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13

by 전영칠


최은은 차가운 유치장 창살만큼이나 딱딱하게 굳어 있던 긴장의 끈이 겨우 느슨해진 순간이었다. 한 신부가 준비한 승합차는 구로동 성당의 아늑한 사제관 앞마당에 멈춰 섰다.

사제관 안에는 한 신부가 미리 부탁해 둔 보살핌의 손길이 가득했다. 커다란 양은 냄비에서는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피어올랐고, 갓 지은 하얀 쌀밥이 김을 모락모락 내뿜고 있었다. 유치장 특유의 퀴퀴한 냄새를 뒤로하고 마주한 그 냄새는 비로소 살아 돌아왔다는 실감을 일행에게 안겨주었다.


성당 입구에서 길식은 최은의 손을 한 번 꽉 쥐었다가 놓았다.

- 살아서 나와줘서 고맙다, 은이. 마음 같아선 이 밥을 같이 먹고 싶은데, 세브란스 응급실 상황이 급하다는 연락을 받았어. 다시 보자.

길식은 최은의 아버지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서둘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엔 안도와 미안함이 교차하고 있었다.


한 신부는 손수 밥을 퍼 담으며 일행을 둘러보았다.

- 자, 오늘 나오신 분들 고생 많았네. 일단 먹고 기운을 차려야 다음을 생각할 수 있는 법이야. 하나님도 굶으면서 싸우라고는 안 하셨네. 함께하신 분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서들 많이 드세요."


최은의 아버지는 딸의 앞에 놓인 밥그릇 위에 투박한 손으로 고등어 한 점을 얹어주었다.

- 은아, 많이 먹어라. 얼굴이 반쪽이 됐구나...

최은은 한동안 숟가락을 들지 못하고 멍하니 밥상을 바라보다가, 아버지가 올려준 생선 살을 보고서야 입을 뗐다.

- 아버지,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신부님, 정말 감사합니다.

풀려난 세 명의 야학 선생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보였다.

- 유치장에서 제일 생각났던 게 바로 이 따뜻한 국물이었어요. 이제야 좀 살 것 같네요."

야학 선생 한 명이 눈시울을 붉히며 된장국을 들이켰다.

식탁 위에는 놋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달그락 소리만 정적을 깨우고 있었다. 그것은 무거운 침묵이 아니라, 서로의 생존을 확인하는 안도의 소리였다. 한 신부는 그들을 자애로운 눈빛으로 지켜보며 말했다.

- 구로의 밤은 차갑지만, 오늘 이 자리는 참으로 따뜻합니다. 시련은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지요. 오늘은 그저 이 온기를 즐기세요. 바깥세상 이야기는 내일 해도 늦지 않아요.


최은은 밥을 씹으며 사제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어두운 구로동 공단 쪽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머물던 '벌집' 방 식구들, 그리고 아직 나오지 못한 동료들 생각에 목이 메어 왔지만, 곁에 있는 아버지의 거친 손등을 보며 다시 힘차게 수저를 움직였다.


식사 후 박동열 선배가 최은을 불렀다. 동열은 학생 운동권 출신으로 최은에게는 늘 엄격하면서도 믿음직한 이정표 같은 존재였다. 그는 성당 기도실에서 최은에게 말했다.


- 최은, 유치장 고생 많았다. 그런데 말이야, 야학에서 노동자들 가르치는 것만이 우리 운동의 전부는 아니야. 지금 우리한테 절실한 건, 현장의 목소리를 이론으로 정립하고 세상에 퍼뜨릴 '기록의 힘'이야.


그는 품 안에서 낡은 수첩을 꺼내며 말을 이었어.

- 마침 아는 선배가 운영하는 사회과학 출판사에 자리가 하나 났어. 제법 이름이 알려진 출판사야. 검열 때문에 다들 몸을 사리지만, 누군가는 금서(禁書)도 만들고 이론서도 번역해서 현장에 공급해야 해. 네 문장력이라면 충분히 제 몫을 할 거다. 공장 라인에 서는 것만큼이나, 활자 뒤에서 싸우는 것도 치열한 투쟁이야. 어때, 출판 일을 한번 해보지 않겠어?


은은 처음 걸어보는 이 험한 길에서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한 모습이었지만 학교로 돌아갈 수도 없는 막막함에서 그녀 역시 책을 좋아하는 국문과 소속으로, 출판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현장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현장을 더 넓게 보는 법이라는 판단도 섰다.


최은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선배님. 해보겠습니다. 글이 어떻게 또 다른 칼이 되고 방패가 되는지, 그곳에서 배우고 싶어요.

- 좋아. 그럴 줄 알고 사실 내가 최사장에게 미리 말해 놓았어. 거기에서 작가로서 책도 내고 열심히 활동도 해봐. 잘 맞을 것 같아. 내일 함께 만나기로 하지.


