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17

by 전영칠


6. 요한의 선택



장충동 남산 자락, 붉은 벽돌 담장이 유독 높은 한정식집 ‘청송헌(靑松軒)’.

입구에는 검은색 그랜저와 레코드 차들이 즐비하고, 무전기를 든 사복 사내들이 빗물에 젖은 정원을 날카롭게 감시하고 있었다. 요한은 입구에서 엄격한 몸수색을 거친 뒤에야 가장 안쪽 별채로 안내받았다.

방 안에는 은은한 침향 냄새와 함께 묵직한 가야금 소리가 흐른다. 방의 상석에는 기독교청년연합협의회 당회장이자 교단 실세인 박 노 회장이 인자한 미소를 띠고 앉아 있고, 그 옆에는 안기부 소속으로 추정되는 차가운 인상의 권 실장이 무표정하게 앉아 있다.


요한은 절제된 동작으로 인사를 한 뒤, 일본에서 가져온 두툼한 서류 뭉치를 내놓았다. 조총련 지도자 강철수와의 담판 내용과 일본 우익 학생들과 조직한 승공 연맹의 명단이 담긴 보고서다.


- 일본 조총련의 기세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저들의 논리적 허점을 파고들어 젊은 세대들의 이탈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2년 동안 신주쿠 세미나를 통해 확보한 핵심 요원 120명은 앞으로 한국 대학가의 좌경화를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할 것입니다.

박 노 회장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 장요한 목사, 수고 많았네. 공산주의는 단순히 정치 체제가 아니라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사탄의 독버섯이야. 그걸 뽑아내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지. 교단에서는 자네의 활동을 위해 추가로 천만 원을 책정했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게.

천만 원은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에 육박하는 거금이다. 요한은 그 금액이 갖는 무게를 직감한다.


권 실장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의 눈은 서류 속 명단에 고정되어 있다.

- 장 목사, 우리는 신은 모르오. 우리가 원하는 건 '효율'입니다. 일본은 지금 북한의 자금이 흘러 들어오는 입구이자, 우리 주사파 놈들이 사상 교육을 받는 정거장이오. 당신이 일본 우익과 손잡고 그 정거장을 폭파해 준다면, 우리 정부는 장 목사가 한국에서 어떤 종류의 재단을 세우든 적극 지원할 용의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요.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정보와 자금도 최대한 협조하겠소.

권 실장은 요한의 눈을 꿰뚫어 보듯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 단, 조건이 있어요. 조총련 놈들과 접촉할 때 우리 쪽에서 보낸 요원을 반드시 동행시키시오. '대화'는 장목사가 하고, '처리'는 우리가 합니다.


요한은 잠시 침묵했다. 자신의 신앙적 열정이 정권의 안보 논리에 철저히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지금 멈출 수가 없다. 그는 일본에서 본 조총련의 서슬 퍼런 위협과 한반도에 부는 자생적 공산주의자들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이 괴물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 저는 신의 정의를 세우기 위해 나섰습니다. 그것이 국가의 이익과 부합한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제 양심의 영역까지 지시받지는 않겠습니다.

박 노 회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바꿨다.

- 하하, 장 목사 역시 대찬 사람이야! 권 실장, 이 사람은 내가 보증하는 일꾼이니 너무 몰아세우지 말게나. 자, 들게. 이 술은 신군부 초기 시절부터 귀하게 사랑받던 술이라네.


회합이 끝나고 밖으로 나온 요한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남산 타워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방금 받은 거액의 수표 뭉치가 품 안에서 뜨겁게 느껴졌다.

이 돈으로 그는 일본 전국에 승공 세미나 조직을 키울 것이고, 더 많은 청년에게 '유신적 승공의 논리'를 주입할 것이다.

그는 우산을 받쳐 들며 중얼거렸다.

- 이것은 내가 선택한 십자가다. 설령 그 끝이 벼랑일지라도, 나는 이 붉은 파도를 막아야 한다.

거액의 후원금을 등에 업은 요한의 행보는 이제 단순한 종교 활동을 넘어 사상 검증과 정보 수집의 영역으로 깊숙이 침투하고 있었다.

