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빨강 18

by 전영칠


7. 장요한



1)

요한은 1970년에 한국신학대학 신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한신대는 신학과를 중심으로 한 소수 정예의 신학 전문 교육기관이었다. 수유리 캠퍼스는 한국 기독교 장로회의 영적, 지적 심장부와 같았다.


장요한과 강철수가 속한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은 다른 보수 교단에 비해 '사회적 실천'과 '현장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시험 과목에 사회학적 통찰이나 민중신학적 견해가 포함되기도 하며, 목사 안수 전 도시산업선교회나 농촌사역 등의 현장 실습을 중요하게 여긴다.


수유리 캠퍼스는 학생 수가 적어 교수와 학생, 선후배 간의 관계가 매우 끈끈했다. 장요한과 강철수가 그토록 치열하게 논쟁할 수 있었던 것도 가족 같은 공동체 분위기 덕분이었다.

그들에게 한신대 시절은 글자 그대로 순수 신학의 시대였다. 요한은 종합대학의 거대함보다는, 신학이라는 단일 가치에 몰두하던 '수유리 신학대생'으로서의 자부심도 강했다. 훗날 학교가 커지고 세상이 변하는 과정에서 그만큼 괴리감도 더 커졌다.


1970년 요한이 입학할 당시, 한국신학대학은 한 학년 정원이 매우 적은 소수 정예의 '강소 대학'이었다.

한 학년 신입생 정원이 약 50명 내외로 4학년 전체 재학생 수는 200여 명에 불과했다.


이 수치는 당시 서울 지역의 다른 대규모 사립대학들과 비교하면 매우 작은 규모였으나 '기장' 교단의 목회자 후보생들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유일한 교육 기관이었기에, 학생들의 자부심과 결속력은 타 대학보다 훨씬 강력했다.


50여 명의 동기들은 수유리 캠퍼스의 낮은 건물들과 북한산의 정기를 공유하며 하루 종일 붙어 지냈다. 강의실에서는 50명이 다 들어가도 넉넉한 강의실에서 교수와 눈을 맞추며 토론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요한과 철수 같은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밤마다 라면을 끓여 먹으며 신학적 논쟁을 벌였다. 매 끼니를 같이 먹으며 서로의 연애 고민과 시국에 대한 울분을 공유했다.

1970년대 수유리 캠퍼스는 동급생들이 서로의 숨소리까지 공유하던 거대한 가족이자, 동시에 서로의 사상을 키우는 아카데미였다.

요한과 철수는 동기생들에게 '수유리 쌍두마차'로 불렸다. 두 사람은 성적에서도, 학생운동의 기개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안병무 교수는 어느 늦은 가을밤, 두 제자를 자신의 서재로 불렀다. 책상 위에는 갓 복사된 독일 신학 서적들이 놓여 있었다.

안 교수가 말했다.

- 요한아, 너는 이 텍스트에서 무엇이 보이느냐?

- 주석과 논리, 그리고 그 뒤에 숨은 하나님의 거룩한 질서가 보입니다.

- 철수야, 너는 이 텍스트에서 무엇이 보이느냐?

- 저는 교수님, 그 질서라는 이름 아래 신음하는 오클로스(민중)의 비명이 들립니다. 이 텍스트는 그 비명을 멈추게 할 화약이 되어야 합니다.

안 교수는 허허 웃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 요한이는 신학의 뼈대를 세우고, 철수는 그 뼈대에 피를 돌게 하는구나. 너희 둘이 함께라면 이 땅의 신학은 외롭지 않겠어.

그날 밤, 두 사람이 도서관을 나오며 철수가 말했다.

- 뼈대만 있는 신은 박제일뿐이야.

요한이 말했다.

- 피만 끓는 신은 광기일 뿐이야.

둘은 서로를 쳐다보고 웃으며 어깨동무를 했다. 그러나 그들이 나눈 대화는 이미 균열을 예고하고 있었다.


정원이 50명뿐이라는 것은 축복이자 저주였다. 누가 누구와 밥을 먹었는지, 누가 어제 야학에 갔는지 숨길 수가 없었다. 1973년 유신 반대 시위가 한창이던 어느 날, 지하 인쇄소의 위치가 발각되어 동기 세 명이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과방에 모인 70학번 동기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뱉었다.


- 우리 중에 형사한테 불어넣은 놈이 있어. 50명밖에 안 되는데, 그 장소를 아는 건 우리뿐이었잖아.

그 순간, 요한과 철수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혔다. 요한은 철수의 과격한 행보가 누군가를 자극했을까 걱정했고, 철수는 요한의 차가운 이성이 '대의'를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켰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철수가 요한에게 말했다.


