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12

by 전영칠



인파가 북적이는 가리봉 시장 입구의 만둣집 뒤편, 전구 불빛조차 닿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퇴근 벨 소리와 함께 여공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 틈에서 영자가 숨을 헐떡이며 나타났다. 영자는 주위를 살핀 뒤 최은의 손에 꼬깃꼬깃한 봉투 하나를 쥐어주었다. 그 안에는 강 반장이 작성한 '요시찰 인물 명단'과 공장의 다음 달 납기 스케줄이 적힌 메모가 들어 있었다.


- 언니, 미숙이는 그날 이후로 공장에서 유령 취급받아. 강 반장이 약속했던 보너스도 안 줬대. 매일 밤 벌집촌 복도에서 울기만 해.

영자의 말에 최은은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다. 증오보다 가련함이 앞섰다.

영자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작은 사탕 하나를 꺼내 은의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 언니, 우린 아직 포기 안 했어. 언니가 가르쳐준 대로 틈틈이 책 읽고 있어.

최은은 영자의 거친 손을 꽉 잡았다. 공장 밖으로 밀려났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미싱 소리를 뚫고 흐르고 있었다.

- 가자.



가리봉 천주교회의 지하 강당은 평소보다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최은과 한 신부의 노력으로 구로공단 내 봉제, 전자, 가발 공장의 소모임들이 하나로 뭉친 ‘가리봉 노동야학 연합회’의 결성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 우리는 이제 각자의 공장에서 외로운 싸움을 하지 않는다!

한 신부의 선언에 여공과 남공들이 붉은 머리띠를 질끈 동여맸다. 최은은 강당 뒤편에서 등사기로 갓 찍어낸 결성 선언문을 배포했다. 잉크 냄새가 진동했지만, 그 냄새는 노동자들의 땀 냄새와 섞여 희망의 향기로 변했다. 1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어깨를 걸고 ‘흔들리지 않게’를 나지막이 합창할 때, 최은은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무언가를 느꼈다.


하지만 그 시각, 공장 사무실에서 강 반장은 담당 정보과 형사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 김 형사님, 지금 천주교회 지하로 가면 빨갱이 연놈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대학생 출신 위장취업자 년도 거기 있고요.

결성식이 절정에 달했을 때, 성당 밖에서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육중한 군화 소리가 지하 계단을 울렸다.


- 문 열어! 국가보안법 위반 현행범들이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부서졌다. 최루탄 가스가 좁은 지하 강당을 메웠고, 평화로웠던 노랫소리는 비명과 고함으로 바뀌었다. 강 반장은 형사들 뒤에서 비열하게 웃으며 최은을 가리켰다.

- 저년도 주동자입니다!

최은과 야학 선생 몇 명이 눈을 찌르는 연기 속에서 한 신부의 옷자락을 붙잡았지만, 몽둥이를 휘두르는 백골단에 의해 그들은 차가운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최은은 남부경찰서 대공분실 산하의 어두운 취조실로 끌려갔다. 며칠간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과 협박이 이어졌다. 최은은 시위 혹은 불온 유인물 배포 혐의로 구속되었고, 수사 및 기소 기간으로 40일 동안을 남부경찰서 대공분실에서 보냈다. 취조실 창문은 밖을 볼 수 없게 높이 달려 있고, 24시간 형광등을 켜두어 시간 감각을 마비시키곤 했다. 그곳에서 최은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형사들이 내미는 전향서에 대한 유혹도 있었으나 최은은 전향서 쓰는 것을 포기했다.

그들은 최은에게 배후 세력을 실토하라며 윽박질렀다. 최은은 입술을 깨물며 “우리는 정당한 노동권을 요구했을 뿐”이라며 버텼다.



길식은 세브란스 응급실 밤샘 근무를 하며 피곤에 절어 자기도 모르게 눈이 자꾸만 감겼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 눈을 감았다.

어린 시절 광주에서 함께 컸던 최은의 맑은 눈망울이 떠올랐다.


두 사람이 살던 고향 마을, 길식의 집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기와집이었고 최은의 집은 그 집 아래 작은 행랑채에서 살았다. 길식은 외동아들로서 많은 사랑을 받으며 부족함 없이 자랐지만, 늘 어른들이 정해준 틀 안에서만 움직여야 하는 유약한 아이였다. 5살 어린 최은은 늘 씩씩하고 거침이 없었다.



길식은 울보였다. 겁이 많았다. 열한 살 때도 길식은 울보였다. 부유한 집안의 외아들로 귀하게만 자란 탓에 조금만 무릎이 까져도 세상을 잃은 듯 울었다. 어느 봄날, 길식은 뒷산 절벽 중턱에 핀 붉은 찔레꽃을 보고 "참 예쁘다"며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그 꽃은 다른 하얀 찔레꽃과 달리 핏빛처럼 붉어 묘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 길식 오빠, 저 꽃 갖고 싶어?