요한은 박 노 회장과 권 실장에게 받은 자금으로 신주쿠 요요기 공원 인근에 ‘동아시아 사상연구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겉으로는 한일 대학생 교류와 승공 서적 출판을 목적으로 하지만, 실상은 한국 내 운동권 세력과 일본 좌익 세력의 연결 고리를 파헤치는 사상적 정보국이다.


요한은 일본 경시청 공안부에서 퇴직한 인물들과 조총련 내부 사정에 밝은 정보원들을 고용했다. 거액의 엔화는 닫혔던 입을 열게 하고, 조총련계 학교와 일본 공산당 산하 출판사의 은밀한 유통 경로를 추적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


요한은 청년들을 대동해 일본의 대형 고서점가인 칸다(神田) 진보초를 이 잡듯 뒤졌다. 한국 운동권이 탐독하던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전과 주체사상 비평서들은 대부분 일본어판을 중역(重譯) 한 것이었다.

요한과 그의 조직원들은 일본의 고서점에서 먼지 쌓인 책들을 뒤지며 한국 운동권의 '번역 말투'를 찾았다.

요한은 한 책을 펼치며 일행들에게 말했다.

- 이것 봐, 이 문장은 일본 공산당의 이론가 다카하시의 문체와 똑같다. 이것들을 찾아 정리해라.


한국의 학생 운동권과 지식인 사회에서 유통되던 사회과학 이론서들은 대부분 일본어 서적의 중역(重譯)이나 직역(直譯)에 의존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나 사회구성체론 같은 금기시된 사상들은 원전을 구하기 힘들었기에, 일본 공산당이나 좌익 학자들이 이미 번역해 놓은 일본어 텍스트를 몰래 가져와 한국어로 다시 옮기는 방식을 취했다.

이런 번역서는 한국어의 자연스러운 문장 구조가 아니라, 일본어 특유의 한자어 배열과 조사 사용, 그리고 딱딱한 문체인 이른바 '직역체'를 의미한다. 이 말투는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사상적 계보를 따르고 있으며 어떤 루트를 통해 이론을 수입했는지를 보여주는 '언어적 지문'과 같다.


요한과 조직원들이 고서점을 뒤지며 이 말투를 찾는 행위는 '사상의 원천'을 추적하는 작업이다.

한국 운동권의 팸플릿이나 선언문에 쓰인 특정 문구와 말투가 일본의 특정 이론가(다카하시)의 저서와 일치한다면, 이는 한국 운동권이 일본 공산당 혹은 그와 연결된 조총련의 사상적 지도를 받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안기부나 일본 극우 정치가 사토 켄지 같은 세력에게 이 '일치하는 말투'는 학생들을 간첩이나 불온 세력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물적 증거로 활용된다.


또한 요한이 다카하시의 문체와 완벽히 일치하는 문장을 찾아내려는 목적은 '완벽한 함정' 혹은 '완벽한 방패'를 설계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이것을 역이용하여 조작된 증거나 거짓 자백서로 활용할 수도 있다.

이 세계는 보이지 않는 전쟁터다. 안기부 강경파가 시나리오를 조작하기 위해 이를 활용할 수도 있고,

조총련이나 일본 우익들이 역정보 공작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요한은 고서점의 눅눅한 공기 속에서 마침내 다카하시의 1978년판 저작권을 찾아냈다. 그 안에는 한국 운동권 지하 유인물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등장했던 '역사적 필연성으로서의 전위적 투쟁'이라는 문구가 박혀 있었다. 요한은 차갑게 미소 지었다. 이제 그는 보이지 않는 적들이 박동열과 최은의 목을 조르기 위해 준비한 밧줄이 어떤 매듭으로 묶여 있는지도 예측할 수 있었다.


요한은 조총련계 출판사인 ‘학우서방’과 일본 공산당 계열의 ‘신 일본출판사’의 장부를 확보하기 위해 공작금을 살포하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좌익 학생들이 한국의 ‘학출’들에게 사상 서적과 활동 자금을 전달하는 이른바 ‘부산-시모노세키 연락선 루트’의 존재를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요한은 일본 공안청으로부터 넘겨받은 ‘해외 요시찰 인물 명단’과 한국 안기부의 자료를 대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일본 조총련 대학생들이 한국의 특정 지역 노동 현장에 집중적으로 ‘이론 가이드’를 보냈다는 증언을 확보하였다.


