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은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이 마무리되던 해였다. 당시 한국은 전쟁의 폐허에서 간신히 벗어나 산업화의 기틀을 닦기 시작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1966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약 131달러였다.
2025년 기준 한국의 1인당 GNI가 37,430 달러(세계 6위)를 상회하는 것과 비교하면, 당시의 소득 수준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북한의 1인당 소득은 약 160달러~190달러 선으로 추정되어, 경제력 면에서 한국이 북한에 뒤처져 있던 시기였다. 당시 한국 경제는 '절대 빈곤'의 상태였으며, 국가 재정은 자립 능력이 거의 없었다.
국가 재정의 상당 부분을 미국의 원조에 의존했다. 정부 예산의 약 30~40%가 미국의 무상 원조나 차관으로 채워졌으며, 이 원조가 끊기면 국가 운영이 불가능할 정도로 재정 자립도가 낮았다.
정확한 통계 수치는 기관마다 차이가 있으나, 당시 한국은 전 세계 약 120~140개국 중 최하위권(100위권 밖)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한국은 필리핀(약 200달러), 태국 등 동남아 국가들보다 훨씬 가난했다. 아프리카의 가나나 가봉과 비슷한 수준이거나 오히려 그보다 낮게 평가되기도 했다. 1인당 소득 100달러 내외는 세계은행 기준으로 '최저개발국'에 해당하며, 말 그대로 하루 한 끼를 걱정해야 하는 기아의 위협이 상존하던 시기였다.
같은 해, 제3공화국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 경제를 세우기 위해 재계에도 경재개발 협조 자금을 요청하였다.
정권의 요직에 있던 인물들이 유일한 박사에게도 접근하여 거액의 자금을 내놓을 것을 압박했다. 하지만 유일한 박사는 "기업에서 번 돈은 개인이나 정권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다"라는 신념으로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정치 자금을 거부당한 정권은 보복 조치로 유한양행에 대해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명령했다.
약 20일 동안 수십 명의 세무조사관이 투입되어 유한양행의 모든 장부와 전표를 샅샅이 뒤졌다. 당시 세무조사관들 사이에서는 "유한양행에서 먼지 하나라도 안 나오면 우리가 죽는다"는 말이 돌 정도로 압박이 심했다.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유일한 박사는 임직원들에게 "절대로 뇌물을 주거나 타협하지 마라. 정직하게 조사에 임하라"라고 지시했다.
조사 결과는 정권의 기대와 정반대였다. 세무조사관들은 아무리 뒤져도 단 1원의 탈세나 부정 자금을 찾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장부상에 누락된 이익마저 정직하게 신고되어 세금을 낸 기록들이 발견되었다. 조사관들은 유일한 박사의 개인 금고와 책상 서랍까지 샅샅이 뒤졌다. 거기서 나온 것은 탈세의 흔적이 아니라, 개인적인 용도로 쓴 우표값과 택시비 영수증이었다. 그는 단 1원의 공금도 개인적으로 쓰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조사를 마친 세무조사관들은 "세상에 이런 기업이 있나"라며 혀를 내둘렀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유한양행은 털어도 먼지가 나지 않는 깨끗한 기업"이라고 보고했다.
보복을 하려던 박정희 대통령은 오히려 유일한 박사의 정직함에 감탄하며, 1968년 제2회 조세의 날에 유한양행에 '동탑산업훈장'을 수여하고 모범 납세 기업으로 치하했다.
유일한 박사(1895~1971)
유일한 박사가 유한양행을 설립하던 1920년대는 일제의 수탈로 민중의 삶이 피폐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사람들은 가난과 질병에 시달렸고, 제대로 된 약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미국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그는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에게 창업은 개인의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건강한 국민만이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 아래, 기업 활동은 곧 구국 운동이자 민족을 위한 봉사였다. 출발점부터 그의 시선은 경쟁사와의 시장 점유율 다툼이 아닌, '민족의 건강과 자립'이라는 더 거대하고 숭고한 목적을 향해 있었다. 경쟁자들이 서로의 파이를 뺏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때, 그는 아예 새로운 파이를, 그것도 민족을 살리는 건강한 파이를 굽기로 결심한 것이다. 목적이 다른 기업에게 세속적인 경쟁은 무의미한 환상일 뿐이었다.
