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사장과 성준 선배는 최은에게 새로운 기획을 맡겼다. 그것은 딱딱한 번역서가 아니라, 공단 노동자들의 수기와 일기를 모은 실명 기록집이었다.
제목은 <어둠을 뚫고 솟는 햇살—구로의 기록>으로 정해졌다.
최은은 이 책이 단순한 기록을 넘어, 공장 담벼락에 갇힌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세상 밖으로 터뜨리는 기폭제가 되길 원했다.
최은은 원고를 모으기 위해 다시 가리봉동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퇴근 시간, 가리봉 오거리의 인파 속에서 그녀는 영자를 비롯한 야학 동료들과 비밀리에 접선했다. 영자는 동료들이 밤마다 연필을 꾹꾹 눌러 쓴 일기와 편지 뭉치를 은에게 전달했다.
가리봉 시장 뒷골목의 허름한 대폿집, 최은과 영자가 마주 앉았다. 영자의 손에는 여전히 가시지 않은 미싱 기름때가 박혀 있었다.
“언니, 이건 지난번에 짤린 숙이가 쓴 거야. 이건 미숙이가... 언니한테 미안하다고 전해달라며 준 일기장이고.”
최은은 미숙의 이름을 듣자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자신을 배신했던 프락치 미숙조차, 결국은 거대한 자본과 권력의 수레바퀴에 치인 가련한 희생자였음을 최은은 일기장을 통해 확인했다. 일기장 속에는 80시간 잔업의 고통, 고향에 있는 동생들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빨갱이’라는 낙인이 주는 공포가 눈물 자국과 함께 적혀 있었다.
최은은 밤을 새워 이 원고들을 다듬었다. 최소한의 안전을 위해 일기와 편지를 적은 그녀들은 가명으로 했다. 그리고 지식인의 유려한 문체가 아니라, 투박하지만 송곳처럼 날카로운 노동자들의 언어를 그대로 살려냈다. 그녀는 편집 후기에 이렇게 적었다. “이 책에 담긴 빨간 피의 기록은, 우리가 기계가 아닌 인간임을 선언하는 첫 번째 증언이다.”
드디어 책이 출간되었다. 최은은 출판사 일을 보며 체험이 묻어난 책 <어둠을 뚫고 솟는 햇살—구로의 기록>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활판 인쇄기의 묵직한 진동이 멈추고, 잉크 냄새가 코끝을 찌르는 제본소 마당에서 최은은 갓 나온 책 한 권을 가슴에 품었다.
인쇄소 아저씨가 투박한 손으로 묶음을 탁탁 치며 말했다.
- 최 선생, 책 예쁘게 잘 나왔네. 사고 안 나고 무사히 전국으로 퍼져야 할 텐데.
책은 종로와 신촌과 신림 등의 이른바 '운동권 서점'들에 깔리기 시작했다. 최은은 평소 자주 가던 신촌의 한 서점 구석에서 자신의 책을 지켜보았다. 최은은 표지를 넘겨 판권지를 확인했다. 편집자 이름에 자신의 이름 세 글자가 박혀 있는 것을 본 순간, 위장취업 시절 공장 구석에서 몰래 적어 내려갔던 일기장 조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파편들이 모여 이제 하나의 무기가 된 것이다.
대학생 두 명이 주위를 살피더니 책을 집어 들어 책장 끝으로 가서 숨가쁘게 읽어 내려갔다. 또한 남루한 작업복 차림의 한 청년이 서점 주인에게 조용히 물었다.
- 구로동 사람들 이야기가 적힌 책이 나왔다던데, 그게 이건가요?
최은은 그 장면을 보며 잠시 목이 메었다. 자신이 만든 책이 누군가에게는 '불온서적'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나의 이야기'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서점 입구에 단단한 체격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이른바 '판금' 조치를 예고하는 압수수색조였다. 서점 주인은 능숙하게 최은의 책 몇 권을 뒤편 밀실로 숨기고는 시치미를 뗐다. 최은은 그 아슬아슬한 광경을 지켜보며 서점을 빠져나왔다. 잡으려 하면 할수록 더 깊숙이, 더 널리 퍼져나가는 활자의 생명력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최은은 직접 배낭에 책을 가득 담고 구로공단 벌집촌 몇곳을 돌았다. 서점과는 달리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표지는 평범한 요리책이나 수필집으로 위장했다.
