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15

by 전영칠


4. 침묵의 공명



강원도 정선과 태백의 경계, 석탄 가루가 섞인 검은 바람이 몰아치는 산 중턱에 요한이 머무는 기도원이 있었다. 최은은 박동열 선배가 쥐어준 두툼한 봉투를 품에 안고 털털거리는 완행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탄 끝에 이곳에 도착했다.


최은이 쓴 <어둠을 뚫고 솟는 햇살 — 구로의 기록>은 출판되자마자 서점을 휩쓸었으나, 열흘이 되자마자 문화공보부에서 긴급 행정 명령이 내려왔고, 치안본부 대공분실 형사들이 지프차를 타고 서점가에 들이닥쳐 책을 포대에 담아 갔다. 출판사 '지평'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지평 사장 성준 선배는 연행되었다. 낌새를 알아챈 박동열 선배와 성준 선배가 최은에게 미리 '도피'를 알렸다. 최은의 이름 앞에는 '위장취업 주동자'와 '불온 문서 제작자'라는 붉은 낙인이 찍혔다.


기도원 입구에서 요한은 2년 전보다 더 깊고 맑아진 눈으로 최은을 맞이했다.

최은이 요한을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요한이 손수건으로 최은의 눈물을 훔쳤다.

- 왔구나, 아우님.

- 이제부터 이름을 불러 주세요.

- 그래, 은이. 알았어.


요한의 목소리는 산바람보다 낮았지만, 최은의 가슴속에서 요동치던 불안을 단번에 잠재웠다. 요한은 최은을 기도원 옆 작은 오두막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예전에 광부들이 잠시 몸을 쉬던 움막으로 기도원 측에서 수리해 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낡은 나무 문틈으로 새어 들던 산바람이 잦아들고, 방 안은 붉은 전구 등과 나무뭉치들이 탁탁 소리 내며 타고 있는 난로의 온기와 요한이 끓인 구수한 차 향기로 가득 찼다.


요한은 찻잔을 내려놓고 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예전의 부드럽던 여대생의 손이 아니었다. 미싱 바늘에 찔린 흉터와 거친 기름때가 밴, 마디마디가 굵어진 노동자의 손이었다.


- 은아, 네 손에 가리봉의 시간이 다 박혀 있구나. 이 거친 살결이 네가 통과해 온 전장(戰場)의 기록이지.

요한의 말에 은은 손을 빼려다 멈췄다.


- 처음에는 이 손이 부끄러웠어요. 대학 교정에서 펜만 굴리던 내 손이 가짜 같았거든요. 그런데 이 손으로 빨간 실을 만지고, 동료들의 거친 손을 잡으면서 비로소 내 진짜 살과 뼈를 만나는 기분이었어요. 요한이 최은의 손등을 엄지로 천천히 쓸었다.

- 그 붉은 실들이 은이를 옭아매는 사슬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은이가 그 실로 찢어진 세상을 기워내고 있었구나. 아팠겠지. 하지만 그 아픔이 은이를 투명하게 만들었어.


최은은 보따리 속에 숨겨온 자신의 책을 꺼내 요한에게 건넸다. 요한은 책장을 넘기며 가명으로 적힌 이름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훑었다.

- 여기 적힌 이름들은 다 가짜예요. 영자는 순이가 되고, 미숙이는 정희가 됐죠. 저조차 공장에서는 '이영순'이라는 가짜 이름이었어요. 그런데 요한 형, 왜 가짜 이름으로 살 때 더 진짜 삶에 가까워졌던 걸까요?

요한이 최은을 똑바로 응시했다.

- 세상은 가명을 강요하지. 사회적 지위, 학벌, 직업이라는 가명 말이지. 하지만 은이는 그 껍데기를 스스로 벗어던지고 '고통'이라는 공통된 언어 속으로 들어갔어. 이름이 지워진 곳에서 비로소 인간의 알몸을 본 거야. 은이가 가져온 이 책은 가짜 이름들의 기록이 아니라, 이름 없는 자들이 신에게 올리는 진짜 기도문이야.


정선의 첫 밤은 깊다 못해 푸른빛이 감돌았다. 오두막의 난로 불빛조차 닿지 않는 방한쪽 침대에 누웠으나 최은은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망월동의 붉은 흙더미 위에 서 있었다. 흙 아래서 죽은 동생 인국이 피 묻은 노란 운동화를 신은 채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장면은 순식간에 가리봉동 대공분실로 바뀌었다. 형사들의 구둣발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울렸고, 사방에서 붉은 페인트가 쏟아져 그녀의 온몸을 적셨다.

- 안 돼!

비명과 함께 눈을 뜬 최은은 땀에 젖은 채 문을 박차고 나갔다. 차가운 산바람이 폐허 같은 가슴속으로 밀려들었다. 그녀는 맨발로 서서 제 몸에 묻은 보이지 않는 붉은 얼룩을 닦아내듯 제 팔을 거칠게 문질렀다. 어둠 속에서도 그 '빨강'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그녀를 조여왔다.

