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11

by 전영칠


길명이 웬일이야?

길명은 국민학교 동창에 동국대 동문이다.

- 잘 있었어? 고생이 많다.

길명은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에게 말했다.

- 다른 사람이 못하는 일을 네가 하는구나, 존경해.

그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 위문품을 전달하려 왔지.

그는 내게 보따리를 건넸다. 그리고 봉투도 손에 쥐어줬다.

- 어머, 봉투까지. 헌데 누구야?

- 익명의 후원자야. 나도 몰라.

- 그래? 고마워.

그녀는 보따리를 풀었다. 상자 안에는 상처에 바르는 연고, 소독약, 가위, 거즈, 소화제 등 각종 긴급구호 약품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최은은 무엇보다도 이 약품들이 반가웠다. 일주일 전 그녀의 뇌리에 밤 10시, 재봉바늘에 관통당한 길숙의 피 묻은 손가락이 스쳐 지나갔다. 봉투에는 50만 원이 들어 있었다.

- 전해줘. 정말 고맙다고 꼭 전해줘.

- 내가 오래 있으면 도움이 안 되겠지. 갈게, 몸 조심하고.

그가 최은의 어깨를 잡았다.

최은의 코가 시큰거렸다. 우리를 알아주는 이들이 있다……



좁은 방 안, 연탄가스 냄새가 미세하게 배어 있는 공간에서 최은과 여공 영자가 마주 앉았다. 최은에 비친 영자의 손이 미싱 기름과 바늘에 찔린 상처로 가득했다.

최은은 영자의 손에 상처에 바르는 연고를 발라주었다.


그리고는 사온 통닭을 영자에게 권하며 말했다.

- 네 손이 말이 아니구나. 우리가 잘 살아야지... 영자야, 여기 이 글자 읽어봐. 이게 뭐라고 쓰여 있지?

- 근, 로, 기, 준, 법. 언니, 이게 대체 뭔데 우리 사장님이 이거 가진 사람들은 다 빨갱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어.

- 이건 빨갱이 책이 아니야. 사장님이 영자 너한테 하루에 14시간씩 일을 시키고, 잔업 수당도 제대로 안 주는 게 '죄'라는 걸 적어놓은 법전이야. 영자야, 여기 8시간이라고 적힌 거 보이지? 사람은 하루에 8시간만 일하는 게 법으로 정해져 있어.

- 에이, 언니. 전에도 듣기는 들었지만 8시간만 일해서 어떻게 옷을 다 만들고 돈을 벌어? 우리 공장에서 그렇게 일했다가는 다 쫓겨나는 거 아니야?. 사장님이 그러는데, 우리가 열심히 안 하면 회사가 망하고 그럼 우리 식구들 다 굶어 죽는댔어.

최은은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 회사가 망하는 게 아니라, 사장이 가져갈 이익이 조금 줄어드는 것뿐이야. 영자야, 너 어제 잠 몇 시간 잤어?

- 세 시간. 잔업 끝나고 벌집 들어갔더니 새벽 한 시더라고.

- 너는 기계가 아니야. 너는 잠을 자야 하고, 맛있는 걸 먹어야 하고, 쉬어야 하는 사람이야. 이 책에 적힌 건 대단한 욕심이 아니야.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국가가 약속한 최소한의 권리야. 우리가 이걸 모르면 평생 사장이 시키는 대로 미싱만 돌리다 늙어 죽을 거야.

- 사람? 언니, 나도 진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공순이 말고, 진짜 사람 말이야.

- 이미 너는 사람이야. 단지 네 권리를 도둑맞았을 뿐이지. 이제 그걸 하나씩 되찾아오는 공부를 할 거야. 무섭니?

- 조금요. 근데 언니랑 같이 있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밖에서는 공장의 야간작업 소리가 멀리서 웅웅 거리고, 방 안에서는 낡은 카세트테이프에서 오래된 가요가 흘러나왔다.

최은의 은밀한 작업은 조용히, 그리고 조금씩 이어졌다.


그런데 최은이 퇴근 후 벌집촌 공동 세면장에서 씻다가, 가방 안쪽 깊숙이 숨겨둔 '전환시대의 논리' 책 모서리가 삐져나온 것을 선배 재봉사 영옥이 보았다.

"은이 너, 가방에 든 이 두꺼운 책은 뭐야? 재봉사가 이런 걸 읽어?"

최은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 아... 그거, 오는 길에 누가 버린 게 종이질이 좋아 보여서요. 나중에 불 땔 때 쓰거나 밑 닦을 때 쓰려고 주웠어요. 영옥 언니, 나 글자도 잘 모르는 거 알잖아요.