유일한 박사의 기업가 정신은 <기업 활동을 통해 얻은 부를 개인의 소유물로 여기지 않는 것이고, 부는 사회로부터 잠시 맡아 관리하는 것이며, 때가 되면 다시 사회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일한 박사는 "기업은 사회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확고한 철학을 바탕으로 '버는 기술'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도덕성을 보여주었다. 당시에는 마약 성분이 든 가짜 약들이 만병통치약처럼 팔려나가며 폭리를 취하는 상인들이 넘쳐났습니다. 하지만 유한양행은 결핵 치료제, 소염진통제 안티푸라민 등 꼭 필요한 양질의 의약품을 정직한 가격에 공급하며 국민의 신뢰를 얻었다.
그는 또한 한국 기업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도입하고, 전문 경영인 체제를 확립하며 투명한 경영을 실천했다. 세금 납부 역시 철저했다.
편법이나 상술, 술수도 없었고 정직과 신용, 철저한 자기 검열과 높은 도덕성을 실천했다.
유한양행은 2025년 결산 기준 매출 '2조 클럽'을 안정적으로 수성하며, 바이오 기업을 제외한 전통 제약사 중 매출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제약·바이오 통합 순위로는 삼성바이오로직스, 셀트리온과 같은 대형 바이오 기업을 포함할 경우 매출 기준 국내 3위권에 해당한다.
유한양행은 국내 모든 기업을 통틀어 상위 100대 기업을 선정하는 'All Star 기업' 중 97위를 기록했다. 특히 제약 산업 부문에서는 22년 연속 1위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유일한 박사가 세운 승계 3대 원칙은 오늘날까지도 유한양행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① 소유와 경영의 철저한 분리,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이며, 개인은 그 관리를 대행할 뿐이다"라는 신념에 따라 주식은 사회재단에 기부하고, 경영은 능력이 검증된 전문인에게 맡겼다.
② 가족 및 친인척의 경영 배제
그는 "조직에 친척이 있으면 파벌이 형성되고 회사 발전에 지장이 생긴다"라고 믿었다.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아들 유일선이 잠시 부사장으로 근무했으나, 유일한 박사는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아들을 포함한 모든 친인척을 회사에서 내보냈다.
아들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이제 스스로의 길을 가라"며 단 한 푼의 주식도 물려주지 않았다.
③ 내부 승진을 통한 전문경영인 선발<'3년+3년'의 임기 관행 (단임 혹은 1회 연임)>
유한양행의 CEO는 외부에서 영입하는 것이 아니라, 평사원으로 입사해 회사의 생리를 잘 아는 인물 중에서 선발하는 전통이 이때 시작되었다.
"내가 살아있을 때 정리해야 한다"
유일한 박사는 타계 직전 측근이었던 연만희(훗날 사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살아있을 때 다 정리하고 나가야 유한양행이 영원히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는 거야. 내가 죽은 뒤 자손들 중에 정말 능력이 있어서 제 실력으로 들어오는 사람이라면 막지 않겠지만, 정실(情實)이 개입되어선 안 된다."
결국 그는 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기라는 주변 임원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기업 경영에는 정실이 개입되어선 안 된다"는 원칙을 몸소 실천하며 세상을 떠났다.
유일한 박사의 이런 결단이 있었기에 유한양행은 오늘날에도 특정 가문의 사유물이 아닌,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남을 수 있었다.
유일한 박사가 1971년 세상을 떠나며 남긴 유언장은 당시 한국 사회에 거대한 파도를 일으켰다. "자식에게 부를 대물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유교적 가치관이 지배적이던 시절, 그의 유언은 비정해 보일 만큼 단호했으나 그 속에는 인류에 대한 숭고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1971년 그가 타계한 후 공개된 유언장은 군더더기 없이 명확했다. 그 속에는 가족에 대한 사적인 정보다는 사회에 대한 공적인 책임이 가득했다.
1. 아들 유일선(柳一宣)에게: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라. 2. 손녀 유일림에게: 대학 졸업 시까지의 학자금으로 1만 달러를 준다. 3. 딸 유재라에게: 유한공고 안의 땅 5,000평을 물려준다. 단, 이 땅을 유한동산으로 꾸며 학생들이 마음껏 뛰어놀게 하고, 절대로 사유화하지 마라. 4. 나의 소유 주식 전부: '한국사회복지교육신탁기금(현 유한재단)'에 기부하여 교육 및 보건 사회사업에 쓰도록 하라. 5. 아내 호미리 여사에게: 딸 재라가 죽을 때까지 잘 모시도록 하라.
