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빨강 16

by 전영칠


5. 신주쿠의 달



도쿄 신주쿠의 밤은 강원도 정선의 밤보다 훨씬 더 붉었다. 빌딩 숲을 수놓은 네온사인은 거대한 혈관처럼 꿈틀거렸고, 그 빛은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정선의 검은 바람 대신 도쿄에는 기름진 매연과 차가운 바닷바람이 섞인 도시의 숨결이 불었다.


장요한은 신주쿠역 인근의 고층 호텔 창가에서 그 불야성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에는 정선에서 최은에게 건네주었던 것과 똑같은 빛깔의 적수정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그의 아버지에게서 받은 2개 중 또 다른 하나였다. 최은에게 준 것이 ‘희망의 눈물’이었다면, 지금 그의 손에 남은 것은 ‘결의의 정체성’ 일 것이다.


요한은 기도원 하나를 맡아하는 목사가 아니었다. 1980년대 들어 세밀하게 조직화되는 한국 좌파운동권과 엄청난 물량으로 전파되는 좌파 서적들을 보며 한국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낀 그는 그동안 눈코 뜰 데 없는 세월을 보냈다. 그는 좌파사상에 빠진 한국의 청년들을 건져낼 사상으로는 기독교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무신론을 잡는 것은 유신론뿐이다 - 유신론을 바탕에 깔고 공산주의 사상에 대항할 수 있는 대안서적을 출판하며, 한일 우파 청년들을 묶어 힘을 합칠 수밖에 없다- 그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위기의 한국을 건지기 위해서라면 전략적으로 전두환 군부독재와 안기부 등의 도움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가 사명적으로 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한국의 대학가를 잠식한 ‘붉은 망령’을 걷어내는 일이었다.

그 길을 가다 보니 그는 한국기독교 청년연합협의회의 사무국장이자, 보수 교단의 실세인 박진성 노 회장의 오른팔이 되었다. 남산의 안기부 요원들은 그를 ‘사상적 방파제’라 불렀고, 박진성 노 회장은 그를 ‘영적 군사’라 칭했다.


- 요한 목사, 준비는 되었나?

등 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기독교청년연합협의회 당회장 박진성 노 회장이었다. 그는 도쿄에서 열릴 ‘한일합동승공(勝共) 대토론회’의 의장이었다.


- 네, 당회장님. 일본 세계승공연합 측과의 조율은 끝났습니다. 이번 세미나를 통해 한국 대학생들에게 마르크스주의가 얼마나 허망한 우상숭배인지 철저히 각인시킬 것입니다.

요한의 목소리는 정선의 오두막에서 최은을 위로하던 낮은 저음이었지만, 그 안에는 서늘한 칼날이 숨겨져 있었다. 그는 최은이 가리봉에서 목격한 고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고통의 해결책이 투쟁이 아닌, 철저한 우익 사상과 복음의 결합이라고 믿었다. 좌파가 ‘민중’과 '투쟁'을 말할 때, 그는 ‘신앙’과 ‘국가’를 말했다.


다음 날 오후, 신주쿠의 한 사찰 근처에 위치한 오래된 찻집, 요한은 그곳에서 한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기부로부터 건네받은 극비 파일 속의 인물, 그리고 요한의 신학대학 시절 가장 친한 동기였던 강철수였다.

강철수는 한신대 시절 말수가 적고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깊이 성경을 연구했고, 요한과 함께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신학’을 토론하던 동료였다. 그러나 졸업 후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안기부가 요한에게 알려준 진실은 충격적이었다. 강철수는 재일교포 출신의 골수 공산주의자였으며, 대학 4년 내내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한국 기독교의 내부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투입된 ‘붉은 가시’였다는 것이다. 그는 강철수를 한번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요한이 일본에 있을 때 강철수가 그에게 먼저 연락을 해왔다.


찻집의 문이 열리고,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내가 들어왔다. 강철수였다. 그는 예전의 수수한 학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일본 조총련청년연합의 회장으로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혁명가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오랫만이군, 요한. 아니, 이제 장 사무국장이라고 불러야 하나?

철수가 요한의 맞은편에 앉으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 반갑네. 오랫만이군. 이런 자리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 자네와의 4년은 좋았어. 혹시라도 나를 도와줄 생각 있나?

- 주체사상으로 통일을 한다? 나는 신을 믿는 자야. 놀리려는 생각이 아니라면 서로 잘 아는 내용은 빼세.

- 아쉽군. 그러나 오늘까지는 우리 보고 싶던 친구로 지내지.

- 철수, 그대가 북의 김일성을 두 번이나 만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스스로 무력감을 느꼈어. 내가 순진한 건가, 자네의 연기가 세련되었던 것인가?