은이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길식은 고개를 저었다.

- 안 돼, 은아. 저긴 너무 가팔라. 떨어지면 죽어.

길식에게 그 절벽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공포였다.


하지만 최은은 대답도 없이 치마 끝을 질끈 묶더니 맨발로 바위틈을 파고들었다. 길식은 아래서 비명을 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 은아! 내려와! 안 가질게. 괜찬으니 어서 내려와!

여린 최은의 손가락 끝에 날카로운 돌부리가 박히고, 무릎에서는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최은은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그 붉은 꽃만을 향해 기어올랐다. 마침내 소담한 꽃가지 하나를 꺾어 입에 문 은이가 미끄러지듯 내려왔을 때, 아래에서 마음 조아리며 기다리던 길식은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 버렸다.


최은은 흙먼지와 피가 뒤섞인 손으로 찔레꽃 한 가지를 길식에게 내밀었다. 최은의 무릎에서도 피가 보였지만 오히려 길식을 달래듯 환하게 웃었다.

- 오빠. 오빠가 이 꽃 예쁘다고 했잖아. 자, 가져.

눈물 맺혀 있던 길식은 엉겁결에 최은이 건네주는 붉은 철쭉을 받았다.

- 저 피봐. 너 안 아파?

- 난 하나도 안 아파. 진짜야.

그 순간 길식은 깨달았다, 자신은 평생 이 아이의 발밑에 흐르는 저 붉은 피를 잊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겁쟁이였던 자신을 대신해 절벽을 타고, 자신의 작은 욕망을 위해 기꺼이 상처를 입어준 아이. 길식은 손으로 꽃을 받으며 속으로 다짐했다.

'은아, 내가 나중에 커서... 의사가 되고 돈을 많이 벌면, 너 다시는 이런 절벽 안 타게 해 줄게. 내가 너한테 빌딩도 지어주고, 비단 신발도 사줄 거야. 네가 그냥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길식이 잠시 회상에서 깨어났다. 길식은 길명을 통해서 최은이 어느 대학에 간 것, 동생이 망월동에 묻힌 것, 운동권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 위장근로 등을 모두 알고 있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최은은 여전히 벼랑 위를 기어오르고 있다. 예전엔 붉은 찔레꽃을 위해서였다면, 이제는 이름 없는 노동자들의 삶을 위해서.

길식은 씁쓸하게 웃었다. 부모의 건물과 재력이 은이에게는 보호막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가 뛰어넘어야 할 또 다른 절벽이 되어버린 것 같은 마음이었다. 프롤레타리아의 세상을 세우려는 그녀에게 자신은 지주의 아들일 뿐인 것인가.

길식은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최은에 대한 마음이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은아, 너는 여전히 그 피 묻은 손으로 웃고 있구나. 나는 여전히 그 발치를 지키는 겁쟁이 소년이고...


신촌역 인근의 허름한 대폿집에서 길식은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의 근무로 며칠째 잠을 못 자 핏발 선 눈으로 길명을 만났다.

- 길명아, 이거... 한 신부님께 좀 전해드려라. 인권 변호사 비용과 최은 영치금으로 써달라고 해. 그냥 익명의 헌금이라고 해. 내가 인턴 시작하면서 조금씩 모았던 적금과 부모님이 준 용돈을 모은 것이야. 지금은 이게 최은이 목숨줄보다 귀하겠냐."

길식은 100만 원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 은이를 직접 만나보시지 그래요.

길명은 길식이 나서지 않고 익명으로 최은을 돕는 것이 안타까웠다.

길식은 고개를 저었다.

-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그 애가 어떻게 견딜지 생각하면 내 심장이 쫄깃해진다.

길식은 길명을 돌려보내고 광주의 부모와 은밀히 손을 쓸 곳으로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최은은 첫 영치물을 받았다.

대공분실의 삼엄한 취조가 잠시 멈춘 시간에 철창 너머로 보따리가 던져졌다.

두툼한 빨간색 내복, 면양말, 수건 등과 그리고 곽우유와 단팥빵 2박스 등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에 최은은 눈물을 쏟았다. 내복 안쪽에 영치금도 들어 있었다. 전달된 물품들은 차가운 고문의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유일한 온기가 되었다. 최은은 철창 안 일행들에게 단팥방과 곽우유를 돌렸다.


최은은 위장취업을 할 때 익명의 후원금을 길명을 통해 받았었다. 또한 박동열 선배에게서도 최은을 잘 도와달라면서 익명의 후원금을 전해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최은은 무명의 후원자가 길식이라는 것을 나중에 한신부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어머니와 동생이 죽고 난 이후 길식이 고향에 올 때마다 아버지에게 들러 건강을 체크해 주고 치료비에 보태라며 용돈을 쥐어주고 간 것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후원자가 길식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녀에게 길식은 그저 고향 같은 집에서 산 먼발치에서 사는 부자 아들 정도였었다.


