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반장이 지랄해서 힘들었지?
최은이 김영자와 박영숙과 함께 라면을 끓여 먹으며 물었다.
- 네 언니.
영자가 맞장구쳤다.
- 근데 영자야, 우리가 왜 이렇게 개처럼 일해도 월급이 요 모양일까?"
라면 밥상을 치우고 난 후 최은은 방에 함께 앉은 영자와 영숙에게 꼬깃꼬깃한 종이 뭉치를 펼쳐 보였다. 갱지에 등사된 근로기준법이었다.
- 법에는 하루 8시간 일하라고 돼 있대. 근데 우린 왜 14시간씩 일하지? 사장이 법을 어기고 우리 피를 빨아먹는 거야.
- 은이 언니, 이게 뭐야? 뭔 글씨가 이렇게 깨알 같아?"
영자가 관심을 보였다.
- 영자야, 이게 '근로기준법'이라는 거야. 나라에서 노동자들 보호하라고 만든 법 이래.
영숙이가 최은에게 물었다.
- 법이요? 그런 게 있어요? 사장이 까라면 까는 거 아니에요? 우리 같은 공순이들한테도 법이 있어요?
- 여기 봐봐. 제55조. '사용자는 근로자에 대하여 매주 1회 이상의 유급휴일을 주어야 한다.' 우리 일요일에도 특근하라고 하면 나가잖아. 그거 다 불법이래. 돈도 안 주고 부려먹는 거라고.
- 정말요? 그런 게 있어요? 시상에… 난 그것도 모르고 반장이 나오라면 '네 네' 하고 나갔는데… 그게 다 도둑놈들이었네!
영자의 거친 손가락이 법 조문의 글자를 더듬었다. 최은은 처음으로 자신의 권리가 적힌 문장을 마주한 노동자들의 눈빛을 보았다. 위장취업한 지 7개월째 되는 때였다. 이때부터 자연스러운 3명의 소모임이 형성되었다. 최은은 답답했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았다.
서너 명이 누우면 꽉 차는 방에 퀴퀴한 땀 냄새와 석유곤로 냄새가 배어 있는 곳. 그곳은 그녀들이 유일하게 쉴 수 있는 곳이었다. 조금씩 이야기가 진전되면서 보안을 위해 한여름에도 창문에 두꺼운 담요를 쳐서 불빛이 밖으로 새 나가지 않게 막았다. 목소리는 옆방에 들리지 않게 소곤거렸다.
등사기로 민 유인물, 혹은 대학 노트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 베껴 쓴 <근로기준법> 발췌본, 쉽게 풀어쓴 노동 야학 교재가 선보였다.
영자와 영숙이 제일 관심을 보인 것은 야근을 해도 대충 빵과 우유로 퉁치는 그 시간에 시간당 1.5배의 돈을 주어야 한다는 항목이었다. 그것을 관심 있어하면서도 돈을 받을 수 있을까 라며 반신반의 해 했다.
- 이 게 다 우리가 약해서 찾아먹지 못한 거라고.
최은은 평일과 일요일에 하는 야학으로 이들과 소모임을 가지기 시작했다.
평일 밤은 잔업이 보통 밤 10~11시에 끝나는 날로 하루, 그리고 유일하게 쉬는 날인 일요일 오후에 모여 집중적으로 공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봉제공장은 일요일에도 특근을 시키는 경우가 많아 늘 불안정한 일정이었다.
최은은 구로지역 노동자 연맹에서 도움을 받았다. 가리봉동 인근 가리봉천주교회와 근처의 개척교회 지하 교육실이 주된 장소였다. 종교 시설은 경찰의 공권력이 함부로 들어오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이곳저곳에서 15, 17세 어리고 젊은 노동자들이 모여들어 공부했다.
한여름, 공장 안은 찜통이었다. 원단 먼지가 안개처럼 자욱해서 앞이 잘 안 보일 지경이었다. 회사는 전기세를 아낀다며 대형 환풍기를 틀어주지 않았다. 작은 환풍기는 몇 개 있었지만 고장 난 것이 더 많았다.
미싱을 돌리던 최은이 옆자리 순자와 눈빛을 교환했다. 어젯밤 쪽방에서 약속한 신호였다. 최은이 미싱 발판에서 발을 떼며 큰 소리로 말했다.
- 아이고! 숨 막혀서 못 해 먹겠네!
최은의 미싱이 멈추자, 약속이나 한 듯 순자의 미싱도 멈췄다. 드르륵거리던 굉음 속에 정적이 흘렀다. 그러자 그 옆, 또 그 옆의 미싱사들도 하나둘 눈치를 보며 기계를 멈췄다. 소모임 멤버들이 중심이 된 '침묵의 태업'이었다. 김 반장이 눈을 부라리며 달려와서 소리쳤다.
- 뭐야! 왜 다들 기계를 세우고 지랄들이야! 물량 펑크 나면 니들이 책임질 거야?
최은은 속으로 떨렸지만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 반장님, 숨을 못 쉬겠어요. 환풍기 좀 틀어주세요. 이러다 우리 다 폐병 걸려 죽어요.
- 이년이 미쳤나! 어디서 말대꾸야!
김 반장이 손을 치켜들었지만, 평소엔 주눅 들었을 다른 여공들이 일제히 김 반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서늘한 눈빛들에 눌려 반장은 멈칫했다. 그날 오후, 언제 틀었는지도 모를 대형 환풍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최은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가슴속에선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날 이후 최은은 더 자신감이 생겼다.
최은이 건네는 근로기준법 소책자와 야학 초대장은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의식화'의 시작이었다.
야학에는 중·고등 과정을 가르치는 '검정고시 야학'과 노동법과 역사를 가르치는 '노동야학'이 있었다.
소모임이 활성화된 것에는 검정고시 야학이 도움이 되었으나 일단 모이고 보면 야학담당자들은 은근히 노동야학을 가르쳤다.
최은은 점심시간, 시끄러운 미싱 소리가 잦아든 틈을 타 친해진 시다 숙자의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접힌 종이 메모지를 찔러 넣었다. 숙자는 영문도 모른 채 최은을 쳐다봤다. 최은은 아무 말 없이 숙자의 거칠어진 손등을 꾹 눌렀다. 메모지에는 '일요일 오후 2시, 가리봉 오거리 약국 앞'이라 적힌 쪽지가 들어 있었다.
- 밥 한번 먹자. 기다릴게.
숙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은은 야학에서 봉제공장 출신 노동자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그녀의 첫 강의는 <우리는 왜 가난한가>였다. 그 강의를 마치고 <인간다운 삶을 위한 노동법 첫걸음>으로 들어가면 최은은 자신도 모를 열정이 가슴속에서 솟았다.
제1장: 노동자란 누구인가?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임금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이다.
사장은 기계를 사고 원단을 사지만, 노동자의 ‘인격’을 산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장에게 고용된 노예가 아니라, 계약을 맺은 대등한 인간이다.
제2장: 근로기준법의 핵심
제42조(근로시간):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1일 8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왜 14시간을 일하는가? 고생한 만큼 보상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제45조(유급휴일): 일주일에 평균 1회 이상의 유급휴일을 주어야 한다. 이 게 현행 법이다. 빨간 날에도 미싱을 돌리는 것은 불법이다!
강의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한 사내가 그녀를 찾아왔다. 길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