- 혹시 너? 네가 질서가 중요하다고 했잖아. 그 질서를 위해 말한 거야?

- 철수야, 네 눈엔 모든 질서가 악으로 보이니? 의심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무너지는 거다. 저들이 노리는 게 바로 이 불신이야.

- 아, 그렇다면 미안.

철수가 바로 자신의 말을 철회했다.


그날 이후, 50명의 동기들은 더 이상 서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화장실에서 마주쳐도 잉크 냄새가 날까 봐 손을 숨겼다. 좁은 캠퍼스는 순간적으로 감옥이 되었고, '유다'가 누구인지 모르는 채 서로를 증오하기도 하며 때로는 그 순간도 잊은 채 웃으며 청춘을 보냈다. 희로애락이 교차되는 낭만과 냉철한 이성이 오가는 하루하루였다.


1970년대 중반 서울 수유리 한국신학대학(한신대) 캠퍼스는 단순히 데모에 휩싸인 정도가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가장 뜨거운 화약고이자 심장부였다. 수유리는 '민주화 운동의 성지'라 불렸다.

한신대 학생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학문을 ‘상아탑의 신학’이 아니라 ‘현장의 신학’으로 정의했다. 1970년대 유신 독재 정권하에서 한신대는 학생 수 대비 시위 참여율과 구속자 비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대학 중 하나였고 시위는 단순한 정치 운동이 아니라 하나의 예배처럼 치러졌다. 찬송가를 부르며 스크럼을 짜고, 성서를 높이 들고 최루탄 연기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은 당시 수유리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수유리 캠퍼스는 북한산 자락에 고립된 느낌을 주었기에, 공권력의 감시가 더욱 노골적이었다. 학교 정문과 주변 식당, 카페에는 늘 사복형사들이 깔려 있었다.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으며, 요한과 철수가 토론하던 도서관 뒷길이나 식당 등도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한신대가 특별했던 이유는 교수들이 학생들의 뒤에 숨지 않고 앞장섰기 때문이다.

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서남동 교수 등은 학생들에게 민중신학을 가르치는 동시에, 직접 시위의 선봉에 서서 구속과 해직을 당했다. 교수와 학생이 함께 유치장에 갇히고 고문을 견디는 과정에서, 수유리 캠퍼스는 단순한 학교를 넘어 전우애와 신앙으로 뭉친 공동체에 가까웠다.

봄이면 북한산에서 불어오는 아까시꽃 향기와 지독한 최루탄 냄새가 뒤섞여 묘한 비극적 정취를 자아냈다. 도서관 구석이나 자취방에서 커튼을 치고 복사기로 밀어낸 유인물을 나누어 읽으며 밤새 토론하던 긴박한 공기와 시위가 금지된 날이면 입에 마스크를 쓰고 침묵 행진을 하거나 촛불을 켜고 기도회를 열어 정권에 저항하던 모습들도 일상이었다.


동기생들과 장요한, 강철수는 그런 수유리의 공기 속에서 토론하며 신앙과 사상을 키웠다. 그들의 대화는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진지한 실존적 선택이기도 하였다. 요한과 철수 - 한 명은 그 뜨거운 조국의 현장을 지키기 위해, 다른 한 명은 그 조국의 현장을 혁명의 기지로 삼기 위해 각자의 길을 갔던 셈이다.


1970년대 중반, 수유리 한국신학대학의 강의실은 항상 무겁고 습했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북한산의 서늘한 기운도 최루탄 연기가 밴 강의실의 열기를 식히지는 못했다. 그날은 민중신학의 거두, 안병무 교수의 마가복음 강의가 있던 날이었다.

요한과 철수는 나란히 앉아 안 교수의 입술 끝을 주시했다. 안 교수는 안경을 고쳐 쓰며 칠판에 헬라어 한 단어를 꾹꾹 눌러썼다.


분필 가루를 털며 안교수가 말했다.

- 여러분, 성서가 말하는 '라오스(Laos)'는 질서 정연한 하느님의 백성을 뜻합니다. 하지만 예수가 실제로 만났던 이들은 누구였나요? 바로 '오클로스(Ochlos)'입니다. 이들은 이름도 없고, 계보도 없으며, 성전 밖으로 밀려난 쓰레기 같은 군중이었습니다. 예수는 이 오클로스와 함께 먹고 자며 그들 자체가 되었어요.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오늘날 수유리 너머 평화시장에서, 구로공단에서 피를 토하는 저 노동자들은 누구인가요?"