그때, 등 뒤로 묵직한 온기가 덮였다. 요한이 자신의 두툼한 코트를 그녀의 어깨에 둘러준 것이다. 최은은 그 온기에 무너지듯 요한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의 어깨가 격렬하게 떨렸다.

- 형, 왜 우리는 항상 이 붉은색 피와 낙인 속에서만 살아야 해요? 내 눈앞에, 내 손끝에 온통 빨간색뿐이야. 너무 무서워... 이 색깔이 나를 삼켜버릴 것 같아요.

요한은 떨고 있는 최은을 말없이 끌어안았다.

- 밖이 너무 추워.

둘은 다시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 요한이 난로에 장작을 집어넣어 방을 덥혔다. 그의 가슴 안쪽에서도 무거운 파동이 일었다. 그는 그동안 성경책갈피와 안기부의 비밀 연락망 사이에 숨겨두었던 자신의 괴물 같은 진심을 처음으로 밖으로 꺼냈다.

- 은아, 네가 쓴 글이 세상을 깨우는 빛이라면, 나는 그 빛을 지키기 위해 어둠 속에서 칼을 휘두르는 그림자다. 네가 가는 길은 너무 투명하고 깨끗한데, 내가 묻힌 이 검은 탄가루와 피비린내가 너에게 옮겨 붙을까 봐... 나는 사실 그게 제일 두렵다.


요한은 최은의 손을 잡았다. 미싱 바늘에 찔리고 쪽가위에 베여 굳은살이 박인, 흉터 가득한 그 손마디를 보며 그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떨리는 입술을 그 거친 흉터 위에 가만히 갖다 대었다. 그것은 성체에 올리는 입맞춤보다 경건하고 처절했다.

- 만약 세상이 너를 끝까지 빨간색으로 낙인찍으려 한다면, 내가 그 낙인을 대신 다 짊어지고 가겠다. 은이는 그저 살아남아. 살아남아서 은이가 만난 그 '신의 얼굴'을 사람들에게 글로 남겨줘. 은이가 이 세상을 증언하는 것, 그것이 곧 내 구원의 방편이 될 테니까.

그가 최은을 침대에 눕혔다.

- 낯선 곳에서 보내는 첫날이니 모든 것이 낯설 거야.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자.

그가 최은에게 이불을 덥혀 주었다.

-가지 마.

돌아서는 최은이 돌아서는 그의 손을 잡았다.

- 여기서 있어 줘요.

- 잠잘 때까지 지켜줄게.

요한이 의자를 가져와 최은이 누운 침대 곁에 앉았다.

둘은 난로의 장작 불빛을 바라보았다. 최은이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

- 걱정 마. 편히 잘 때까지 있을 테니.

1시간가량의 시간이 흘렀을까. 요한이 잠시 졸다가 최은을 보았다. 최은은 전혀 졸리는 모습이 아니었다.

- 가지 마요. 여기에 있어줘요.

최은이 다시 그렇게 말하며 요한을 안았다. 그리고 요한과 키스했다.

- 사랑해요, 형.

- 우리가 함께 살 수 있을까.

최은과의 뜨거운 입맞춤 후 요한이 말했다.

- 청춘남녀인 데 뭐가 문제죠?

순간 요한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얼마 만에 웃는 웃음인가. 최은 못지않게 긴장 속에서 살았던 몇 년이었다.

- 이제 보니 둘 다 결혼하지 않았군.

- 그것은 확실한 사실이에요. 그깟 이념, 사상 따위 – 사랑이 우선이에요.

그녀가 예쁘게 웃었다.

- 정말? 그럴 수 있을까?

- 얼마든지요. 나는 요한형과 일생을 함께하고 싶어요.

요한이 뭐라 말하려 하자 최은이 요한의 입을 막았다.

- 오늘은 다른 생각 말기. 둘만의 이기만 생각하기 – 어때요?

- 이렇게 편한 마음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요한이 말했다.

-나를 사랑하는 것 맞지요?

요한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사실 몇 번 보았을 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렸어.

- 정말요? 진작 고백하지 그랬어요.

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 제가 사실은 그랬어요. 요한형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가슴이 뛰었어요.

최은이 다시 요한을 안고 깊은 키스를 했다.

- 나를 안아줘요, 다른 생각은 일체 말기!

- 나중에 안아주면 안 될까?.

- 안돼요.

최은이 그의 겉옷을 벗겼다. 최은이 먼저 상의를 모두 벗었다.

요한은 성직의 길과 사내의 길 사이에서 길을 잃었으나, 그녀의 살결 위에서 비로소 신의 자비를 보았다. 눈부신 신부의 상체가 요한의 눈앞에 있었다. 요한이 말했다.