최은은 한 신부가 미리 연락해 둔 ‘인권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변호인단은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신청하고, 경찰의 가혹 행위와 불법 연행을 문제 삼았다.

결정적으로 최은의 ‘위장취업’ 사실은 입증되었으나,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찬양·고무’를 입증할 불온서적 같은 확실한 물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기에 기소하기가 모호해졌다.

그리고 최은은 서울 구치소에 수감되어 20일 동안 재판 대기를 하다가, 1983년 12월 23일 성탄절 특사로 특별사면 되어 풀려났다.


그날 서울의 아침 기온은 영하로 떨어져 무척 추웠다. 찬바람과 함께 눈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최은은 검정 고무신과 얇은 수의를 벗었다.

교도관이 수용자 기록부를 넘기며 "22번 최은, 출역!"이라고 말했다. 최은은 이때까지도 영문도 모른 채 영치품을 받아 들고 정문을 나섰다. 최은은 60일 만에 제 이름이 적힌 하얀 명찰을 떼어냈다. '특별사면'이라는 네 글자가 적힌 통지서를 든 교도관의 목소리는 무심했지만, 그 안에는 정권이 내미는 기만적인 화해의 손길이 숨어 있었다.

서울구치소 앞에는 석방되는 학생들을 맞이하기 위해 수백 명의 가족과 동료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거나 교가를 부르는 소리가 담장 밖에서 들려왔다.


당일, 서울구치소 앞은 새벽부터 몰려든 가족들과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영하의 칼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교도소 문이 열릴 때마다 터져 나오는 함성은 그 추위를 뚫고 나갔다.

성탄절을 이틀 앞둔 서울의 거리는 캐럴 소리로 들떠 있었으나, 60일간의 어둠 끝에 마주한 그 화려한 불빛은 최은에게 오히려 낯설고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최은은 오랫만에 마주한 칼바람 부는 서울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대문 구치소의 육중한 철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고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최은이 걸어 나왔을 때, 그녀의 손에는 60일 전 자취방에서 압수당했던 빛바랜 가방 하나만이 들려 있었다. 그 동안의 어둠이 살을 깎아낸 듯, 그녀의 뺨은 파여 있었고 눈은 형광등 불빛에 길들여져 겨울 햇살 아래서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성탄절을 앞둔 거리에는 조잡한 케럴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최은의 귀에는 여전히 취조실의 차가운 타자기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이것은 정권이 베푼 시혜인가, 아니면 더 큰 감옥으로의 이송인가.


마침내 최은은 마중 나온 아버지의 눈물과 한신부, 길명, 그 뒤의 길식을 보았다. 그들의 환호와 갈채를 들으며 비로소 자신이 살아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가장 먼저 달려든 것은 광주에서 올라온 아버지였다. 거칠고 투박한 손이 최은의 어깨를 바스러지도록 움켜쥐었다.

- 은아... 고생했다. 참말로 고생했어.

아버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뿌리며 자식의 얼굴을 연신 쓸어내렸다. 그 손에는 전라남도 광주의 고향내음과 자식을 옥바라지하기 위해 상경한 노부의 고단함이 배어 있었다.

그 뒤로 구로 천주교회의 한 신부가 인자하지만 단호한 눈빛으로 서 있었다. 그는 최은이 위장 취업을 하며 흔들릴 때마다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던 사람이다. 한 신부는 짧은 목례로 최은을 축복하며, 곁에 서 있던 길식을 눈으로 가리켰다.

최은의 시선이 길식에게 머물렀다. 구속되기 전 야학에서 한 신부를 통해 들었던 이름. 자신의 영치금과 변호사 비용을 남몰래 대준 익명의 독지가가 바로 눈앞의 길식이라는 사실을 한신부가 면회를 왔을 때 그에게 전해 들었었다.

- 후원자가 비밀로 해달라고 했지만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이 후원금은 고향 선배 오길식이 낸 거야. 무료변론을 해 주는 변호사들에게도 변호를 하려면 돈이 필요해. 그들에게도 도움이 되었어.

길식의 요청으로 길식의 아버지가 자신의 연줄을 동원해 최은의 석방을 도우려 애썼고, 그 과정에서 길식의 아버지와 최은의 아버지도 길식이 최은을 돕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길식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지만, 그 눈에는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최은은 길식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 최은! 진짜 나오는구나!

고향 친구이자 단국대 동창 길명이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다가왔고, 그 뒤에 서 있던 학출 출신 박동열 선배가 최은의 등에 손을 얹었다.

- 고생했다, 은아. 네가 견뎌준 덕분에 우리도 힘을 얻었다.

최은은 길명이 건네준 두부를 한입 베어 물었다.


최은은 학교에서 '무기정학'이라는 징계를 받았다. 몸은 자유를 얻었지만, 학교로 돌아갈 수 없는 막막함이 최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