가리봉 천주교회의 한 신부와 영자가 가교가 되어, 책은 여공들의 치마 속과 도시락 가방 밑바닥을 타고 공장 안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책을 읽은 여공들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자신이 겪는 고통이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사회적 모순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공장 화장실 벽에는 책 속의 문구들이 낙서로 적혔고, 이는 곧 대규모 동맹 파업의 불씨가 되었다.
최은은 종로의 출판사 창가에서 가리봉동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은 더 이상 실을 꿴 바늘을 잡지 않았지만, 그녀가 만든 활자들은 수만 개의 바늘이 되어 잠든 노동자들의 의식을 깨우고 있었다.
이제 최은은 단순히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중개하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최은은 창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을 보며 다짐했다.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당장 바꿀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가슴 속에 꺼지지 않는 불꽃 하나는 지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도망자가 아닌, 시대를 기록하는 역사의 목격자로서 서 있었다.
최은이 쓴 <어둠을 뚫고 솟는 햇살—구로의 기록>은 출판되자마자 대학가 운동권과 노동 현장을 퍼지기 시작했다. 그저 그런 이론서가 아니라, 현장의 피비린내 나는 증언과 최은 특유의 날카로우면서도 여공들의 체험수기를 비롯해 그에 따른 저자의 따뜻한 시선, 야학과 조직, 집고 넘어가야 할 노동운동의 문제점, 앞으로의 방향성 등을 제시한 내용들이 노동운동의 현장에서 또 한권의 교육서로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이 책 한 권으로 최은은 '얼굴 없는 편집자'에서 운동권의 새로운 '필봉(筆鋒)'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출간 열흘 만에 정부는 이 책을 판금 도서로 지정했다. 하지만 검압이 강해질수록 갈증은 더 커졌다. 대학가 복사 집에서는 밤새도록 기계가 돌아갔고, 책은 겉표지도 없는 '제본 형태'로 가방에서 가방으로 은밀하게 전달되었다.
- 이 글 쓴 사람이 누구야? 문장이 가슴을 후벼파네.
학생들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최은의 필명은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그녀의 문장은 대자보와 유인물의 인용구 중 하나가 되고 있었다.
그동안 투쟁의 현장에서는 '행동'이 우선이었고 '기록'은 뒷전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은의 책이 대중적인 분노와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을 보며, 운동권 지도부 내에서도 시각의 변화가 생겼다.
노동운동권에서 '최은은 현장의 경험을 단순한 하소연이 아니라, 시대의 논리로 승화시켰다'는 판단도 나왔다. 여러 조직에서 최은에게 '기록 및 홍보 전략'을 맡아달라는 요청도 들어왔다. 그녀는 이제 단순한 야학 선생이 아니라, 운동의 방향을 글로써 제시하는 전략가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박동열 선배는 다시 최은을 찾아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은아, 내 눈이 틀리지 않았지? 네 글 한 줄이 최루탄 열 발보다 더 무섭게 저들의 심장을 찌르고 있다. 이제 너를 찾는 곳이 많아질 거야. 하지만 조심해라, 이름이 알려진다는 건 그만큼 적들의 표적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최은은 주목받는 것이 기쁘기보다 어깨가 무거워졌다. 회의장에 나가면 사람들이 그녀를 '최 작가' 혹은 '최 동지'라 부르며 예우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글이 현장의 고통을 다 담아내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최은은 이제 출판사 업무 외에도 밤이면 지하 비밀 아지트에서 열리는 주요 정세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노동법 개정 투쟁의 선언문을 작성하거나, 5·18의 진실을 알리는 해외 배포용 소책자를 기획하는 등 운동권의 '브레인' 역할을 수행하며 입지를 다져나갔다.
이제 최은은 단순히 현장에 몸을 던지는 투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수만 명의 투사를 만들어내는 '사상과 현장'의 리더 중 한명이 된 것이다. 월급에서 아버지의 보약을 사서 보내고, 남은 돈으로 검거된 동료들의 영치금을 넣으면서 최은은 비로소 자신이 가야 할 길을 확신하게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