며칠 후, 최은은 광화문 인근 골목에 위치한 출판사 지평으로 첫 출근을 했다. 최은은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사무실과 10여 명의 젊은 출판사 직원들 사이에서 잉크 냄새와 책 향기가 좋았다. 그녀는 그곳에서 마음껏 일 하고 싶은 마음이 솟았다.

그녀가 맡은 첫 업무는 해외 사회과학 서적의 초고를 교정하는 일이었다. 밤마다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최은은 깨달았다. 자신이 수정하는 문장 하나하나가 어쩌면 누군가의 잠든 의식을 깨우는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

최은은 출판사 책상 한쪽 가에 아버지가 선물한 보온병을 두었다. 따뜻한 보리차 한 모금을 마시며 그녀는 원고지에 정갈하게 글자를 채워 나갔다. 비록 몸은 공단에서 멀어졌지만, 그녀의 마음 한쪽에는 여전히 구로의 '벌집' 방과 노동자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 이제 내 싸움은 이 종이 위에서 시작된다.

최은의 눈빛은 교정지를 응시하며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최은은 고마운 마음과 무거운 마음을 동시에 안고, 감사인사를 위해 길식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최은은 길식이 제안한 저녁 약속 장소로 향했다.


길식이 최은을 데려간 곳은 남산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서울힐튼호텔 레스토랑이었다. 서울 힐튼호텔은 서울에서 최고급호텔이었다. 세련된 외관과 로비, 그리고 남산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레스토랑에서의 전망을 보며 최은이 잠시 어지러워 의자에 손을 잡고 서 있었다.


- 정말 오랜만이야.

길식이 말했다.

- 후원 감사했어요. 누군지도 모르고 썼네요. 어려운 이들을 위해 정말 잘 썼어요.

- 아니야. 얼마 되지도 않은 것인데.

- 아버지에게도 건강체크 해주셨다는 것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최은은 고개를 속였다.


길식이 최은에게 와인을 따라 주었다. 와인 잔에 비친 불빛이 일렁거렸다. 길식은 정갈하게 잘린 스테이크를 최은의 접시 앞으로 밀어주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 어렸을 때부터 함께 커왔던 기억이 눈에 선하네. 사실 나는 변증법이 뭔지도 몰라. 은이가 내가 가지 못하는 길을 가는 것이 경이로울 뿐이야. 조금이라도 돕고 싶어서.

- 이제는 저도 돈을 벌고 있으니 안 도와주셔도 돼요.

최은이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 은이가 고생하는 것이 마음이 안 좋은데.

- 저, 씩씩해요.

최은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

- 알아, 어렸을 때부터 알지. 사실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 말씀하세요.

- 내가 은이를 조금 더 지켜주면 안 될까? 은이가 어렸을 때 절벽에서 붉은 철쭉꽃을 따와 내게 주었을 때 나는 피 묻은 손과 무릎을 보며 마음속으로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 지금 의사가 된 동기야. 쑥스럽지만 다시 말할게. 그때부터 은이를 마음속에 두었어.

- 고백하는 거예요?

- 맞아 고백. 나는 소극적인 성격이고 은이처럼 열정적이지도 못해. 다만 분명하게 내가 의사가 되고자 한 것은 은이를 지켜주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어.

- 고마운 말인데요.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길식형이 그저 고향 선배로 감사할 뿐이에요. 게다가 후원까지 해주신 고마운 선배, 이 빚을 갚아야 할 선배님으로요.

- 용기 내서 말할게. 나는 너를 좋아해. 나머지는 묻지 말아 줘.

- 저도 솔직하게 말할게요. 길식형 네와 우리는 사는 세계가 달라요. 사는 세계가 다른 만큼 생각도 다르겠지요. 이질감...이랄까, 그게 있어서. 죄송해요.


길식이 그녀를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말을 이었다.

- 이렇게 하면 안 될까. 시간을 갖자. 천천히 시간을 가지면서 지켜보기로 하면 어떨까.

최은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그래요. 오늘은 제가 아버지와 저와 한신부까지 도와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인사 드리러 온 것이에요.

최은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최은은 힐튼 호텔을 나와 길식과 헤어져 길을 걸으며 다시 한번 호텔 건물을 힐끗 바라보았다.

길식 같은 재력가 집안의 아들이라면, 갓 문을 연 가장 화려하고 현대적인 이 호텔의 레스토랑을 골라 자신의 능력과 진심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화려함이, 구로공단의 벌집 방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호흡하던 최은에게는 더 큰 이질감과 어색함으로 다가왔다.

세 명이 누우면 가득 차는 방에서 지방 시골 부모와 동생들 학비를 보내며 아침이면 2개의 변소 앞에서 생존경쟁을 해야 하고, 밤에 졸다가 쪽가위에 베이는 공장 아이들의 사정을 어떻게 알 것인가. 한 달 내내 미싱을 돌려도 벌지 못할 돈이 단 한 끼 식사로 소비되는 곳, 저런 호텔과 우아하게 반쩍이는 샹들리에가 도대체 그녀가 걷는 이 길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녀는 길식의 도움에 감사하면서도 사정이 통하지 않는 이런 거리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계속)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