영옥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최은을 한참 바라보았다.

- 하긴, 네가 무슨... 조심해, 의심받아.

그녀가 자기의 숙소로 향했다. 그날 이후 최은은 영옥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열흘 전 최은이 신도림역 근처에서 박동열 선배를 만났을 때 위장근로자 영학 선배가 경찰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최은은 더욱 조심했다.

그런데 야학 현장에서 일이 터졌다. 그녀가 야학에서 근로자들을 가르친 지 3개월쯤 되던 날 밤이었다. 형사들의 급습이 있었다. 망을 보던 이들이 그것을 알렸다. 그녀는 뒷문 담장으로 야학 일행을 인도했다. 그런 일이 있을 것을 예상한 비밀 루트였고, 그녀는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이 길을 연습했으나 가슴이 떨리고 발이 후들거렸다.

그런데 다들 잘 피했으나 뒤늦게 온 영자가 형사에게 잡히고 말았다.


야학을 급습한 경찰들에게 영자가 끌려간 뒤, 최은은 더 이상 '무식한 미싱사'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공장 정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여공들을 설득해 경찰서로 향했다.

최은은 면회를 신청했다.

가리봉 경찰서 앞은 눅눅한 밤비에 젖어 있었다. 일행은 경찰서 건물의 위압감에 질려 금방이라도 흩어질 듯 불안해 보였다. 최은은 그들의 떨리는 손을 느꼈다. 5월의 광주 망월동에서도 사람들은 이렇게 떨었다. 하지만 그 떨림이 모여 10일간의 거대한 함성이 되었던 것을 최은은 기억했다.


정보과 형사가 껌을 씹으며 경찰서 정문에서 말했다.

- 야, 이 공순이들아. 좋은 말로 할 때 가서 잠이나 자. 니들 이거 다 빨갱이질이야, 알아?"

'빨갱이'라는 단어가 최은의 심장을 날카롭게 찔렀다. 광주를 고립시키고 사람들을 죽일 때 국가가 전매특허처럼 사용했던 그 말. 최은은 형사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


- 법대로 하시면 되지요. 영자가 무슨 법을 어겼습니까? 근로기준법 가르친 게 죄라면, 법을 만든 국가가 범죄자 아닌가요?

최은의 목소리가 빗줄기를 뚫고 울려 퍼졌다. 당황한 형사가 최은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자, 뒤에 서 있던 옥순과 여공들이 일제히 최은의 팔을 붙잡고 스크럼을 짰다. 최은의 일행 중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 동료로서 영자 면회 좀 하겠다는 데 뭐가 잘 못 되었습니까?

그리고 기름때 묻은 작업복들을 서로의 몸을 밀착시켰다. 순간 최은은 깨달았다. 지식인으로서 그들을 가르치려 했던 오만함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지금 자신을 지켜주는 것은 어려운 법률 지식이 아니라, 함께 잔업을 견디고 짬밥을 나눠 먹던 이들의 거친 손마디였다. 비에 젖은 경찰서 차가운 바닥 위에서, 최은은 비로소 광주의 유령으로부터 벗어나 '가리봉의 노동자'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은 형사들의 막무가내로 잠시 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법은 멀고 힘은 가까웠다.

노동운동에 가해진 사상적 탄압은 집요하고도 잔인했다. 단순히 월급을 더 달라는 요구조차 북괴의 지령을 받은 파괴 선동으로 둔갑하던 시대였다. 형사는 최은의 엉치뼈를 구둣발로 툭툭 치기까지 했다.


- 니들 같은 학출들이 들어와서 순진한 애들 물들이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이건 근로기준법이 아니라 불온사상이야. “

최은이 돌아와 전율했다. 그녀가 가르친 것은 '인간답게 살 권리'였으나, 권력의 눈에는 '체제를 뒤엎는 빨간색'일뿐이었다. 형사의 눈에 서린 살기는 광주의 계엄군과 똑 닮아 있었다. 그 단어 하나로 영자와 최은은 대한민국이라는 지도 위에서 지워져야 할 붉은 점이 되었다. 사방이 붉은색으로 물드는 환각 속에서 최은은 차가운 빗물을 삼키며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이자, 지울 수 없는 낙인에 대한 비명이었다.


영자가 사흘 만에 경찰서에서 풀려나 야학으로 돌아왔을 때, 지하 단칸방의 공기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돌아온 영자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눈가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영자의 눈빛은 이전처럼 겁먹은 시다의 그것이 아니었다. 야학에 함께한 여공들은 영자를 껴안고 소리 없이 울었다. 이전의 야학이 '글자를 배우고 희망을 노래하던 곳'이었다면, 이제 그곳은 '운명을 공유하는 요새'가 되었다.