유일한 박사가 이토록 자식들에게 엄격했던 이유는 자신의 성장 배경에 있다. 그는 9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 유기연에 의해 미국 유람선에 태워졌다. 그때 아버지가 준 것은 작은 주머니칼 하나와 약간의 노잣돈뿐이었다. "스스로 길을 찾아 살아남아라"는 부친의 가르침이 유일한의 뼈대를 만들었고, 그는 이를 자신의 자식들에게도 똑같이 적용했다.
유일선 씨는 미국에서 이미 변호사로 활동하며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그는 유언장에 대해 "아버지는 위대한 결정을 하셨다"라고 순종했다.
유일선 씨는 아버지가 남긴 뜻을 받들어, 훗날 자신 역시 사재를 털어 유한재단에 기부하는 등 아버지의 정신을 삶으로 증명했다.
아들 유일선 씨 못지않게 딸 유재라 여사의 행보도 눈부셨다. 그녀는 아버지가 남긴 땅과 자산을 철저히 관리하여 유한재단을 키웠고, 1991년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전 재산 200억 원을 다시 사회에 환원했다. 이로써 유일한 박사의 일가는 한국 역사상 유례없는 '가족 전체의 사회 환원'이라는 신화를 완성했다.
유일한 박사의 부인 호미리 여사는 유일한 박사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자식들에게 한 푼의 재산도 물려주지 않기로 했을 때, 조금의 망설임 없이 그 뜻을 존중하고 따랐다.
호미리 여사는 남편이 유언장을 작성하기 훨씬 전부터 모든 재산은 사회의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했다. 남편이 아들 유일선을 회사에서 해고하고 경영권 승계에서 배제했을 때도 그녀는 어머니로서의 사사로운 정보다 '공인'으로서의 남편의 결단을 우선시했다.
남편 사후, 그녀는 유언장에 명시된 대로 딸 유재라 여사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극히 검소하게 살았다. 재벌가의 안주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삶을 멀리했으며, 남편이 남긴 '유한 정신'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평생을 절제하며 지냈다.
그녀는 유일한 박사가 타계한 후에도 유한재단과 유한양행 임직원들에게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남편의 유지가 제대로 실천되고 있는지 묵묵히 지켜보는 감시자이자 격려자였다.
유일한 박사에게 자녀 교육이란 '독립된 인간으로 세상을 살아갈 힘을 길러주는 것'이었다. 그는 부의 세습이 자식의 앞날을 망치는 독약이라 믿었기에, 그들이 스스로 땀 흘려 가치를 창출하는 기쁨을 누리길 원했다.
유한양행은 2025년에도 창업주 일가가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유한재단(약 15.8%)과 유한학원이 최대주주로 있다. 개인이 아닌 공익법인이 회사의 주인 역할을 함으로써, 수익이 특정 가문으로 흐르지 않고 장학 및 사회사업으로 환원되는 구조가 여전히 견고하다.
전문 경영인 체제로, 평사원 출신이 사장으로 선임되어 임기를 마치면 물러나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유한양행이 회장직을 만들어 놓고도 비워두는 것은 기업 내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권력 경쟁'이 자칫 창업주의 숭고한 정신(무소유와 공익)이라는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리는 만들되 그 자리를 탐하는 경쟁을 허용하지 않는 '역설적인 절제'가 현재 유한양행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유한양행은 창업주 유일한 박사의 기업정신에 따라 대한민국 재계에 유일무이한 사례를 만들었다.
유박사의 기업가 정신에는 '경쟁'이라는 단어가 무색하다. 오직 '원칙'과 '사회에 빌려온 돈을 사회에 환원'하는 선명한 정신만이 빛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를 능가하는 기업가의 정신이 탄생한 것이다.
유일한 박사의 "기업은 사회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철학은 자본주의 이후를 생각해야 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신선하고도 거대한 화두를 던졌다. 이런 사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의 유래가 없다. 그의 사례는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유일무이한 것이기에 재계를 비롯한 사회에서도 경원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물극필반(物極必反) - 지금은 물질문명과 물질만능의 세상이 저물고, 새로운 정신문명의 가치와 정신문명의 세계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경쟁이 후순위가 되는 시대, 경쟁 보다 가치가 우선시되는 시대가 기필코 도래할 것이라 본다. 그런 시점에서 유일한 박사는 새로운 시대의 선구자이며 선지자라 할 수 있다. 경쟁은 환상이다. 우리와 이 세대는 유일한 박사의 '정신'을 연구하고 묵상하여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고 본다.