- 그래. 결혼하자. 함께 길을 걸어보자.

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 많이 사랑해요. 요한형과 어디라도 함께 가겠어요, 지옥이라도!


그 밤, 정선의 오두막 앞에서 두 사람은 이념과 사상을 넘어 서로의 상처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최은에게 요한은 이제 단순한 정신적 지주가 아니었다. 요한은 그녀의 존재 자체를 증명하는 이었고, 단 한 사람의 '구원자'로 각인되었다. 요한에게 최은은 자신이 지켜야 할, 이 세상의 '마지막 순수'가 되었다.


며칠 후 최은은 박동열 선배에게 받은 도피자금의 출처에 대해 털어놓았다.

-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길명이를 통해 전해진 길식 오빠의 마음이라는 것을요. 힐튼 호텔의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서 저는 그 오빠가 사는 세상과 제가 걷는 길이 너무 다르다고 생각해서 밀어냈는데... 결국 그 오빠가 건네준 온기가 저를 여기까지 오게 했네요.

최은의 목소리에는 요한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했다.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 길식은 그 붉은 철쭉을 따다 준 꼬마 은이를 여전히 지키고 싶은 거겠지. 방식은 달라도 사랑은 하나야. 은아, 은이를 지탱하는 건 네 이념뿐만이 아니라, 은이를 위해 남몰래 울어주는 그 마음들이야.


최은은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광주의 붉은 피와 공장의 빨간 실에 대해 말했다. 그녀에게 빨강은 늘 공포이자 부채였다. 망월동의 붉은 흙더미에 묻힌 동생 인국이, 미싱 바늘에 찔려 옷감을 적시던 선홍색 피.


- 내 안의 빨강은 늘 비명이자 선혈이었어요. 그런데 요한 형을 다시 만나러 오는 길에 본 노을은 무섭지 않았어요. 그냥 따뜻했어요.

요한은 창밖의 어둠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 피가 붉은 것은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이고, 불이 붉은 것은 그것이 온기이기 때문 아닐까. 은이가 본 빨강은 이제 분노를 넘어 자비로 가고 있어. 분명히 말해, 남을 위해 흘리는 피는 더 이상 죽음의 색이 아니지 않을까. 그것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시원(始原)의 빛이지. 은아, 이제 너를 괴롭히던 그 빨강을 용서해도 좋다. 은이는 충분히 자격이 있어.

-고마워요, 요한 형.


다음 날부터 최은은 기도원 옆 움막에서 새로운 집필을 시작했다. 제목은 <가리봉의 고백>이었다.

이전의 책이 현장의 외침을 담은 투쟁의 기록이었다면, 이번 글은 그 현장에서 만난 인간들의 내면과 사랑, 그리고 희망에 대한 사상적 성찰을 담은 소설이었다. 그녀도 그 사상이 '신학적' 소설로 이어지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요한은 매일 아침 산에서 캔 나물과 감자를 최은의 움막 앞에 두고 갔다. 가끔은 조영래 변호사의 수배 시절 일화가 담긴 쪽지나, NCCK에서 발행한 비밀 인권 소식지를 함께 놓아두었다. 최은은 그 글들을 읽으며 자신의 글을 다듬었다.


어느 날, 움막을 방문한 요한이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최은에게 천천히 물었다.

- 은이, 괜찮아? 이 길 가는 것 괜찮아?

최은은 펜을 잠시 내려놓고 밖을 보았다. 저 멀리 폐광의 거대한 수직갱도가 공룡의 뼈처럼 솟아 있었다.

- 인국이가 쓰레기차에 실려 가던 날, 저는 신이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가리봉에서 영자의 부은 손을 씻어줄 때, 옥순 언니가 연탄가스에 질식해 쓰러지면서도 제 손을 잡을 때... 신이 거기 있더라고요. 사장님의 금고 안이 아니라, 우리들의 거친 손바닥 위예요. 저는 그 신의 얼굴을 기록하고 싶어요.

- 내가 이번에 대학생 세미나를 위해 일본으로 출장을 가. 기도원 기본 인원들은 그대로이고 움막 관리도 잘 말해두었으니 생활에 불편함은 없을 거야.

- 네. 제 걱정 마시고 잘 다녀오세요.

-......

요한은 최은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 무슨?

최은이 물었다.

- 아냐, 잘 다녀올게.


요한이 움막을 나왔다. 그는 최은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으나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바람이 움막의 억새를 흔들 무렵, 박동열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정국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고, 이제는 전면적인 투쟁보다 문화적·이론적 기반을 닦을 인재들이 서울로 복귀해야 한다는 신호였다.