- 언니, 나 무서웠어. 근데… 형사가 내 뺨을 때릴 때 속으로 언니가 해준 말이 생각났어. 나는 기계가 아니다, 나는 사람이다-.

영자의 떨리는 목소리에 야학 방 안은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이제 그들에게 공부는 선택이 아닌 생존이 되었다. 책상 위엔 <근로기준법> 대신 누군가 가져온 붉은 머리띠가 놓였다. 배움의 열기는 투쟁의 결의로 변해갔다. 최은은 여공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슬픔이 아니라, 강철처럼 단단해지는 담금질의 과정임을 깨달았다. 야학은 더 이상 학교가 아니었다. 가리봉동의 어두운 배후에서 불을 밝히는 저항의 심장으로 서서히 불타고 있었다.



공장의 실세인 강 반장은 예리한 눈썰미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최은이 들어온 날부터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과 지나치게 곧은 자세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잔업이 한창인 밤, 강 반장이 최은의 미싱 옆으로 다가와 멈춰 섰다. 기계 돌아가는 소음 속에서도 그의 낮은 목소리는 최은의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 최은이! 너, 고향이 어디라고 했지?

- 전남… 영광입니다, 반장님.

최은은 최대한 투박한 사투리를 섞으며 고개를 숙였다. 강 반장은 최은이 박음질한 원단을 들어 올리더니 혀를 찼다.

- 영광이라... 근데 말이야, 시골에서 갓 올라온 애 치고는 단어가 너무 고급져. 아까 '부당하다'라고 했나? 그런 말은 공순이들 입에서 쉽게 나오는 말이 아니거든. “

최은의 등 뒤로 식은땀이 찔끔거렸다. 그녀는 미싱 페달을 밟는 발끝에 힘을 주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 라디오에서 들었습니다. 하도 억울한 일이 많으니 그런 말만 귀에 쏙쏙 들어오대요."

강 반장은 은의 가방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 어제 경찰서 앞에 갔었다며? 영자 그 가시나 데리러. 너, 거기서 소리 지르는 게 꼭 대학생들 데모하는 폼이더라?


최은은 미싱을 멈추고 강 반장을 똑바로 쳐다봤다. 여기서 피하면 끝장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 반장님, 저 같은 게 대학은 무슨… 동생 같은 영자가 잡혀갔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반장님도 우리 고생하는 거 다 보시잖아요.

강 반장은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최은의 어깨를 툭 쳤다.

- 그래, 조심해라. 너무 똑똑하면 이 바닥에서 오래 못 버티는 법이니까.

강 반장이 멀어지자 최은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뒷모습은 언제든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챌 수 있는 사냥개처럼 보였다. 공장은 이제 일터가 아니라, 정체를 숨겨야 하는 적진(敵陣) 한복판이었다.


최은에게 '빨갱이'라는 말은 단순한 욕설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논리를 잠재우고 생명을 말살해도 좋다는 국가의 공식적인 '살인 면허'와 같았다.

형사의 입에서 튀어나온 '빨갱이'라는 단어에는 비릿한 쇠 냄새가 풍겼다. 그 말이 가리봉동의 눅눅한 공기를 가르는 순간, 최은의 발밑은 거대한 구덩이처럼 꺼져 내려갔다. 80년 5월, 광주역 광장에서 대검을 든 군인들이 쓰러진 시민들을 향해 내뱉던 그 단어였다.


당시 노동운동에 가해진 사상적 탄압은 집요하고도 잔인했다. 단순히 월급을 더 달라는 요구조차 북괴의 지령을 받은 파괴 선동으로 둔갑하던 시대였다. 형사는 최은의 뺨을 손가락으로도 툭툭 치며 비웃었었다.

- 니들 같은 학출들이 들어와서 순진한 애들 물들이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이건 근로기준법이 아니라 불온사상이야.


그들은 도대체가 막무가내였다. 아무런 증거 없이도 넘겨 집고 주먹으로 허세를 부렸다. 최은이 가르친 것은 '인간답게 살 권리'였으나, 권력의 눈에는 '체제를 뒤엎는 빨간색'일뿐이었다.

형사의 눈에 서린 살기는 광주의 계엄군과 똑 닮아 있었다. 그 단어 하나로 영자와 최은은 대한민국이라는 지도 위에서 지워져야 할 붉은 점이 되었다. 사방이 붉은색으로 물드는 환각 속에서 최은은 차가운 빗물을 삼키며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이자, 지울 수 없는 낙인에 대한 비명이었다.