강의실에 팽팽한 정적이 흘렀다. 철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 교수님, 그렇다면 오클로스는 단순히 불쌍한 무리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가 선택한 혁명의 주체입니다.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채찍을 휘두른 것은, 오클로스의 한을 폭발시켜 낡은 체제를 바꾸려 한 해방적 결단 아니었습니까?"


안 교수는 철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대견함과 우려가 교차했다. 그때 요한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교수님, 강철수의 말대로 예수는 뛰어난 사회 혁명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서 속 예수는 그들의 육체적 굶주림뿐만 아니라 영혼의 죄 문제도 다루셨습니다. 오클로스가 혁명의 도구가 되는 순간, 그들 또한 권력의 또 다른 이름인 '라오스'가 될 수 있습니다. 신의 절대 주권이 빠진 해방이 진정한 해방일 수 있는지 언제나 확인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강철수가 요한을 보며 말했다.

- 장요한, 그것은 기우입니다. 지금 당장 옆구리에 창이 꽂혀 죽어가는 민중에게 영혼의 구원은 차차 말해도 될 것입니다. 배고픈 자에게는 빵이 곧 하느님이고, 억압받는 자에게 해방이 곧 성령 아닌가요?!"


안병무 교수가 허허롭게 웃으며 말했다.

- 둘 다 신학의 급소를 건드렸네. 요한 군, 신은 인간의 고통 밖에서 고고하게 주권을 행사하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오클로스의 비명 속에 함께 갇혀 계신다. 그리고 철수 군, 예수는 오클로스를 이끌고 권력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죽었을 뿐이지. 신학은 답을 내리는 학문이 아니라, 그 고통의 현장에 끝까지 머무는 실천이다."


안 교수는 강의를 마치며 칠판에 적힌 '오클로스'라는 단어 아래에 '예수'라고 덧붙여 썼다.


강의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서 요한과 철수는 여전히 긴장이 풀리지 않은 표정이었다.

철수가 요한에게 말했다.

- 요한은 너무 투명해. 하나님을 항상 모셔두려 하지. 하지만 나는 봤어. 일본에서 건너온 그 책들이 말하는 진짜 세상을 말이야. 예수는 실패한 게 아니라, 우리가 완성해야 할 혁명의 불씨를 남긴 거야.


- 좋아, 철수야. 그러나 네가 말하는 그 '불꽃'이 세상을 태우는 산불이 될까 봐 조금은 겁난다. 나는 질서 없는 해방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역사에서 봤어. 인간이 신이 되려는 순간, 오클로스는 다시 소모품이 되는 것을 말이지.

철수는 대답 대신 요한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 좋아. 언젠가 우리가 서 있는 곳이 다를지라도, 오늘 들은 '오클로스'라는 단어는 잊지 말자. 각자의 방식대로 그들을 사랑해 보자고.

그것은 수유리의 노을 아래서 나눈 두 사람의 진심 어린 약속이었다. 하지만 그날 요한이 철수의 가방 틈으로 살짝 보았던 일본어판『사회구성체론』서적은, 이미 철수가 안 교수의 강의를 그 자신의 '붉은 서사'로 재해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조였다. 요한은 그것까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 좋아. 못다 한 이야기는 초록집에서 하자고. 그들은 초록집으로 향했다.


초록집은 정문 근처 으슥한 골목에 위치한 낮은 천장의 목조 주막이다. 이곳은 한신대생들의 비공식적인 '신학 토론장'이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탁자에는 수많은 학생의 이름과 '해방', '민중' 같은 단어들이 칼자국으로 새겨져 있었다. 주인아주머니는 형사들이 들이닥치면 학생들을 뒷방 장독대 뒤로 숨겨주던 든든한 조력자였다.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에 담긴 시큼한 막걸리와 쉰 김치 냄새가 신학적 고뇌와 뒤섞여 있었다. 요한과 철수는 이곳에서 안병무 선생의 강의 내용을 놓고 밤늦도록 설전을 벌였다.



2)

1974년 2월, 한신대 졸업식 날 수유리 캠퍼스 대강당의 의자 50개 중 절반 가까이가 비어 있었다. 학사모를 쓴 요한은 빈 옆자리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가족처럼 지내던 당시 70학번 동기 25명의 행방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보여주고 있었다.


철수는 졸업식장에 나타나지 않은 채 '해방의 언어'를 들고 지하로 숨어들었다. 50명이 함께 불렀던 찬송가는 몇 개로 쪼개진 투쟁가와 비명으로 흩어졌다.


장요한은 졸업식장에서 다짐했다. 다시는 이념 때문에 형제가 서로를 의심하고 죽어가는 세상을 만들지 않겠노라고. 하지만 그 다짐을 지키기 위해 그가 선택한 길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차가운 감시자의 길이었다.

(계속)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