정보원 하나가 말했다.

- 장 목사님, 조총련 동경 지부에서 작년 말부터 한국의 '구로 수출공단' 쪽으로 세 줄기의 인맥을 꽂았습니다. 그중 하나가 '기독교 사회 선교'라는 탈을 쓰고 활동하는 대학생 조직입니다."

요한의 눈빛이 흔들렸다. 구로. 최은이 있는 곳이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정보원이 건넨 사진과 메모를 살폈다. 거기에는 구로 지역 노동 소모임을 배후 지원하는 ‘민주노동자연맹’의 초기 조직도가 그려져 있었다.


밤샘 작업 끝에 요한은 일본 우익 대학생 연맹이 감시해 온 ‘한국인 유학생 및 활동가 리스트 중’에서 익숙한 이름들을 발견했다.


박동열: 단국대 복학생. 구로 지역 의식화 교육의 핵심 기획자.

지평(知平) : 사회과학 전문 출판사. 일본 좌익 서적의 불법 번역 및 유통 거점.


그리고 그 명단의 가장 아래쪽, 최근 ‘공활(공장활동)’을 마치고 지평에 합류한 요원 명단에서 요한은 심장이 멎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최은 / 가명: 이영순 / 소속: 구로 대성실업(전), 도서출판 지평(현) / 특이사항: 광주 망월동 묘역 관련 요시찰 대상


요한은 책상을 내리쳤다. 자신이 받은 그 거액의 돈이 결국 그녀를 잡아넣기 위한 ‘사냥개’의 먹이였다는 사실이 보다 명확해졌다. 자신이 배후를 캐면 캘수록 최은의 목은 더 죄어올 것이다.


요한은 권 실장에게 보낼 보고서를 작성하다 멈췄다. 최은의 이름을 지워야 할까, 아니면 이념의 승리를 위해 그녀마저 제단에 올려야 할까?


하지만 그는 이내 펜을 고쳐 잡았다. 그는 최은을 구원하는 방법은 그녀의 사상을 완전히 뿌리 뽑는 것뿐이라고 믿기로 한다.


"은아, 너는 지금 독사들에게 둘러싸여 있구나. 내가 그 배후를 다 끄집어내어 네가 믿는 그 가짜 신들을 무너뜨려 주마. 그것이 너를 살리는 길이다."

요한은 보고서에 도서출판 지평 등을 배후 기지로 적시하고, 일본에서 수집한 증거물인 일본어판 노동법 해설서와 주체사상 비평서 교차 대조본을 동봉했다. 이제 남산의 권 실장은 이 자료를 바탕으로 구로 지역의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일으킬 것이다.


도서출판 지평 : 사회과학 전문 출판사. 일본 좌익 서적의 불법 번역 및 유통 거점. 지평 직원들에 대해 조사를 요청함. 이렇게 바꾸고 요한은 지평의 최은에게도 위기가 닥쳐왔음을 직감한다.


일요일 오후, 요한은 보고서를 넘기기 직전 곧장 구로 지역의 한 작은 개척교회로 향했다. 그곳 지하실에서는 길식이 인근 공단 여공들의 곪은 상처를 치료하고 영양제를 놔주는 의료 봉사를 하고 있었다.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그곳에서, 땀에 젖은 가운을 입은 길식과 정장 차림의 요한이 마주했다.

그는 길식에게 자신이 장목사임을 말했다.


- 장 목사님이십니까? 최은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길식이 청진기를 목에 걸며 말했다. 길식은 최은이 장 목사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요한은 길식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낮게 속삭였다.

- 시간이 없어요. 곧 지평에 큰바람이 불 겁니다. 최은에게 위기가 올 겁니다. 더 이상 내 말을 묻지 말고, 지금 당장 그녀를 어디로든 대피시키세요.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조사가 시작될 겁니다. 내가 한 말은 비밀로 지켜주시오. 최은 외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되오.