강철수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 유감이로군. 나는 한 번도 예수를 믿은 적이 없어. 나에게 기독교는 인민을 마취시키는 아편의 유통망일 뿐이야. 하지만 그 속에 들어가 보니 알겠더군. 너희가 말하는 ‘사랑’이 얼마나 기득권의 안녕을 지키는 데 유용한 도구인지 말이야.

요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 너는 한신대 시절의 후배 셋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총련의 핵심 세력으로 키웠더군. 그들이 지금 한국의 대학가에 뿌리고 있는 그 독한 사상들이 얼마나 많은 젊은이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지 알고는 있나?

- 죽음이 아니라 해방이다, 요한. 너는 안기부의 지원을 받아 ‘승공’이라는 이름의 가짜 복음을 전파하고 있잖아. 도쿄의 화려한 호텔에서 일본 우익들의 돈을 받아 책자를 만들고, 아이들을 세뇌하는 네가 나보다 더 깨끗하다고 생각하나?”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한때 같은 제단에서 기도를 올리던 동기들은 이제 거대한 이념의 전장에서 서로의 심장을 겨누는 적수가 되어 있었다.


철수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낮게 속삭였다.

- 네가 정선에서 돌봐주던 그 여자, 최은이라고 했나? 그 여자가 쓴 책 <어둠을 뚫고 솟는 햇살>은 우리가 아주 잘 활용하고 있네. 노동의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했더군. 그녀는 미처 자각하지 못하겠지만, 그녀의 펜은 이미 우리의 칼이 되어 한국의 체제를 밑바닥부터 갉아먹고 있어.

요한의 손이 떨렸다. 최은의 순수한 열정과 고뇌가 철수와 같은 자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

- 최은은 너희의 도구가 아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가지지 못한 억울한 인간들을 사랑할 뿐이야.

- 그 ‘진심’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불쏘시개지. 요한, 너는 그녀를 보호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국 너도 그녀를 이용하고 있는 거야. 너의 ‘우익 사상’을 정당화하기 위한 사례의 한 예로 말이지.

- 아니야, 그렇지 않아.

요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철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봉투 하나를 요한 앞에 던졌다.

- 조총련과 한국의 좌파 학생 조직이 연대하는 다음 단계의 계획이다. 네가 남산에 보고하든 말든 상관없어. 이미 도도한 역사의 흐름은 시작되었으니까. 어쩔 수가 없지 않나? 신은 죽었고, 인민의 의지만이 남았다. 우린 길이 달라. 요한, 다음에는 이 찻집이 아니라 취조실이나 전장에서 만나게 되겠지. 만나서 반가왔네.

강철수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요한에게 악수를 청했다. 요한은 침묵하며 악수했다.

강철수가 떠난 자리에는 식어버린 찻잔과 매캐한 담배 연기만 남았다. 요한은 철수가 남긴 봉투를 쳐다보았다. 그 안에 한국의 대학가를 거대한 화염으로 몰아넣을 활동 지침 같은 것이 들어 있을까. 그가 왜 이것을 남겼을까. 어떤 속임수가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요한은 창밖을 보았다. 도쿄의 태양은 지고, 차가운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문득 최은이 떠올랐다. 그녀는 서울에서 자기의 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믿는 ‘인간 사랑’과 요한이 지키려는 ‘국가’, 그리고 철수가 갈망하는 ‘혁명’. 이 모든 것이 ‘빨강’이라는 하나의 색깔 안에서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요한은 품 안의 성경책을 꺼냈다. 그 갈피에는 박진성 노 회장이 건네준 안기부의 비밀 연락망이 적힌 메모가 숨겨져 있었다. 그는 성경을 꽉 쥐었다.

은아, 네가 보려는 신의 얼굴이 정말 그곳에 있을까. 나는 너를 지키기 위해, 이 세상을 붉은 피로부터 지키기 위해 기꺼이 괴물이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요한의 눈빛이 신주쿠의 네온사인보다 더 차갑게 빛났다. 한국 대학가의 ‘영적 정화’를 위한 그의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도쿄의 밤은 깊어갔고, 잠들지 않는 도시의 소음은 마치 거대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처럼 요한의 귓가를 울렸다. 그는 자신이 걷는 이 길이 과연 구원의 길인지, 아니면 구원을 위한 또 다른 희생의 길인지 자문하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적, 강철수로 이어질 남한의 붉은 별들을 지워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는 호텔로 돌아와 펜을 들었다. 새로운 원고의 제목을 써 내려갔다. <복음과 승공 : 무너지는 대학가를 향한 선언>.

최은이 <가리봉의 고백>을 쓰며 인간의 얼굴을 한 신을 찾고 있을 때, 요한은 국가를 지키기 위한 강철의 복음을 기록하고 있었다. 뿌리가 다른 두 줄기의 신학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갈라져 흐르기 시작하는 것일까.

(계속)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