄에 오자 다른 이가 그녀에게 고함을 질렀다.
- 새치기하지 마.
- 뭐라고? 여기에 서 있다가 방에서 수건을 들고 온 것인데 무슨 소리야?
이런 모습은 일상사다. 최은은 이 과정에서 옆방 사람과 사소한 시비가 붙으며 이웃 간의 정보다는 생존 본능만 남은 삭막한 현실을 목도한다.
겨우 들어간 화장실의 악취와 비위생적인 환경은 그녀가 광주에서 꿈꿨던 평범한 삶과 극명하게 대비 되었다. 씻지도 못한 채 작업복을 꿰어 입고 공장으로 뛰어가는 길에, 최은은 마치 자신이 공장의 부품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약해지면 안 돼. 힘을 내자,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주말 오후, 최은이 영등포 시장의 시끌벅적한 순대국밥집 골목으로 들어서서 식당 한집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 한쪽 창가에 같은 단국대 박동열 선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선배는 학출 2년을 보내고 군대를 제대한 3학년 복학생으로 운동권 선배였다.
- 이쪽이야.
그가 한쪽 손을 가볍게 들었다.
- 잘 있었어?
- 형, 오랜만이에요.
그가 순댓국 두 그릇을 시켰다.
그가 최연의 두 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 고생이 많구먼.
지금은 전두환 신군부의 폭압이 서슬 퍼렇던 '동토의 시대'다.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민중항쟁이 짓밟힌 직후라, 어느 곳에서든지 공개적인 투쟁은 거의 불가능했고 모든 것은 언더그라운드에서 은밀하고 치밀하게 이루어졌다. 구로공단의 노동조직 활동은 거창한 파업보다는 '소모임'을 통한 조직원 확보와 의식화, 그리고 아주 작은 현장 투쟁의 축적이 핵심이었다.
박선배는 최은에게 간단하게 핵심적인 활동 방향을 지시하고, '학습 자료'를 건넸다. 최은은 주요 인물, 노동 조건, 불만 사항 등을 깨알같이 적은 메모를 적은 공장 내 동향 보고서를 전달했다.
- 요새 분위기가 좀 어때? 3라인에 들어온 영숙이란 친구를 보고 있다고 했지?
- 깡다구가 있어요. 반장한테 말대꾸도 하고. 그런데 아직은 먹고사는 게 너무 급해서…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 서두르지 마. 괜히 들쑤셨다가 문제 생기면 안 되니까. 자, 이거. 이번 주 '도시락 반찬'이야.
선배가 식탁 밑으로 건넨 것은 신문지에 두툼하게 쌓인 등사기로 밀어서 만든 <노동야학교재> 갱지 뭉치였다. 최은은 그것을 재빨리 자신의 시장바구니 깊숙한 곳, 배추 포기 밑으로 밀어 넣었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그들은 식사 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은이 재봉사가 된 지 1개월이 지날 무렵, 살고 있는 방에서 연탄가스가 샜다.
벌집촌은 연탄보일러를 사용하는 온돌 방식이었으나 일반적인 온돌과는 차이가 있었다.
좁은 대지에 방을 다닥다닥 붙여 만들다 보니 연탄아궁이와 방바닥의 배관이 부실하게 연결된 경우가 많았다. 벌집촌에서 방바닥 갈라진 틈으로 연탄가스가 스며드는 사고가 빈번했다. 영자는 머리맡에 동치미 국물을 놓아두고 잤다.
최은 역시 추위보다 연탄가스 중독이 더 두려웠다. 잠들기 전 바닥의 장판을 들춰보거나, 머리맡에 동치미 국물을 두고 자는 것이 벌집촌의 일상이었다.
연탄재를 복도에 내놓으면 공간이 더 좁아져 이웃 간에 다툼이 생기기도 했다.
최은과 영자는 오후에 공장에 출근해 일을 할 수 있었으나 옥순은 병원에 실려가 3일 동안 꿈쩍도 하지 못했다. 옥순이 깨어나 공장장과 면담을 하고 나서 친구가 근무하고 있다는 창신동 봉제공장으로 이직했다.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있고 월급 20,000을 인상해 준다고 했다. 옥순은 경력 5년 된 숙련된 재봉사다. 연탄냄새 나는 이곳이 넌덜머리가 났는지도 모른다.
최은은 영숙을 불렀다. 영자와 함께 3명이 방을 썼고 연장자 최은은 방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