요한의 눈 속에 담긴 절박함을 읽은 길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길식은 황급히 짐을 챙겼다. 요한은 멀어지는 길식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 나는 내 일을 했으니, 이제 자네는 자네 일을 하게.


요한은 남산 권 실장의 집무실에서 서류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일본 진보초 고서점에서 입수한 일본어판 노동법 해설서와, 도서출판 지평에서 불법 번역해 구로공단에 유포한 갱지 뭉치들의 정밀 대조본이 들어 있었다.


- 이것들이 배후 기지입니다. 지평 직원들은 단순한 편집자가 아니라, 일본 좌익의 이론을 한국 실정에 맞게 이식하는 이념적 배양책들입니다. 내가 조사한 출판사는 지평 외 총 4개사입니다. 전원 조사가 필요합니다.

요한의 목소리는 차가웠으나, 서류를 넘기는 손끝은 미세하게 떨렸다. 보고서를 보고나서 '지평'을 적시하는 순간, 최은의 목에 칼날이 겨누어지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권 실장은 흡족한 듯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 수고했어요, 장목사. 이제 우리가 나설 차례군.



길식은 최은에게 전화를 했다.

- 나 길식이야. 중요한 일이 있어, 만나서 이야기하지.

장소를 지평과 떨어진 곳으로 잡았다.

- 무슨 일이야 오빠?

최은이 길식을 보며 말했다. 최은은 이제 옛날처럼 길식에게 반말을 했다. 그것이 더 자연스러웠다.

최은이 길식에게 물었다.

- 장목사님이 구로교회에 왔었어.

- 요한 형이? 왜? 일본에서 왔어?

그녀가 빠르게 길식에게 물었다.

- 일본으로 다시 가야 한데. 은에게 긴급히 전달해 달라고 했어.

- 왜 나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오빠에게 갔어?

- 나도 몰라. 확실한 것은.

길식은 요한이 말한 것을 최은에게 전했다.

- 그래?

최은은 혼란스러웠다. 왜 직접 나를 찾지 않았을까. 그러나 길식의 다급한 말과 요한이 그를 찾아왔고 요한의 말을 들었다는 것에 그녀는 무엇인가를 예감했다.

그녀는 믿을 만한 후배에게 연락해 직접 박동열 선배와 지평 사장을 찾아, 자신의 사정을 전달하고 조심하고 어떤 상황인지 급하게 알아보시라고 했다. 길식이 전한 내용대로 이 말의 소스는 덮었다.


길식은 최은을 이끌고 서초동 병원 인근에 아버지가 마련해 주었던 조용한 오피스텔로 향했다. 구로공단의 눅눅한 먼지 대신, 세련된 대리석 바닥과 고요함이 흐르는 공간이었다. 최은은 갑작스러운 피신에 당황했으나 지금은 어찌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 은아, 당분간 여기 있어. 신분이 확실해질 때까지는 밖으로 나가선 안 돼.

길식은 냉장고에 음식을 채워 넣고, 그녀의 책상에 새 원고지와 만년필을 올려두었다. 최은은 창밖으로 보이는 평화로운 서울의 야경을 보았다. 자신이 함께 했던 가리봉동의 '벌집' 풍경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최은은 박동열 선배와 지평 사장이 보낸 인편을 통해 즉시 도피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최은은 그 고요한 오피스텔에서 펜을 들었다. 창밖의 화려한 불빛은 또 다른 세계 같았고, 발밑의 어둠은 그녀가 떠나온 공장의 지옥 같았다. 그녀는 원고지 첫 장에 <빨강: 1.5평의 연대기>라는 제목을 썼다.

그녀는 쪽가위에 베인 여공들의 손가락과,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하얗게 질린 옥순 언니의 얼굴을 써 내려갔다. 요한이 남산에 바친 보고서가 그녀를 파괴하려 했다면, 그녀는 이 오피스텔에서 세상을 파괴할 정직한 기록을 완성하고 있었다. 길식이 가져다주는 따뜻한 죽을 먹으며, 그녀는 차가운 황토 흙 아래 누워있는 동생 인국에게 편지를 쓰듯 글을 이어갔다.

(계속)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