박선배는 인권 변호사를 통한 '자수 형식'을 통해 사건을 마무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권 변호사가 검찰이나 안기부와 물밑 접촉을 할 것이고, 최은을 대동해 검찰에 '자진 출두' 하여, "작가가 직접 쓴 수기일 뿐 체제 전복의 의도는 전혀 아니다"는 점을 강조할 것이라 말했다.

또한 박선배는 6개월 정도 수배 생활을 하며 이미 책이 판금 되어 '목적(배포 차단)'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당국은, 최은을 며칠간 강도 높게 조사한 뒤 '기소유예'나 '집행유예' 정도로 풀어주는 방식을 목표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은은 움막에서 쓴 원고뭉치 복사본을 요한에게 건넸다.

- 요한 형, 이 글을 읽어봐 주세요. 제가 만난 신의 얼굴들이에요.

요한은 원고를 가슴에 품고 최은을 배웅했다.

- 은아, 세상이 너를 다시 붉은색으로 칠하려 하겠지만, 은이는 이미 노을보다 아름다운 연약한 인간에 대한 사랑의 빛을 가졌어. 두려워하지 마.

그리고 자그마한 함 하나를 최은에게 건넸다.




요한의 아버지는 평생을 검은 탄가루 속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일하던 막장은 해발 고도보다 깊은 지하 1,000미터 아래, 지열이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지옥 같은 곳이었다. 광부들 사이에서 그곳은 '막다른 막장'이라 불렸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희망 대신 탄을 캤다.

요한이 열 살 되던 해, 아버지는 큰 사고를 당했다. 갱도가 무너져 사흘 동안 지하에 갇혔다가 기적적으로 구조된 것이다. 아버지가 병원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검게 그을린 손에 꼭 쥐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적수정'이었다.


"요한아, 봐라. 이 붉은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병원 침대에서 아버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들에게 수정을 내밀었다.

"이건 땅속 깊은 곳에서 수만 년 동안 눌리고 타서 만들어진 거란다. 사람들은 우리가 캐는 검은 탄만 귀하다고 하지만, 진짜 귀한 건 이 붉은 눈물이야. 지옥 같은 압력을 견디고, 숨 막히는 열기를 참아내야만 이런 투명한 핏빛이 나오는 법이지. 신이 우리 같은 광부들에게 보여주시는 마지막 자비 같은 거란다."

아버지는 그 사고 이후 진폐증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셨지만, 임종 직전까지 그 수정을 요한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 세상이 너를 짓누를 때, 이 돌을 보거라. 압력이 강할수록 보석은 더 단단해지고 빛깔은 더 짙어지는 법이다. 너의 믿음도, 너의 삶도 이 적수정 같아야 한다.


요한은 이 오래된 이야기를 최은에게 들려주었다.

최은이 오래된 자그마한 함을 열고 수건을 풀자 붉고 영롱하게 빛나는 적수정이 보였다.

최은은 요한의 아버지가 겪었을 그 뜨겁고 어두운 막장의 시간을 상상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처한 수배와 판금이라는 현실이, 어쩌면 더 단단한 보석이 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막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요한 형, 제가 이런 것을 어떻게 받아요. 이 귀한 유물은 요한 형이 가지고 계시는 것이 맞아요.

- 내 아버지는 검은 석탄 속에서 이 빨간 보석을 찾으셨지. 은이는 가리봉의 시커먼 먼지 속에서 이 책을 썼어. 내 아버지에게 이 수정이 지하 천 미터의 어둠을 버티게 한 희망이었듯이, 은이의 소망이 하나 되고 빛나 은이를 지켜줄 거야, 은이의 글도 마찬가지로.

-... 아버님의 심장을 제게 주시는 거네요.

- 은이가 이미 가지고 있던 심장을 이 돌의 모습으로 확인해 주는 것뿐이야.

최은은 수정의 매끄러운 감촉 아래 숨겨진, 요한 아버지의 가쁜 숨소리와 요한의 기도를 느꼈다. 그 안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내'와 '부활'의 서사가 담겨 있었다.

- 아.

최은의 입에서 가는 감탄이 터져 나왔다.

최은이 요한의 손을 잡았다.


최은은 완행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강원도의 붉은 단풍이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예전의 최은이라면 그 색깔에 몸을 떨었겠지만, 이제 그녀는 마음에 안정감이 피어나고 있었다.

- 인국아, 누나 이제 안 무서워. 네가 묻힌 그 붉은 흙에서 꽃이 피는 걸 봤거든.


최은은 길식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수첩을 뒤적였다. 힐튼 호텔의 스테이크는 여전히 어색하겠지만, 그에게 다시 한번 감사함을 표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구로의 어둠을 뚫고 솟아오른 햇살은 이제 강원도의 험한 산줄기를 넘어 다시 가리봉의 좁은 벌집촌 복도를 비추기 위해 긴 여정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햇살의 이름은 바로 '사랑'일까. 아니면 투쟁이라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일까.

(계속)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