경찰에 쫓기는 야학 현장 가리봉동 어느 개척교회 지하, 촛불 하나에 의지해 공부하던 중, 구둣발 소리와 함께 "문 열어!" 하는 고함이 들린다. 최은은 능숙하게 뒷문을 열어 여공들을 대피시킨다. 좁은 골목길, 전봇대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최은. 멀리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는 광주의 기억을 소환하며 그녀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 그런 형국이 몇 달에 한번씩은 연례행사처럼 계속되고 있었다. 최은은 겉으로 표시 내지는 않았으나 속으로 지쳐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잔업이 끝난 심야에 강 반장은 최은을 자재 창고로 불러냈다. 쌓여 있는 원단 더미 사이로 먼지가 뿌옇게 일었고, 희미한 알전구 아래 강 반장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강 반장은 주머니에서 때 묻은 종이 한 장을 꺼내 최은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그것은 그녀의 본명 '최은'이 선명하게 적힌 대학 학생증 사본이었다.


- 최은! 61년생, 단국대학교 국어국문과! ‘영광에서 온 재봉사 최은' 치고는 뒷조사가 너무 쉽더군.

강 반장의 비릿한 웃음이 창고 안을 채웠다. 최은의 심장이 얼음물에 담긴 듯 차갑게 식었다. 강 반장은 최은의 턱을 거칠게 잡아 올리며 낮게 읊조렸다.

- 너희 같은 것들이 들어오면 공장에 피바람이 불어. 광주에서 죽어 나간 놈들처럼 되고 싶어서 환장을 한 건가? 당장 내일부터 짐 싸서 꺼져. 아니면 이 종이 한 장 들고 경찰서로 갈까? 그럼 너뿐만 아니라 영자랑 그 야학쟁이들 전부 줄줄이 사탕으로 굴비 엮이듯 엮일 텐데."

그는 최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 빨갱이 년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야." 강 반장의 손에 힘이 들어갈수록 최은은 공포보다 더 깊은 모멸감을 느꼈다. 자신이 숨겨온 정의감이 사냥개의 이빨 앞에 얼마나 무력했는지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강 반장의 협박보다 최은을 더 처참하게 무너뜨린 것은 따로 있었다. 최은이 가장 아끼고 정성을 다해 가르쳤던 신참 공순이 '미숙'이었다.

미숙은 야학에서도 가장 앞자리에 앉아 최은의 말을 하나하나 받아 적던 아이였다. 하지만 최은이 쫓겨나기 직전, 사무실 밖에서 강 반장에게 야학 명단을 건네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미숙과 눈이 마주쳤다. 미숙의 눈에는 죄책감 대신, 동생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동료의 영혼을 판 자의 지독한 생존 본능만 서려 있었다.


- 언니, 미안해요. 근데 나도 살아야 하잖아요. 반장님이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우리 식구들 다 굶어 죽는댔어요.

공장을 떠나는 최은의 뒤에서 미숙이 말을 했다.

최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가르쳤던 '인간의 존엄'은 배고픔이라는 원초적인 폭력 앞에 너무나 가벼웠다. 최은은 그날로 공장에서 '권고사직'이라는 명목하에 쫓겨났다. 동료들의 눈빛은 차가웠고, 최은이 머물던 벌집촌 쪽방에는 그녀가 남긴 빨간 실타래만이 굴러다녔다.


공장에서 쫓겨난 최은은 가리봉동의 더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 이제 그녀는 '위장취업자'가 아닌, 본격적인 '노동 활동가'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그녀의 새로운 거점은 두 곳이었다.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고 습기가 가득한 지하방. 그곳으로 낮에는 텅 비어 있지만, 밤이 되면 잔업을 마친 여공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최은은 이곳에서 잉크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유인물을 복사하며 노동법을 가르쳤다. 공장의 소음 대신, 낮은 기도로 위장된 투쟁의 노래가 지하를 채웠다.


가리봉 천주교회는 경찰의 구둣발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는 성역이었다. 최은은 이곳에서 더 체계적인 야학을 운영했다. 성당의 높은 천장 아래서 그녀는 여공들에게 말했다.

- 우리는 공장에서 쫓겨난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 썩은 공장을 버린 것입니다. 이제 이곳에서 우리의 진짜 이름을 찾읍시다.

최은은 성당 제단 위의 붉은 등을 바라보며 광주의 기억을 되새겼다. 죽음의 공포는 여전했지만, 이제 그녀의 곁에는 미숙 같은 배신자도, 강 반장 같은 사냥개도 침범하지 못할 '보이지 않는 연대'가 싹트고 있었다. 빗물이 새는 지하교회 벽면에 최은은 붉은 페인트로 작게 적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